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 of the Fake Hero RAW novel - Chapter (129)
가짜 용사 이야기-129화(129/310)
#25 :
[5. 트라이폴] 메인 퀘스트 공략 (3) [새로운 지역 : 트라이폴 중앙 거리] [메인 퀘스트 갱신 : 구출 작전 개시 (3)]* 경고 : 보스 몬스터가 이 지역을 활보하고 있습니다.
멍하니 뒤를 돌아보았다.
……쏴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다시 성문을 따라 펼쳐진 바다의 장벽만이 수직으로 일렁이는 파도로 느물거릴 뿐.
성벽 건너편의 소리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마치 물속으로 잠수했을 때처럼 귀가 먹먹했다.
숨소리만이 들리는 정적이었다.
바이로니카는 바다 장벽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결국 울기 시작했다.
가이네이브가 그 어깨를 끌어안았다.
배신자는 슬픔에 잠기는 척을 하는지 고개를 뒤로 젖히며 슬픔을 삼켰다.
피터의 눈동자에는 생기가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의식을 잃은 건 사쿠라이뿐인 걸까.
나는 울지 않았다.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까.
누군가 장난을 친 것만 같은 이 세계에는 오직 절망만 있으며 희망은 사라져서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하아…….”
한숨이 밀려 나왔다.
그들 모두가 잊은 걸까.
엄청난 수라장을 돌파해온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공략’은 이제야 본궤도에 올랐을 뿐이란 걸.
……쏴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바다 장벽이 이 절망을 비웃듯 더 음흉하게 철썩거렸다.
그동안 나는 이 퀘스트를 클리어하던 기억을 돌이켜 보면서 ‘공략’을 새롭게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구출…….
미끼…….
트라이폴 백작 공략…….
탈출…….
진심으로 말도 안 되는 난이도다. 인원은 고작 다섯. 그 다섯 중에서도 꼬맹이만 둘.
하지만 이런 수라장을 돌파해온 건 처음이 아니고 이번이 마지막이 아닐 터.
공격대장 ‘정철’의 공략 고안은 길지 않았다.
구출.
이런 공략 유형의 경우 공격대장이 가장 먼저 확보해둬야 하는 것은 바로 퇴로였다.
우선 남문은 막혔다.
북문은 항구 쪽 절벽으로 나 있다.
동문과 서문으로 나갔다가는 트라이폴 시가지에 갇히는 꼴이 될 것이다.
사용할 수 있는 곳이며 살아 나갈 수 있는 곳은 단 하나였다. 바로 미끼조가 쓰기로 했었던 샛문.
조심스럽게 일행을 서쪽으로 몰아갔다. 시가지보다는 움직이기가 한결 편했다.
이곳이 이제 슈’율큘라의 영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바닷속처럼 시야가 약간 희뿌열 뿐, 하등한 심연의 안개 따위는 걷히는 게 일반적이었다.
슈’율큘라의 영지에서 주의해야 할 부분은 단 하나뿐이다.
[그 누구도 심해(深海)를 깨워서는 안 된다.]하지만 이 단 하나의 조건이 슈’율큘라 막하 보스들의 레이드를 진실로 어렵게 만든다. ‘조용히 한다’라는 게 파티 플레이에서 언제까지고 가능하겠는가?
[빛의 군주들조차도 심해(深海)를 까닭 없이 깨우지 않았다.]콰드득…… 그때 돌멩이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누군가가 밟아서 낸 소리였다.
아니 미친, 일행의 표정들을 훑어보니 범인은 가이네이브였다.
콰드득…… 드득…… 득…….
메아리는 우레처럼 크고 요란했다. 그 메아리가, 망자의 거리를 불안하게 울리며 퍼져 나갔다.
쿵…… 쿵…… 쿵…….
그것들이 반응해오기 전까지, 나는 내 심장 박동 소리를 또렷이 들을 수 있었다.
끼기기키기기키기기기기끼키키기기기기키기기끼기기기긱.
