Tale of the Fake Hero RAW novel - Chapter (115)
가짜 용사 이야기-115화(115/310)
#11 :
[4. 메인 퀘스트 시작] 명예의 전장으로인파가 분주히 오고 가는 <캐슬베이아> 역내 광장, 3천여 명의 결사대가 열차 승강장에서 출발할 채비를 하고 있었다.
“병사들과 친목은 잘 다져 놓으셨습니까?”
“네…… 뭐.”
박현수가 겸연쩍다는 듯이 볼을 긁었다. 한 병사가 박현수의 앞을 스쳐 지나가며 농담을 건넸다.
“이봐, 명사수! 이번에는 발데마르의 머리통에 한 발 부탁한다고!”
박현수가 소년의 웃음을 짓는 것이 보였다.
벌써 이렇게 친해졌다고?
그뿐 아니라 열차에 군마를 밀어 넣던 병사 NPC들도 박현수에게 친근한 장난을 치는 것이 보였다.
확인해보니 아르츠레히드 진영에서의 호감 수치가 128이었다. 나보다도 50이나 높은 셈이다.
이놈이 말까지 잘할 줄이야.
내심 당황했지만 곧 안도했다.
박현수가 다른 엘리트의 곁으로 넘어갔으면 얼마나 위험했을까.
“병사들이 저희가 죽으러 가는 거라던데요. 진짜 죽으러 가는 겁니까?”
“그 튜토리얼에서도 살아왔잖습니까. 여기서 안 죽습니다.”
박현수가 불안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덩치가 좋아서인지 기마병 갑옷의 모양새가 위풍당당하게 잘 살아났다.
그의 무장은 <기마병의 갑주>와 <하급 증기총>. 이 정도면, 음?
“현수 씨. 그 총은 뭡니까?”
“아, 이거 말입니까? 렌이 줬습니다. 좋은 겁니까?”
“좋다마다요. 설마 이상한 퀘스트를 수락한 거 아닙니까?”
“아닙니다. 그냥 줬습니다.”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저건 알르미티 장총이라고, 최소 은화 30닢은 하는 희귀 아이템이다. 그걸 그저 호의로 줬다고?
놀랍게도 준다.
어떻게 아냐면, 나도 한 번 받아본 적이 있거든. 이 게임 1회차 뉴비였던 시절.
그래…….
내 1회차와 똑같은 루트를 밟았단 거냐. 반갑기도 하고, 겸연쩍기도 한 동질감에 뒷골이 간지러웠다.
그때 등자를 밟고 안장에 오르려던 박현수가 멈칫했다. 그의 눈이 내 의상을 훑었다.
“에델 씨는 갑옷이 아니지 않습니까? 지팡이까지?”
“아시다시피 전 마법사니까요.”
<순백의 마법사 로브>.
<나무 지팡이>.
그것이 내 무장. 박현수의 반응은 아르츠레히드와 비슷했다.
살다 살다 그런 개소리는 처음 들었다는 표정. 하지만 박현수의 표정은 금방 바뀌었다.
“하긴. 튜토리얼에서 엄청난 마법을 쓰셨죠. 깜빡하고 있었습니다.”
박현수와 나는 각자 말에 올라 집결지에 정렬했다. 박현수가 내게 몸을 기울이더니 이상한 농담을 건넸다.
“에델 씨는 힘도 좋으시니, 힘법사라는 표현도 괜찮을 것 같아요. 예전에 그런 단어를 봤는데, 인상이 깊게 남더라고요.”
힘법사?
무언가 웃기면서도 기묘한 이름이었다. 이름 자체에 특별한 마법이 담겨 있는 것만 같았다.
“재밌네요.”
“재미로 한 게 아니라 진심…….”
“진심?”
우리 현수, 사실 파워풀엠페러도 진심이었던 건 아니지?
“흠, 그런데 다른 플레이어들은 있는 것 같습니까?”
“아뇨. 저희가 유난히 빠른 편입니다.”
그 누가 벌써 우리처럼 시나리오의 핵심에 접근할 수 있을까.
대륙의 다른 엘리트들이라면 모르겠지만, 이데아의 노말 플레이어들 가운데 그런 사람은 없을 것이었다.
