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 of the Fake Hero RAW novel - Chapter (150)
가짜 용사 이야기-150화(150/310)
#46 :
[8. 태고의 심연이 잠든 도시] 네이갈라스 레이드 (3)광장 바닥을 이루던 원판이 하강하기 시작했다. 위험한 건 없다. 고대의 승강기 같은 물건일 뿐.
위험한 건, 하강하는 승강기 위로 쏟아지는 렙틸리언의 군대. 그러나 이 또한 문제없다.
“로우.”
여기에 내가 누굴 데려왔는데.
용부인의 명령에 응한 로헤이리츠가 손가락을 튕겼다.
“네, 아가씨.”
곧장 공허의 벌레들이 차원의 회랑으로부터 무수히 쏟아져 나와 원판 위를 둥글게 덮는다.
뛰어내리던 렙틸리언들은 그 벌레들에게 갉아 먹히는 동시에 공허의 공간으로 추방되었다.
사쿠라이가 말했다.
“귀엽다…….”
이 상황에 귀엽단 말이 나오다니, 점점 공포에 대한 감정이 상당 부분 마모되어 가는 건가…….
놀랄 일은 아니었다. 이 게임의 다회차 유저들은 모두 겪는 과정이니까.
그렇게 언젠가는, 나처럼 세계 멸망에조차 별다른 감정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
“지금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설명해 주겠어?”
크세리니아가 물었다.
“누군가가 네이갈라스를 깨우고 있는 게 확실시되었습니다. 놈을 잡으러 가야 합니다.”
“그걸 어떻게 알지?”
“놈은 <트라이폴> 비극을 일으킨 주역이기도 하니까요. 왕이 출현하는 곳마다 놈이 있었습니다.”
NPC들은 최대한 이용해야 한다.
NPC의 감정선을 모두 꿰고 있지 않아도, 트라이폴 비극을 연결시킨다면 용부인의 적극적인 협조를 얻을 수 있는 건 명확하다.
로헤이리츠가 팔짱을 끼며 턱을 오만하게 들었다.
“그건 너도 마찬가지 아닌가?”
아주 정확한 지적이다.
이래서 신중한 NPC들은 싫다. 이놈은 그냥 싫고.
“기다려, 로헤이리츠. 방금 그 말 설명해줄 수 있겠어?”
바이로니카의 발언이었다.
바이로니카 또한 트라이폴에서 양부 칼레이브를 잃었다. 그 증오는 누구보다도 깊을 터.
“난 무고해. 여기 피터가 증인이야. 놈은 모험가들 대부분을 함정으로 끌어들여 살해했지. 그들이 건재했더라면 그런 참담한 결과는 나오지 않았을 텐데.”
“수상해. 네 말은 못 믿겠어.”
“로우.”
“하지만 이놈보다도 그놈이 더 수상한 건 확실하군. 붙잡아 족쳐보면 뭔가 알게 될지도.”
좋아.
이로써 NPC들의 협조는 얻었다.
“그러면 크세리니아 아가씨께서 모두에게 냉기의 축복을 걸어 주십시오. 이 아래는 지옥도, 그게 없으면 다 녹아내려 죽습니다.”
네이갈라스는 사막의 왕이며 화산이 곧 놈의 권위이다. 이제 용암이 끓어오르는 대지 속으로 가게 될 것이다.
“좋아.”
머리에 현기증을 펼쳐내던 살인적인 열기가 곧 청명한 냉기 속에서 시원하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빙룡의 성흔.
그래도 <잊혀진 왕들>의 발끝 정도에는 미치는 진룡급 여의주의 힘이다. 그 권능인 열기를 막는 것 정도는 간단하다.
“어제 제 동료들이 역사서에 기록된 라리엔의 지도를 찾아냈습니다.”
야나는 “내가?”라는 표정을 지었으나 사쿠라이는 오히려 당당하게 팔짱을 끼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젠장~ 믿고 있었다고, 챌린저 원딜!