손톱으로 칠판을 긁어내리는 듯한 끔찍한 고주파가 들린다.
심해목들이 침입자의 존재를 감지하고 하나둘씩 잠에서 깨어나는 소리. 감히 슈’율큘라의 안식을 깨뜨린 자들에게 분노를 터뜨리는 소리.
최악이지만,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혼란에 빠진 일행에게 손을 치켜들어 간단하게 지시했다.
앞으로 전진.
여유롭게 걸을 것.
절대 달리지 말 것.
천천히 그 장소를 빠져나갔다. 경악스러운 일은 바로 그때 생겼다.
빠져나가기 직전, 멀리 앞쪽에서 ‘나무’ 한 그루가 다가오는 게 보인 것이다.
섬뜩하도록 시퍼렇고 배배 꼬인 줄기와 가지. 바로 심해목이다.
또 뿌리를 다리처럼 이용하며 접근해오는 행동에 음산하도록 소리가 없다.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지르는 일행과 달리 나는 태연했다. 또 일행들을 더욱 경악하게 만들 만한 행동을 개시했다.
‘정지’의 수신호를 보낸 것이다.
심해목에 대해 모른다면 내가 미쳤다고 보는 게 정상이겠지만, 이게 정답이다. 움직이지 않는다면 놈은 우리를 보지 못한다.
놈들은 ‘소리’에만 반응하니까.
그렇기에 이후 미끼조가 중요한 것이다.
끼기기키기기키기기기기기기기기기기기긱.
심해목은 우리 앞을 천천히 스쳐 지나갔다.
정말 가까웠다.
놈의 전신에서 음침하게 발딱거리는 심연 이끼들이 보일 정도로.
숨조차 참아야 했다. 문제가 생긴 건 그때였다.
옆구리에 끼고 있던 사쿠라이가 순간 꿈틀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위험했다.
사쿠라이가 이제 비명을 지른다면, 주변 민가들을 뒤덮고 있는 다른 심해목들이 일시에 깨어날 것이니까.
정신을 차려도 하필 이때…….
관리자 그 개자식들이 이런 부분까지 관여할 수 있을지 문득 궁금해졌다.
손을 천천히 움직였다.
소리를 내서는 안 됐다. 손이 목표에 닿기까지의 일순이 영원처럼 길게 느껴졌다.
끼기기기긱?
비명이 살짝 흘러나오며 심해목이 잠깐 움찔한 순간, 내 손이 목표에 간신히 닿았다.
거칠게 꿈틀대던 사쿠라이는 비명을 마저 지르지 않았다.
내 목표는 입이 아니라 정수리 쪽이었다. 진정해, 라고 부드럽게 손을 얹은 것이다.
영리한 녀석이니 이 정도 제스처는 곧바로 이해하리라.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녀석은 내 기대에 부응했다.
하지만 심해목은 한참 동안 의심하듯 가만히 서 있다가.
키헤헤헤헤…… 히히히히헤…… 히히히…….
어디선가 망자의 울음소리가 들려오자, 그 소리에 반응해서 떠났다.
망자들도, 방금 그 소리 때문에 우리의 존재를 감지한 것이리라. 사태가 화급했다.
도망치듯 그곳을 빠져나갔다. 이번엔 걸으라고 명령하지 않고 속보를 지시해서.
일단, 샛문까지 가야만 했다.
트라이폴 공략에서는 언제나 거기가 베이스 캠프였다.
오직 그곳만이, 조용한 목소리를 사용한다면 대화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얼마나 걸었을까.
저 멀리 희뿌연 시야 너머로, 썩어 문드러진 샛문이 보였다.
이제 2차 트라이폴 공략 브리핑을 할 때였다.
샬류안.
네가 난이도를 얼마나 뒤틀든 간에, 어떻게든 모두 공략해서 이 세계의 종말을 봐주겠어.