그나저나, 성도 공방전에 참가하려면 최소 7명은 더 모아야 하는데. 이 악랄한 지역에서 노말 유저들이 살아남을 수 있을지 문득 걱정되었다.
그때, 말 탄 아르츠레히드가 집결한 대열 앞으로 말을 몰아왔다.
엘우드 경이 고함쳐서 병사들을 정숙하게 만드는 동안 아르츠레히드가 목청을 훑었다.
“우리는 죽으러 갈 것이다.”
위험한데.
벌써 수백 번은 듣는 거지만, 벌써부터 전율이 스치며 소름이 돋았다.
그 유명한 <성도의 구원자 아르츠레히드>의 전설이 시작되려 하는 순간이었다.
“그야말로 개죽음이다. 우리들의 작전목표는 불가능에 가깝다. 2만의 요정병을 상대로 돌진하는 게 목표이니 말이다.”
물론 저런 간단한 목표로 전투에 임하지는 않는다. 우리의 목표는 의수왕이 오기까지 버티는 거니까.
아르츠레히드의 영지 위병 몇 명이 웃었다. 공포로 굳어 있는 병사들은 왕이 내어준 병사들이고.
“혹자는 의미 없는 죽음이라고 말할 것이다. 누구도 너희들의 이름을 기억하지 않을 것이라고. 우리가 죽는다고 한들 몇 명의 백성이 살겠냐고. 적은 2만 명이고 우리는 고작 3천 명인데?”
박현수가 소곤거렸다.
“왜 겁을 주는 거죠?”
“연설 기술 중 하나죠. 이제 뒤집을 때예요.”
아르츠레히드가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하지만 말이다. 언젠가, 정말로 언젠가, 이 신들의 땅에 인간과 요정의 진정한 평화가 세워졌을 때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그때, 그 순간, 그들이 있었기에! 그들이 우리를 위해 몸을 바쳤기에. 내가 살아 있다고. 내 아버지가, 어머니가 살았었다고. 그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내가 지금 여기에 있을 수 있다고.”
“!”
“우리는 단지 ‘그들’ 중 1명으로 기억될 것이다. 나는 진실로 기쁘다. 영주 아르츠레히드가 아니라 그대들처럼 용감한 용사들과 더불어 ‘그들’로 기억된다는 미래가.”
우리가 구하러 가는 백성들은 인간도 있었고 요정도 있었다. 성도의 평화는 그러한 이데아 주민들의 절실한 소원이었던 것이다.
병사들이 침을 꼴딱 삼켰다.
박현수도 몰입했는지 어느새 눈동자에서 전의가 감돌고 있었다. 아르츠레히드는 눈을 감았고, 숨을 깊게 들이마셨고, 빙그레 웃었다.
“태양을 위해서도 싸우지 않는다. 달을 위해서도 아니다.”
“……!”
“우리는 오늘 오직 약하고 힘없는 백성들의 피를 지키기 위해 싸우러 가는 것이다.”
“…………!”
“가자, 명예의 땅으로. 우리가 처음으로 창칼을 쥐었을 때, 꿈꾸던 바로 그 명예와 영광의 전장으로.”
순간, 엄청난 함성이 터져 나왔다. 귀청이 터지도록 땅이 흔들리도록 함성 소리는 컸다. 병사들이 총을 치켜들며 울부짖었다.
“명예의 땅으로!”
“땅으로!”
“명예의 전장으로!”
“전장으로!”
“명예의 땅으로!”
“땅으로!”
그들의 외침은 처절했다.
바꾸려고 하는 것이다. 공포라는 감정을 전의(戰意)라는 이름의 굳센 감정으로.
[NPC, 아르츠레히드가 스킬, 《사기 진작 Lv.67》을 시전했습니다!]– 지속 시간 동안 모든 능력치에 (+5)의 보너스를 받습니다.
역시 대단한 NPC. 잠깐뿐이긴 해도 모든 능력치에 5의 보너스이니, 순간적으로 레벨이 무려 20이나 높아진 셈이다.
나도 힘껏 돕겠다, 아르츠레히드.
이제 아르츠레히드가 죽지 않게 엄호를 하면 된다.
뿌우우우우…… 열차가 기적(汽笛)을 터뜨리며 매연을 새까맣게 토해냈다. 철로가 이어지는 동문이 개문되었다.
