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 of the Fake Hero RAW novel - Chapter (146)
가짜 용사 이야기-146화(146/310)
#42 :
[7. 새로운 길을 찾아라] 기사단장 죽이기 (2) [플레이어, 파워풀엠페러가 《속사》를 시전했습니다!]연달은 사격에 손가락에서 피까지 터져 나왔다.
수십 발의 사격.
그러나 로바르의 총탄 한 발도 로바르의 군마의 마갑을 비집고 들어가지 못했다. 정철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한단 말인가?
두두두두두두두ㅡ!
기마대는 현수를, 서문(西門)을 노리고 진격해왔다. 이제 코앞 거리까지 닥쳐온 상황이었다.
“……피하란 말이다! 박현수! 제발!”
샬롯의 찢어지는 음성이 들렸을 때에야 정신을 차렸다.
[경고 : 총탄을 모두 사용하였습니다!]눈앞에서 로바르가 험악한 대망치를 드높이 쳐들고 있었다.
피해야 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다리가 납덩이처럼 무거워져 움직일 수가 없었다. 로바르의 살기에 압도당했단 말인가.
망치가 새하얀 빛으로 타올랐고, 파공성을 토하며 현수에게로 짓쳐들던 그때, 누군가가 현수를 옆으로 밀쳤다.
[NPC, 로바르가 전용 스킬 《철성추(鐵星鎚) Lv.82》를 시전합니다!]콰아아아아아아앙!
넘어지는 시야로 황당한 광경이 펼쳐졌다.
로바르가 대망치를 매섭게 내려치자, 하늘에서 혜성 같은 섬광이 떨어지면서 내성문이 성벽째로 가라앉았다.
돌 파편들이 정신없이 용솟음쳤는데, 수십 총병들이 비명을 지르며 하늘에 붕 떠올라 허우적대다가 지면 위로 처박혔다.
[경고 : 제1관문이 돌파당했습니다! 관문 수비 1 / 2.]자욱한 흙먼지 속에서 누군가가 나동그라진 현수를 위에서 내리누르고 있었다.
“휴우, 괜찮아요?”
현수는 고개를 들어 보았다가 경악했다.
오늘 만났던 아랍계 플레이어.
구제 기사단 종자의 전투복을 걸친 아담한 체구. 입술 옆쪽의 큰 점 덕에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경악했던 이유는, 오른팔 팔뚝이 힘줄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데도 싱글벙글한 표정 때문이었다.
“아, 이거요? 뭘 그리 놀라고 그래요. 어차피 의수(義手) 달 거였는데 알아서 절단되고, 잘됐네.”
그러더니 걸레 짜듯 뒤틀어서 팔을 내던졌다.
미친.
아프기는 한지, 살짝 미간을 구기며 허리춤에서 약병을 꺼내들어 물약을 빨아 먹었다.
“휘유! 역시 로바르네. 근골 강화 포션까지 먹었는데 아주 작살을 내놨어.”
“아니, 당신, 팔이…….”
“아아 영웅이시여, 킥킥, 전 브뤼나라고 해요. 이래봬도 성기사 클래스로 엔딩 한 번 봤답니다.”
“왜 도와준 겁니까?”
“간단해요. 그게 이익이라고 판단했으니까.”
브뤼나가 눈을 반짝였다.
“봐요. 당신 한 번 구했을 뿐인데, 호감도 상승치가 장난이 아니잖아. 구제 기사단, 영목 기사단, 기타 잡병 등등…….”
고양이처럼 요염하기도 했다.
입가에 묻은 포션을 도발적으로 핥아 먹었다.
“그리고 처음 보는 퀘스트잖아요. 플레이어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죠. 이런 퀘스트는 클리어 보상이 얼마나 좋은데.”
브뤼나가 흠칫하더니, 성벽 위를 흘끔 올려보았다. 시선을 따라가 보니 샬롯이 브뤼나를 노려보는 게 보였다.
“흠, 그런데 정말 이상하네. 왜 단장님한테만 비호감도가 높은 폭으로 올랐을까?”
“지금 장난칠 시간 없습니다.”
잔해 속에 파묻힌 장총을 꺼내들면서 일어섰다.
기마대의 후속 대열이, 무너져 내린 관문의 잔해를 밟고 달아나고 있었다. 대열의 선두에 로바르가 있겠지.
개자식, 이대로는 안 놓친다.
