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 of the Fake Hero RAW novel - Chapter (140)
가짜 용사 이야기-140화(140/310)
#36 :
[6. 너의 이야기이자 나의 이야기] 1회차 (6)“보스 몬스터가 나온다는데요?”
“어, 나와.”
“아니, 또 레이드라고요?”
걱정할 필요 없다. 레이드가 시작될 확률은 정말 낮으니까.
“따라오기나 해.”
한 걸음, 한 걸음, 비명과 쇳소리가 뒤엉키는 공동의 중심부로 나아갔다.
이곳에 몇 번은 와봤건만…….
정말 올 때마다 섬뜩한 연출이군. 시각, 후각, 청각의 공포를 모두 조장하는 지역이야.
먼저 생선뼈 구조의 모루가 보였다. 그 모루 위에 놓인 무언가가 망치질이 꽂힐 때마다 비명을 내질렀다.
“저, 저거 쇠가 아니라 죽은 사람의 넋이래요! 완전 미쳤어!”
그 비명에, 풀무를 당겨 용암이 아니라 심연이 들끓게 만들던 전설의 대장장이가 반응했다.
“오랜만에 손님이 왔군. 몇십 년, 아니, 몇백 년 만인가. 흐흐흐흐.”
무언가가 숨을 내쉬듯, 병적으로 후끈한 공기가 새어 나왔다.
등줄기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저 형태는 정말이지…… 얼굴은 넙치처럼 징그럽고 새하얀 뱃가죽은 끔찍하게 늘어졌다.
“심연을 정제하러 왔다.”
정중하면서도 단호하게.
1.6%의 확률로 괼프는 전투 패턴이 발생하기도 한다.
– 네놈이 과연 내 무구를 찰 실력이 있는지 시험해보마. 흐흐흐.
난이도가 좆같은 건 둘째 치고 이놈을 살릴 방법이 없다.
그냥 죽이는 게 끝이고, 그러면 대륙에 넘어갈 때까지 심연 계열 장비는 꿈도 못 꾼다.
참고로 심연 계열 장비는 루팅이 불가능하여 오직 제작으로만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나는 괼프다. 흐흐흐, 가까이 와서 얼굴을 보여라.”
“오빠!”
“여기서 기다려.”
괼프가 방금 전까지 넋을 붙잡고 있던 부집게로 턱을 잡더니 이리저리 돌리기 시작했다.
“심연의 강렬한 속삭임을 받은 놈이로군. 아주 좋아. 심연은 원하는 걸 이루어주지. 창세의 섭리같이 의(義)를 찾으라는 개소리를 안 해. 정말 인간이 원하는 게 뭔지 알고, 들어준단 말이지, 으흐흐흐흐.”
“장비를 만들어 주겠나?”
“재료만 있다면 만들어주지. 네놈에게 흥미가 생겼다. 이미 수명이 1년도 안 남았군. 영생을 찾아서 왔나? 역겨운 검을 차고 있군. 심연의 축복을 받는 동시에 인간성을 지키려는 발버둥이냐? 흐흐흐흐, 아서라.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다 모두 놓치게 될 테니.”
얼마나 긴장했던지, 안도의 숨이 밀려 나왔다. 그때 사쿠라이가 소리쳤다.
“정철 오빠는 너처럼 안 될걸, 이 괴물아!”
“흐흐흐흐흐, 당찬 꼬맹이로군. 너에게 예언을 하나 하마. 빛은 아무것도 주지 않는다. 어둠의 진리만이 인간이 원하는 모든 걸 베풀지. 그걸 위해서 네 품의 마지막 빛조차도 바쳐야 할 때가 올 거다.”
뭐지?
이런 대사는 없었는데…….
뭐든 됐다. 이걸로 괼프를 이용해서 심연 계열 장비들을 만들 수 있게 되었으니.
품에서 구텐트라스의 핵을 꺼냈다. 그 수상한 구체를 받아든 괼프가 음흉하게 웃었다.