* * *
[숨겨진 지역 : 남서쪽 샛문] [심연 지대 활성화 : 61%]마침내 남서쪽 샛문을 찾아냈을 때, 사쿠라이는 썩어 문드러진 문짝을 박차고 도망치고픈 충동에 휩싸여 있었다.
“이 포인트를 외워둬야 합니다. 주변 정경도 잘 봐두세요. 살고 싶으면 이 포인트로 돌아올 수 있어야 합니다.”
기이했다.
이런 상황인데 정철은 언제나처럼 냉철했다. 마치 다른 세계에서 이 상황을 구경하는 사람처럼.
“너도 살펴봐. 사쿠라이. 너 혼자만 살아남아서 달아나야 할 수도 있어.”
이 게임은 분명 공포 게임이었을 거야. 제작진들은 또라이 사이코패스들이고.
이번에 확신했다.
중앙 거리는 시가지보다는 괜찮았지만 그게 끔찍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그래. 바다에 잠긴 ‘해저 도시’에 들어온다면 비슷한 느낌을 받을 듯했다.
두근꿈틀쏴아아꿈틀두근촤아악두근꿈틀두근꿈틀두근꿈틀.
중앙 거리에는 불안한 정적만이 맴돈다. 들리는 것이라고는 섬뜩한 파도 소리와 맥박 소리뿐.
정철은 그것이 슈’율큘라의 피조물이 빚어지는 소리라 했다.
“앞을 보지 말고. 주변을 살피라고.”
뭘 살피란 말인가.
축축한 도로는 피인지 물인지 알 수 없는 무언가로 끈적거리고, 건물들은 모조리 심해목에게 기괴하게 침식되어 소름이 돋는 모습이다.
어딜 가나 똑같을 것 같았다.
“저…….”
그때 피터가 조심스레 속삭였다.
여기에서는 말을 할 수 있었지만 저렇게 나직하게 말해야만 했다.
“수색조에서 두 분이 죽었는데…… 편성은 그대로 가나요?”
바이로니카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떨구는 반면 정철은 무덤덤하게 고개를 내저을 뿐이었다.
“질문 잘했다. 그래. 마르셸이 수색조에 합류한다.”
“뭐?”
마르셸이 황당해했다.
“그 말은 그러니까…….”
“길게 돌려 말할 필요도 없어. 혼자서 미끼를 서겠다는 거야.”
“형씨 제정신인 거 맞지? 심연에 침식된 건 아니고?”
믿을 수가 없었다. 미끼 역은 자살이나 다름없었다. 그걸 혼자서 서겠다니? 사쿠라이가 말했다.
“그럴 순 없어요. 미친 짓이라고요.”
“그래야만 해.”
“왜요?”
“최악의 상황에서는 미친 짓이 최선인 법이니까.”
정철이 돌 조각을 하나 쥐어들더니 흙바닥에 지도를 쓱쓱 그렸다. 간단하고 실용적인 지도였다.
“우리가 있는 장소는 이곳.”
정철이 바닥에 대각선을 쭉 그었다. 선이 멈춘 곳에는 별표가 그려져 있었다. 중앙의 A포인트에서 살짝 비껴난 곳이었다.
“수색조가 향해야 할 곳은 이곳.”
이어서 정철이 손가락을 튕기자, 사쿠라이는 지도를 더 자세히 볼 수 있었다.
[MAP : 파티 리더가 『트라이폴 도시 약도』를 활성화합니다. 잔여 시간 : 920초.]사쿠라이는 저도 모르게 그 지명을 읽었다.
“성 롱덴 등탑……?”
인터페이스가 표시해준 지점에 떠오른 지명이었는데, 정철이 눈을 찡긋해준 걸로 보아 잘 말했나 싶었다.
“그래. 수색조는 그 롱덴 등탑으로 직행한다.”
“거기에 뭐가 있는데요? 롱덴 등탑은 단순히 성소(聖所)일 뿐일 텐데요.”
“형씨. 롱덴이면 중심의 영주관 쪽이야. 무턱대고 위험을 무릅쓰기에는 어려울 텐데.”