나는 성검의 칼끝으로 바닥에 레이드 약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이제 지하 깊숙이 내려와 불빛이 들지 않아 어둑했다. 야나의 전투 정령이 등불 역할을 해주었다.
“이 승강기가 내려서면 바로 1번 기둥이 나옵니다. 왼쪽으로 가면 19번 기둥, 오른쪽으로 가면 6번 기둥부터 시작해서 108번 기둥으로 연결되죠. 네이갈라스는 66번 기둥에 있습니다.”
“……!”
“19번, 58번, 106번 기둥에는 네이갈라스의 봉인을 통제하는 장치가 있다고 하더군요. 정면을 돌파하다가 흩어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108번 기둥에서 서든데스 포인트가 발동, 즉사 패턴에 걸려 죽게 된다.
44번 기둥은 사실 《파멸의 선지자》의 각성 지점이니, 야나를 이곳으로 보내야 한다.
사이코 플레이어가 어디에 있느냐가 관건이겠으니, 인원 배치를 조금의 실수도 없이 해야 한다.
“저걸 다 외고 있다고?”
“미쳤다, 미쳤어.”
“이제 인원 배치를…….”
그때, 쿠구구구구…… 육중한 마찰음과 함께 원판의 하강이 멎기 시작한다.
라리엔, 그 옛 지하의 악몽 속에 진입했다는 소리다.
불길한 기운이 바람에 실려 불어온다. 대기가 음침하고 무거웠다. 즉시 성검을 발검했다.
[숨겨진 지역 : 기둥의 도시 : 라리엔.] [메인 퀘스트 갱신 : 태고의 심연이 잠든 도시 (3)]– 금기를 탐닉하는 자, 죽음이 있을지어다.
– 태고의 지하 도시에 있는 것은 오직 종말의 예언. 그리고 그 예언을 엿본 자의 파멸만 있을 뿐입니다. 아아, 심연으로 빨려갈 당신의 영혼이 걱정됩니다…….
라리엔의 승강기가 세 갈래의 굴길 앞에서 멈췄다. 사악한 낄낄거림이 동굴 표면에 난반사되었다.
“……킥킥킥킥킥킥킥킥킥킥킥킥킥킥킥킥킥킥킥킥킥킥킥킥…….”
세 갈래의 굴길을 순간적으로 살핀 로헤이리츠가 앞으로 나섰다. 이미 유물 석궁의 방아쇠에 손가락이 얹어져 있었다.
“쓰레기다운 웃음소리군.”
천살뇌의 화살이 중앙 굴길로 내달린다.
살점에 화살이 박히는 소리, 로헤이리츠가 거만하게 나를 돌아보나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다.
한숨이 나왔다.
“여긴 지하란다, 우리 빡구야. 번개가 떨어질 리가 없잖니. 번개는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지는 거야. 땅에서 지하로 떨어지는 번개는 없단다.”
“오빠, 오빠가 참으세요. 근대에서 현대인다운 교육을 받을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이 자식들……!”
로헤이리츠가 발끈하던 그때 희끄무레한 형체가 굴길의 어둠을 뚫고 나타나 달려들었다.
“키이헤헤에에에에에에에!”
완전한 동시였다.
로헤이리츠와 내가 뒤로 살짝 물러나면서 간격을 벌린 순간, 그 틈새를 악마가 물어뜯었다.
그 주둥이의 위턱과 아래턱이 맞물리기도 전에, 그 몸이 칼날에 절단되고 머리통은 화살에 관통되었다.
화살에 꿰뚫린 머리통은 기괴할 정도로 길고 가늘었다.
몸통은 여성의 나신이었으나, 덜렁거리는 여섯 팔다리는 파충류의 비늘로 뒤덮인 괴물이었다.
