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 of the Fake Hero RAW novel - Chapter (116)
가짜 용사 이야기-116화(116/310)
#12 :
[4. 메인 퀘스트 시작] 에이스의 증명– 다 버리라고요?
나라고 뉴비 시절이 없던 게 아니다.
운이 좋아서 2회차 유저에게 도움을 받은 적이 있었다.
참고로 이 미친 게임은 2회차라 함은 클리어할 때까지 수백, 수천 번의 대가리를 박았다는 소리니 상당한 고수라 볼 수 있다.
– 이 사람들을, 다 버리라고요?
– 사람이 아니라 NPC지. 과몰입 좀 하지 말고.
– 아니, 아까는 다 친해지라고 했잖습니까.
– 포인트 벌어야 할 거 아니야, 포인트. 진영 우호도가 높아져야 아이템이나 퀘스트가 해금된다고. 왜 그래? 예쁜 NPC라도 봤어?
바로 여기.
실버스톤 북쪽 언덕길 어귀에서.
내 첫 특성도 사냥꾼이었다. 그래서, 스킬 《숲을 걷는 자》로 길섶에 매복한 요정병들의 모습을 감지했을 때.
– 양쪽에 적 매복!
“양쪽에 적 매복!”
박현수와 완전히 똑같이 말했던 것이 떠올라, 새삼 그리운 미소가 지어졌다.
[전투 퀘스트 : 매복.]결사대 대원들이 곳곳에서 날카로운 고함을 토해냈다.
– 적습!
– 길섶에서 적 출현!
그 뉴비 시절, 나는 박현수와 마찬가지로 증기총에 총알을 삽탄했었다.
물론 똑같은 알르미티 장총에.
역시 UDT 짬밥이 어디로 안 가는지, 박현수는 몇 번 해보지도 않은 삽탄 동작을 매우 노련하게 수행하고 있었다.
스킬 《필살 삼중사》를 사용하는지 손가락에서 푸른 기운이 넘실거리며 흘러나왔다.
“우선 하나.”
목표는 방패 벽을 이루며 진군하는 요정병들.
요정들은 문명을 경멸하며 자연과의 공존과 육체의 단련을 중요시한다.
시대착오적이게도, 이 총기의 시대에조차 요정들은 중장 보병의 전통을 따랐다.
장창과 대방패, 그리고 중갑.
이건 요정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개미처럼, 태어날 때부터 직업이 정해지는 요정의 전사 계급들은 초인적인 힘을 갖고 태어나니까.
그런 요정병들이 사용하는 방패는 통상적인 총탄을 비껴내게 설계되건만, 박현수의 총탄에는 꿰뚫렸다.
알르미티 장총의 총탄은 대구경이라, 저격탄처럼 방패를 뚫고 지나가 뒤쪽에 있던 요정병의 흉갑을 관통할 정도였다.
“첫 번째 자손에게 영광을!”
“쏴, 쏴서 죽여버려!”
그것이 피 튀기는 백병전의 막을 열었다.
요정병의 창극이 인간 총병의 목을 꿰뚫었고 총병의 총탄이 요정들의 목을 베었다.
현실의 전쟁과 이 게임의 전쟁은 다른 게 없었다. 너무 익숙해서 별 자극이 없을 정도로.
현실의 전쟁에 익숙해진 건지, 이 상황을 몇 번이나 봐서 이제는 감흥이 없어진 건지.
청각으로는 “제발”과 “살려줘”와 “죽어”라는 소리만 들리고.
시각으로는 붉은빛 피와 암청색 쇠붙이들만 보이며.
후각으로는 쇠비린내와 피비린내만이 나니까.
– 끄아아아아아아!
하지만…… 뭘 해도 저런 단말마의 비명은 익숙해지지 않더라.
그때 들려온 비명에, 과거의 내가 미친 듯이 그 비명의 진원지를 찾는 것이 보였다.
그건 바로 렌의 비명이었다.
– 이 더러운 반요 새끼.
상황은 긴박했다.
한 요정이 나동그라진 렌의 머리통에 창을 내리찍으려 하고 있었으니까.
– 그 비천함을 어머니들의 품으로 돌려보내 주마.
– ……좆까고 있네. 그것들이 내게 뭘 해줬다고?
– 이 새끼가, 지금 뭐라고?
즉시 총구를 쳐들었다.
1회차의 그 순간, 노병 칼리옌의 다급한 경고가 들려왔다.
– 피하게! 자넬 노리고 있어!
피하지 않았다, 곧바로는. 그랬다면 렌은 속절없이 죽을 터였으니까.
다음 순간, 말에서 도망치듯 뛰어내렸다. 물론 총구에서 총탄이 빠져나간 뒤였다.
떨어질 때, 투창이 투구를 스치면서 투구가 박살 났고 지면을 급하게 디딘 발목이 작살나면서 격통의 신음을 흘렸다.
눈앞이 컴컴해지는 아픔 속에서 렌의 상황을 살폈다.
그때 렌은 살아 있었다.
