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 of the Fake Hero RAW novel - Chapter (117)
가짜 용사 이야기-117화(117/310)
#13 :
[4. 메인 퀘스트 시작] 엘리트 나이트부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
웅장한 나팔 소리에 사쿠라이는 고개를 쳐들었다.
수백 개의 나팔이 동시에 터뜨리는 소음은 성명도서관의 책장들을 바르르 떨게 만들 정도였다.
‘벌써 돌아온 건가?’
그건 아닐 듯했다. 정철과 박현수가 떠난 지 2시간밖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사쿠라이는 책장을 덮고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성도의 역사』라는 낡은 책이었다.
이제야 다 읽었다고 안도하던 순간 헛숨을 들이켜야 했다. 어떤 영상이 별안간 눈앞에 나타나더니 재생되는 게 아닌가.
[전용 특성, 《세계의 기억》이 책에 숨겨진 역사를 읽어냅니다!]+ + +
“카이센, 정신이 들어?”
웬 여자가 한 장신의 검사를 조심스레 끌어안고 있었다.
신묘했다.
여자의 온몸에서는 은빛 광채가 흘러나오고 있었으니까. 역사서를 읽었기 때문인지 감히 추측해볼 수 있었다.
이 여자가 달의 여신이라고.
검사가 숨을 헐떡이면서 겨우 입을 열었다.
“타르시요, 리암은…… 리암은 어떻게 됐지? 요토스는……!”
여신은 슬프게 입을 다물었다.
온몸이 심연에 뒤덮인 상태로도 세상의 미래와 동료의 생사부터 걱정하는 검사를 내려다보며.
그렇기에 검사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다른 남자에게서 나왔다.
“리암은 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긴 것도 아니지만.”
그 남자는 여신처럼 온몸에 여명의 붉은 광휘를 위엄처럼 거느리고 있었다.
이쪽은 태양신인 건가?
남신의 목소리는 낮게 잠겨 있었다.
“요토스는 기원 이전의 그때처럼 달아났다. 리암은 요토스를 쫓는 게 아니라 자넬 살리는 걸 선택했다. 그러고 나서 그대로…….”
“에오스, 그게 무슨…….”
“요토스는 많은 힘을 잃어버렸으나 죽지 않았으니 심연은 그대로 남아 있어. 이제 내 몸에 이 세상에 창궐하는 심연을 봉인해야 한다. 헬레니아,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하자.”
헬레니아라고 불린 인물 또한 온몸에 신성한 광채를 거느리고 있었다. 헬레니아가 타르시요에게 말했다.
“타르시요, 너는 행복해지렴.”
타르시요가 슬피 웃었다.
“어차피 나는 오래 살지 못해. 내가 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아.”
“안 돼. 너에게는 샤릴리온이 있잖아. <잊혀진 왕들>의 심연을 거두지 않는 한 봄은 오지 않아. 카이센은, 샤릴리온은 여기서 죽으면 안 돼. 미래에 새벽을 열 씨앗을 심어야지.”
“내가 카이센의 심연을 가져가면…….”
에오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된다. 그랬다가는 샤릴리온의 마음이 죽고 말 테니까. 샤릴리온, 아직 이 전쟁은 끝나지 않았고 세상에는 용사의 존재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건 이제 자네뿐이야. 타르시요, 우리는 우리의 길을 마칠 테니 너도 네 길을 마쳐라.”
소름이 돋았다.
신들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건 늪이었다. 튜토리얼에서 보았던, 그 끔찍한 심연(深淵)의 늪.
에오스가 헬레니아를 돌아보며 빙그레 웃었다.
“난 후회하지 않아. 처음 만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나누었던 그 모든 걸. 아버지는…… 아니, 형님들은 반대하겠지만.”
에오스가 주먹을 그러쥐었다.
[NPC, 에오스가 기적 《차원 압축 Lv.Max》를 시전합니다!]놀라웠다. 그 힘에 세계가 전율하는 게 아닌가. 심연의 늪이 주먹 쪽으로 빨려 들어왔다.
