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 of the Fake Hero RAW novel - Chapter (135)
가짜 용사 이야기-135화(135/310)
#31 :
[6. 너의 이야기이자 나의 이야기] 1회차 (1)누구에게나 시작은 있는 법이다.
처음부터 고인 물은 없는 법, 나에게도 치기 어린 시작의 날은 부끄럽지만 존재했다.
그때 나는 다른 고수 플레이어들을 따라서 트라이폴로 향하지 않았다.
어디 있었냐고? 바로 성도 캐슬베이아의 영목 광장.
– 횃불을 들어라.
거기서, 용병 영주 아르츠레히드의 명령을 따라 횃불을 치켜들고 있었다.
장례식을 위해서.
지난 전투에서 죽었던 NPC들의 안식을 빌어주기 위해서.
– 불 지필 준비.
이 세계의 장례식은 특이했다.
3개의 태양이 모두(추락하지 않고 남아 있었더라면) 중천에 떠오르는 시간. 그때 시체를 불태움으로써, 혼을 빛에게 바친다.
불꽃이야말로 빛의 일등 권속이라는 이유에서였던가.
그때 왜 그랬을까.
NPC들의 죽음이 왜 그렇게나 슬펐을까. 고수 플레이어들이 너 등신이냐고 묻는 소리를 들어 가면서까지 그 장례식에 참가했을까.
– 에밀에게 불꽃을.
– 렌에게 불꽃을.
– 키돈에게 불꽃을.
노병 칼리옌이 전우들의 시체에 불을 붙였다.
칼리옌의 표정도, 그걸 지시하는 아르츠레히드의 목소리도 지나치게 무덤덤했다.
어떻게, 진실로 어떻게.
이런 것까지 완벽하게 재현해냈단 말인가. 전투에서 전우를 잃은 병사들의 분위기조차도.
– 렌에게 불꽃을.
날름거리며, NPC들의 몸을 집어삼키는 불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인육이 타들어가는 누린내가 훅 끼쳐왔다.
– ……짐에게 불꽃을.
– ……구렌에게 불꽃을.
– ……불꽃을.
사자(死者)들에게 태양의 은총이 내려지자, 아르츠레히드가 광장의 연단 위로 올라섰다.
– 나는 진실로 기쁘다. 이데아 역사에서 평화를 위한, 위대한 전투가 있던 날, 바로 그 자리에 이 용감한 전사들과 함께하고 있었단 사실이 자랑스럽다.
– …….
– 300여 년 전, 에오스와 헬레니아께서 심연을 몰아내고 성도(聖都)를 세웠다. 그 중대한 사건은 심연의 악몽에 신음하던 우리의 조상들에게 희망의 불꽃이 되었다.
왜, 왜 그렇게 슬펐을까.
뭐가 그렇게 슬퍼서 그저 고개만 숙이고 있었을까.
– 그때, 그분들께서는 ‘너희들에게 봄이 있을지어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 말은, 영원처럼 보였던 파멸의 악몽을 종식하는 기쁨의 봄비였다.
– …….
– 그러나 아직까지도 이데아 반도에는 여전히 봄이 오지 않고 있다. 아직까지도, 고통과 증오의 쇠사슬에 묶여 인간과 요정들의 삶은 여전히 겨울인 것이다.
이 존재들은 데이터 단말에 불과하고, 이 모든 이야기는 누군가가 쓴 극본에 불과하거늘.
– 하지만 근래, 요르한 3세 전하의 통치 아래 그 겨울의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감히 자신한다. 요정 부녀자가 인간 장정과 함께 음식을 먹고, 인간 아이가 요정 아이와 어울려 놀고 있다.
– ……!
– 그 봄, 그 봄의 새싹을 지키기 위해서, 이 용사들은 전장으로 나아갔다. 명예도 부도 영광도 무엇 하나 보장되지 않은 사지였다. 그들이 지키러 간 것은 오직 하나. 평화. 이제야 싹트기 시작한 한 줌의 평화였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데.