그 뒤를 구제 기사단과 영목 기사들이 쫓으려 했으나…… 그들에게는 말이 없었다.
현수도 무턱대고 뒤쫓으려 하자, 브뤼나가 현수의 손목을 낚아챘다.
“저걸 달려서 쫓겠다고요?”
“방도가 없잖습니까?”
“와. 퀘스트를 박살 내기에 난 당신이 힘을 숨긴 엘리트인 줄 알았는데요. 이렇게 보니 진짜 초회차 플레이어네요. 귀여워라.”
브뤼나가 당혹스러운 행동을 개시한 건 그때였다. 양손 검지를 제 입 안에 집어넣었다.
“휘익!”
그렇게 휘파람을 불더니 현수를 보았다. 따라 하세요, 라는 눈빛이었다.
현수는 마지못해 따라 했다.
브뤼나에게서 정철 같은 베테랑의 느낌이 났기 때문이다. 이득에 따라서 행동한다니까, 이번 한 번만 믿어보기로 했다.
[명마, 블러드윈드가 주인의 호출에 응합니다!]순식간이었다. 블러드윈드가 핏빛 폭풍을 몰며 달려왔다. 브뤼나가 감탄의 신음을 흘렸다.
“이게 획득 가능한 아이템인지는 전혀 몰랐는데.”
현수는 블러드윈드가 어디서 나타난 건지 헤아릴 틈도 없었다.
“말고삐를 잡아주시죠.”
현수가 말했다.
“흐음, 첫 데이트부터 여자한테 운전을 시키는 남자는 영 꽝인데. 그래도 차가 이렇게 명품이니 한 번 봐주죠.”
명마는 정신이 어지러울 정도로 빨랐고, 놀랍게도 달릴 때 흙먼지 대신 핏빛 폭풍이 일었다.
하지만 블러드윈드는 성문을 넘자마자 제 속도를 잃었다. 추격로에 병사들이 너무나도 많았던 탓이다.
답답해지던 그때 블러드윈드가 나직이 울더니.
[명마, 블러드윈드가 주인의 길을 인도하고자 합니다!]별안간 제멋대로 마구 질주하기 시작했다.
“진정해, 블러드윈드!”
“이대로 됐어요! 전설 등급 명마들은 알아서 길을 잡을 줄도 알거든요.”
블러드윈드의 뜀박질은 편안하면서도 신속했다.
엄청난 속도로, 비좁은 골목길에 들어서는가 하면 짐수레와 맥주 통을 뛰어넘으며 시가지를 단번에 주파했다.
밤하늘 저편에서 나팔 소리가 풀려 나오고 있었다. 서문 쪽이었다.
[파티 : 아르츠레히드가 병력 증원을 급히 요청합니다!] [파티 : 파티 리더 제롤드가 전 병력에게 서문으로 집결할 것을 명령합니다!]입 안이 타들어가는 걸 느꼈다.
“죽여라!”
“막아라아아아!”
전투의 함성 소리와 피비린내가 점점 가까워왔다. 문득 궁금해졌다.
“대체 로바르 녀석이 저렇게 많은 군세를 어떻게 대기시켜 놓고 있던 겁니까?”
브뤼나가 자신의 전투 메이스를 쓱 꺼내며 말했다.
“사실 이 전투는 로바르가 주인공이었어야 해요. 쫓기는 건 영목 기사들이고.”
“……!”
“오늘 밤 숙청의 칼날을 드는 건 로바르였으니까요. 시나리오가 원래 그래요.”
아, 그래서 그런 거였나…….
블러드윈드가 마지막 모퉁이를 돌았다. 서문, 그 처절한 수라장이 시야에 들어왔다. 총탄에 박혀 쓰러진 시체들이 지척에 깔려 있었다.
전투의 본무대는 역시나 성곽 계단이었다. 성루에 내리닫이 쇠살문의 권양기가 설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으아아아아아!”
엔더스킵 소수 병력이 계단참으로 밀어닥치는 적들을 상대로 처참한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아르츠레히드와 엘우드가 쉴 새 없이 칼을 휘두르고 있었다.
칼리옌이 적병의 복부에 총검을 박아 넣고는, 성벽 아래로 밀어서 내던지는 모습이 보였다.
“지금 신경 써야 할 건 그쪽이 아녜요!”
현수는 브뤼나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고는, 탄식했다.
