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 of the Fake Hero RAW novel - Chapter (126)
가짜 용사 이야기-126화(126/310)
#22 :
[5. 트라이폴] 지혜의 보고중앙 거리를 향해 앞서 달리는 바이로니카가 중앙 아성의 성벽을 바라보며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무사하셔야 할 텐데.”
복부에서 기분 나쁜 팽만감이 꿈틀거렸다.
뭐냐.
뭐냐고, 대체.
퀘스트가 뒤죽박죽이다. 시작되어야 할 퀘스트는 시작되지 않고 시작되지 말아야 할 퀘스트가 동시다발적으로 시작된다.
“바이로니카.”
“응?”
“현자에게서 최근에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했나?”
“뭐?”
바이로니카가 눈을 흘겼다.
“당신, 아저씨한테는 말 좀 가려서 해.”
그 순간 억눌린 비명이 들렸다.
한 번도, 하나의 비명도 아니었기 때문에 소리의 진원은 곧바로 찾을 수 있었다.
항구 쪽이었다.
단지 멈춰 서서 무언가를 올려다보고 있는 인파들. 그 시선이 향하는 곳은 단 한 곳이었다.
‘멈춰 섰다’라는 표현을 ‘사고가 정지됐다’라는 묘사로 바꾸는 데는 1초도 걸리지 않았다.
바다가 고통스럽게 흐느끼고, 바닷새들은 바다를 버리고 육지 쪽으로 황망히 달아난다.
수면 위로 솟아오르는 악마.
초거대 어인종 2기.
샛노란 어안은 태양만큼이나 크다. 놈들의 거대한 그림자가 도시를 시커멓게 물들였다. 바이로니카가 공포에 질린 신음을 냈다.
“……뭐야?”
솔직히 말하자면, 놈의 외형 따위 두렵지 않다. 족히 몇천 번은 봤는데.
[광기 수치 : 47%]나를 두렵게 만드는 건, 저것들이 지금 등장해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큘륜.
오랑우탄처럼 긴 팔. 검보라색 털로 온몸이 덥수룩한 저놈들은 슈’율큘라의 하수인들이다.
게임 설정상 신화시대 이전부터 존재했던 ‘옛것들’ 중 최상위 격의 존재로, 심연 계열 몬스터 중에서 보스급 몬스터를 제외하면 가장 강하다.
놈들의 등장 타이밍은 이 메인 퀘스트의 막바지 부분이어야 옳았다. 상대하는 이벤트도 아니다. 도망치는 이벤트지.
순간, 한 큘륜이 정박된 증기선 한 척을 집어 들었다.
배는 돌멩이 던져지듯 날아와 저쪽 인파를 덮치며 부서졌다.
집과 도로와 배가 부딪혀 으깨졌고 그 파편에 뼈가 깨어지고 피가 튀며 단말마들이 처참하게 울렸다.
“도, 도망쳐!”
“괴물이야!”
비웃는 소리.
심장의 고동이 격렬해진다.
저 비웃음의 의미를 알고 있기 때문에.
[몬스터, 큘륜들이 결계 술식 《심연 지대》를 활성화합니다.]다음 순간 심연이 해일처럼 일어서서 부둣가를 덮쳤다. 수많은 NPC들이 심연에 휩쓸려 절여졌다.
이후 상황은 튜토리얼 때와 같았다. 악 받친 비명들이 광기 어린 웃음으로 변해간다.
망자화(亡者化)다.
“가야 해.”
바이로니카가 황망히 내 소매를 붙잡고 흔들었다.
“서둘러서 아가씨한테 가야 한다고!”
이 상황에 압도되어 공황 상태에 빠진 거냐고?
아니었다.
잠시 멍하니 멈춰 선 건, 느닷없이 눈앞을 어지러이 메우는 문자열 때문이었다.
[퀘스트 갱신 : 아가씨를 구하라!]– ???가 아가씨란 사람의 존재를 눈치챈 것이 틀림없습니다. 놈의 마수가 뻗치기 전에 아가씨를 구해야만 합니다!
[퀘스트 도착 : 플레이어 규합.]– 심연의 권속이 도시를 휩쓸고 있습니다. 용감한 동료 플레이어들을 소집하여 저들을 퇴치하십시오!