아르츠레히드가 저렇게 열변하는 미래는 결코 찾아오지 않는데.
– 나는 그 명예를 알리기 위해 이 자리에 올랐다. 그들의 피와 눈물을 전하기 위해 이 자리에 올라왔다. 그들에게는 꿈이 있었다. 언젠가, 그 머나먼 언젠가 이데아가 하나로 통합되어 평화 속에서 살아가는 날이 있을 것이라는 꿈.
그렇게 되게 하기 위하여 몇 번을, 몇십 번을, 몇백 번을 노력했는데도.
모두 실패했으면서.
모두 실패했기에 포기했으면서.
왜 1회차의 이 이야기를 떠올릴 때면 괜스레 눈시울이 젖을까.
– 그들의 꿈은 이제 우리의 꿈이 되었다. 그들을 기억하며 함께 나아가자. 우리는 홀로 걸을 수 없다고 주님들께서는 늘 말씀하셨다.
– ……!
– 심연을 진멸하신 용사 리암에게도 신성 기사 샤릴리온이라는 전우가 있지 않았던가. 이날, 바로 이날이 이데아의 인간과 요정이 새로운 노래를 부를 수 있는 바로 그날로 기억되어야 한다!
어느 정도냐면 그 연설을 외고 있을 정도였다.
심연이 다시 오고 있다.
겨울이 다시 오고 있다.
우리의 봄을 무너뜨리려고, 여름과 가을을 건너뛰고 겨울은 몰려오고 있다.
– 이데아의 아들딸들이여. 형제에게, 가족에게, 친척에게 어젯밤 그들의 죽음을 알려라. 그들의 꿈을 알려라.
그래서 타르혜 론델의 봉화에서 불꽃이 오르게 하자.
이데아의 숲과 사막들로부터 평화의 울음이 울려 퍼지게 하자. 캐슬베이아의 영목에 맺힌 태양과 달의 눈부신 결합을 기억하자.
이데아의 모든 산맥에서 빛의 세계를 위한 창칼과 방패가 빛나게 하자.
– 바로 그 순간이 와야, 비로소 우리는 그들의 죽음을 진실로 기억하고 또 기억했노라고 자랑스레 말할 것이다…….
전능하신 태양의 아버지들과 달의 어머니들이시여. 이들의 명예와 희생을 탄원컨대 굽어살피소서. 지고하신 태양과 달들의 이름으로, 듀르시엘.
– 듀르시엘.
– 듀르시엘.
듀르시엘은 ‘그렇게 되길 원하나이다’라는 뜻의 종교적 표현이다.
그때 영목 기사단도, 구성원 전체가 대륙의 귀족인 구제 기사단도 고상하게 슬픔을 표현했다.
단 두 부류만 그러지 않았다.
종교인과 흑양 기사단 자식들.
– 신성 모독이다!
그 외침이 터진 뒤 아르츠레히드의 머리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누군가가 돌을 던진 것이다.
바로 그 누군가가 흑양 기사단 대열에서 웃음을 터뜨리며 튀어나왔다.
흑양 기사단 제복이었지만, 혼자만 의장이 매우 화려했다.
– 비천한 용병 놈이 기어이 제 입으로 죄를 고백했군.
장대한 체격에 어울리지 않게 수려한 외모. 똘마니들이 그 이름을 연호한다.
– 로바르!
– 로바르!
– 로바르!
객관적으로 판단하자면, 과연 왕녀의 약혼자이자 흑양 기사의 단장이라고 할 만한 풍채.
– 선진들께서 피땀 흘려 세워낸 게 이 성도다. 헬레니아? 그게 뭘 했지? 모든 일은 네 번째 태양, 에오스께서 하신 일이다. 심연이 온다고? 네놈에게 오는 건 교수형뿐이야.
요정들이 발끈하려 하자, 흑양 기사들이 총자루를 위협적으로 움켜잡았다.
긴장감이 팽팽히 당겨지면서 아르츠레히드가 간신히 일궈낸 합일의 분위기가 무너져가고 있었다.
– 체통을 지켜, 로바르.
