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 of the Fake Hero RAW novel - Chapter (158)
가짜 용사 이야기-158화(158/310)
#54 :
[9. 대관식] 나의 질문과 너의 대답, 너의 질문과 나의 대답 (3)순간, 광장으로부터 함성이 우레처럼 터져 나왔다. 갈채가 뒤를 이었다.
뭔……?
아니, 뭐라고……?
박현수가 지금 이 사태에 답을 구하듯 나를 바라보았으나 나라고 답을 알 리가 없었다. 나도 이 퀘스트에서는 뉴비 그 자체였으니.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나도 모릅니다. 진짜 몰라요.”
우리들이 머뭇거리자 아르츠레히드가 말했다.
“내 친구들이여. 그대들이야말로 오늘이라는 날을 만들어낸 주역이 아닌가. 어서 나와서 왕께 축복을 베풀어주게.”
박수와 함성에 떠밀린 우리는 단상으로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박현수가 먼저 대주교에게서 왕관을 건네받았다. 이어서 나에게 그 왕관을 전달해 주었다.
성도의 왕관은 소박하면서 아름다웠다. 순은의 왕관, 정교히 세공된 나뭇가지 장식은 순금. 이는 타르혜 론델과 영목, 즉 태양과 달의 합일을 상징하는 것.
왕관을 쥔 손이 부르르 떨렸다.
이 세계를 멸망시켜야만 하는 내가, 이 평화의 상징을 씌워줄 자격이 있는가.
“선왕께서는 백성들을 진정으로 사랑하신 왕이었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복잡한 심정으로, 요르한 4세의 머리 위에 왕관을 얹었다.
이 순간을 꿈꿔 왔었는데.
이 순간을 지켜보길 꿈꿔 왔었는데, 설마 직접 행하게 될 줄이야.
“전하께서도 백성을 사랑으로 살피는 성군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도저히 길게 말할 수가 없었다.
평화의 왕으로 오래도록 통치하소서…… 같은 상투적인 어구조차 말할 수 없었다.
저 말이, 에델 바이스와 정철이 고민 끝에 낸 최후의 타협점이었다.
왕관의 씌워지기 무섭게 나팔과 종소리가 폭발하듯 터졌다. 장정들은 함성과 갈채를, 부녀자들은 바구니에 담아온 꽃을 광장에 흩뿌렸다. 그 평화의 광경 속에서, 나는 박현수와 함께 단상에서 내려왔다.
– 멸망이 아닌 다른 엔딩을 만들 수 있는 건 아닐까요……?
– 정철…… 이 세계는…… 너무 가여워…….
이제야 알겠다. 내 가슴을 후벼 파는 감정의 정체를. 이건 쓰라림이구나.
내가 참가하기 전에 개최되었던 배틀로얄은 모두 다섯 번. 그 다섯 번 동안, 어쩌면 박현수처럼 뒤트는 플레이어들이 여럿 존재했을 수 있다.
그들 모두 분투했을 텐데도, 다섯 번의 배틀로얄 모두 ‘종말시대’로 귀결되었으며, 최종 결말은 빙룡 스케사리의 죽음이었다.
그것들이 뜻하는 바는 분명해.
시나리오가 얼마나 뒤틀리든, 결말은 관리자들의 통제하에 있다는 거겠지.
승리했던 공격대는, 기존의 루트를 밟은 공격대들일 거고.
바로 그때, 환하게 웃는 아르츠레히드와 요르한 4세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오면서 어렴풋한 망상이 내 뇌리를 스쳤다.
정말…….
하지만 정말로 만약에…….
박현수의 말대로, 이 게임을 완전히 뒤트는 ‘히든 엔딩’이라는 게 있다면?
아니, 아니다. 에델 바이스가 곧바로 정철을 머릿속에서 쫓아내었다.
그 보이지 않는 길을 개척하는 도박을 하느니, 이전 배틀로얄 우승자들처럼 끝만큼은 확실한 결말을 따르는 것이 옳았다.
그 길이 무조건 옳았다. 옳아야만 했다. 네가 여기에 왜 들어왔는지를 절대 잊지 마라.
“우스꽝스럽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
차가우면서 품격 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영주 및 기사들의 대열에 합류했을 때였다. 인사 임명식이 곧 거행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목소리의 주인은 바로 옆쪽, 앤티키아의 공작 아비가일이었다.