역내 헌병들과 시민들이 우리에게 갈채와 함성을 보낼 때, 열차가 성문 아래의 그림자를 통과해 가속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군용으로 개조된 객차에서 말고삐를 붙들고 열차의 단조로운 리듬에 몸을 맡겼다.
그때 그곳에는 출전을 망설이거나 전투에 자조하는 병사는 1명도 없었다.
오늘 이곳에서 겨우 20명 정도만 살아남겠지만…….
여기서 죽은 이들도, 살아남은 이들도, 아르츠레히드를 원망하지 않는다.
바로 오늘, 저 사지(死地)가 명예의 전장이라는 말을 NPC들이 굳게 믿었기 때문일까?
* * *
요정군(軍) 전위대와의 첫 격돌은 북쪽 언덕길에서 이루어졌다. 나는 그곳에서 ‘힘법사’의 가능성을 확인했다.
“어떻게 생각하나?”
그린데스크(Greendesk) 포인트에서 열차가 멈췄고 기마 총병대가 모두 하차했다.
그때 아르츠레히드의 호출이 있었다.
그린데스크는 캐슬베이아와 실버스톤의 기착지 역할을 하는 목초지였다.
“이건 내 생각이고, 방금 말한 건 엘우드 경의 작전이네.”
아르츠레히드는 선두에서 엘우드 경과 작전을 의논하고 있었다. 영주가 내게 물어왔다.
“영주께서 일개 병사의 의견을 여쭈시다니, 놀랍습니다.”
“흠? 자네는 일개 병사가 아니라 마법사잖는가.”
아르츠레히드가 재치 있게 내 말을 받아쳤다. 누구의 작전이 옳은가. 솔직하게 말하자면 둘 다 틀렸다.
실버스톤 성채는 넓은 언덕마루에 형성된 성채.
언덕 진입로는 총 세 곳. 하지만 피난민들이 달아나는 곳은 단 한 곳이다.
“엘우드 경은 서쪽의 언덕길을 올라서, 곧장 동쪽 언덕길로 내려가자고 말했네. 하지만 그것보다는 언덕을 길게 우회해서 옆을 치는 게 낫지 않겠나?”
둘의 작전은 엄청난 결점을 한 가지 가지고 있었다. 바로 피난민들이 동쪽 언덕길로 피난할 거라고 확신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요정군은 바보가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들보다 지능이 더 높지요.”
내 전략 설명의 시작은 이렇게 운을 떼었다.
“기병대를 앞세워서 동쪽의 경사로를 차단했겠지요. 당연한 일입니다. 지금쯤 피난민들은 북쪽 언덕을 향해 달아나고 있을 겁니다.”
이 말을 했을 때 아르츠레히드의 표정은 늘 똑같았다. 한 대 얻어맞은 사람처럼 멍한 표정.
“그렇다면 엘우드 경의 전략도 안 되겠군. 서쪽 언덕길을 올라서 북쪽으로 내려가면 피난민들과 섞일 것이 아닌가.”
“아닙니다. 요정은 북쪽 언덕길도 차단했을 겁니다. 서쪽 언덕을 올라 북쪽 요정들의 배후를 분쇄하는 편이 좋을 겁니다.”
조언은 여기까지였다.
물론 아르츠레히드와 엘우드가 내 조언을 귀담아들었다면 추가로 이것까지 예상했을 것이다.
영리한 요정들이 북쪽 언덕길에 복병을 심어두지 않았을까?
자, 이제는 에이스를 시험할 차례였다.
“왜 말을 안 해준단 겁니까?”
이 말을 그대로 전해주자 박현수가 귀를 의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알면서도 정보를 안 준다니, 아군 아닌가요? 방금 영주님의 연설에 의하면 명예로운 전우고요.”
“그 편이 쉽습니다.”
“쉽다?”
“이 게임은 유저의 판단에 따라서 전투의 흐름이 계속 바뀌는 게임입니다.”
그 이유를 세 줄로 단호하게 요약했다.
1. 북쪽 언덕길의 매복으로 많은 사상자가 나올 것이다.
2. 죽는 병사들을 뒤로하고 재빨리 그 장소를 벗어난다.