이건 뭐야…….
슈’율큘라는 《예지안(銳智眼)》이라는 신화 등급 기술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놈이 빙룡 스케사리가 자신들을 막아설 미래를 보았다고 해도 이해할 수는 있다.
하지만 내가 모르는 이벤트가 진행된다는 점에서 납득할 수가 없었다. 슈’율큘라는 아직 깨어나지도 못했을 시점이란 말이다.
“정신 차리라니까! 이제 가야 해!”
내가 모르는 진행.
잇따른 퀘스트들의 혼재.
점점 불가능으로 치솟는 진행 난이도. 온갖 기분 나쁜 감각들의 정체가 파악되던 순간이었다.
이제 알겠다.
그래, 이제야 알겠어.
이건, 한 플레이어가 벌일 수 있는 짓이 아니다. 그렇기에 감히 확신해볼 수 있었다.
이 행위의 주체는 바로…….
멀리서 플레이어를, 이 악몽을, 이 비극을 웃으면서 지켜보는 녀석들.
바로 시청자와 관리자들이다.
* * *
[큘륜은 예언한다. 존엄하신 옛 바다의 왕, 슈’율큘라의 재림을.]이후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면서도 또 모른다는 공포가 이런 것일까.
[그들의 예언은 꿀보다 달고 흑암보다 매혹스러우리라. 피와 비명과 광기로 얼룩진 향연이 베풀어질 것이니.]시가지에 피와 비명과 광기의 얼룩이 번져간다.
“사, 살려줘! 저게 뭐야!”
“꺄아아아악!”
“우히히히헤헤헤헤헤!”
산더미처럼 많은 망자들이 폴짝폴짝 뛰어다니며 생자들을 사냥하는 참담한 수라장이 펼쳐졌다. 이 게임에서 앞으로 숱하게 볼 광경이다.
“제, 제발, 으아아아아악!”
슈’율큘라의 권능으로 망자가 된 자들은 켈렉─샼의 그것과는 다르다.
온몸이 구더기로 변하지 않는다.
대신 아가미와 지느러미가 생겨나고, 눈동자에서 섬뜩한 안광을 뿜는 대신 어안(魚眼)을 끔벅이는 어인(魚人)이 되는 것이다.
“하핫, 드디어 퀘스트냐!”
“죽여버려!”
[플레이어, 에바가 기적, 《신성 방벽》을 시전합니다.] [플레이어, 쥬제프가 마법, 《불 뿜기》를 시전합니다.]해저인과 맞서는 플레이어들의 모습도 보였다. 무의미한 발버둥이었다.
“키키키킥.”
그쪽으로 손을 뻗으려다가, 목소리를 눌러 담으며 돌아섰다.
분명 한두 명 정도 인재가 있을지도 몰라. 그래, 모르는데…….
지금 나에게는 힘도 여유도 없었다. 큘륜들을 물리치고 플레이어들을 규합해낼 만한 힘과 여유가.
[퀘스트 : ‘플레이어 규합’을 포기하셨습니다!]– 명성이 (20) 차감됩니다.
관리자와 시청자들의 장난질. 그것에 대해 분노하는 건 나중이다.
지금 해야 할 건 퀘스트 속행뿐.
큘륜이 등장한 이상 [트라이폴 몰락] 퀘스트는 메인 퀘스트로 승격되고, 순식간에 그 결말을 향해 쉬지 않고 나아갈 것이다.
모든 NPC의 생사가 시나리오의 궤도에서 벗어난 상황이다.
까딱했다가는 용부인과 그 배 속의 빙룡도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뇌리를 스쳤다.
그것만은 막아야 한다. 반드시.
“바이로니카, 일단 지하 은신처로 돌아가자.”
“뭐?”
“지금 이 상황에서 우리들만으로는 중앙 거리를 뚫을 수 없어! 너도 알걸? 어찌어찌 뚫는다고 해도 용부인은 어떻게 데려오지?”
본심은 다른 곳에 있었다.
본격적인 재림 절차가 시작되었다면, 칼레이브 또한 폭주할 터.