에오스가 다시 주먹을 펼쳤을 때, 심연은 길쭉한 형태로 정제되어 허공에 두둥실 떠 있었다.
기이한 창의 형태로.
총합 두 자루였다.
비슷한 원리로, 샤릴리온 또는 카이센이라 불리는 검사의 몸을 잠식하던 심연은 헬레니아의 손으로 빨려 들어갔다.
“나도 후회하지 않아요. 어머니는…… 그리고 언니들도 쫓아내겠다면서 반대할지 몰라도.”
“타르시요, 지금 저 둘이 뭘 하려는 거야? 막아야지, 막아!”
“그분들께서? 그럴 일은 없을 거야. 축복해줄 게 분명하지.”
“타르시요, 왜 가만히…….”
“이제 시간이 없구나. 타르시요, 우리 애를 부탁해. 안녕.”
정제된 심연의 창이 울면서 에오스의 심장을 꿰뚫었다. 다른 하나는 헬레니아의 심장을.
두 신이 처절하게 피를 토했다.
그 육신으로 거느리고 있던 광채도 서서히 사그라져 갔다. 에오스가 무릎을 꿇고 쓰러졌다.
당황한 검사가 고꾸라지기 직전인 에오스를 끌어안았다. 타르시요가 쓰러지는 헬레니아를 부둥켜안고 끝내 아이처럼 울기 시작했다.
달빛과 태양빛의 광채가 스러져가며 영상은 천천히 어두워졌다.
철저한 관찰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사쿠라이는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왜인지 진실로 슬펐다.
영상이 다시 밝았을 때, 그곳에서 거대한 나무가 자라나고 있었다.
낯익은 나무였다.
영목 기사단의 문장, 바로 캐슬베이아의 중앙에서 자라나고 있는 영목이었다.
+ + +
아아, 영목이 저렇게 태어났구나.
그래서 이곳이 인간과 요정 모두의 성도인 거구나.
양쪽 신이 목숨을 바쳐 심연을 진멸한 장소니까.
[전용 특성, 《세계의 기억》이 『영목의 탄생』을 읽었습니다.] [영웅시대(英雄時代)의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세계의 기억》의 숙련도가 상승합니다. Lv.16 -> Lv.21.] [영웅시대의 이야기를 두 번 더 읽을 경우 숨겨진 직업 《신화의 사자(使者)》로 각성합니다. 현재 1 / 3.]와! 한순간에 5의 숙련도가 올랐다. 정철의 숙제를 책 한 권으로 끝낸 셈이었다!
게다가 숨겨진 직업이라니?
완전 대박이다.
하지만 속으로 밀려 나오는 환성을 어떤 감정이 짓눌렀다.
어쩐지 찜찜했으니까.
이 세상을 멸망시켜야만 모든 게 끝난다면…….
언젠가 저 신들이 희생으로 세운 나무를 쓰러뜨려야만 하는 날도 오는 건가…….
‘정 오빠한테 물어봐야겠어.’
고개를 돌려보자 창가에서 여사서 NPC들이 떠드는 것이 보였다. 목소리가 제법 심각했다.
“요르한 전하께서 직접 출전하신다네요.”
“말도 안 돼. 그 몸으로?”
“직접 가야만 발데마르를 돌려보낼 수 있다고 하셨다고…….”
사쿠라이는 창가로 쪼르르 달려갔다. 묻고 싶었다. 결사대는 어떻게 됐는지.
“아르츠레히드 영주님……?”
늙은 인간 사서는 되물었고, 젊은 요정 쪽은 고개를 저었다.
“얘야, 우리가 전투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아르츠레히드 공께서 이끌고 간 병력이 몇인지 아니?”
“모르겠는데요.”
“3천 명쯤이야.”
“적은요?”
사쿠라이는 별걱정을 안 하고 있었다. 정철이라면 5배에 가까운 적도 물리칠 수 있을 것처럼 보였으니까.
말할 테면 말해보라지.
꼬맹이처럼 놀라지 않게 마음의 대비도 미리 해두었다.
“2만 명.”
“네?”
“2만 명. 불쌍하게도…….”
순간 잘못 들었나 싶었다.