3. 그래야만 이후 기병 돌격 페이즈의 공략이 쉬워진다.
“현수 씨, 당신은 지금 이 세계에 과몰입 하고 있습니다. 비난하지는 않아요. 이렇게나 현실적인 세계를 처음 접한 뉴비들이 대체로 보이는 반응이니까.”
“……?”
“다른 누구를 예시로 들 필요도 없습니다. 나 또한 예전에는 그랬으니까요. 하지만 지금은 그래선 안 돼요. 이 버전은 게임이지만 게임이 아니잖습니까? 동정심이 끼어들 여지가 없죠.”
“우리가 도와주면 편하게 매복병들도 잡지 않겠습니까? 그러고 나면 다음 퀘스트도─”
“─저흰 3천 명입니다. 요정군은 전위대만 2만이고요. 불가능한 전장에서 영웅이 되려고 마음먹는 건 아직 이릅니다. 나중에 그렇게 될 기회를 충분히 드리죠. 지금은 아닙니다.”
“그러면 죽게 내버려 두겠단 겁니까?”
“예.”
“동료를?”
“예. 정확히는 동료가 아니라 NPC를.”
“아니…….”
“제 공략에 따르세요.”
뉴비 때 내가 들었던 말을 그대로 돌려준다.
공략이라…….
공략이라는 말은 참 우습게 들렸다. 마치 다른 세계에서 이 세계를 주물럭대는 신들의 언어처럼 들렸으니까.
그런데 어쩌겠는가.
지금은 그게 현실인데.
“당신의 소원에 집중하세요. 현수 씨. 그게 이로운 길입니다.”
“그럴 거면 도대체 왜 NPC들과 친해지라고 말한 건지 모르겠습니다. 이 황당할 정도로 현실과 똑같은 NPC들과.”
“아이템을 얻게 하려고요. 그리고 진영 친밀도도.”
두통으로 머리가 흔들릴 정도의 기시감이 뇌를 흔든다.
이 대화, 이 반목…….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박현수의 얼굴에 다른 누군가의 표정이 겹쳐진다.
그건 바로, 과거의 나였다.
이 <황녀를 위하여>를 처음 접했던 시절의 나.
“슬픈 눈의 렌이 반인반요인 것과 어머니는 양명군에게 강간당하고 손발이 잘렸으며, 아버지는 요정들에게 이교도로 화형을 당했다고 합니다.”
“예, 노병 칼리옌은 긴 용병 생활의 후유증으로 처자식을 적으로 착각하였다가 다 죽여버렸죠. 그 영혼들에게 안식을 주기 위해 이곳에 와서 신의 이름으로 싸우고 있고. 그래서 어쩌란 겁니까? 기껏해야 널리고 널린 NPC 중 하나입니다.”
“알고 계시는군요! 알고 계시는데 도대체 왜? 그 이외에도 홀렌, 에밀…… 그 외에도…… 죄송합니다.”
박현수가 입술을 깨물더니, 문득 말 옆구리에 박차를 가해 앞으로 뛰쳐나가며 소리쳤다.
“양쪽에 적 매복!”
그 통제를 벗어난 모습을 보면서,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런 인물이기를 바라고 기대하고 시험해 보았다.
공대의 에이스는 실력만 투철해서는 안 되니까. 자기 잘난 맛에 사는 놈이 에이스면 공대 전체의 붕괴까지도 우려되니까.
팀원들의 목숨을 자기 목숨처럼 여기고, 자기 자신을 희생할 줄 아는 자.
그거야말로 공대 에이스의 재목.
사냥꾼 특성을 갖고 있으니 스킬도 에이스가 되기에 문제없다.
이 배틀로얄 버전에서는 무엇보다 인간성이 중요했다.
한낱 NPC 따위한테도 저런 애정을 가질 수 있는 인물이 과연 동료들을 배신할 수 있을까? 아니, 그런 일은 결코 없을 거다.
그래, 그랬지.
그러니 기뻐해야 할 순간이다.
완벽한 인재를 얻은 것에 새삼 감사해야 할 순간일 것이다.
그런데 왜일까?
게임의 마지막 시나리오에서, 박현수와 마주 선 채 서로를 칼로 겨누는 시상이 느닷없이 눈앞을 스치고 지나간 까닭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