그때 우아한 미색의 기사가 그 앞을 가로막았다.
구제 기사단의 핏빛 태양 망토.
은발 단발 아래로는 다른 구제 기사랑 차별화된 의장이었는데, 정말로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던 NPC다.
그 이름은 샬롯 칸드라군.
제국의 ‘버려진 황녀’로 이데아 스타팅 플레이어에게 ‘성배 전쟁’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
– 체통은 그쪽이야말로 지키시지요. 저 용병 탕아 자식이 한 말 못 들었습니까?
– 까불 자리가 있고 까불지 말아야 할 자리가 있는 거야.
– 저 염병할 귀쟁이 놈들은 우리에게 빌붙어서 고혈을 빨아먹고 있는데, 무슨? 타르혜 론델? 그 불경의 상징을 들먹였는데! 기사단은 뭣들 하는 거야! 저 쳐 죽일 놈을 당장 체포하지 않고!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었다.
흑양 기사들이 아르츠레히드를 붙잡으려고 뛰어들었고, 영목 기사와 구제 기사단 단원들이 그 앞을 가로막는 형세가 되었다.
기사들이 서로에게로 총구를 겨누었다.
– 이 망나니 자식들!
– 저 이단을 비호할 셈이냐! 오호라, 네놈들도 이단이렷다!
– 정녕 피를 보고 싶은 거냐?
궁성 쪽에서 노기사 제롤드가 성큼성큼 오고 있었지만, 로바르의 망나니짓은 끝이 없었다.
– 귀쟁이 놈들의 제단이 어디라고?
– 저쪽입니다, 단장님.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는 일이 벌어졌다.
로바르가 장례식이 행해지던 제단을 발길질로 맹렬히 부수기 시작했다.
렌의 제단이었다. 렌의 뼈가 태양을 향해 바쳐진 장소였다.
그 장소가 허물어뜨려졌다.
화장된 뼈와 잿더미를 끌어내 바닥에서 마구 짓밟았다.
– 저주받을 하프 자식에게 국장은 무슨!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용납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 ??????가 당신의 용기를 주의 깊게 관찰합니다. 1 / 3.]앞으로 나아갈 때 누군가가 어깨를 붙들었다.
칼리옌이었다.
노병이 비참하게 고개를 저었다. 늙은 눈에는 깊은 울분이 타오르고 있으면서.
그 손을 뿌리치고 달려 나갔다.
목표는 로바르였다.
로바르의 부하 기사의 등짝을 먼저 발로 걷어찼다. 놈이 넘어지자마자 로바르가 고개를 홱 돌렸다.
그 면상에 주먹을 박아 넣으면서 다리를 걸어 넘어뜨렸다.
속사니 사냥꾼 특성이니, 그런 거창한 기술은 필요 없었다. 전쟁에서 미친 듯이 연마했던 살인 기술이면 충분했다.
나동그라진 놈의 몸 위로 올라타서 주먹을 내리찍고, 내리찍고, 또 내리찍고…….
아마 죽여버렸을 것이다.
흑양 기사 수십 명에게 붙들리지만 않았어도.
정신을 차렸을 때는 역으로 내가 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몸 곳곳에서 차가운 한기가 느껴졌다.
나를 겨눈 총구들이었다.
목덜미, 뒷골, 팔목, 발목, 사타구니…….
– 고개를 들어라, 개자식아.
로바르가 내 머리카락을 휘어잡아 거칠게 들어 올렸다. 그리고 비릿하게 웃었다.
– 눈알 뽑기, 코 자르기, 이빨 하나씩 깨부수기. 자비를 베풀어주마. 받고 싶은 것부터 받게 해줄 특권을 주겠어.
태양빛을 눈부시게 튕겨내는 칼끝이 눈동자를 향해 다가오고, 여기저기에서 고함이 솟고, 그때.
“트라이폴에 심연이 나타났다는데요.”
트라이폴, 그 네 음절의 떨림이 의식을 먼 과거로부터 현실로 각성시켰다.
“……!”