확인사살을 당했을 때는 머리가 캄캄해왔다.
[NPC, 일레인이 당신의 불행에 연민을 품습니다.]‘2만 명’이라는 말에 포함된 뉘앙스는 그들은 이미 죽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불쌍하게도’는 살아올 확률 자체가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걱정이 차갑게 식으면서 알 수 없는 격정이 밀려왔다.
정철에게 화가 났다. 죽지 않는다며. 그가 죽는다면 자신의 노력은 뭐가 된다는 말인가.
이번엔 왕에게 화가 났다. 2만 명을 상대로 3천 명을 보내다니, 왕은 제정신인가?
“그런 장소에 휘하 영주를 보냈다고요? 왜요?”
부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
또다시 나팔 소리가 들렸다. 사서들의 도움으로 창가에 기대앉아 밖을 내다보았다.
창밖을 내다보니, 거대한 성문이 열리는 도중이었다.
와, 입이 쩍 벌어졌다.
헤아릴 수조차 없이 많은 기사와 총병 들이 성문 앞에 늘어선 열차 내부에 장엄하게 늘어서 있던 것이다.
부우우우우우우우…… 나팔의 향연 속에서 형형색색의 깃발들이 마구 휘날렸다.
영목 기사단의 영목.
구제 기사단의 핏빛 태양.
흑양 기사단의 검은 태양…….
성문이 완전히 개문되자, 열차들이 하나둘씩 나팔보다도 더 우렁찬 기적을 토해냈다.
진군하기 직전, 첫 번째 열차의 1번 객차에 누군가가 어정쩡한 걸음걸이로 걸어갔다. 걸을 때마다 전신에서 증기가 솟았다.
순간 깨달았다.
저 사람이 요르한 3세구나. 몸의 절반을 기계로 대체한 왕…….
왕이 한쪽 팔을 힘없이 치켜들자 열렬한 함성이 터져 나왔다. 병사들부터 몰려나온 백성들까지.
심지어 사서들도 창밖을 향해 소리를 내질러 귀가 아팠다.
“요르한! 요르한! 요르한!”
요르한 3세는 성도 사상 가장 위대한 왕이랬지.
하지만 사쿠라이는 걱정스러웠다. 왕이 전혀 미덥지가 않았던 것이다.
왕한테 저렇게나 힘이 없는데 병사들이 힘이 날까……?
“몇 명이에요?”
“뭐가?”
“전하가 이끌고 가는 병사들이요.”
“15만 명이라고 들었어.”
15만 명?
사쿠라이는 다시 되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 들은 것 같았으니까.
“오, 안심해선 안 된단다. 저것도 엄청 무리한 거야……. 성도 일대의 전 병력을 동원한 거야.”
“많은 거 아니에요?”
“요정군은 처음에는 20만이었다는데 지금은 50만에 가까워져 가고 있다고 하는구나.”
스팀펑크 세계관이라더니, 물산이 풍족해지고 기술이 발달해서 그런가 일반 판타지에 비해 동원되는 숫자가 어마어마하긴 하다.
[NPC, 일레인이 당신의 불행에 강렬한 연민을 품습니다.]그래도 15만 명 대 50만 명…….
사쿠라이는 자리로 돌아와 망연히 앉았다. 누군가 뒤통수를 세게 후려갈긴 느낌이었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반대쪽 창문으로는 영목의 새하얀 나뭇가지가 보였다. 그 가지 너머로 석양이 서글프게 타오르고 있었다.
오래전, 아버지와 함께 산에 오를 때마다 보던 석양들과 다른 게 없었다.
– 석양을 볼 때마다 그렇게 기쁘더라.
– 왜요? 일이 끝나서요?
– 그래. 일이 끝나고 널 보러 갈 수 있으니까.
눈물이 왈칵 솟았다.
책상 위로 엎어져 얼굴을 박고 흐느꼈다. 정철이 죽는다는 게 슬픈 게 아니었다.
아버지를 위해 배틀로얄에 왔는데, 힘이, 힘이 하나도 없어서, 누군가한테 의지해야 하는 무력감이 너무나 슬펐다.