가이네이브에게 맡겨두고 온 사쿠라이의 목숨도 위태로워진 것이다. 녀석을 데려와야 한다.
사쿠라이는 내 공대원이다.
* * *
“맛이 어떠니?”
사쿠라이는 대답할 수 없었다.
입 안에 비스킷이 잔뜩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너무 맛있어서 마구 집어넣은 것이 화근이었다.
[포만감 수치 : 85%]그런 모습을 지켜보며 ‘빡빡이 현자’가 씁쓸하게 웃었다. 사쿠라이가 잘 아는 미소였다. 저것은 이른바 아버지의 미소였다.
“로헤이리츠. 그 아이도 너처럼 그걸 아주 좋아했었지……. 내 집사람의 특기였던 게다.”
“진짜 맛있어요.”
사쿠라이는 비스킷을 재빨리 삼키며 말했다.
게임 음식이 이렇게 맛있는 건 반칙인데.
손가락과 입가에 과자 부스러기가 무공훈장처럼 잔뜩 붙어 있었다.
“이제 좀 진정이 되는 모양이구나.”
정말이었다.
아까처럼 몸이 이유도 없이 바들바들 떨리지도 않았고, 귓가에서 슈’율큘라의 목소리가 끝없이 메아리치지도 않았다.
눈앞의 현자가 어떤 영창을 왼 뒤부터 그 증상들이 마법처럼 싹 사라진 것이다.
“솔직히 말해주렴. 슈’율큘라를 정말로 봤다는 게냐?”
“네. 꿈에서요. 아뇨, 《세계의 기억》으로요.”
자신도 믿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믿어야만 했다.
온몸에 나타난 붉은 반점들을 키스 마크라고 말할 것이 아니라면 그것밖에 설명할 길이 없지 않은가.
“정말 놀랍구나. 영웅시대의 기억을 목도하다니. 리암 경을 봤다는 것도 정말이더냐?”
“유명한 사람인가요?”
“유명하다는 말로도 부족하지! 이 땅에서 심연을 몰아내셨던 전설적인 용사님이시란다. 영웅시대에 말이다. 나도 그분을 한 번이라도 뵈었으면 여한이 없었을 텐데…….”
소년 만화를 이야기하던 동급생 소년들처럼 눈을 반짝이는 칼레이브를 보자 속이 메슥거렸다.
분명히 리암 경을 봤다.
그 거울의 방패도 봤지.
그렇지만 그걸 떠올리면 슈’율큘라의 소름 끼치는 촉수들과 안리달의 사냥개도 떠오른다…….
또다.
또 구역질이 몰려나왔다.
차원을 찢고 나타난 사냥개가 아가리를 쩍 벌리던 장면이 떠올랐던 것이다.
“괜찮으냐?”
“네, 괜찮아요.”
순간 소녀는 소스라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현자가 걱정하듯 소녀의 팔을 잡았었는데 그게 너무나도 차가웠던 것이다.
인간의 체온이 아니었다.
이 바다처럼 차가운 감각, 이건…… 해저인의 것이었다.
칼레이브의 보조개 뒤에서 꿈틀거리는 아가미가 눈에 들어오던 순간, 날카로운 비명이 들려왔고 시스템 알림이 활성화되었다.
[시스템 : 심연 지대가 점차 활성화됩니다. 심연이 도시를 뒤덮기 전에 탈출하십시오.] [메인 퀘스트 갱신 : 아가씨를 구하라!] [서브 퀘스트 도착 : 플레이어 규합.]숨이 격하게 가팔라왔다.
정철이 무언가를 벌이고 있는 것일까. 아니. 지금 두려운 건 그게 아니었다.
눈앞에서 현자의 탈을 쓰고 있는 존재가 가장 크게 두려웠다.
“두렵구나.”
“두려워요.”
“하하, 질문이 아니란다. 그 녀석이 너와 같은 눈으로 나를 보리라는 미래가 두렵다는 게다…….”
그 녀석?
정철을 말하는 걸까?
하긴, 정철에게 걸리면 저놈은 바로 죽을 거니 맞는 말이긴 했다.
“그렇겠네요.”
사쿠라이는 침착하게 대꾸하며 문 쪽으로 천천히 움직였다.
