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 of the Fake Hero RAW novel - Chapter (121)
가짜 용사 이야기-121화(121/310)
#17 :
[00. 튜토리얼 정산] 시청자들 (2)「후원금이 폭주한 관계로 지금부터 단 1분만! 후원금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시청자들이 시간이 너무 짧다며 야유를 보냅니다!]「에이, 그러지들 마시고. 아직 초반인데. 적어도 최소한의 밸런스는 맞아야죠.」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정말로 없었다.
그 통일 전쟁의 전쟁터보다도 더 혼란스러웠다.
[실버 멤버십, $샤*가 엘리트 소서러에게 레벨업 포인트 (+2)를 후원합니다!] [VVIP, O*&X가 엘리트 소서러에게 레벨업 포인트 (+10)을 후원합니다!]……
……
[VIP, v큐&’fg가 엘리트 소서러에게 레벨업 포인트 (+7)을 후원합니다!]당혹스럽다. 진짜. 내 ‘플레이 영상’을 시청하며 후원의 향연을 듣는 중이라니.
《대마력방호》가 기적처럼 등장해서 심연 지네를 박살 내자 우아아악! 환성이 터져 나왔다.
후원도 마구 터졌고.
정점은 버그 플레이가 발동하기 직전이었다.
태고 뱀들이 우리를 삼키기 직전,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정적이 흐르다가, 영화처럼 탈출에 성공하자 끝내 함성이 폭발해 나왔다.
발작을 일으키는 작자까지 나왔기에 관리자들이 중재에 나서기까지 했다.
「자, 여기까지입니다!」
그리고 방금 마침내, ‘후원 타임’이 시작되었고 끝난 것이다.
[레벨업 포인트를 (+68) 얻었습니다. 능력치를 올리세요.]68……?
심호흡으로 당혹감을 잠재웠다.
일등상보다도 후원금이 많았다. 하루 동안 개처럼 굴러서 얻어낸 포인트보다도 훨씬 많았다.
[시청자들이 당신의 추후 활약을 열렬히 기대합니다!]이래도 되는 거야?
「마법을 쓸 줄 모르는 마법사가 이토록 선전을 하다니! 대단하죠? 마지막으로 엘리트 소서러의 감사 인사를 듣고 결산을 마치도록 할게요.」
그 말이 끝나자마자 팔다리를 얽매고 있던 결박이 사라졌다.
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섰다.
평범하게 감사 인사를 하면 되는 건가? ‘열심히 하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샬류안의 “동작 그만”이라는 명령이 들렸던 건, 내가 뒤로 돌아서려 했을 때였다.
「엘리트 소서러, 이쪽을 보고 하세요. 다 들리니까. 아직 당신은 시청자분들을 대면하기에 너무 연약해요. 몸도 마음도. 봤다가는 미쳐버리고 말걸요. 진짜로요.」
생글생글 웃고 있었지만, 그 미소의 진의를 추측해볼 수 있었다.
저 눈.
축사 밖으로 탈출하려는 가축을 보는 눈 같기도 했고 인질을 잡은 테러범을 설득하는 눈 같기도 했다. 상등품이 망가지면 안 된다는 듯한.
「자, 천천히. 이쪽으로 돌아서세요. 그래요. 착하죠. 자.」
무섭군…….
대체 내가 어떤 놈들의 장난감으로 전락한 건지. 새삼 나의 처지를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배틀로얄’이라는 이름으로 알 수 없는 신들의 장난감이 되어버리고 만 것이다.
그래서 화가 나냐고? 아니다.
“감사합니다. 제대로 된 마법을 배워서 더욱 좋은 구경거리를 보여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 처지를 깨달았으니 이젠 더욱 재미난 장난감이 되어주기로 결심했다.
그것이 장난감의 본분이니까.
내 소원을 위해 여기로 왔다. 타의가 아니라 자의로. 그래, 어머니만 살릴 수 있다면 장난감이든 노예든 상관없어.
[시청자들이 또 다른 버그 플레이로 다른 엘리트 플레이어들을 작살내 주기를 기대합니다!]그건 힘들겠지만 다른 방식으로 노력해보지. 내 버그 플레이를 보고는 아주 환장한 상태로군.