“……킥킥킥킥킥킥킥킥킥킥킥킥킥킥킥킥킥킥킥킥킥킥킥킥…….”
갈라진 몸뚱어리가 땅바닥에 나동그라졌다. 몸은 계속 살아서 발딱거리며 또 키득거렸다.
불멸을 구가하는 놈의 여유…….
로헤이리츠가 군홧발로 몇 번이고 놈의 머리통을 짓밟자, 곧 경련이 멈추고 조용해졌다.
“빨리 갑시다. 어제 예언서를 보니 이놈은 원시 심연이란 존재로 다시 살아난다고 하니까.”
네이갈라스는 생명을 수확한다.
수확한 생명에게는 섭리를 뒤틀어서 기괴한 방식의 불사(不死)를 내린다.
네이갈라스가 살아 있는 한, 그 하수인들은 계속 육신을 받고 부활할 수 있었다. 놈의 군세가 왕들 중에 제일 큰 이유다.
“브뤼나, 부활이 최대한 늦게 이뤄지게 돈가스를 만들어버려.”
“돈가스요?”
“한국의 전통 음식이지.”
“뭐라고요? 돈가스는 우리 일본 거 아니었어요?”
“고구려 수박도에 돈가스를 튀기는 고구려 개마무사의 모습이 그려져 있단 것도 모르니? 돼지 돈에 순우리말인 가스가 합쳐진 단어란다.”
“?”
물론 거짓말이다.
박현수가 나를 어처구니없게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크흠, 저렇게 진지하게 반응하니 부끄럽구먼.
“뭐해, 얼른 안 만들고.”
브뤼나가 울상을 지었으나 결국 시킨 대로 스타폴로 도마뱀 돈가스를 만들기 시작했다.
[긴급 전투 퀘스트 완료 : 원시 심연 1 / 5.]라리엔 공략은 이제 막 시작한 참이었다. 저런 악마는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굴길을 빠져나가는 내내, 용암이 끓는 소리가 커져갔다. 메마르고 까끌까끌한 모래의 바람 속에 매캐한 유황의 악취가 섞여 있었다.
굴길의 긴 어둠을 빠져나오자, 모래 폭풍이 작렬하는 사막이, 시공간을 초월한 사막이 보였다.
황량하고 괴괴한 풍경이었다.
윤곽이 모호한 기둥들이, 저쪽으로 끝없이 펼쳐져 나갔다. 이것이 바로 기둥의 도시.
수평선 쪽 마지막 기둥 어딘가에 사이코 플레이어가 있을 것이다.
[새로운 지역 : 네이갈라스의 영지.]자, 어디에 숨어 있냐.
형 지금 간다.
뒤질 준비는 됐겠지?
▶ ▶ ● ◀ ◀
현재 열람 가능한 역사 :
용현이 남긴 세 가지 기적 중 하나, 청성 미른가디아는 영웅시대에 샤릴리온의 조력에 힘입어 네이갈라스를 봉인하는 데 성공한다.
그 봉인이 끝난 장소에는 하얀 나무 한 그루와 맑은 호수가 생겨났다고 한다.
그 이름, 백청목(白淸木)…….
보고 있으면 견딜 수 없이 처연해지는 그 하얀 나무와 푸른 호수가 바로 청성의 사명의 끝이었다.
백청목 또한 뇌향의 세츠넨이 네이갈라스의 도시를 지하에 매몰시킬 때 따로 어딘가로 전이되었다고 한다.
* * *
“옆에서 하나 더!”
거대한 기둥들을 스쳐 지나며, 네이갈라스의 핵(核)이 위치한 66번 기둥으로의 진격은 위험천만하기만 했다.
“현수 씨!”
“조준 중!”
“피터, 너는 왼쪽이다!”
마른침이 목울대를 울리며 넘어간다. 발에 밟히는 모래가 늪처럼 질퍽하게 발목을 삼킨다.
유사(流砂; Quicksand)다.