“이걸 보고도 모르겠나.”
가이네이브와 마르셸이 반박하자 정철이 성벽 쪽 심연 이끼에게 돌멩이를 던졌다.
소름이 온몸을 덮었다.
돌멩이는 녹아서 죽처럼 흘러내렸다. 이끼에 부딪힌 순간 치이익, 거리며 녹아버린 것이다.
“상황이 이런데. 당신네들 아가씨가 어디에 숨었겠나? 아직도 온전한 장소가 있다면 성소뿐일 거다. 건물 자체에 신성력이 존재하니까.”
“흠, 과연…….”
“제 생각이 짧았어요. 그렇겠네요.”
두 NPC의 눈빛을 보니 왠지 이런 알림이 울렸을 것 같았다.
[NPC, 마르셸이 에델 바이스를 고평가합니다. 호감 (+20)] [NPC, 가이네이브가 에델 바이스를 고평가합니다. 호감 (+15)]정철은 말과 행동으로 NPC들을 휘어잡는 능력이 있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던 바로 그 순간, 진짜 알림이 들려왔다.
죽음이 다가온다는 알림이었다.
[심연 지대 활성화 : 68%]사쿠라이는 순간적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터져 나오려는 비명도 간신히 삼켜내야 했다.
……GUAAAAAAAAAAA……!
너무나도 두려웠다. 저 사악하고 질퍽한 울음은 바로 큘륜의 울음소리였다.
사람의 영혼을 무참히 뒤틀고 짓이기는 울음소리가 멀리 어디에선가 들려오고 있는 것이다.
정철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놈들이 우리를 찾고 있군요.”
정철은 잠깐 동안 소리 나는 허공을 응시하다가 이렇게 중얼거렸다.
“……여유 시간은 20분 정도인가? 30분? 아니, 32분.”
그러더니 돌연 벌떡 일어서서 브리핑을 일방적으로 끝냈다.
“이젠 시간이 없네요. 정확히 120초 뒤에 작전을 개시하죠. 각자 정비할 것들 있으면 정비하고. 서로에게 유언을 남겨도 좋고.”
미끼조의 역할은 자살행위와도 비슷할 텐데, 가장 차분한 표정인 건 정철이었다.
미끼조.
혼자서 수색조의 노정을 앞서 달려가며 적들을 꾀어내는 임무. 그렇기에 그 누구도 정철이 언제 합류를 할 것인지 묻지 않았다.
모두가 알고 있던 것이다.
정철이 맡은 임무는 살아 돌아올 수가 없는 임무라는 사실을.
[메인 퀘스트 갱신 : 아가씨를 구하라 (4)]– 작전이 수립되었습니다. 이젠 아가씨만 구하면 모든 게 이루어지겠지요. 어째서 소현자 칼레이브가 그 아가씨란 존재를 구출하는 것에 그토록 집착했는지, 곧 답을 알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 경고 : 심연의 비웃음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 경고 : 보스 몬스터가 해당 지역을 활보하고 있습니다.
[파티 : 공략 스타팅 타이머 – 120초]모든 것이 시작되나 싶던 그때, 정철이 사쿠라이와 피터를 손짓해 불렀다.
“사쿠라이, 아까는 덕분에 살았다. 정말 잘했어.”
“네? 네!”
“시간이 없으니 요점만 빠르게 말해봐. 아까 도대체 어떻게 한 거야?”
요점, 요점……!
사쿠라이는 재빠르게 머릿속으로 대답을 정리해 보았다. 정철 특유의 빠르고 냉철한 요약을 모방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시작은 말이죠. 피터가 가지고 있던 책을 보고 있다가 시작됐어요. 제가 《세계의 기억》을 쓰고 싶지도 않았는데…… 자동적으로 사용되더라고요.”
피터가 들고 있던 괴상한 책.
『클라에논 단장(短章)』. 그 책을 보다가 신화시대 기억을 목도한 것.
