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 of the Fake Hero RAW novel - Chapter (157)
가짜 용사 이야기-157화(157/310)
#53 :
[9. 대관식] 나의 질문과 너의 대답, 너의 질문과 나의 대답 (2)7회차 막바지의 꿈을 꾸었다.
태양과 달이 모두 사라진 종말의 시대. 마지막 시나리오에는 이처럼 어둠밖에 없다.
그 세계적인 어둠 속에서 크리스가 나를 돌아보며 흐느꼈다.
– 이 세계는…… 왜 이렇게 잔인한 걸까……?
그때 나는 처음으로 그녀가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처연함 속에서 흐드러지는 아름다움. 신이 버린 세계에서 마지막 태양처럼 꿋꿋이 빛나던 인간성.
크리스에게 느끼던 감정은 평범한 감정이 아니었다. 명료하게 말할 수 있는 건 단 하나뿐.
크리스를 볼 때마다, 잃어버린 ‘나 자신’을 되찾는 것만 같은 가슴 떨림을 느꼈었다. 방법을 계산하는 게 아니라, 찾아내려고 하던 옛날의 나 자신을.
– 세계가 아니라 게임이야.
기억이 몇 가지 생략되어, 꿈의 정경이 최종 던전인 <서리늪 미궁>으로 바뀌었다. 죽은 빙룡 스케사리 앞에서 크리스가 눈물을 흘리고 있었는데.
– 드디어…….
순간 성검 샤릴리온이 갑자기 날더니 크리스의 심장을 꿰뚫었다. 피가 터져 나올 때 샬류안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메아리쳤다.
– 엘리트 플레이어는 서로 연합할 수 없습니다!
크리스가 핏물을 고통스럽게 쿨럭이며 내 쪽으로 손을 뻗었다.
– 정철…… 이 세계는…… 너무…… 가여워…….
크리스의 손이 마침내 내게로 닿았다. 내 볼을 쓸었다. 나는 아무런 감정도 없이 그 가슴에서 칼날을 빼냈다.
– 날 용서하지 마라.
크리스가 제 피 웅덩이에 쓰러지는 그 순간, 꿈이 깨어졌다. 숨을 헐떡이면서 벌떡 일어났다.
온몸이 식은땀으로 범벅이고 심장은 미친 듯이 날뛰고 있었다. 심신을 진정시키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달빛이 방 안으로 내리비치고 있었다. 작은 침대, 작은 책상, 작은 난로가 있는 아늑한 방.
여기는?
아, 그래, 종탑에서 박현수와 헤어지고 여관으로 왔었지…….
크리스가 보낸 편지는 협탁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아직도 읽지 않았고, 읽지 못했다. 두려웠다.
호흡을 정돈한 다음, 방을 나서 1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갔다.
카운터에서 맥주잔을 받아든 뒤 방으로 돌아오면서 그 편지를 진정 읽어야만 하는지를 몇 번이고 생각했다.
침상에 걸터앉은 채 술을 마셨다. 거듭 마셨다. 뜨거운 술이 차가운 몸을 적셔줄 때까지.
마시면서, 고요하게 타오르는 난롯불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왼손으로는 그 편지를 쥔 채.
[알림 : 캬, 취한다!]– 취기 수치 : 82%
난롯불 속에서, 허깨비가 보이기 시작했다. 크리스는 공략에 성공할 때마다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곤 했다. 이유를 물으면 환하게 웃으며.
– 감사하다고 기도했어.
– 뭘?
– 널 만날 수 있게 해주셔서.
크리스의 말은 늘 너무나도 따뜻해서, 마치 태양처럼 따스하게 빛나서…… 크리스를 싫어하는 공격대원은 한 명도 없었다.
물론, 나 또한…….
눈을 마구 비볐다. 환각이라니, 미친 것일까.
이번에는 어머니의 미소가 크리스의 모습을 지워내며 나타났다. 뒤이어 박현수, 사쿠라이, 브뤼나, 야나의 미소가 불 속에서 겹쳐져갔다.
한숨이, 몸속 깊은 곳으로부터 터져 나왔다.
“네가 도대체 어떻게 이 배틀로얄에…….”
어떻게 엘리트 플레이어 자격을 얻었고, 이 편지는 왜 보낸 거냐. 아니, 잊자. 그런 건 이제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
읽어서는 안 돼.
이 편지를 본다고 한들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잖아.