‘이대로 죽는다면 평생 저주할 거야.’
그도 알고 있겠지만 일본은 국가적 다신교였다. 저주를 기원할 신이 무진장 많다는 뜻이다.
▶ ▶ ● ◀ ◀
숨@!#?겨진 역*@사 :
(……역시, 이 방법은 너무 무모해. 내가 왕위에 올라서 인요를 공동체로 통합해놓는 것이 최선…….)
(……너나 나의 영향력은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이 전부일 거야. 우리의 아이들도 요토스의 저주를 받아 단명하게 되었으니…… 후대의 인요(人妖)를 통합할 수 있는 건 에오스와 헬레니아가 남긴 저 아이뿐이라 생각해…….)
(……그 방법이 유일하다면, 정체를 공표하는 게……?)
(……그랬다가는 요토스가, 요토스의 심복들이 분명 뭔 짓을 할 거야. 부모의 후광이 아닌, 저 아이가 가진, 자신의 빛으로 해내기를 기도할 수밖에…….)
* * *
“사, 살려주세요!”
진군하는 기마 대열 정면의 황야. 필사적으로 달리는 피난민 행렬이 보였다.
저 멀리 뒤에서 일어나는 거대한 흙먼지, 그 틈새를 뚫고 지축을 울리는 말발굽 소리.
팽팽하게 당겨지는 살기(殺氣).
요정군의 전위 본대였다.
이제부터 하나의 판단으로 생사의 행방이 갈리리라.
“현수 씨, 정면입니다!”
나의 지시가 닿기도 전에 박현수는 총구를 치켜든 상태였다.
박현수가 고개를 끄덕였고, 곧 눈동자에서 푸른 안광이 흘러나왔다.
[플레이어, 파워풀엠페러가 스킬 《속사》를 시전합니다!]피융, 피난민 부녀의 목을 자르려던 참인 요정 기병의 목에 총탄이 꽂혔다. 벌써 일곱 번째 명중이었다.
[플레이어, 파워풀엠페러의 영웅적인 기상에 《사기 진작》 스킬이 발동합니다. 전 능력치 보정 (+1)을 받습니다.]이젠 하다 하다 사기 진작까지 습득했나.
“역시! 발데마르 짜샤, 네놈 엉덩이에 총탄을 박아주고자 박현수가 왔다!”
“박현수! 박현수!”
NPC 병사들이 휘파람을 불며 함성을 토해냈다. 옆에서 아르츠레히드가 “대단하군”이라고 진심 어린 감탄을 토했다.
박현수의 성장은 두려울 정도였다. 초 단위로 엄청난 성장을 이뤄내고 있다니.
성장의 동력은 친밀도.
NPC와 전우애라니, 저렇게 성장하는 방식도 있었지. 하지만 이제 나에겐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제 모친의 사형집행인이자 정신병자인 정철에게 이제 저런 방식의 인간관계는 불가능할 테니까.
그러나…….
요정병이 주력은 기병대가 아닌 전차대다. 홀트란크스 보병 또는 전차병이 되는 게 요정병 최고의 명예라고도 한다.
요정은 항상 이런 식이다.
기동력보다는 중량을 선호한다. 기원의 전투에서 <온 것들>이 사용하던 방식을 모방해, 중량에 집착한다는 게 게임 역사서에도 나오는 게 정설이다.
“전차대가 등장하면 총기로 제압하는 건 어려워진다!”
그걸 아는 아르츠레히드가 말에 박차를 가하며 전열을 뛰어다녔다.
“마지막 백성이 통과한 뒤로 문을 닫고 횡렬진을 펼친다!”
일대의 모든 바위와 돌멩이와 나무, 그리고 군마의 안장까지 동원해서 임시 방벽을 만들었다.
그 방벽 뒤에서 겨우 3천 개에 불과한 총구가, 적 2만 명이 일으키는 흙먼지를 겨누었다.
사실 이 전개대로라면 아르츠레히드를 제외하고 전멸한다. 아르츠레히드만 특이한 이벤트로 살아남지.
내가 없으면 이번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영주님!”
나는 앞으로 튀어나갔다.