“가장 천한 권속의 핵을 가지고 왔군. 핵은 온전한데 왜 육신을 재생시키고 있지 않을까? 자네는 절대 심연의 축복을 받고 있군.”
무슨 소리지.
게임 시스템상 이런 것뿐인데.
거기에다가 나는 아직 심연 계열 클래스로 전직도 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심연의 주인이 재생을 허락하고 있지 않는 거야. 그래서 네가 이걸 여기로 가져올 수 있던 거다.”
“심연의 주인? 슈’율큘라?”
“그보다 더 위대한 분이지. 으흐흐흐흐흐흐.”
“거미 군주 아쉬론이냐?”
“그보다도 더욱 높다. 흐흐흐, 곧 알게 될 거다. 너에게 더 큰 흥미가 생겼다. 무슨 장비를 원하나?”
“옷. 천과 같은 재질의 옷이지만 갑옷처럼 단단한 옷.”
어린갑(魚鱗鉀)은 게임 시스템에서 천 재질 장비로 분류되나, 갑옷과도 같은 단단함을 갖고 있다. 힘법사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이 장비가 반드시 필요했다.
“좋다. 이 재료들로 네가 원하는 장비를 만들어주마. 네게 더 큰 힘을 안겨 주겠지만, 그만큼 네 영혼을 빠르게 타락시키겠지.”
“상관없다.”
“흐흐흐흐흐흐, 그건 어디 한번 보자고. 광기의 속삭임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인간은 없나니.”
괼프가 부글부글 끓던 심연에 구텐트라스의 핵을 집어넣자, 위대한 자의 비명이 메아리치기 시작했다.
심연의 대장장이가 그걸 부집게로 꺼낸 이후, 모루에 올려놓고 망치로 내리찍기 시작했다.
공동에 차 있던 심해의 물이 심연처럼 걸쭉하게 변하며, 발치에 와닿는 감각이 섬뜩해져 갔다.
사쿠라이가 다가왔다.
“얼마나 걸려요? 여기 싫어요. 빨리 나가고 싶어요.”
“조금 걸려.”
“오빠는 저렇게 되지 않을 거죠? 물고기 냄새 풍기는 인간이 되고 그러는 거 아니죠?”
“난 심연을 이용하기만 해. 잡아먹히기는 무슨.”
항상 그래왔다.
그런데 괼프가 웃음을 터뜨렸다.
“흐흐, 늪에 빠져본 적이 한 번도 없나?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점점, 점점 깊게 빠지게 되지. 심연의 힘은 영혼의 늪, 누구의 도움도 바랄 수 없고 빠져나갈 수도 없지. 이용만 한다고? 흐흐흐흐흐흐.”
괼프의 말은 대부분 헛소리에 불과하지만, 맞는 말이 하나 있기는 했다.
심연은 강하고, 빛은 약하다.
이 게임의 세계관에서 빛은 답도 없이 약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심연에 비교한 약해빠졌다.
왜 심연 클래스를 선택했냐고?
대답은 심플하다. 그게 가장 강하기 때문이다. 제일 강하니까, 시나리오조차도 바꿀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지금도 선명히 기억한다…….
끝내 이 힘을 선택하게 만든, 무력감을…….
【요정 아이가 준 빵.】
【왕에게 받은 블러드윈드.】
【그 모든 것을 비웃듯 요르한이 죽고 성도의 왕이 되는 로바르.】
그것은 1회차의 기억.
샬롯을 따라 구제 기사단 병원 밖으로 나가자 NPC 다리오 경이 말을 데려왔다.
말들을 향해 걸어가는데, 군중이 함성과 갈채를 터뜨렸다.
화들짝 놀라 멈춰 서자, 웬 요정 여아가 달려왔다. 그리고 빵을 내밀었다. 방금 구웠는지 따뜻했다.
– 드, 드셔주시면, 감, 감사하겠습니다…….