그래…….
과거의 망령은 잊어버리는 게 옳아. 이 게임의 클리어는, 이제 나 하나만의 싸움이 아니잖아.
나는 8회차 정철 공격대의 공격대장이었고 이미 휘하에 4명의 부하가 있었다. 1명은 죽었다.
공격대원들의 소원까지 책임져야 할 의무를 지고 있는 셈이었다. 목숨이 판돈으로 걸린 전쟁, 개인적인 감정은 배제해야 옳았다.
읽어보기만 할까?
머릿속에서 ‘정철’이 ‘에델 바이스’와 흐느끼면서 싸우고 있었다. 그때, 열린 창문으로 옆방의 목소리가 들렸다.
단순한 잠꼬대였을 것이다.
하지만 상태창을 통해 오감마저도 증폭된 탓인지, 그 소리는 너무나도 선명하게 들렸다.
“아빠…….”
사쿠라이의 목소리를 인지한 그 순간, 난로로 걸어가서 편지를 난롯불 속에 집어 던졌다.
편지가, 크리스의 글씨가, 크리스의 웃음과 울음이 완전히 잿더미로 변할 때까지 난롯불을 들여다보고만 있었다.
이 쓰레기 같은 종말의 세계.
나와 크리스는 그 세계에서 엘리트 플레이어였고, 서로 경쟁하며 이 세계를 멸망시켜야만 한다.
– 엘리트 플레이어는 서로 연합할 수 없습니다!
게임의 절대적인 룰이 그러니까.
너와 나는, 시청자와 관리자들의 장난감으로서 죽고 죽여야만 하는 운명이야. 그러니까, 그러니까…… 다음에 만났을 때 너와 나는 칼을 겨누게 되겠지…….
너에게 칼을 겨누고, 너를 벨 때 내 마음에 망설임이라고는 일절 없어야 한다.
편지는 읽지 않았다.
침대로 돌아가 누웠다. 창문의 틈새를 뚫고 들어온 밤바람이 뼛속까지 차갑게 파고들었다.
* * *
대관식은 [영목의 광장]에서 개최되었다.
댕…… 대앵…… 대애앵…….
성도의 모든 종탑에서 종이 울렸고, 영목 양옆으로 늘어선 깃발들이 아침의 바람에 펄럭였다. 그 광경은 웅장하고 힘찼다.
“수상 각하.”
아르츠레히드가 수상의 관복을 걸치고 그 광장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아르츠레히드가 지나갈 때마다 병사와 기사들이 경례를 붙였고, 아르츠레히드가 목례로 화답했다.
장교로 복무할 때 질리도록 겪었던 일. 내 목례에 스킬 레벨이 붙는다면 아마 Max일 것이다.
“아르츠레히드 영주님이 저런 대우를 받는 걸 보니 감개가 무량하군요.”
옆자리에 서 있던 박현수가 말했다.
지금 누구 앞에서 그런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 내가 얼마나 이 광경을 꿈에 그려 왔었는지 알면 놀랄걸.
누구에게는 하나의 게임에 불과했지만, 나에게는 삶의 일부였었으니까.
“내 친구들이여.”
아르츠레히드가 문득 발길을 돌려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이미 대관식의 예식이 시작되었으므로 이건 심히 이례적이며 있어서는 안 될 처사였다.
그러나 아무도 그 행동에 반발하지 않았다.
“우리들에게 경의를 받아야 할 건 이쪽인데, 자네들에게 이런 일까지 하게 만들어 미안하네.”
아르츠레히드가 나에게 손을 내밀었으나, 그 손을 선뜻 잡을 수가 없었다.
이러지 마.
부탁이니, 나에게 이러지 마.
내가 겨우 쌓아 올린 마음, 내 신념이 무너지게 만들지 마. 그래서 그걸 잡지 못하자 사쿠라이가 대신 당차게 잡았다.
“오빠가 어제 손에 부상을 입어서요!”
무례하게 비칠 수도 있던 걸 사쿠라이가 제대로 수습해 주었다. 여기저기에서 웃음이 터졌다.
“Shhhhiirakk!”
그 머리 위에 앉아 있던 빙룡, 스케사리의 울음이 사쿠라이의 귀여움을 한층 강조했다.
스케사리의 몸에서 햇살이 투명하게 비껴 나갈 때마다, 모두의 이목이 그곳으로 집중되었다.