「후후, 시청자 여러분. 이제 광고 한두 편 보고 오시면 첫 번째 시나리오 결산이 나 있을 겁니다! 더 풍부한 콘텐츠로 뵙겠습니다. 지금은 맛보기인 거 아시죠? 조금 뒤면 플레이어들과 전속 계약도 하실 수 있다고요. Doubt, Cooperate, Kill! 채널 고정!」
광고 한 편이라…… 생각해보면 불가능한 건 아닐 듯했다.
그야, 게임 시간의 6년이 현실 시간으로 사흘밖에 걸리지 않는다고 했으니까.
[시청자들이 퇴장합니다.]한순간, 몸을 으스러뜨리는 것만 같던 시선들이 사라졌다.
그러자 짧은 시간 동안 쌓였던 의문이 한순간에 몰려왔다.
저들은 정말로 신인가?
아니면, 인간이 모르는 그 무언가일까……?
「이제 엘리트 여러분도 돌려보내야겠군요. 서둘러야 한다고요. 광고가 길어지면 시청자들이 화를 내니까. 참, 이번 엘리트 여러분들은 정말 마음에 들어요. 이건 제 성의고요.」
[일등 관리자, 샬류안이 모든 엘리트 플레이어에게 레벨업 포인트를 (+1)씩 후원했습니다.]「영웅극, 희극, 비극, 광기의 도가니. 장르가 뭐든 좋습니다! 강해지고 싶다면 시청자분들을 만족시킬 만한 ‘이야기’를 보여주면 되니까요! 자, 다른 세 분도 이번엔 분발하세요!」
전속 계약이 무엇인지 질문할 시간도, 엘리트들끼리 대화를 나눌 시간도 없었다.
[집행 관리자 명령 : 게임의 일시정지가 해제됩니다.]다음 순간, 나는 게임 세계로 돌아와 있었으니까.
“그만 물러가라, 에델. 짐은 아르츠레히드와 나눌 대화가 있으니까.”
소녀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는 사라지고, 대신 탁음 섞인 음성이 들려왔다.
요르한 3세가 고통스러운 기침을 내뱉고 있었다.
혼란스러웠지만, 뒤바뀐 상황에 곧장 적응해야 했다.
“이따 보세, 에델. 전하께서 명령하시네.”
이제 그 대화를 나눌 때가 온 듯했다. 아르츠레히드 평생 최악의 실수이자 성도의 파멸을 불러오는 그 대화.
언제나 이때가 되면 필사적으로 말리고 싶은 마음이 든다.
하지만 아르츠레히드는 그러지 않을 것이다. 그래야 시나리오의 굴레가 돌아갈 테니까.
“전하, 부디 옥체 강녕하소서.”
“고맙다. 물러가라.”
이것은 나의 작별 인사.
내가 돌아왔을 때 요르한 3세는 이미 승하했을 것이니까.
평안이 있기를, 요르한.
이게 배틀로얄이 아니었더라면, 늘 그래왔듯 네 임종을 지켜봤을 거야…….
뒤로 물러나면서 다음 전략을 구상했다. 여유를 부릴 시간도 슬픔에 잠길 시간도 없었다.
이번에 상을 받지 못한 엘리트들이 눈에 불을 켜고 상을 타기 위한 행동을 벌일 것은 자명하니까.
그리고 그런 놈들 가운데 1명이 이데아 시나리오의 적수다.
그 적수가, 5대 예언서 중 하나인 『클라에논 단장(斷章)』을 빼앗기 전에 항구도시 트라이폴로 가야만 했다.
이데아 스타팅의 이점을 살리려면 반드시 손에 넣어야 한다.
[캐릭터 피로 수치 : 89%]– 지쳤습니다! 모든 능력치에 (-7) 페널티를 받습니다.
능력치라.
그래, 우선 파워업의 시간이다.
인터페이스를 열고 상태창을 열자 능력치 (69)는 정말로 적립되어 있었다.