얼떨결에 고맙다고 말하자, 여아는 얼굴을 붉히며 도망쳤다. 다음에는 인간 노인이 앞으로 나섰다.
야윈 체구로 갑작스레 땅에 엎드리더니 절했다. 구슬픈 울음을 터뜨리며.
– 고맙소…… 내 아들놈의 마지막 명예를…… 지켜줘서 정말로 고맙소…….
노인에게 당신이 누구의 아버지였는지를 물어볼 틈조차 없었다. 인파가 몰려와 악수를 청하거나 선물을 주었던 탓이다.
– 이제 그만들 하라! 단장님께서는 왕의 소환을 받으셨단 말이다!
구제 기사들이 총검으로 윽박질러 인파를 밀어낸 뒤에야 상황이 진정되었다.
이 기억을 잊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그때 블러드윈드를 처음으로 받아 봤으니까.
다리오가 데려온 말은 두 마리 모두 체격이 늠름했고 마구들까지 세련됐는데, 그중 한 마리는 정말 엄청난 명마였다. 말을 잘 모르던 나도 한눈에 알 정도로.
황금의 갈기에서 황혼이 부서졌고, 붉은 피부에서는 윤이 좌르르 흐른다.
블러드윈드 품종은 솔론디안 준마라는 품종으로 게임 설정상 아드리온 대륙이 멸망하면서 혈통이 끊길 뻔했다고 한다.
하지만 샤릴리온의 군마 ‘블러드윈드’를 통해 혈통 보존에 성공했고 그렇게 나온 말들은 샤릴리온과 블러드윈드에 대한 존경심을 따서 품종명 자체가 블러드윈드로 정해졌다.
그걸 생각하며 넋이 나가 있을 때 샬롯이 말에 올라탔다. 그 명마가 아니라 다른 백마의 등에.
– 말을 잘못 타신 게 아닌지?
– 그게 네 말이다. 요르한이 자네에게 선물한 말이야. 명마 중의 명마다.
[아이템 획득 : 명마 블러드윈드(Blood Wind)]– 업적 달성 : 나는 전설이다.
녀석은 말에 오르려 하자 스스로 무릎을 굽힐 줄도 알았다. 주인이 올라타기 쉽게끔 말이다.
말이 부드럽게 울었다.
이런 명마를 대체 왜 주었을까? 복받치는 감동에 심장이 벌렁거렸으나 한편으로는 당황스러워서 미칠 지경이었다.
– 어서 가야 해. 시간이 없다.
샬롯의 재촉에 말에 올라 캐슬베이아 대로를 가로질렀다.
가는 내내 시민들의 환호가 끊이지 않았지만, 종종 보이던 성직자나 흑양 기사들은 야유를 보내기도 했다.
궁성 성문에 도달하자 헌병대가 즉시 문을 닫았다. 제롤드 경이 기다리고 있었다.
–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신다.
궁성의 호화로운 주랑을 통과하는 동안, 불길한 느낌을 받았다.
왕정이니 경비가 삼엄한 건 당연하겠지만, 그 수준이 지나칠 정도였던 것이다.
곧 전장에 나서기라도 하는지 죄다 중무장이었고, 무기들 또한 방범용이 아니라 살상용이었다.
– 들어가시지요.
<캐슬베이아>의 궁궐은 소박하되 실리적인 아름다움을 갖춘 장소였다.
내부 깊숙이 들어가자 곧 요르한 3세의 증기가 보였다.
왕은 어둑한 방 안에서 아르츠레히드 공 및 4명의 가신들과 함께 있었다.
– 아아. 드디어 샬롯이 이방인을 데리고 왔군.
왕의 목소리가 힘없이 떨렸다.
– 블러드윈드는 받아 보았느냐? 어떻더냐?