계속 한곳을 딛고 서 있다가는 그대로 모래에 빠져 죽게 된다. 라리엔의 모래는 일반적인 모래와 달랐다. 물에 젖는다고 진창이 되지도 않는다.
모래가 아니라, <잊혀진 왕들> 네이갈라스가 만들어낸 심연의 찌꺼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안 그래도 달리기 힘들어 죽겠는데, 사방에서 렙틸리언들이 끝도 없이 밀려 나온다.
물론, 이게 전부라면 마른침을 삼키지도 않았다.
상황은 최악으로 치달아, 이미 ‘죽은 자의 공국’ 이벤트가 발동되어 있었다.
죽은 자의 공국.
네이갈라스의 일등 권속, 골공왕(骨空王) 하이르칸이 해골 왕좌에서 깨어났을 때 발생하게 되는 전투 이벤트.
들짐승처럼 네 발로 달리는 원시인들도 수없이 몰려온다.
본래는 중후반에 심연 계열의 시체 술사 각성 퀘스트 때 개방되는 이벤트이건만…….
“아가씨, 여긴 제가 맡겠습니다.”
그 끝도 없이 밀려드는 원시의 파도를 정면으로 막아서는 그놈. 시그니처 포인트라 할 수 있는 가죽 롱코트의 옷자락이 거칠게 펄럭거린다.
싸가지 없는 놈이다.
싸가지라곤 정말 없는 놈인데, 이럴 때 보면 진짜 그냥 존나 멋있다.
아무도 ‘정말 괜찮겠냐’라거나 ‘혼자 할 수 있겠어’라고 묻지 않는다. 그냥 놈이 막는다면 막는 거다.
왜냐고?
놈이 바로 이데아 인류 NPC 중 최강, 심연 사냥꾼 로헤이리츠이니까.
“죽지 마, 로우. 명령이야.”
그 대답으로, 저 답도 없는 물량에 ‘답이 있게’ 만드는 숫자의 공허충들이 놈의 주변에서 무수히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바이로니카, 너도 여기 남아서 로헤이리츠를 도와. 번개를 못 쓰니 약간 버거울 거야.”
“네, 아가씨.”
크세리니아가 심복들에게 지시하는 동안 나도 공대원들에게 이것저것 지시하느라 바빴다.
“지금부터 되묻지 말고 지시 사항 그대로 이행해. 야나, 지성만 올려. 죽은 자의 공국을 멈춰야 해. 공국의 대공자 이벤트를 발동시키러 가. 파멸의 선지자 각성도 거기서 할 수 있어.”
“으, 응!”
“사쿠라이는 야나를 따라서 가고. 도망칠 일이 많을 테니까 기량만.”
“캡틴. 저는 신앙을 올려요?”
“넌 아까 힘이 부족해 보였으니 신앙 말고 힘. 피터, 너도 마찬가지다. 박현수 씨는 지금 기량이 어떻게 됩니까?”
박현수가 특유의 빠릿빠릿함으로 인터페이스를 열었다.
한국 특수부대 간지의 정점 UDT/SEAL들이 어기적거린단 건 상상도 못 할 일이다. 나는 전장에서 이 작자들을 본 날 처음으로 기립 박수까지 쳐본 몸이다.
근데 오늘 처음으로 박현수에게서 답답함을 느꼈다.
“몇입니까? 시간 없습니다.”
“이게 대체 왜 이러지? 상태창이 안 열립니다.”
“그게 대체 뭔──?!”
그러나 그런 지시도 제대로 오가기 어려울 정도로 라리엔의 상황은 최악이었다.
화산(火山)이 움직인다.
수평선을 가득 채우며 붉게 뻗어 나가던 화산, 이 지하에 은밀히 유폐된 공간을 압도하던 산맥 전체가 움직인다.