당연히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사쿠라이는 캑캑거리며 사레가 들릴 정도였다.
“괜찮니?”
자, 저렇게 말한 사람이 내 마음을 아주 심란하게 만들고 있었다.
용부인(龍婦人), 크세리니아.
님아, 아니, 님들? 여기서 뭣들 하고 계신 거지요?
공허의 사도, 로헤이리츠가 닭다리를 거만하게 뜯으며 대꾸했다.
“괜찮겠지요. 안 괜찮으면 죽는 것 말고 뭐 더 있겠습니까?”
“로우, 여자애에게는 상냥하게 대해야 한다고 몇 번을 말하니.”
“여아애 아이어으요. 저 로오채이어아어요(여자애 아니거든요. 저 LOH 챌린저라고요)!”
입 안에 든 모든 음식물을 로헤이리츠의 얼굴에 속사포처럼 뱉어내는 사쿠라이. 그 푸근한 광경에 엄지를 치켰다.
너는 내가 인정한다.
너는 챌린저가 맞아.
4시즌 연속 챌린저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마에서 힘줄이 돋아난 로헤이리츠의 주위에서 벌레들이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공허충(空虛蟲).
공허 능력자의 기본적인 소환수이지만 그 능력은 말도 안 되게 다재다능하다.
눈이 6개이긴 하지만, 녹색 털의 꿀벌처럼 생겨서 아주 귀엽게 느껴졌다.
여자들이 저것 때문에 공허의 사도 루트를 타려고 하다가 피를 많이 봤다. 각성 퀘스트 난이도가 돌아 버렸거든.
“로우, 지금 거기에서 허튼짓하면 가만 안 둬.”
크세리니아는 웃으며 말했지만 그 명령은 절대적이었다.
로헤이리츠가 사쿠라이를 노려보다 한숨을 토해내자, 사쿠라이가 혀를 내밀며 약을 올렸다.
공허충들은 그런 사쿠라이에게 달려드는 대신, 꼬물거리며 주인의 얼굴에 달라붙은 음식물들을 없애기 시작했다.
면전에 대고 웃음을 터뜨려주고 싶었지만, 안 그래도 복잡한 일을 복잡하게 만들고 싶지도 않고 좀 쉬고 싶었다.
“근데 아가씨께서 여기서 뭐 하시는지?”
“이건 식사라고 해. 영목 기사단에서 식사에 대해 가르쳐주지 않나 봐?”
“식사하고 계신 건 압니다. 왜 저희와 합석하고 계십니까?”
원래 크세리니아 파티는 플레이어와는 개별적으로 행동하며 심연을 사냥한다.
처음으로 협력할 수 있게 될 때는 벌레 군주 켈렉─샼 레이드 퀘스트가 개방될 때다.
그런 존재들이 지금 앞에서 식사를 하고 있단 것이 이해가 되지도 않고 믿기지도 않았다.
“말장난을 하는 유형이 아니라 바로 본론을 말하는 유형이구나. 좋아, 그러면 솔직하게 말할게. 나는 당신을 사랑하게 되어버렸어.”
“예?”
“아가씨, 어찌 이딴 쓰레기를!”
사쿠라이가 이번에는 마시던 물을 로헤이리츠의 얼굴에 토하고 말았다. 물론 그 전에 공허충들이 다 막아냈지만.
“뻥이야.”
침묵이 감돌았다.
맞아, 이 아줌마는 이런 엉뚱한 캐릭터였지…….
인간 남자도 아니고 요정 남자도 아니고 용족 남자를 홀리려면 이 정도는 할 줄 알아야 하나 보다.
근데 님아…….
샤릴리온은 엄청 과묵하고 진중한 인물이었던데 그 후손은 왜 이런 것임……?
“당신한테 흥미가 생긴 건 사실이야. 그 샤릴리온, 우리 가문 구성원이 아니면 지금까지 아무도 못 썼거든. 사실 지금까지 크란노스를 제외하면 아무도 제대로 못 썼어. 한 번 들어올리는 게 고작이었지.”
샤릴리온은 에고 소드.