총탄이 뒤통수에 박힌 요정의 사체가 그 앞에 고꾸라져 있었다.
요정의 피를 흠뻑 뒤집어쓴 렌이 멍하니 나를 돌아보았었지.
그때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렌의 시선 때문이 아니라, 시스템 알림들이 수없이 귓가를 울리는 바람에.
[엔더스킵 세력 총 호감도 : 440.]ㆍ 엔더스킵 세력 내에서 당신은 ‘세력가’ 직위로 격상되었습니다.
* 세력가는 그 세력의 도움을 아무런 조건 없이 받을 수 있습니다.
세력가가 뭔지, 생각해볼 틈도 없었다. 10여 명의 요정병들이 밀려들고 있었으니까.
총, 총을 장전해야 했다.
하지만 아무리 허리춤을 더듬거려도 총탄이 만져지지 않았다. 대체 어디로 간 거야.
시야 안으로 불쑥 칼이 들어왔다. 요정의 장검이었다.
숨을 삼키던 그때, 총탄이 그 머리통을 꿰뚫고 튀어나왔다. 이어서 함성이 들려왔다.
– 정철을 지켜!
– 에밀, 저 녀석 전장 밖으로 끌고 가!
– 알겠습니다!
엔더스킵의 동료들이었다. 그들이 나를 에워쌌던 요정병들에게 달려든 것이다.
하지만 상황은 최악이었다.
좁은 시야로도 그들이 적들에게 포위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 하, 진짜, 무슨, 아니, 이봐, 정 씨, 뒤질래?
그때 나를 가르쳐주던, 2회차 플레이어는 그런 욕설과 함께 나를 가차 없이 버렸다.
– 에라이 씨, 아, 저 몰입충 때문에 캐릭터 삭제하고 게임 리셋 해야 되네. 오랜만에 이데아 반도에서 재미 좀 볼까 했더니만.
그때와 똑같은 상황이.
눈앞에서 정말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이 펼쳐지고 있었다.
걱정 마라 박현수.
너는 다음에도 이런 상황에 놓이게 된다면 똑같이 행동하겠지.
천성이 그런 거니까.
천성이 그렇게 멍청한 것들은 바보라고 해야 되겠지만, 나는 그런 바보들이 싫지 않아. 그러니 걱정하지 마.
나는 널 절대 버리지 않을 테니까.
한순간, 에밀이 허벅지에 화살이 박히며 쓰러진 순간.
그 등에 업혀 있던 박현수가 흙바닥을 나뒹굴며 수많은 창극에 둘러싸인 그 순간.
새하얀 안개가 벽처럼 박현수와 에밀의 주위를 뒤덮었다.
[플레이어, 에델 바이스가 마법, 《공기 방벽》을 시전합니다!]창극들이 박현수를 겨누고 방벽 속으로 짓쳐왔다.
들어오긴 했는데, 약하게, 천천히 날았다. 마치 잘못 접은 종이비행기 같았다.
창극들이 그에게까지 닿긴 했지만 박히기는커녕 조금 따갑기만 할 것이다.
“이게 뭐야?”
에밀이 피가 나는 허벅지를 싸쥐며 고통스레 중얼거렸다.
“마, 마법?”
죽게 놔두지 않아.
너와는 끝까지 함께 간다.
지팡이로 땅을 짚는데, 하얀 로브의 옷자락이 하늘거리며 박현수의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현수 씨, 당신이란 사람은 어찌 된 게 한 번도 절 실망시키지를 않습니까?”
칼을 뽑았다.
왼손엔 지팡이, 오른손엔 장검.
나도 이 모습이 엉뚱하기 짝이 없다는 걸 안다. 하지만 지금은 이 방법 말고는 생각나는 게 없어.
“보답을 하도록 하죠. 현수 씨 덕에 ‘힘법사’라는 대단한 힌트를 얻었으니까.”
왼손은 거들 뿐이라는 명언이 있다. 나는 마법은 거들 뿐이라는 명언으로 바꿔 쓰련다.
공기 방벽 밖으로 뛰어나갔다.
들이닥치는 요정병의 창의 궤도를 칼날로 튕겨내는 동시에 지팡이로 그 머리뼈를 으깼다.
그다음, 창을 튕겨냈던 칼을 허공에서 비틀어 뒤쪽에서 달려오던 요정병의 목을 꿰찔렀다.
목이 꿰뚫린 요정병의 투구 말총을 움켜잡고 끌어당긴다. 창 3개가 그 요정의 흉갑에 박힌다.
그 시체를 앞세우고 돌진.
바싹 접근하는 데 성공했으니 고기방패를 내던지면서 준비해둔 마법을 사용한다.
[플레이어, 에델 바이스가 마법, 《불 뿜기》를 시전합니다!]불꽃이 요정병 다섯을 휘감았고 고통의 비명이 메아리쳤다.
그 불꽃의 매캐한 연기 때문에 마지막 요정병들이 창을 제대로 겨누지 못한 채 머뭇거렸다.