스케사리는 로헤이리츠와 나는 극도로 싫어한 반면 사쿠라이와 박현수는 잘 따랐다.
이놈, 쓰레기 탐지기인 게 틀림없어. 나중에 딸을 낳게 되면 꼭 하나 사주고 싶은데 사전 예약 되나요?
왜 쓰레기 탐지기냐면, 방구석 폐인 GOAT 야나도 아주 싫어하기 때문이다. 신뢰도 급상승.
“사쿠라이 너, 신태엽이랑 죽이 잘 맞겠다.”
“사쿠라이 너, 혜림이랑 정말 친하게 지낼 것 같아.”
아르츠레히드가 피식 웃으며 우리 앞을 지나간 뒤, 나와 박현수가 거의 동시에 그렇게 말했다.
“신태엽? 혜림?”
“잊어. 진심으로 죽빵 마려운 녀석 있어. 갑자기 왜 그놈 생각이 났는지 모르겠네. 혜림이는 현수 씨 동생이고.”
“음, 동생? 아저씨, 예전부터 한국인 또래 친구가 갖고 싶었어요.”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거야. 그때는 혜림이도 건강할 거고…… 일본 여행도 가보고 싶다고 했는데 네가 안내해 주겠니?”
사쿠라이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르츠레히드가 최고 상석인 트라이폴 백작, 즉 크세리니아 파티 앞을 지나며 가볍게 인사를 했다.
그다음에 서 있는 건 앤티키아 공작이었다.
앤티키아의 공작, 아비가일.
강철 같은 아름다움을 가진 NPC. 걸을 때마다 붉은 머리가 우아하게 춤춘다. 주목해야 할 점은 그 머리 양쪽으로 솟은 여우 귀.
요컨대, 아비가일은 수인이다.
정확히는 삼미호.
영웅시대의 용사 파티의 일원, 삼미호 시렌의 가까운 혈족이다. 시렌은 켈렉─샼을 토벌하고 죽었으므로 후손이 없다.
아비가일의 눈동자에 짙은 수심이 드리워져 있었다. 켈렉─샼 때문이다. 앤티키아는 켈렉─샼의 레이드가 펼쳐지는 장소다.
그러니 곧 아비가일과는 긴밀한 협력 관계를 맺게 된다. 이 짧은 평화가 끝나고, 켈렉─샼과의 혈투가 시작되는 것이다.
뒤숭숭한 생각을 머릿속에서 털어냈다. 지금은 대관식에만 집중해야 했다.
“제롤드 경, 부탁드립니다.”
아르츠레히드가 왕좌 옆에 서자 영목 기사단 단장, 제롤드가 앞으로 나섰다.
오늘 영목 기사단의 의장은 전보다도 훨씬 화려했다. 전포와 망토에 최고급 은실로 수놓인 영목.
거기서 제롤드는 더 특별하다.
뻗어 나가는 가지의 숫자는 17개. 17개는 기사단장의 상징이었다. 견장에도 같은 문장이 있었다.
검대에 꽂힌 장검과 지휘봉이 보였다. 기사단장의 장검과 지휘봉.
제롤드가 나를 보며 씩 웃었다.
“나중에 자네에게 이걸 넘겨주는 날까지 잘 간직하고 있을 테니 걱정 말게.”
“예? 아니, 저는…….”
“그런 사내의 동생이라니, 엄청난 행운을 타고난 꼬맹이로군.”
그러자 사쿠라이가 과장스러운 동작으로 허리를 굽혔다.
“각하! 그 말씀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각하!”
“Shhhhhhhhiiikkk!”
“각하를 두 번이나 할 필요는 없다. 우하하하!”
나는 그 대화를 재빨리 끊었다.
“지금은 대관식 도중인데 어찌 이러십니까.”
“이렇게 기쁜 날, 딱딱한 대관식보다는 부드럽고 기쁜 대관식을 치르고 싶네. 이날을 얼마나 고대해 왔는지. 고맙네, 박현수.”
“아뇨, 모두 에델 씨 덕입니다.”
“자네 같은 영웅들이 내 후임자가 되어준다면 나는 더없이 기쁠 걸세.”
제롤드의 과찬은 고마운 일이었으나, 나는 기사단장 자리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었다.
그건 확정 사항이었다.
애초에 그때까지 이 세계가 남아 있을 리도 없고…… 더 말해봐야 무의미한 대화였다.