그때는 어전에서 뭘 어찌해야 할지 몰라 그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 예. 전하. 정말…… 좋은 말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하하…… 짐의 몸이 온전했더라면 친히 네게 직접 말고삐를 건네주었을 터인데. 신들께서는 이제 내게 그런 여유조차─
왕은 곧 질퍽하고 고통스러운 기침을 뱉었다. 듣기만 해도 그 고통을 헤아려볼 수 있을 정도였다.
– 전하!
문관과 제롤드 경이 왕에게 가까이 가려 하자 왕이 팔을 치켜들어 멈춰 세웠다.
– ……나의 친애하는 친구들이여. 이제…… 내 사후의 일들에 대해 논의할 때가 왔네…….
그것이, 시작이었다.
바로 그 순간이, 몇 번이고 끝나지 않았던 1회차 공략의 시작이었다.
[메인 퀘스트 갱신 : 숙청의 밤 (2)]– 궁성 내부에 완전무장한 병사들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또, 어전에 모인 대신들의 분위기 또한 심상치 않습니다. 무슨 일이 벌어지려는 걸까요?
그리고 바로 이 결코 클리어할 수 없는 퀘스트의 무한한 반복이 뼈저리고 또 사무칠 정도로 나에게 가르쳐 주었다.
이건 게임이라고.
이 세계는, 게임에 불과하다고.
* * *
“……대문관(大文官), 이제…… 그걸 가져오라.”
홀로그램 지도가 눈앞에 생성되었을 때, 현수는 저도 모르게 탄식을 토하고 말았다.
최악. 성도의 상황은 그야말로 최악이었으니까.
요르한 3세가 힘겹게 하명했을 때 현수는 어리둥절했다.
누가 봐도 ‘대문관’처럼 보이는 노인은 가만히 서 있고, 오히려 젊은 학자가 움직였던 것이다. 일순 여종인가 싶었지만 이런 자리에 종이 있을 리가 없었다.
기이했다.
두루마리 지도를 펼치는 대문관은 이상한 느낌을 주었다. 도저히 인간 같지 않은 우아함이 동작에 배어 있었다.
“시작하겠습니다.”
대문관이 입을 열었다.
목소리에서 지적인 냉정함이 물씬 느껴졌다.
“지금부터 제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은, 모두 전하께서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미리 일러주셨던 내용입니다.”
현수가 지도를 흘끔 보기 무섭게 시스템 알림이 울렸다.
[MAP : 『요르한 3세의 전략지도』를 보았습니다. 50분 동안 [인터페이스] – [MAP]에서 해당 지도가 활성화됩니다.]왕국의 세력 분포는 이러했다.
앤티키아 공작령.
캐슬베이아 국왕령.
트라이폴 백작령.
트라이폴 백작은 남서부 항구 지대를 관할하고, 앤티키아 공작은 북부 장벽 지대를 관할한다고 했다.
언뜻 보기에는 견고해 보이는 구성이다. 하지만 주변의 상황이 너무나도 흉흉했다.
서해를 제외한 삼면이 요정 세력에게 포위된 것과 다름없는 형세였으니까.
“도대체 지금까지 어떻게 버텨온 겁니까?”
현수가 나직이 속삭이자 샬롯이 한숨과 함께 대꾸했다.
“분열. 발데마르가 통합해내기 전까지 요정들은 분열되어 있었어. 종교적인 문제로 삼파전이었거든. 요정들에게 통합된 왕이란 존재는 100년 동안 없었어.”
발데마르…….
현수가 요정왕의 어마어마한 군세를 떠올리는 동안 탁상 앞에서 대문관이 말을 이어 나갔다.
“아시다시피, 왕국은 요정 세력에게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 문제는 갈수록 심각해져 가고 있고요.”
대문관이 트라이폴 아래쪽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지도로만 봐도 어마어마한 군세가 포진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심각한 정세만 간단히 짚겠습니다. 트라이폴 남단은 청(淸)요정의 영토입니다. 대제사장 페아로스가 그 지도자죠. 청요정은 바다에 친화적인 요정, 밀정의 보고에 따르면, 현재 새로운 함대를 건조하고 있다고 합니다.”