“로바르……!”
왼쪽. 대로 쪽이었다. 로바르가 대망치를 붕붕 돌리며 기병대를 휘몰아오고 있었다.
안 돼.
로바르를 성문으로 보내서는.
놈은 성루를 점거하지 않고도 쇠살문과 그 너머 성문의 빗장마저 간단히 박살 낼 놈이었다.
바로 지금, 막아야 했다.
“맞힐 수 있겠어요?”
“해봐야죠.”
그런데 아니, 어라…….
아.
없었다. 총구로 조준한 것까진 좋았으나 방아쇠를 아무리 당겨도, 틱, 틱, 맥 빠진 소리만이 반복된다.
‘맞아. 총알을 다 썼지.’
로바르는 지금도 성문 쪽으로 거침없이 달려가고 있었다.
이제 선택의 시간이었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로바르와의 첫 대면 때부터 이런 운명이 정해져 있었던 것 같았다.
현수는 등자에서 발을 슬쩍 뺐고, 브뤼나의 양어깨를 잡고 일어설 준비를 했다.
[명마, 블러드윈드가 주인의 의도를 이해했습니다!]블러드윈드가 돌연, 진로를 틀었다. 로바르 기병대의 측면을 파고드는 방향이었다. 정확히는, 로바르에게 그대로 들이받는 방향.
“와, 당신은 진짜 또라이군요!”
브뤼나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웃었다.
“사상 최강의 또라이 플레이어. 닉네임도 또라이고…….”
“고맙습니다.”
“겸손하기까지.”
신기하게도 들뜬 목소리였다.
“더 마음에 들어요. 난 또라이가 좋더라. 게임이 재밌어지잖아.”
대략 50미터.
이제 집중해야 했다.
블러드윈드의 발길질이 더욱 거세졌다. 로바르는 아직 현수를 보지 못한 상태였다.
[아이템 장착 : 대장간 장검, 핏빛 태양 방패.]대략 30미터.
“장비는 격돌한 뒤에 끼세요.”
브뤼나가 조언했다.
“격돌한 뒤요?”
“부딪칠 때 장비가 튕겨 나가면 분실되거든요. 플레이어들만 쓸 수 있는 편법이라고 할까. 아무튼 빨리하세요!”
그렇군.
“잘 버티세요. 추격대를 이끌고 당신 위치로 갈게요. 미안하지만, 당신처럼 무모한 플레이를 하기엔 제 캐릭턴 너무 연약해서요.”
브뤼나가 현수에게 약병을 건넸다. 백골처럼 스산한 흰빛이었다.
“뭡니까?”
“또라이 플레이어 정신 케어 약이요!”
10미터.
그때 로바르가 고개를 홱 돌렸고, 현수를 알아보았다.
멍청한 놈. 이미 늦었어.
[아이템 사용 : 하급 근골 강화 물약.]– 300초 동안 생명력과 힘 능력치가 (+3) 올라갑니다.
바로 그 순간 블러드윈드가 급제동을 했고, 현수는 말에서 매섭게 튕겨 나갔다.
현수의 거구가 로바르를 덮쳤다.
미친, 거친 고성이 들려왔을 때는 이미 작전이 성공한 뒤였다.
현수는 바닥을 마구 나뒹굴고 있었다. 뼈가 깨어지는 듯한 격통이 왼쪽 어깨를 관통했다. 이를 악물어 고통에 맞서 일어섰고, 재빨리 인터페이스를 활성화했다.
[아이템 장착 : 대장간 장검, 핏빛 태양 방패.]얼굴에 잔뜩 묻은 진흙을 털어내자 앞이 또렷이 보였다.
“이 잡것이…….”
로바르도 휘청거리며 일어서는 중이었다.
판금 갑주를 입고 낙마를 한 셈이니 현수보다도 피해가 막심할 것이다.
작전대로였다. 끔찍한 대망치는 저 멀리 떨어져 있었다.
기병대는 앞쪽에서 멈춰 서려는 자들과 뒤쪽에서 달려 나오는 자들과 뒤섞이며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로바르가 성문을 부수지 못했으니 당연한 수순, 시간을 제대로 번 셈이다.
문제는 지금부터였다.
왼쪽 어깨는 반쯤 작살난 상황이었다. 힘이 들어가지 않아 방패가 자꾸만 아래로 처졌다.
로바르는 비틀거리긴 했으나 양팔은 온전해 보였다.