[에델 바이스] [각성] : 방황하는 현자 [레벨] : 23 [스테이터스] :힘 : 17 / 기량 : 13 / 지력 : 28 / 신앙 : 7
[지력에 +32를 투자합니다.]– 지력이 (60)이 되었습니다.
– 경고 : 이제 지력을 올릴 때는 레벨업 포인트가 (2) 필요합니다.
지력 60.
이제 아까처럼 허무하게 마법이 격파당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참고로 능력치 60 이상부터는 사기 진작 효과를 받아도 능력치 뻥튀기가 이루어지지 않게 된다.
[전용 스킬, 《대마력방호》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기 시작합니다.] [전용 스킬, 《현자의 기억법》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기 시작합니다.]훌륭해.
기세를 타서 더 투자할까 하다가 잠시 망설였다.
– 에델 씨는 힘도 좋으시니, 힘법사라는 표현도…….
힘법사라는 컨셉으로 숲의 백병전에서 엄청난 활약을 벌이긴 했다.
하지만 그래봐야 잡병.
아까처럼 엘리트 나이트에게는 특성으로 밀릴 것이 분명해. 그렇다면 자체적인 센스가 있다고 해도 무슨 소용인가?
내 적수는 결국 엘리트 플레이어들인데.
망설이는 이유는 마법 특화로 가자니 마법의 정점이 될 자신도 없었기 때문이다.
공략 때마다 흑기사(黑騎士)를 고집했었다.
대검을 한 손으로 휘두르며 현란한 전투를 벌이던 인파이터 클래스. 뒤에서 마법을 날리기보다는 심연을 칼날에 둘러서──
──잠깐, 지금 뭐라고?
이마를 탁 쳤다.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다음 순간 나는 인터페이스를 마구 조작하고 있었다. 미친 듯이 울리는 경고음은 다 무시하고.
[경고 : 당신의 각성 클래스에 적합하지 않은 능력치입니다!] [경고 : 당신의 각성 클래스에 적합하지 않은 능력치입니다!] [경고 : 당신의 각성 클래스에 적합하지 않은 능력치입니다!]▶ ▶ ● ◀ ◀
숨@!#?겨진 역*@사 :
영웅시대(英雄時代)의 판도를 어지럽히고 태양과 달까지 추락시킨 이계의 존재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 숫자는 총 666명이었다는데, 인류의 수호자였던 뇌향의 세츠넨이 분신 글리아륜을 남기고 승하한 뒤 그 역사 또한 사라졌다고 한다.
잊힌 것이 아니라, 모두의 기억과 역사와 전승 속에서 완전히 사라졌다고.
* * *
심야(深夜)였다.
하지만 성도 캐슬베이아는 개선의 대열을 맞아들이느라 시끌벅적했다.
“요르한 전하, 천세(千歲)!”
“천세!”
“천천세!”
역시, 정철은 선두에서 말을 몰고 있었다.
누더기에 가까워진 마법사 로브.
사쿠라이는 그것만으로도 그가 어떤 사선(死線)을 넘어왔는지 손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 대군을 상대로 살아 돌아왔어.’
[긴급 퀘스트 실패]라는 알림이 왔을 때 얼마나 가슴 졸였었는지 정철은 평생 모를 것이다. [히든 퀘스트 : 정의구현 완료]라는 알림이 왔을 때 숨죽여 울었던 것도.“역시 요르한 전하셔. 저 병력으로 50만 명의 요정 대군을 물리치시다니!”
아냐, 역시 정철이지.
안도감일지 기쁨일지 모를 감동이 속으로부터 벅차올랐다.
그래서일까, 소녀는 민낯으로는 평생 하지 못할 미친 짓을 저지르고 말았다.
궁성 마구간.
아르츠레히드와 정철이 말에서 내려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사쿠라이가 이때 마부 소년들을 지나쳐 쪼르르 달려가 정철을 꼭 껴안은 것이다.
소녀는 키가 작고 정철은 성큼했으므로 기껏해야 허리였지만. 안고 나서야 얼굴이 붉어오는 걸 느꼈다.