잠깐. 문밖의 검사들도 같은 편이면 어떻게 하지? 그러면 문밖으로 달아나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는데.
칼레이브가 거칠게 기침을 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힘에 버티려는 고통스러운 몸부림처럼 보였다.
“지금…… 피 토하시는 거예요?”
마른침을 삼키며 묻자, 붉은 눈의 현자가 자신의 피를 보면서 짧게 신음했다.
“이제 정말 시간이 없구나.”
탁상 위로 쏟아진 피를 보자 소름이 끼쳤다. 그 속에서, 촉수가 꿈틀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받거라.”
칼레이브가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평생 처음 보는 기이한 책이었다. 책 표지가 강철로 장정된 책을 본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어서.”
그쪽으로 가지 않았다.
제정신이 아니고서야 누가 해저인의 아귀 속으로 달려든단 말인가.
그러자 칼레이브가 다가왔다.
“그런 눈으로 나를 보지 말거라. 내가 심연에 먹혔더라면 지금쯤 너한테 달려들었어야 했다. 광기의 속삭임에 놀아나서 네 몸과 영혼을 미친 듯이 탐하고 있어야 하지. 침을 흘리면서, 상상도 못 할 야만적인 행위로.”
“오지 마세요.”
“그리고 입으로는 사람의 언어가 아니라 괴어(怪語)를 쉬지 않고 뱉겠지. 계속, 계속. 네 정신도 광기로 인해 더러워지도록. 그 말은 단순한 짐승의 소리가 아니다. 무슨 뜻인지 아느냐?”
“오지 말라고요!”
“슈’율큘라의 하수인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거다. ‘주는 위대하시고 위대하시다. 주는 깨어나고 깨어나신다. 또다시 일어나고 태양과 달을 깨부수고 별들을 제자리로 돌아오게 하시며 이 세계에 우뚝 서시리라……’ 하, 하, 하하하하하하하하하!”
“오지 말라고 했어요! 저 챌린저 원딜이에요! 총 엄청 잘 쏴요! 머리에 구멍 뚫을 거예요!”
[전용 특성, 《세계의 기억》이 《진위 판별》 스킬을 시전합니다.] [전용 특성, 《세계의 기억》이 NPC, 칼레이브의 《세계의 기억》에 의해 무효화됩니다.]세계의 기억 레벨이 95?
칼레이브가 발을 질질 끌며 더욱 다가왔다. 오는 도중에 피를 한 번 더 토했다.
뒷걸음질 치던 다리가 저절로 멈췄다. 등뼈가 벽에 닿은 탓이다.
갑자기 너무나도 추워졌다.
이가 제멋대로 딱딱 부딪쳤다. 죽음의 한기가 밀려들고 있었다.
“소리, 소리 지를 거예요!”
“시간이 없다. 애야.”
“오지 말라니까요!”
한바탕 울고 싶었다. 이 배틀로얄에 들어온 뒤로 심장이 떨리지 않은 적이 없었다.
마음이 놓일 때는 정철이나 박현수가 곁에 있을 때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둘 모두가 없었다.
해저인 앞에서 다만 혼자인 것이다. 그리고 다음 순간, 칼레이브가 소녀의 앞에 다다랐다.
무서워서 다리에 힘이 풀렸다.
이제 얼굴 위로 선명하게 드러난 아가미를 섬뜩하게 뻐끔거리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칼레이브는 혀를 날름거린다거나 그 손으로 목을 조른다거나 하지 않았다.
아까 꺼낸 책을 내밀 뿐이었다.
그러고는 죽어가는 목소리로 이렇게 당부했다.
“어서 받아라……! 그 아이, 로헤이리츠에게 전해줘야만 한다. 그래야만 해! 인류가 <잊혀진 왕들>에게 대항할 수 있는 방도를 조금이나마 얻기 위해서라도!”
“대항하는……? 아저씨는 이제 심연의 편이 된 거 아니에요?”
“슈’율큘라는 나로부터 인류의 지혜를 빼앗아 가려고 했지. 멍청한 놈. 하지만 나 칼레이브가 그걸 역으로 이용했지……! 어떻게 했는지 아느냐? 놈이 나를 들여다볼 때 나도 그놈을 들여다보았지. 그래서 <잊혀진 왕들>의……!”