“로드커맨더, 전하께서 오고 계십니다.”
제롤드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더없이 절도 넘치는 동작으로, 뒤돌아서며 호령을 내린다.
“문을 열어라!”
궁성으로 이어지는 문 양쪽으로 영목 기사단 의장대가 도열해 있었다.
의장이 단연 화려하다.
날개 장식 투구, 비단 망토, 예식용 대검을 양손으로 치켜든 자세까지도.
기사 2명이 궁성의 문을 힘겹게 당겨 열었다.
“국왕 전하 납시오!”
문 안쪽에서 곧바로 종사관의 외침이 들려 나왔다. 캐슬베이아를 힘차게 울리던 종소리가 하나둘씩 멎어갔다.
도시가 고요해질 때쯤 문이 온전히 열렸다.
제롤드가 발뒤축으로 뒤돌아서며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기사단!”
제롤드가 사령관의 칼자루를 움켜쥐자 영목 기사들이 일제히 왼손으로 대검의 날밑을 잡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지고.
“국왕 전하께 일신(一身)을 바쳐라!”
제롤드가 지휘봉을 뽑아드는 것과 동시에 기사들이 대검을 빙글 돌려 절도 있게 땅을 내려쳤다. 이어서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고개를 숙였다.
몸이 감탄으로 떨렸다.
마치 한 몸처럼, 한순간에 이루어진 동작.
“와아아아아아아아……!”
백성들이 열렬한 환호성을 지르는 동안, 제롤드가 다시 발뒤축을 끌며 궁성 쪽으로 돌아섰다.
웃고 있었다.
그때 나는 웃고 있었다.
스스로에게도 낯선 미소로.
왕실 행렬이 질서 정연하게 밀려 나오는 것을 보면서, 그 선두에서 요르한 4세가 걸어오는 것을 지켜보면서.
요르한 4세.
반투명한 베일을 얼굴에 드리운 소녀가 있었다. 걸을 때마다 유려한 레이스 장식의 치맛자락이 대리석 바닥을 스친다.
나는 말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저도 모르게 말하고 있었다.
“평생 잊지 않을 겁니다.”
나는 박현수에게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현수 씨가 보게 해준 성도 퀘스트의 새로운 종장, 평생 잊지 않을 겁니다.”
얼마나 괴로워하고, 얼마나 괴로워하고 슬퍼하다가 끝내 이 광경을 보는 꿈을 접어야 했는지는 이제 생각나지 않는다.
배틀로얄이란 건 알고 있어.
언젠가 다 멸망시켜야 한단 것도 다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냥 이 꿈의 광경에 순수하게 취하고 싶다.
“똑같이 말씀드리죠. 에델 씨 덕에 보게 된 성도 퀘스트의 종장, 저도 잊지 않을 겁니다.”
박현수가 피식 웃었다.
나도 웃었다.
박현수의 말을 비웃었다거나 헛웃음을 흘린 게 아니라, 그와 함께 웃은 것이다. 함께, 웃은 것이다.
“모두 정숙하시오!”
제롤드가 소리쳤다.
요르한 4세가 왕좌 앞에 도착한 것이다. 성도의 대주교가 왕관을 양손으로 받들고 계단을 올랐다.
“성도 캐슬베이아의 적법한 통치자이자, 이 땅의 모든 인간의 행복을 주관할 왕, 요르한 4세.”
그러나 요르한 4세가 손을 내저어 대주교의 대관을 물렸다.
“그 관을 받지 않겠어요.”
그것이 요르한 4세의 첫 번째 기행이었다.
진중한 트럼펫 소리와 웅장한 사열식. 그 모든 것의 마침표는 왕의 대관으로 끝나는 것인데.
대주교가 당황스러워했다.
“그것이…… 무슨 말씀이십니까, 전하?”
“대주교에게 대관의 영예를 누리는 것도 좋은 일이겠지요. 하지만 저는, 다른 이들에게 그 축복을 받고 싶어요.”
“허허…… 무슨 말씀이신지 알 듯합니다. 뜻대로 하소서. 전하.”
대주교가 싱긋 웃자, 요르한 4세가 위엄차게 고개를 돌렸다. 영주들이 정렬한 곳의 마지막…… 나와 박현수가 서 있는 곳으로.
“성도의 영웅, 박현수. 그대가 짐에게 관을 가져다주게. 그리고 에델 경, 그대가 나에게 관을 씌워줬으면 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