그리고 사용한 기적은 ‘거울의 기사 리암’의 것이었다는 것까지 최대한 열심히 요약해 보았다.
묵묵히 듣던 정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원해서 쓴 건 아니었단 말이지.”
“네.”
“그나저나 리암? 거울의 기사 리암이 진짜로?”
“절 구해줬어요.”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어.”
상관있는데…….
지금도 그 슈’율큘라의 흉측한 외모를 생각하면 몸서리가 쳐졌다.
일면식 하나 없던 사쿠라이를 필사적으로 구해준 리암은 그 한순간으로 소녀에게 영웅이 되었다.
“요는 아직은 패시브 스킬이란 거겠군. 중요한 건 그거야. 조건은 역시나 생명의 위협인가. 그런데 넌 아직 마력이 부족할 텐데…… 알 수가 없군.”
초읽기의 알림이 정철의 중얼거림을 끊었다.
[파티 : 공략 스타팅 타이머 – 75초]정철이 시선을 피터에게로 돌렸다.
“하나 묻자, 네 소원이 뭐냐?”
“그…….”
“빨리 말해.”
“엄마가…… 이혼해서 사라졌는데요. 다섯 살 여동생이 항상 엄마를 찾아서 울어요. 아빠랑 엄마가 다시 사랑해서 재혼하는 게 소원이에요.”
시선을 내리깔면서 피터의 머리에 손을 얹는 정철의 표정에 연민이 스쳐 지나가는 게 보였다.
“이룰 수 있을 거야.”
“네.”
“사쿠라이, 너도 절실한 소원을 빌고 여기로 들어왔지?”
“네. 당연히 그렇죠.”
그러자 정철이 NPC 일행을 쓱 살핀 다음, 충격적인 말을 했다.
“마르셸은 배신자다.”
“배신자라뇨? 그게 무슨?”
“놈은 크세리니아를 찾는 즉시 수색조 일행을 모조리 죽일 거다. 마지막으로 용부인도 죽일 거고.”
진실로 이상한 일이었다. 배신을 때릴 거면 진작 그랬어야 했다.
[파티 : 공략 스타팅 타이머 – 63초]이해할 수가 없지 않은가.
마르셸이 몸을 바쳐서 일행을 두 번이나 지켜준 믿음직한 행위는 무엇이었단 말인가?
“저…… 목표는요? 아니, 도대체 이유가 뭔데요?”
“심연의 하수인이야. 슈’율큘라에게 제물을 바쳐서 총애를 받으려 하는 거겠지. 심연의 종복들이 하는 짓은 원래 다 음흉하기 짝이 없어. 이해하려 하지 마라.”
심연의 종복이라니…… 사쿠라이는 온몸의 솜털들이 곤두서는 걸 느꼈다.
[파티 : 공략 스타팅 타이머 – 35초]절대 약하지는 않을 거다.
각종 소설이나 만화 따위에서 어둠의 실력자들이 초반 구간에서 얼마나 강하던가?
“자, 잠깐만요! 마르셸은 수색조잖아요!”
“그래. 그래서 너희 둘이 협력해서 크세리니아를 살려야 한다.”
“할 수 있을까요?”
정철이 피터를 마주 보았다.
태연한 눈동자와 격하게 떨리는 눈동자.
“잊은 것 같아서 말해둔다. 너희들도 플레이어야. 나만 플레이어가 아니고. 무슨 뜻인지 알지?”
“……!”
“이제 주어진 선택지는 단 하나뿐. 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문제다. ‘하지 못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하지 않을’ 경우에는 죽는 길밖에 없어.”
정철의 말이 끝나자마자 절망이 다시 시가지를 덮었다.
또다시, 큘륜의 발소리가 섬뜩하게 들려왔고 심해목들이 끼긱거렸으며 망자들은 울음소리를 토해낸 것이다.
‘무언가’가 숨을 쉬는 온기도 다시 한번 끼쳐왔다. 사쿠라이는 몸을 가늘게 떨었고, 피터는 겁에 질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해 보겠습니다. 할 수 있을지……가 아니겠지요. 반드시 하겠습니다. 저, 저희들도 플레이어니까요. 그렇죠?”