에고 웨폰답게 퀘스트를 클리어해야만 사용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고 끝인가? 아니다.
예전에 말했듯 대가로 현재 수명의 99%를 바쳐야만 사용할 수 있게 되는 무기다.
할부로 바치는 방법도 있지만 그건 고유 스킬을 사용할 때마다 무력화 상태가 너무 잦게 발생한다.
물론 일시에 바쳐도, 힘의 반동에 의한 육체 손상은 조금씩 남아 있어서 정말 쓰기 힘든 무기다.
근데 그건 플레이어라서 가능한 거지, NPC들에게는 아마 그런 선택지가 안 주어지지 않을까?
쓸 때마다 힘줄이 끊어지고 뼈가 부서지면 누구나 안 쓴다고 할 법하다.
사실상 못 쓰는 거지.
물론, 뭐가 어떻게 되든 간에 나는 이걸 써야 한다. 안 그래도 유리 몸인 마법사 클래스로 대검을 쓰려면 이놈 말고는 답이 없어.
“그리고 당신은 심연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는 것 같아. 당신을 따라다니면 심연의 핵심에 접근할 수 있을 것 같단 예감이 들었어.”
크세리니아가 손가락으로 저쪽 테이블을 슬며시 가리켰다.
“……<트라이폴>을 막 떠나온 열차의 기관사가 창백해진 얼굴로 말했다고요! 항구에 털북숭이 거인이 나타났었다고……!”
“……<트라이폴>이 목적지였던 열차들은 군용 열차 말고는 다 운행을 멈추었다던데…….”
“……오, 태양의 빛이시여…… 다시 이 땅으로 돌아오사 심연을 진멸해 주소서…….”
“……영주님께서도 수색대를 내보냈다고 하셔요. 열차로 못 가니 도중에는 기마병으로…….”
서머가든 영주의 수색대가 돌아오면, 트라이폴 멸망이 시스템적으로도 갱신될 것이다. UI로 시간을 확인했다. 17시 26분.
이곳은 <트라이폴> 북부의 도시, <스프링가든(Spring Guarden; 봄의 정원)>.
트라이폴 멸망을 확인하고 아연실색한 기장을 설득하여, 그 차편을 타고 여기까지 왔다.
[당신은 이데아 반도 (군왕)의 (친위대)입니다. 파티원이 그 권위에 영향을 받습니다.]영목 기사의 지위란 참으로 편리한 것이다. 근데 이 작자들은 언제 그 열차에 탔지?
여하튼 아주 귀찮게 됐다.
너희들은 앞으로 내가 피똥 싸면서 구르는 동안, 다른 장소에서 더 큰 피똥을 싸며 굴러줘야 한단 말이다.
“제가 거절한다면 어쩔 겁니까?”
로헤이리츠가 테이블 위에 양발을 거만하게 올리며 말했다.
“네 선택 따윈 아무 의미도 없어. 아가씨께서 따라간다면 잠자코 앞서가면 될 뿐이다.”
야, 딱 기다려.
넌 퀘스트 활성화되는 즉시 반드시 내 손으로 죽인다.
크세리니아가 로헤이리츠를 만류하면서 빙그레 웃었다.
“거절하는 이유가?”
“제가 부끄럼이 많아서요.”
그러자 크세리니아의 눈동자에 맺힌 미소가 어딘가 섬뜩했다.
“여자를 얕보는구나. 여자는 원하는 남자를 발견하면 물불을 가리지 않아. 우연을 운명처럼 가장해서, 함락될 때까지 계속 공략할 뿐.”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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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릴리온은 종전 후 9년, 곧 28세의 나이(그 배우자인 타르시요는 그보다 1년 먼저 죽었다)로 단명하였다.
오만한 아인과 그보다 더 오만한 요정조차도 샤릴리온의 힘과 위업을 경외하여 그 전까지는 형식상으로나마 인류와의 연대를 유지했었다 한다.
그러나 점차 유명무실해져만 가던 종족 간의 유대는 대영웅 사후 완전히 끊어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