흙먼지가 자꾸 휘몰아쳐 눈을 뜨기조차 힘겨웠다.
“말하라!”
“이대로 대기하다가는 적에게 포위당하는 형세가 될 겁니다!”
요정군 전위 부대의 거대한 군세를 목도한 아르츠레히드의 눈동자가 일순 흔들렸다.
“알고 있네. 하지만…… 방법이 없지 않은가. 몸을 써서라도 막아야지.”
우리는 버티면 된다.
아르츠레히드는 왕이 오리라는 낙관에 그렇게 생각하고 있겠지.
하지만 아무 대책 없이 저 패턴에 맞서다가는 너 빼고 다 죽는다니까?
“전하께서 죽지 말라고 명령한 걸 잊으셨습니까?”
“…….”
“제가 마법사라는 사실도 잊으신 겁니까? 맡겨 주십시오.”
아르츠레히드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부탁하네.”
짧은 말을 남기고 말 머리를 돌렸다. 이제 피난민들의 대피를 마저 지시하고, 진을 펼친 뒤 나를 기다리겠지.
이제 내 차례였다.
내 말은 여전히 적진을 향해 돌진하는 중이었다.
침착하자.
목표는 시간을 버는 것. 요르한이 오기까지의 시간. 그렇기에 신중히 선별해서 배워온 스킬 5개.
그리고 내가 아는 최고의 마법사 플레이어에게 배웠던, 저레벨 구간에서의 필살기.
– 우선 《공기 방벽》과 《불 뿜기》의 조합이야, 형.
지팡이로 허공을 쓱 그었다.
[플레이어, 에델 바이스가 마법, 《공기 방벽》을 시전합니다!]손바닥 위로 마방진이 펼쳐지는 순간, 그 마법진에 불을 뿜는다.
[플레이어, 에델 바이스가 마법, 《불 뿜기》를 시전합니다.] [《공기 방벽》과 《불 뿜기》가 혼합되어 시전됩니다!]물론 이대로 사용하지는 않는다.
필살기를 섞을 것이다.
인터페이스를 열어 [상태창]을 열었다.
[잔여 레벨업 포인트 : 5]필살기를 위해 남겨둔 포인트.
여기서 힘, 기량, 지력, 신앙 중 하나를 누르면 능력치가 투자된다.
지력 버튼을 눌렀다. 꾹. 손가락을 떼지 않고 3초, 2초, 1초…….
0초.
즉시 기다리던 알림이 왔다.
[순간 능력치를 사용하시겠습니까?]* 경고! 순간 능력치는 영구적이지 않습니다!
알고 있다. 이것은 레벨업 포인트 5를 사용해서 순간적으로 10배의 능력치를 증상시키는 방법.
4회차 이상의 튜토리얼에서 TIP으로 알려주는 기술이었다. 한 회차에서 단 한 번만 사용이 가능하다고 한다.
아마 요구 능력치가 높은 장비를 한 번 입어보기라도 하라는 취지에서 만들어진 건 아닐까 싶은데.
뭐든 됐다.
현재 지력은 18.
여기에 아르츠레히드와 박현수의 사기 진작으로 +6.
그리고 순간 능력치로 +50.
총합 74.
중상급 마법사의 지력 스텟과 맞먹는다.
물론 한순간뿐이지만 말이다.
요정군 전위대는 어느새 50미터 거리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창극에서 황혼이 섬뜩하게 튕겨 나가고, 창잡이들의 상판까지 희미하게 보인다. 수백의 창극이 나를 겨누고, 곧 꿰뚫으리라.
‘그래, 과연?’
주먹 위에서 빙그르르 돌아가던 마방진을 움켜잡았다.
채앵!
마방진이 산산조각 깨지며 청명한 소리를 냈다.
[플레이어, 에델 바이스가 혼성 마법, 《불을 뿜는 공기 방벽》을 시전합니다!]순간, 나와 요정군 사이에 흐릿한 안개의 방벽이 세워졌다. 핵심은 그다음이다.
화르르륵!