마부 소년들이며 기병들이 휘익, 휘파람을 불어댄 탓이다.
“하하, 그러고 보니 자네 여동생이 꽤나 걱정했겠군.”
아르츠레히드가 피식 웃자 정철이 잘생긴 얼굴로 멋쩍게 웃으며 소녀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오늘 왠지 기분이 좋아 보였다.
“돌아온다고 했잖아.”
진심일까, 가식일까?
첫 대면에 정철이 사쿠라이를 친동생이라고 소개한 바 있었으니 계산적으로 연기를 펼치는 것일 가능성도 높았다.
“그러면 먼저 가보겠네. 내일 엔더스킵으로 함께 이동하자고.”
“실례지만, 전 트라이폴로 가볼 생각입니다.”
“그런가? 아쉽군. 자네도 사정이 있겠지.”
“영주님, 감히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정철의 목소리가 일순 낮고 진지해졌다. 그 진지함이 아르츠레히드를 멈춰 서게 했다.
“말하게, 친구여.”
“후회할 선택은 처음부터 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보는 겁니다. 저도 한 번의 선택으로 지금…….”
아르츠레히드는 쓰라린 미소로 대답하고는 사슬 갑옷의 쇳소리를 찰랑이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정철은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일이에요?”
“운명의 장난.”
“그게 뭔데요!”
“애들은 몰라. 어른들만 이해할 수 있는 일이야.”
정철은 대체로 이런 모호한 대답을 고집한다. 사쿠라이가 뾰로통하게 입술을 내밀었다.
“입술 집어넣어라. 확 잘라버릴라.”
하지만 역시 이 강철 같은 남자에겐 이른바 ‘소녀의 무기’는 일절 통하지 않았다.
“박 아저씨는요?”
순간 정철이 미간을 틀어쥐었다.
아까 좋아 보이던 기분이 한순간에 착잡해져 버린 것처럼 보였다.
뭘까. 당연히 같이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박현수는 지금까지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혹시 싸웠어요?”
“아니. 화장 준비로 엔더스킵으로 갔다. 내일은 우리끼리만 이동할 거야.”
“화장이요? 누가 죽은 거예요?”
“몰라. 일단 가자. 춥다.”
기분이 몹시 안 좋아 보였으므로, 박현수에 대한 건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했다.
“편안한 밤 되시길 바랍니다. 필요한 일이 있으시면 협탁의 종을 울려 주십시오.”
왕실 종사관은 그들에게 한방(!)을 침소로 내주었다. 이는 매우 중대한 사안이었다.
정철이 사쿠라이와 마주 앉으며 대꾸했다.
“조금 씻고 싶습니다만.”
“아, 이 늙은이의 정신도 참. 준비가 되면 곧장 집사를 보내겠습니다.”
설정상 친남매니까 당연한 수순이긴 했지만, 물론 정철이 엉큼한 짓이나 벌일 얼간이가 아니란 건 알지만.
그래도 이건?
이건 배틀로얄이든 현실이든 상관없이 사춘기 소녀에게는 매우 민감한 사안이란 말이다.
“갑자기 왜 조용해졌냐.”
“……딸꾹.”
“지금 심란하니까, 너까지 속 긁지 마라.”
“제가요. 그러니까요. 땅바닥에서 잘게요. 오빠는 피곤하니까요.”
정철은 멍청이가 아니었다.
그는 소녀의 말에 담긴 함축적인 의미 118가지를 한눈에 파악한 것이 분명했다.
정철이 눈을 가늘게 뜨고 깍지 낀 손에 턱을 괴었다.
추행 우려가 짜증 난다기보다 추행 대상이 어이가 없다는 듯한 눈빛이었다.
“야, 돌았어? 성진국(性進國) 꼬맹이 아니랄까 봐.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게임 속에서 그런 걱정이나 하고 있고.”
“성진국? 무슨 뜻이에요?”
“그런 게 있어.”
“알려줘요.”
“저기 이웃나라 중국인은 벌써 미친 짓을 하면서 폭업을 하고 있는데……. 하여튼 오늘은 잠잘 생각도 말아. 내가 씻는 동안만 쉬고 있어라.”