정철이 고개를 짧게 끄덕인 후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28분. 큘륜이 냄새를 맡았다.”
“……!”
“배신자가 처음으로 칼을 꽂는) 상대는 바이로니카다. 반드시. 전투 인원은 이제 그 건방진 여자 하나니까. 말했듯이 NPC든 적이든 다 생각이란 걸 한다.”
“바이로니카를 살려야 해요?”
“그 죽음을 어떻게 이용할지는 너희들이 정해. 하지만 나라면 죽게 놔둘걸. 그다음 순간 마르셸의 허를 찌를 거고. 피터는 《검사》이니 해볼 만해.”
정철이 몸의 관절들을 풀기 시작했다.
[파티 : 공략 스타팅 타이머 – 23초]사쿠라이가 말했다.
“빙룡이랑 용부인이 그렇게 중요하면 저희랑 함께 가면 되지 않아요?”
사쿠라이가 마지막으로 닥쳐올 운명에 반항해 보았다.
“아니면 마르셸을 지금 죽이면 될 것 같은데요. 오빠. 왜 저희가, 그리고 오빠가 그런 위험을 무릅써야 해요?”
“원래는 그러려고 했는데.”
[파티 : 공략 스타팅 타이머 – 18초]“근데 지금 생존자 숫자를 봐. 미끼가 있다고 모든 적이 미끼에게만 쏠리는 게 아니야. 망자들도 생각이란 걸 하거든.”
“……!”
“이게 최선이야. 따라오든가. 아니면 뒤처진 채 죽든가. 선택은 이제 네 몫.”
수색조에 마르셸마저 없으면 전투는 바이로니카 혼자서 한다는 소리였다. 그건 불가능에 가깝다는 소리지. 피터가 말했다.
“저 말이 맞아. 그리고…… 엘리트가 보스를 죽이지 않으면 맵에서 빠져나갈 수가 없어. 이건…… 정말 최선의 공략법일 거야…….”
“거짓말하지 마.”
“진짜야. 보스가 있는 퀘스트는 다 그렇다고. 저렇게 안 하면 여기에서 망자가 되는 길밖에 없어.”
피터가 더듬거리며 게임의 룰을 설명해 주었다. 정철이 피터의 어깨를 잡았다.
놀라웠다.
두 남자는 칼과 갑옷을 착용하고 있었는데도, 정철에게서는 검고 육중한 위압감이 느껴졌으나 피터에게서는 위엄이라 할 것이 뭣도 없었던 것이다. 대검 때문일까?
이후 정철은 ‘배신자를 물리칠 팁’을 짧게 설명해 주었다. 어차피 초반 적대 NPC이기에 공략법도 다 있다는 것이었다.
[파티 : 공략 스타팅 타이머 – 3초.]정철이 심호흡과 함께 칼자루를 매만졌다. 뒤쪽에서 NPC 일행이 천천히 다가왔다.
“빛이 그대의 길을 인도하시기를, 정말 고마워요. 에델 경.”
먼저 가이네이브가 고개 숙여 말하자, 정철이 짧게 대꾸했다.
“그쪽도 무운을 빕니다. 부탁한다. 마르셸.”
“살아서 다시 보자고. 형씨.”
“아니. 내가 오지 않으면 죽은 걸로 알고 먼저 가라.”
공략이 시작되기 직전인 바로 그때 정철이 잠시 뒤를, 사쿠라이를 흘끔 돌아보았다.
영화나 소설이면 멋들어진 말을 한번 남겨야 할 극적인 순간이건만 역시 정철은 정철이다.
정철은 아무런 말도 남기지 않았다. 그저 전속력으로 달려 나갈 뿐.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파티 : 공략 스타팅 타이머 – 0초]– 알림 설정음이 울립니다.
삐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익!
[파티 : 퀘스트 공략이 시작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