「RuriwaaaaaaaaaaaaaaaaaaaaaaAAAAAAAAAAAAA…………!」
놈이 멀리서 보기에는 언뜻 악어를 닮은 아가리를 쳐들고 포효하자, 지축 전체가 요동친다.
“오, 오빠, 뭐예요, 저건?!”
“폭식공(暴食公), 베헤─리크.”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역시나 저 크기에 압도되어 입이 잠시 다물어지지 않았다.
베헤─리크는 네이갈라스의 이등 권속이지만 공략 난이도가 부모님이 안 계신 것으로 유명했다.
그래서 아무도 놈을 공략하지 않았다. 놈의 발목을 잡은 뒤 네이갈라스를 쥐어 패는 것이 국룰이지.
그것 말고는 답이 없었다.
전승지기와 이야기꾼을 통해 게임이 제공하는 공략법은 조부모님마저도 계시지 않았으니까.
[신성 기사, 샤릴리온. 그는 폭식공 베헤─리크의 체내로 들어가 그 핵(核)을 꿰뚫는 것으로 폭식공 토벌 작전에 성공했다.]아무도 그딴 짓을 하고 싶지 않거니와 들어갔다가는 100% 확률로 죽는데 누가 한단 말인가.
놈은 화산이다.
화산 속으로 들어간단 건 말이 안 된다. 하지만 이 또한 상정 범위 이내. 베헤─리크의 발목을 잡을 수 있는 바로 그 존재를 데려왔거든.
“크세리니아 아가씨, 저놈의 다리를 얼려서 잠깐이라도 움직임을 막아 주십시오.”
샤릴리온의 후손도 그딴 방법은 원치 않을 것이다. 후손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대신 그 흑막 놈은 반드시 내 앞으로 데려와. 물어볼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니까.”
“가능하면요. 참, 가이네이브 씨가 함께 가셔서 결계를 펼쳐드리면 도움이 될 겁니다.”
무엇보다 라리엔 내부에서는 권속들의 힘이 4할을 넘지 못하도록 제한된다.
청성 미른가디아와 뇌향 세츠넨의 힘이 놈들의 봉인을 억눌러 아직 봉인이 완전하게 깨어지지 않았다는 설정 때문이다.
그럼에도…… 사이코 플레이어는 그 모든 혼란을 효율적으로 이용할 줄 아는 놈이었다.
크세리니아와 가이네이브가 이탈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자기 피터가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지르더니 그 눈자위가 섬뜩하게 뒤집혔다.
“앞에서 적이 와요!”
“현수 씨, 브뤼나와 같이 전방 경계하세요!”
그때 피터가 고개를 홱 들어 나를 보았다.
피터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나를 들여다보는 듯한 기괴한 감각. 그 입이 부자연스럽게 열리더니 이빨을 딱딱거렸다.
“……환영한다, 마법의 사도. 이번엔 샬류안조차 널 구해주지 못할 거다. 여긴 청성과 뇌향의 힘이 닿은 공간. 외우주의 눈이 닿지 못하지.”
피터가 아니다.
놈이다.
빙의 계열 술식을 쓴 건가. 문제는 그게 아니다.
“너 엘리트였냐?”
엘리트가 아니고서는 샬류안에 대해 알 수 있을 리가 없다. 나도 발설한 적이 한 번도 없는데.
아니, 이상해.
엘리트 어쌔신과 아처와 헌터는 대륙에 있고, 여기에는 나와 리샤르뿐인데, 뭐지?
“흐, 흐흐흐흐, 너희들의 반응은 언제나 똑같지. 세 치 혀로 사람들을 농락하기만 하다가, 역으로 당혹감에 잠기게 되는 그 표정은 볼 때마다 새롭군.”
“야, 이 개새야. 자꾸 뭔 개 같은 컨셉질이야. 너 진짜 곱게는 못 뒤질 줄 알아라.”
“항상 모든 사도 중에 마법의 사도가 가장 볼품없었지. 네놈 또한 마찬가지다. 입만 산 애송이.”