“네?!”
몹시 위험한 발언이었다. 알고 한 말인가? 모르고 한 말인가?
몰라도 문제로다!
똑똑똑…… 그때 문밖에서 들려온 말소리에 요동치던 심장이 떨어질 뻔했다.
“에델 바이스 님. 목욕물이 준비되었습니다.”
“곧바로 가지.”
정철이 나가고 나서야, 그의 몸에서 얼마나 악취가 심한지를 깨달았다.
피와 땀의 비린내와 먼지 냄새.
힘들었을 텐데 싫은 소리 한 번을 안 했다.
정철이 돌아왔을 때 사쿠라이는 양피지 종이들에 깃펜으로 온갖 질문들을 적어놓는 중이었다.
무수한 질문을 하다 보면, 밤도 훌쩍 지나가버릴 것이고, ‘잠잘 생각도 못 할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었으니까.
[전용 스킬, 《세계의 기억》이 당신의 기억력에 힘을 보탭니다.]양피지 더미를 흘끔 살피는 정철은 왕실의 예복을 단정히 차려입은 상태였다.
대단했다.
그것만으로도 오늘 하루 만에 왕실 내에서 어떤 지위에 올라섰는지 알 수 있었으니.
“존경하는 챌린저 누님, 세계의 기억 렙 몇이십니까?”
정철이 의자에 쓰러지듯 앉으며 물었다.
“22요!”
“잘했네.”
사쿠라이는 ‘질문 넘버 원’을 곧바로 스캔했다. 이야기의 고삐를 놓쳐서는 안 됐다.
“영웅시대의 이야기를 읽었어요. 막 영상이 재생되더라고요.”
좋아.
정철의 고단한 눈동자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무슨 이야기였지?”
“영목의 탄생이요.”
정철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그래서 사쿠라이는 그 태양과 달의 신들과 검사의 정체를 묻고자 했던 것을 까먹고 말았다.
답답하다는 한숨을 내쉰 것이다.
“영목의 탄생? 설마 히든 클래스가 나왔냐?”
“네. 어떻게 아셨어요? 《신화의 사자(使者)》라고…….”
“야단났네.”
정철이 제 관자놀이를 주물렀다.
“숨겨진 직업이면 좋은 거 아니었어요?”
“그래서 문제란 거야.”
그 말을 끝으로 정철은 긴 상념에 잠겼다.
앉아서 손가락으로 숫자를 세거나, 일어서서 창가를 서성이거나, 창밖을 내다보며 쉼 없이 중얼거리곤 했다.
중얼거림의 틈새로 ‘트라이폴’이라는 말이 간간이 들려왔다. 세 번째로 들렸을 때였다.
트라이폴(Trifall).
– 유서 깊은 부유한 항구도시.
– 소금의 산지이며, 성도 쟁탈전 이전에는 아크라드 대륙과 이데아 반도를 잇는 주요 교역로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 교통이 편하고 부유하여, 많은 초심자 플레이어들에게 추천되는 도시입니다.
– 영웅시대 용사 파티의 신성 기사 샤릴리온이 일으켜 세운 도시로, 그 후손 리드 가문이 도시를 지켜오고 있습니다.
샤릴리온?
그때 본 그 샤릴리온?
특성이 보여주는 정보창을 읽고 있던 그때였다.
“아무래도 네 남자 친구를 구해 봐야겠다.”
“네?”
남자 친구?
저쪽에서 정철이 침대의 깃털 시트 위에 걸터앉는 것이 보였다. 침대는 하나였다.
“이야기꾼을 1명 더 영입해야겠단 말이야. 같잖은 농담이나 하는 거 보니 외로워 보이는데 최대한 소년으로 구해볼게.”
“아, 아, 아니거든요?!”
“어차피 내일 트라이폴로 갈 계획이었으니까.”
“왜요?”
사쿠라이는 감히 무례해질 수 있었다.
경쟁자가 생기는 건 사양이었다.
사소한 일로 비교당하는 것도 절대 싫었다.