방벽에 불이 붙더니 불길이 되어 타오르기 시작했다. 시커먼 연기가 하늘을 덮었다. 들이닥치던 장창들은 그 방벽을 넘지 못하고 재가 되었다.
그리고 1~3선의 선봉을 맡던 요정병들과 그 군마들도.
온몸이 새까맣게 타들어가는 자가 터뜨리는 단말마의 비명이 전장을 가로지른다.
“뭐, 뭐야!”
“끄아아아아!”
방벽 너머에서 급하게 제동한 기병들이 서로 부딪히며 뒤엉키는 혼란의 신음이 들려왔다.
성공이었다.
이제 나와 요정 전위대 사이에는 120초간의 통곡의 벽이 생긴 셈이다. 마법사라는 클래스도 생각보다 재미가 있네.
왜 검사만 고집했더라.
아, 마법에 재능이 없었다.
정확히는 수학에.
문과라서 죄송하지 않습니다.
자, 이제 말 머리를 돌려 아르츠레히드의 대열로 돌아갈 때다.
이제 마지막 위기인 기병 돌격만 어떻게 잘 넘기면 될 텐데…… 그 상황에서 박현수를 어떻게 살려낼까.
멀리서 총병들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총병들이 나를 보는 눈동자는 박현수를 볼 때와 달랐다. 동료라기보다는 마치 자연재해를 보는 듯한 시선.
그래.
저런 시선이 낫다.
어느 정도 거리감이 있는 편이 나았다.
괜히 정이 들면 죽을 때 가슴이 아파오니까. 그걸 뼈저리게 느꼈으니까. 게임에서든 현실에서든.
그때였다.
뭐지, 갑자기 수평선이 붕 떠오르고 있었다. 아니, 내 몸이 허공을 붕 날고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깨달은 건, 모래 바닥에 처박힌 뒤의 일이었다.
몸통이 바닥에 거칠게 쓸렸다.
살갗이 찢어졌고 누더기가 된 로브는 피에 젖었다. 아팠다.
[아이템 분실 : 군마.]절뚝거리며 일어섰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쓰러진 채로 고통스럽게 울부짖는 말이었다.
내가 타고 있던 말이었다.
그런데 편자 박힌 네 다리가 말끔하게 잘린 채 발버둥 치고 있다.
이상해.
더 충격적인 건, 내 마법이 사라져 있다는 것이었다.
이상하잖아.
정확히는 사라져 있다기보다, 기병이 통과할 만한 정도의 구멍이 가로로 길게 나 있었다. 마치 무언가에 베인 것처럼.
잠깐, 플레이어?
그 의문이 든 순간.
[플레이어, 리샤르 후가 전용 스킬, 《검신의 극의 : 참마격(斬魔擊)》을 시전했습니다!] [혼성 마법, 《불을 뿜는 공기 방벽》이 《검신의 극의 : 참마격》에 피격되어 위력이 64% 감소되었습니다.]엄청난 알림이 내 귓가를, 아니, 뇌리를 두들겨 팼다.
그 구멍 너머로, 멋들어지게 칼을 칼집에 집어넣고 있는 누군가의 모습이 보였다.
순간 내 아둔함에 몸을 떨었다.
왜, 어째서, 인류에게만 플레이어가 배정되리라고 생각했던가. 이 게임에서 플레이 가능한 종족이 3개나 있는데. 왜 그렇게 곧바로 확신했을까.
적수는 플레이어였다.
그것도 그냥 플레이어가 아니다.
나처럼 빠르게 이데아 시나리오의 핵심으로 접근한 플레이어.
《검신의 극의》라고 했다. 내 《현자의 극의》와 특성 이름이 비슷하다.
더구나 이름까지 낯익었다. 머릿속으로 배틀로얄 설명회를 재빠르게 재생해 보았다.
“아…….”
내가 최초로 직면한 적수는, 내가 얻어야 했으나 얻지 못한 것을 가진 자였다.
그래서일까.
순식간에 떠올릴 수 있었다.
내가 그토록 원하던 걸 대신 가져간 적의 이름을.
– 리샤르 후…….
그도 그럴 것이.
놈의 엘리트 클래스는 바로.
– ……엘리트 나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