운 좋게 한쪽 팔이 불구가 되었더라도…… 현수보다 절대적으로 강한 상대였다.
이길 생각은 없었다.
시간을 끌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했다.
로바르가 진흙으로 뒤덮인 투구를 집어 던졌다. 그리고 검대에서 장검을 뽑아들었다.
“네 천한 눈알들을 그때 뽑아 버렸어야 했는데.”
“해보시지. 지금이라도.”
“원한다면.”
로바르의 온몸에서 새하얀 기운이 뱀처럼 꿈틀거렸다.
“이젠 눈알로는 안 끝날 거다.”
로바르가 땅을 박차는 게 보인 순간, 로바르와 그 칼날이 현수의 눈앞으로 쇄도해와 있었다.
하지만 저번과는 달랐다.
반응할 수 있었다.
기량 45. 지금까지 쌓아둔 레벨업 포인트를 모두 기량에 투자한 덕이었다.
채앵! 막아내며 반격까지 노려볼 수 있던 그 순간.
[???, ??????가 당신에게 정체를 드러냅니다.] [일월(日月)의 영목이 당신의 용기에 전율했습니다. 3 / 3.]– 숨겨진 직업 : 《봉화지기》로 각성합니다.
– 전용 특성 개방 : 《태양과 달의 노래》.
– 경고 : 이후 《사냥꾼》 스킬이 추가로 개방되지 않습니다.
봉화지기?
영화처럼, 각성의 순간에 어마어마한 힘이 생겨나는 게 아니었다.
기적 같은 마법이 일어나 악당을 물리치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떠오른 문구들이 시야를 차단한 꼴이 되었다.
[아이템 파괴됨 : 핏빛 태양 방패.]방패를 부수며 깊숙이 치고 들어온 칼날이 현수의 왼팔 건틀릿과 살가죽을 가르고 뼈에 닿았다.
“크흡!”
즉시 손을 빼지 않았더라면 뼈까지 잘려 나갈 뻔했다…… 현수는 입으로 피를 토했다.
뒤이어 로바르가 휘돌려 찬 발에 시야가 암전했다. 민가의 돌담까지 날아가 처박혀 있었다.
[경고 : 제2관문이 돌파당하기 직전입니다.]아득해지는 시야 속으로 로바르가 들어왔다.
‘……웃음도 안 나와. 일격에 수십 미터를 날아갔다고?’
칼을 들고 비틀거리긴 했지만, 어쨌든 점점 가까워오고 있었다.
그건 괜찮았다.
로바르와의 싸움은 일순이었을 텐데 전황이 절망적으로 변한 게 문제였다.
로바르 어깨 너머 서문. 거기서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영주도 기사도 노병도 보이지 않았다.
입술을 깨물었다.
아르츠레히드와 엘우드는 죽어버린 건가? 칼리옌도?
대로에서는 아군 추격대와 적 기마대가 뒤엉켜 혈전을 벌이고 있었다.
추격대는 다급하게 달려왔기 때문인지 진형을 재정비하지 못했고, 효율적인 섬멸전을 수행하지 못했다.
그때 한 기병이 로바르에게로 달려왔다.
하얀 망토에 검은 태양 문장이 수놓여 펄럭였다. 흑양 기사단 기수였다.
“단장 각하. 곧 성문이 열립니다. 단원들이 시간을 버는 동안 피하십시오!”
“알겠다. 내 말은?”
“여기 있습니다!”
로바르가 현수의 멱살을 거칠게 휘어잡아 위로 끌어 올렸다.
“릭!”
로바르의 오른손에 장검이 쥐어져 있었다. 현수는 발버둥 칠 힘조차도 없었다.
“예, 각하.”
“깃대에 이놈의 머리통을 꿰뚫고 나갈 것이다. 준비해라.”
“분부대로!”
키기기기깅…… 내리닫이 쇠살문이 올라갔다.
이어서 쿠우우우웅…… 육중한 강철 성문도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고, 승리를 자축하는 강경파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경고 : 제2관문이 돌파당했습니다! 관문 수비 0 / 2.]하지만 뭔가 이상했다.
마지막 관문마저 돌파당했는데, 퀘스트 실패라는 알림이 들리지 않았다.
더 이상한 건 쇄도해들던 칼날이 별안간 멈췄다는 것이었다.
쏴아아아아아…….