정철도 이야기꾼은 공격대에서 단 1명만 필요하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저 말이 뜻하는 건, 사쿠라이가 게임의 끝까지 그 상대와 경쟁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원래 널 전투 클래스로 키우려고 했었어. 파멸의 선지자라고, 네 각성으로 점찍어 뒀지. 이야기꾼 중에서 유일하게 제일선에 나설 수 있는 각성이야.”
“이야기꾼은 비전투 클래스라면서요.”
“파멸의 선지자는 《엘더 사인 Elder Sign》이라는 전용 특성이 있거든. 고대신의 문장이란 놈인데, 어쨌건 <잊혀진 왕들>을 물리치는 데 특화가 된 클래스야. 전장에 나설 수 있지. 성배 전쟁 시나리오 이후의 종말시대부터는 심연(深淵)이 주적이 되거든.”
“고대신이 태양신이에요?”
“태양과 달은 <온 것들>이야. 고대신은 다른 놈이고. 정체를 아무도 몰라.”
뭔 소리지? 잘 알 수 없었지만, 사쿠라이는 파멸의 선지자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소략한 정보로도 그 중요성만큼은 알 수 있었으니까. 사쿠라이는 정철에게 필수 불가결한 존재가 되어야만 했다.
살기 위해서. 아버지를 위해서.
“제가 파멸의 선지자가 될게요. 그러면 되잖아요.”
“안 돼. 신화의 사자는 그것보다 백배는 좋아.”
부녀간의 갈등 같기도 하고 남매간의 갈등 같기도 한 긴장감이 흘렀다.
새벽이 다가온 창밖에서 풀벌레들이 울고 있었다.
정철이 장화 끈을 힘없이 풀었다.
“파멸 할래요. 저 챌린저라고요. 컨트롤 개쩔걸요?”
“난 세 번 이상 말하는 걸 극도로 싫어한다. 엘리트 나이트가 적수로 나타났단 말이야.”
강풍이 불어와 창틀을 때렸다.
저 짧은 말에 살벌한 한기가 담겨 있었다.
“……강해요?”
“나보다 한발 앞서서 가던 놈이었어. 지금은 아니지만.”
[긴급 퀘스트 실패]가 엘리트 나이트 때문이었구나.“죽여야만 하죠?”
“언젠가는. 놈이 멍청하면 내일 트라이폴에서 죽일 수 있을지도.”
정철은 살인을 무덤덤하게 말하며 어깨를 주물렀다.
“공격대를 수백 번은 넘게 지휘하면서 불변의 신조로 세운 게 하나 있다. 그게 뭔 줄 아냐?”
“알면 제가 초능력자게요?”
“한번 공격대원으로 받은 사람은 절대 먼저 내치지 않는단 거야. 알겠냐? 너도. 박현수도.”
저 말에 담긴 의미, 당연히 안다. 널 버릴 일은 없을 거라고 말해주고 있는 거다.
사쿠라이는 고개를 떨구었다.
미소가 계속 번져 나왔다. 왜일까. 왜 이리도 기쁜가.
“죄송해요. 안 할게요. 오빠도 생각이 있겠죠.”
대답도 없었다.
어찌나 피곤했던지 정철은 그 상태로 잠들었으니까. 사쿠라이는 정철에게 조심스레 다가섰다.
담요를 덮어주기 위해서였다. 사막의 새벽은 몹시 추웠다. 이렇게 가까이서 유심히 관찰하는 건 처음이었다.
그때 문득, 정철은 입술을 천천히 달싹여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
아, 정철도 사실 한 사람의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순간이었다.
저 비인간적인 싸늘함은…… 사실 절실한 소원을 성취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내모는 거였구나.
창밖으로는 어느새 여명의 빛이 밝아오고 있었다.
정철의 표현을 빌리자면, ‘남자 친구를 만나러’ 트라이폴에 갈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그 장난 같은 말 때문에, 이 절망적인 세계에 한순간이나마 낙관을 품었던 것 같다.
어찌 알았겠는가.
아마 정철도 몰랐을 것이다.
트라이폴에서 두 번째 <잊혀진 왕들>과 조우하게 되리라고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