아르츠레히드가 물었다.
“어느 정도랍니까?”
“주력 전함만 170척입니다.”
“목표는?”
“분명, 요르한 전하께서 승하하신 뒤에 트라이폴 백작령으로 진격하겠지요. 요정들이 대륙으로 갈 일은 없으니까요.”
대문관처럼 보였던 노인이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트라이폴 백작께서는…… 강경파이시니…… 아아, 그러니까 로바르를 섬기는…… 쪽이니…… 차라리?”
제롤드 경이 한숨을 뱉었다.
“크달칼론이 성가신 건 맞지만, 그렇다고 백작령 전체를 요정에게 넘기란 소리요? 항구 지대가 먹히는 순간 성도는 끝이오. 사막에 고립되어 말라 죽는단 말이오.”
“그 문제 말입니다만.”
대문관이 지적했다.
“크란노스가 닷새 전에 그리핀으로 서한을 보내왔습니다.”
“크란노스? 성검의 검주?”
샬롯이 물었다.
“그렇습니다. 성내 6할의 위병을 자신이 장악하고 있답니다. 국왕께서 재가만 내려 주신다면, 크달칼론 백작을 제압하고 왕에게 충성을 바치겠다고요.”
“백광검귀라, 실력은 확실하나 함부로 믿어서도 안 될 터. 6할이라는 병력 수도 분명 과장이 섞였을 것이고. 아버지를 배반하는 데에 무엇을 보상으로 요구하는지도 중요하다.”
“왕명으로 누이의 신변 안전을 보장해달라 청했습니다. 그것만 약속해주면 뭐든 하겠답니다.”
“단지 그것뿐?”
샬롯의 의문에 대문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뿐입니다. 전하께서는 그렇기에 믿을 수 있다고 하셨고요.”
누이를 위해서 뭐든 한다라…….
현수는 침을 삼켰다.
그 이후 현수는 대문관의 설명을 듣기는 했지만 이해할 수는 없었다.
“……캐슬베이아 동쪽으로는 발데마르의 백(白)요정이 있고, 앤티키아 북쪽으로는 리겔르웬의 흑(黑)요정이 있습니다…….”
머릿속으로 설명을 간신히 되짚어보고 있을 때에는, 대문관이 지도를 걷어내고 양피지와 깃펜을 가져오고 있었다. 요르한 3세가 입을 열었다.
“……이런 실정에 로바르가 성도의 실권을 쥐게 된다면……? 심연까지 재림한 이 혼란 속에……? 놈은 분명 짐의 여동생을 앞세워 전쟁을 일으킬 게야……. 하지만 그건 전쟁이 아니야…… 성도의 패망이지…….”
요르한이 고통스럽게 각혈을 내뱉더니 현수를 보았다.
“……블러드윈드를 주어서 고맙다고 했었나? 감사를 표하고 싶은 것은 오히려 나라네. 자네 덕에 로바르를 성내에 묶어둘 수 있었으니까……. 친애하는 아르츠레히드.”
“예, 전하.”
“……캐슬베이아의 수상이 되어 줘야겠네. 군권을 장악하란 소리야. 내 조카의 왕위를 지켜주겠나……?”
침묵.
현수는 주변을 조심스레 살펴보았다. 없었다. 왕의 요청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하지만 당사자인 아르츠레히드가 고개를 내저었다.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아르츠레히드.”
“전 그런 그릇이 아닙니다.”
“빛께서 자네에게…… 내려준 그릇은 자네 생각처럼…… 작지 않네.”
아르츠레히드는 일순 고민하는 듯했으나, 곧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송구합니다, 전하.”
“엘리아가 걱정인가……? 걱정하지 말게. 로바르뿐만 아니라 그 아이도…… 목숨을 잃게 될 거야.”
“전하? 그게 도대체 무슨……?”
샬롯이 끼어들었다.