한순간, 피터의 몸에서 마방진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마방진 다섯 장이 겹쳐지고 포개진 고차원 술식.
이게 여기서 발동한다면…….
이미 손보다도 빨리 머리가 발동한 뒤였다. 내 손바닥 위에서도 여섯 장의 마방진이 떠오른다. 대마력방호.
그러나 대마력방호는 놈의 마법을 막지 못했다.
힘이 부족해서?
아니, 놈이 마법을 사용하질 않았으니까. 대신 놈의 시선이 박현수의 등에 꽂혀 있었다.
“기이하군. 이 사내의 존재는 도대체 뭐지? 어떻게 외우주의 권속에게 <온 것들>께서 총애를 보이시는…….”
그래도 그 순간, 대마력방호는 녀석의 빙의 술식을 확실하게 무력화시켰다.
놈의 목소리가, 놈의 섬뜩한 시선이 산산이 깨어지며 조각난다. 대마력방호의 빛이 녀석의 이능을 무력화시킨다.
사실, 설정을 깊게 파보면 이 힘은 용현 레인 루드윅에게 마법을 배운 뇌향 세츠넨이 창안한 6성 마법이라 한다.
“야나! 피터를 돌보고 있어!”
즉시 박현수의 옆으로 달려가며 성검을 뽑았다. 그 옆으로 사쿠라이가 쌍권총을 쥐며 붙었다.
“오빠, <온 것들>이 뭐예요?”
“태양과 달의 신들. 신화시대 <잊혀진 왕들>의 압제로부터 세계를 구했던 신들. 근데 왜?”
“뭔가 이상해요.”
“신경 쓰지 마. 미친놈의 컨셉질일 뿐이야.”
“그렇다면 좋겠지만…… 엘리트를 사도라고 칭하는 것도 웃기고, 무엇보다 ‘항상’이라고 했잖아요. 그 사람도 이 배틀로얄에 온 건 처음일 텐데, ‘항상’이라는 표현을 어떻게 쓰죠?”
성검의 칼날에 렙틸리언의 주둥이가 찢겨 나갔다. 숨을 고르는데 사쿠라이가 계속 말했다.
“저놈, NPC 아니죠?”
“저런 NPC 본 적도 없어. 저딴 NPC 있었으면 이 똥겜은 그냥 처음부터 개같이 망했을걸.”
“근데 만약 NPC면요? 그때 그놈은 오빠가 플레이어냐고 물으니까 같은 취급 하지 말라고 화냈었잖아요.”
당혹감을 감추고 있긴 했으나, 내 머릿속은 사쿠라이가 생각하는 것보다도 더욱 뒤죽박죽이었다.
이상해. 이상하다.
엘리트가 아닌데 샬류안을 알고 있다. 외우주의 존재들이란 건 대체 뭐지? 그리고 사쿠라이 말대로 ‘마법의 사도는 항상 가장 볼품없었지’라는 말은 또 뭐지?
“뭔가 다른 스페셜 플레이어 아니겠어? 다른 재미를 위해, 엘리트 말고도 심어놓는. 컨셉질에 미친 인간만 받을 수 있는…… 메소드 플레이어라든가.”
“이건 진짜, 그러니까 그냥 제 추측인데요, 저도 진짜 뭐가 뭔지 모르겠는데, 오빠가 소설 같은 걸 많이 보셨을 것 같지는 않고…….”
관리자와 시청자들의 존재를 외우주라는 이름으로 인지하는 자.
‘항상’이라는 말을 쓰는 자.
그런데 만약 그게 플레이어가 아닌 NPC라면…… 서브컬처 대국의 소설가 지망 중학생은 그래서 그놈을 이렇게 불렀다.
“……회귀자 아닐까요? 저도 진짜 이상한 말이라는 거 아는데, 다회차 NPC라는 말은 더 이상하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