성문 쪽이었다. 해일이 밀려드는 듯한 섬뜩한 소리가 들려왔다.
여기는 내륙인데?
마찬가지로 황당했는지, 로바르와 기수의 시선이 그쪽으로 홱 돌아갔다.
“끄, 끄아아아아아아아아아!”
“하, 하, 하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현수는 평생 그렇게 끔찍한 비명 소리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사나운 물결도 처음이었다.
수많은 흑양 기사와 군마들이 미친 듯이 날뛰며 절규하는 게 보였다.
온몸에 검푸르게 눌어붙은 포말 때문에 그 몸이 걸쭉하게 녹아내리고 있었다.
“심연(深淵)?”
철갑이나 마갑을 뜨겁게 달구어 녹이는 게 아니라, 갑옷 너머의 살갗까지 썩어서 부패시키는 힘이었던 것이다.
“미친, 저건 심연이잖아!”
멱살 쥔 로바르의 손아귀에서 힘이 풀렸다. 현수는 엉덩방아를 찧으며 바닥에 쓰러졌다.
“……저놈은 뭐야.”
로바르의 질문에 기수가 횡설수설했다.
“모, 모르겠습니다. 시, 심연의 왕이 온 거 아닙니까?”
“우둔한 놈! <잊혀진 왕들>이 영목이 있는 캐슬베이아에 어떻게 온단 말이냐!”
현수는 알 수 없는 경외감에 몸을 떨었다. 심연의 폭풍 속에서, 흑기사가 모습을 드러낸 순간에.
그는 천천히 걸었다.
무수한 적들 속에서 그저 태연했다. 고개를 연신 돌리는 것으로 보아 누군가를 찾는 것 같았다.
“저건 심연의 갑옷 같습니다!”
기수는 이제 숨이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로바르가 중얼거렸다.
“아니, 저건 성검이잖아. 크달칼론인가? 백작이 날 도우러 온 건가?”
아마 지금 이 순간보다 ‘압도’라는 말이 어울리는 순간은 없을 것이다.
용감한 흑양 기사 3명이 저항하듯 달려들었다. 흑기사는 등 뒤의 대검을 뽑지도 않았다.
달려드는 적의 무릎을 발로 걷어차자 그 무릎이 갑옷째로 으깨졌다.
이어서 두 번째 적과 세 번째 적의 얼굴에 주먹이 순식간에 박혔다. 그 일격에 머리통이 투구째로 무참히 우그러졌다. 즉사였다.
“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몸이 녹으면서 죽는 기사들의 단말마에, 무릎이 박살 난 적의 비명까지 섞이자, 기사들이 공포에 짓눌려 뒷걸음질 쳤다.
그런 혼란 속에서, 흑기사가 마침내 로바르를 보았다.
눈이 마주친 순간 이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오기 시작했다.
뿜어내는 살기와 적의(敵意)의 깊이가 험악했다. 상대의 온몸을 칼로 난도질하듯이.
그래서 말이 겁에 질린 건지 주인이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기수가 갑자기 말 두 마리를 이끌고 황망히 줄행랑을 쳤다.
“이런 미친! 릭! 돌아와라! 릭!”
로바르가 마구 소리쳤지만 기수는 돌아오지 않았다.
플레이어?
그 생각이 뇌리를 스치자 현수는 UI를 확인해 보았다.
역시 스킬 사용 문구가 띄워져 있었지만, 플레이어의 이름은 확인할 수 없었다.
[심연, 어린갑이 《심해의 회오리》를 시전했습니다!]로바르가 뒤쪽으로 몸을 던졌다. 대망치가 있는 방향이었다. 그러나 흑기사는 로바르에게로 방향을 틀지 않았다.
검푸른 망토를 사납게 휘날리며 일직선으로 다가와, 현수의 눈앞까지 와서야 멈췄다.
보잘것없이 찢어진 망토에는 기괴한 눈알이 그려져 있었는데, 그 위로 보이는 얼굴만은 낯익었다.
“박현수.”
숨이, 숨이 멎는 것만 같았다.
흙먼지를 뒤집어쓴 흑발 더벅머리 아래에서, 심연처럼, 검푸른 안광을 머금은 눈동자.
흑양 기사단을 손쉽게 학살하면서 나타나 현수를 위압적으로 내려다본 그 흑기사의 정체는 바로, 엘리트 소서러 정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