머뭇거리던 순간, 지팡이가 밑동 쪽으로 붕 날아와 그 목을 꿰뚫었다. 마지막 요정병이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에델!”
서로 등을 맞대고 분전하던 아르츠레히드와 엘우드가 뒤늦게 달려왔다. 뒤로 300여 명의 총병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자네 괜찮은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새하얀 로브가 선혈로 시뻘겋게 젖어 있었다. 모든 피조물들의 피는 붉다.
그것보다는 칼에 엉긴 피와 지방 덩어리가 더 걱정되었다. 칼날이 무뎌졌을 텐데, 새로 하나 구해야겠군.
“자네는 분명 마법사라 하지 않았나?”
아르츠레히드가 어처구니없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마법사 맞습니다. 힘 좀 쓰는 마법사요. 힘법사입니다.”
어쩔 수 없다. 일류 마법사가 되는 건 엘리트 특전이 있어도 불가능하다.
그러면 답은 쉽다.
마법은 거들게만 하면 된다.
그리고 검술 쓰지 뭐. 마법은 딱 최소한의 능력치만 주고 힘이랑 기량에 능력치 올인하면 된다.
갑옷 입으면 생기는 페널티는 어떻게 하냐고? 페널티 입거나 안 입고 싸우지 뭐.
아주 간단하다.
[비상 전투 퀘스트 : 매복 완료.]– 레벨업 포인트를 (+3) 받았습니다.
– 레벨업 포인트가 파티원에게 분배됩니다. (-2)
박현수가 날 멍하니 올려다보고 있었다. 질책이 올 것이라 생각했는지, 눈을 똑바로 마주치지는 못했다.
“받으세요.”
“……?”
“저 화 안 났으니 걱정하지 마시고. 물약입니다.”
주춤거리다가 유리병의 붉은 액체를 마신 박현수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신기하겠지.
물약 하나에 자잘한 상처가 치유되기 시작한다는 것이.
이런 말이 나올 수 있다.
현실적인 게임이라더니 결국 태생적인 한계가 명확한 거 아니냐? 다른 MMORPG처럼 물약 시스템에 굴복하다니.
하지만 그렇지가 않다.
이 미친 게임의 물약은 체내의 치유 속도를 증폭시킬 뿐, 결손된 신체를 재생시키는 기적은 일으키지 못한다.
그래서 겁나 피곤해지기만 한다.
“명예로운 부상을 당해 성도로 돌아갈 생각이었습니까?”
“아, 아닙니다.”
“자, 잡으세요.”
박현수에게 손을 내밀어 일으켜 세워주었다.
‘힘법사’를 곰곰이 생각하다가 힘에 4스텟이나 투자한 덕분이다. 힘이 정말이지 팔팔하게 남아돈다.
진작 찍을걸, 약간 후회가 될 정도로.
“정말 화 안 내십니까?”
“왜 내야 합니까?”
“제가 명령에 불복했잖습니까.”
말은 저렇게 하지만 박현수는 떳떳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점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자신의 행동에 한 줌의 후회도 없다는 저 표정. 뉴비 때 욕을 처먹었던 나도 저런 표정이었지.
“사실 저도 그랬던 걸요.”
“예?”
“떠들 시간 없습니다. 말이나 타세요.”
넌 이제부터 공대 에이스다.
에이스는 공격대장의 명령 없이도 판단을 내릴 수 있어야 한다.
단순한 꼭두각시는 에이스가 될 수 없다. 던전에서는 언제 어디서 화급한 상황이 생길지 모르니까.
그리고 동료 공격대원의 생명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자기 살자고 달아나거나 자기 잘난 맛에 사는 놈은 아무리 재능이 있어도 필요가 없었다.
그렇기에 박현수의 첫 전투를 유심히 관찰했다. 전투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으면서까지.
평가?
박현수는 에이스의 재목이다.
설마 1회차의 나와 완전히 똑같이 행동하는 인간을 만나게 되다니, 그것도 이 배틀로얄에서…….
더 설명해달라 부탁한다면, 관리자가 준 스타터팩처럼 느껴질 정도다.
말에 올라타며 조용히 웃었다.
이건 아마도 이 세계에 들어와 처음으로 짓는 웃음이 아닐까.
어머니의 미소가 손에 잡힐 것처럼 가까워진 느낌이 들었으니까.
봐라.
지금 박현수에게 개미 떼처럼 달라붙어서 껄껄 웃는 병사들을.
이 전투의 영웅은 내가 아니라 박현수였다. 에이스는 바로 저런 존재가 되어야 한다. 영웅적인 행동 하나로 공대원들의 마음을 단결시킬 수 있는 존재가.
“슬슬 이동해야 합니다.”
엘우드에게 말했다.
더 지체했다가는 내가 전투 상황을 통제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피난민들을 구해야죠.”
엘우드의 시선도 박현수에게 쏠려 있었다. 그가 내 말에 정신을 차렸다.
“그, 그렇지. 가세. 이 녀석들아! 어서 말에 올라타라!”
아직 안심하기엔 일렀다.
진짜 전투는 지금부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