“오늘 밤, 로바르와 함께 처형된다면 로바르에 죽고 못 사는 엘리아가 어떤 한을 품겠어? 자식을 조종해서 어떤 보복 정치를 벌일까? 앤티키아 공작령과 트라이폴 백작령을 순회하면서 반군을 소집할 수도 있어. 왕권의 정당성 또한 그녀에게 있지.”
제롤드가 거들었다.
“……군사 삼백이 대기하고 있네. 자네가 명을 받들기만 하면, 로바르와 왕녀는 함께 죽는 걸세. 요르한 전하의 왕명 아래.”
[메인 퀘스트 갱신 : 숙청의 밤 (3)]– 요르한 3세가 깃발을 꽂은 이유는 로바르를 성안에 가둬두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숙청의 칼날이 오늘 밤 로바르에게 임할 것입니다.
그런 거였군.
퀘스트의 이름과, 궁성 내에 완전무장한 병력들은 바로 이 작전을 위한 거였어.
늙은 주교가 다급하게 외쳤다.
“저, 전하! 친족 살해라니요! 그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대죄입니다! 게, 게다가 로, 로바르 공은 세도가, 아르휀 가문의 장자입니다. 흑양 기사들이야, 근본이 대부분 방랑 기사였다지만…… 로바르를 처형했다가는…… 아르휀 공작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참으로 무지하다.”
샬롯이 차갑게 대꾸했다.
“아르휀은 병력을 움직이지 못한다. 아니, 대륙에서 성도로 군대를 보낼 세력 자체가 이젠 없을 게다.”
“어, 어째서입니까?”
“모르는가? 곧 성배가 피를 삼키기 시작할 터이니, 모든 가문의 병력이 제각기 섬기는 내 언니들의 깃발 아래로 집결하지 않겠느냐.”
“아…….”
궁금했다.
도대체 성배가 무엇이기에, 언급되기만 하면 NPC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는 것인지.
“전하, 전 살생은 원치 않습니다. 그 누구의 죽음도요. 이건 한두 명이 죽는다고 끝날 일이 아닙니다. 전국적으로 살상 행위가 벌어질 것 아닙니까.”
아르츠레히드의 발언에 요르한 3세가 힘없이 웃었다.
“하하, 살생은…… 자네의 몫이 아니야. 그러니 자네의 명예를 비난하는 이들도 없을 게야. 자…… 대문관은 이제 내 말을 받아 적으라…….”
대문관이 깃펜을 적시자 요르한의 말이 시작되었다.
“요르한 3세가 기나긴 투병으로 미쳐서…… 죄 없는 이들과 그 여동생까지 붙잡아 처형을…… 언도했으니…… 실로 참담한 일이라고 하겠다…….”
‘미쳐서’라는 단어를 받아 적을 때 대문관의 손이 구슬피 떨렸다.
“그 미친 왕을…… 엔더스킵의 영주 아르츠레히드가 신들의 정의로 처단하였고…… 그 목을 내걸어…… 성도의 질서를 회복했으니…… 황제와 법황과 영주들은 성도의 안전을 심려치 말라…….”
“전하! 이건─”
“─짐은.”
아르츠레히드의 반박을 끊어내며, 요르한 3세가 숨을 골랐다.
“치세 말기에 무고한 이들을 잡아 죽인 폭군으로 기록될 것이다……. 하지만 성도는, 백성들의 삶은 온전하겠지……. 내 목이 성벽에 내걸리는 것으로…… 백성들을 지킬 수 있다면야…… 백 번도 고쳐 죽을 수 있다.”
“전하, 제발.”
“내 목을 내걸 때 반드시 명심하게, 내 친구여. 역사란 본래 진실과 거짓의 잉크로 쓰이는 것이라는 걸. 그리고 이 거짓은, 내가 자청하는 것이야. 난 폭군으로 죽을 테니…… 자넨 참된 수상으로서 내 조카를 성군으로 이끌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