칼레이브가 반쯤 강제로 사쿠라이의 양손에 그 책을 떠맡긴 순간, 눈앞에 문자열이 떠올랐다.
[전설 퀘스트 도착 : 소현자의 희생.]– 소현자 칼레이브는 심연에 먹히지 않았습니다. 아직까지는 말입니다. 고통 속에서 끝까지 투쟁했고, 결국 <잊혀진 왕들>의 상대법을 적은 『지혜의 보고』를 집필해 내었습니다.
– 『지혜의 보고』를 심연 사냥꾼 로헤이리츠에게 전달하는 것으로 퀘스트를 완료합니다.
[전설 아이템 습득 : 『지혜의 보고』.] [전설 아이템 자동 장착 : 소현자의 기억.]– 소현자의 기억이 그대를 진리의 길로 이끌 것입니다.
칼레이브가 또다시 피를 토했다.
한 번, 두 번, 세 번.
“이걸 왜…… 저한테 주는 거예요?”
“그 책의 광기를 견뎌낼 수 있는 자는 별로 없으니까……. 하지만 이미 슈’율큘라와 안리달을 대면하고도 제정신인 너라면…… 그리고 그 기사라면 믿을 만하다고 여겼다. 한눈에도 실력이 출중해 보였으니까. 어쩌면, <온 것들>께서 내게 너희들을 보내준 것 같구나. 정말 기막힌 타이밍이었어. 아아, 듀르시엘.”
그때 검사 NPC들이 문을 박차고 안으로 들어섰다.
비명과 고함을 들었던 걸까.
경계심은 처음에는 당연히 사쿠라이를 향했으나, 칼레이브를 보고는 표정이 경악감으로 젖었다.
“현자님, 큰일입니다. 지금 항구에서 심연이……?”
그 무렵 칼레이브는 사쿠라이로부터 점점 멀어져가고 있었다.
자신이라는 괴물을 소녀로부터 격리하는 행동처럼 보였다.
다음 순간은 정말 끔찍했다.
칼레이브의 볼이 길게 찢어지면서 아가미가 하나 더 생겨났고 오른쪽 눈은 샛노랗게 물들면서 빠져나올 듯이 커다래졌다. 어안이었다.
간신히, 정말 간신히 비명을 삼켰다.
“현자님, 결국 당신마저…….”
“마침 잘 왔네, 제군들.”
칼레이브가 소매에서 약병을 꺼내들었다.
기적과 관련된 걸까.
담긴 약에서 태양광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긍지 높은 나의 동지들이여! 부디 인간으로서의 긍지를 잃지 말게. 왕들을 두려워하지 말게. 광기의 속삭임 앞에서 늘 태산처럼 담대하게. 서로를 의지하게. 서로 합력하는 법을 깨칠 때 인간은 비로소 위대해진다는 창세의 가르침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칼레이브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 순간 왼쪽 눈도 노랗게 물들여졌던 것이다.
그러자 칼레이브가 “하하하하하하!” 악에 받친 고함을 지르며 약병을 입 안에 털어 넣었다.
“진리를 섬기는 자는…… 빛으로 나아가나니…… 심연의 권세가…… 감히 범하지 못하느니라…….”
그 헐떡임이 그의 마지막 말이었을까.
사쿠라이는 『지혜의 보고』를 꽉 움켜쥐며 비명을 터뜨리고 말았다. 낯익은 장면이 되풀이되었던 것이다.
리암의 광선에 부스러지던 슈’율큘라의 촉수처럼, 방금까지 비스킷을 나눠주며 아버지의 웃음을 짓던 노인의 몸이 재가 되어 사방으로 흩날린 것이다.
이젠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심연이 신성력의 힘을 받으면 저렇게 된다는 걸.
그리고 앞으로 만나게 될 NPC들 중 저렇게 죽게 될 자들이 상당할 거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정철이 박현수에게 했던 말이 우연히 떠올랐으니까.
– 현수 씨, 이 세계가 멸망해야만 우리가 이 게임을 클리어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NPC들에게 정을 주지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