“저렇게 행복하게 웃고 있다는 게.”
“핸콕 공작님.”
“이야기는 많이 들었다. <트라이폴> 사태를 혼자서 해결한 성검의 계승자라던데.”
“과장된 이야기일 뿐입니다. 그런데 우스꽝스럽다뇨?”
“흠, 현명한 사내로 보였는데.”
아비가일이 뭐가 우습다는 건지는 당연히 알고 있다.
지금 꺼내려는 화제가, 여기에서 대꾸하기에 상당히 민감한 사안이기 때문이니 그렇지.
아비가일이 팔짱을 끼면서 평화의 광경을 천천히 훑었다.
“심연(深淵)이 몰려오고 있다.”
“압니다.”
“아니. 넌 모른다. 트라이폴에 관해 말하려는 게 아니니까. 북부에서는 지금도 순찰자들이 하나둘씩 사라져가고 있어. 깊은 숲으로 갔던 내 부하들이 돌아오지 않는단 말이다.”
켈렉─샼인가.
말하지 않아도, 상황이 어떤지는 이미 훤히 알고 있다. 아마 아비가일은 이렇게 말할 거다. 비둘기만 한 날벌레와 구더기로 뒤덮인 변사체들이 출현한다고.
“깊은 숲 인근에서 들개만 한 크기의 괴물 쥐들이 나타나고, 이미 이데아 북단은 혹한의 추위로 뒤덮였다.”
어라, 뭐지?
괴물 쥐? 혹한의 추위?
“이제 알겠나? 내가 성도에 온 이유는 대관식 때문이 아니다. 그 일을 논의하러 온 거지.”
“처음 듣는 이야기입니다. 혹한의 추위라니, 켈렉─샼은 벌레 군주일 텐데요.”
“그래! 아무도 종잡을 수 없는 게 지금 상황인데 저렇게 웃고 있을 수가 있다는 게 난…….”
“공포를 극복하는 방법에는 웃음도 있는 법입니다.”
왜 그 말이 튀어나왔는지는 나조차도 모르겠다. 이건 크리스가 내게 해주었던 말이었으니까. 그 말에 아비가일의 붉은 입술에 허탈한 미소가 걸렸다.
“매사에 여유가 있는 사내로군. 나쁘지 않아…… 힘 있는 자의 여유는 말이지.”
아비가일의 눈이 왕에게 향했다. 요르한 4세는 성가대로부터 장대한 축사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힘없는 자의 여유는 경멸스러울 뿐이다.”
“방금 하신 말씀들은 듣지 못한 걸로 하겠습니다.”
“제법이구나. 네가 나를 배려해 주겠단 것이냐?”
아비가일이 윤기 흐르는 붉은 머리를 쓱 쓸어 올리며 웃었다.
[NPC, 아비가일이 당신에게 미미한 호감을 품습니다. (+20)]아비가일과의 호감도가 상승하는 건 좋은 일이었다.
아비가일은 공작.
반도 북부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자. <트라이폴>과 <라리엔> 사건을 마무리한 성도의 권력자가 아니었더라면 이렇게 말도 못 붙이고 있었을걸.
“그대, 날 도와줄 수 있겠는가?”
이야기가 빙빙 돌긴 했지만, 목적은 역시 이거였군.
다행이었다.
서로 접근 목적이 일치하니까.
“영웅시대에 샤릴리온이 리암과 시렌을 도우러 왔었던 것처럼 말이다.”
신성 기사 샤릴리온이 리암을 위해 이데아 반도로 와 켈렉─샼을 쓰러뜨린 건 정말 유명한 영웅시대의 이야기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새삼 재미난 연합 전선이 형성된 걸 느꼈다. 시렌의 혈족인 아비가일과 샤릴리온의 계승자인 나.
“잠시 <스프링가든>에 들를 일이 있습니다만, 용무가 끝나는 즉시 공작님을 도우러 가겠습니다.”
켈렉─샼의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았다.
혹한의 냉기라니, 그건 거미 군주 아쉬론이 가진 특성인데……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빠르게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리샤르 후가 피똥 좀 싸고 있겠군. 예전에 시나리오가 뒤틀렸다고 징징대더니, 어디 좀 놀려주러 가볼까?
“자네는 친위대인 걸로 아는데.”
“선왕의 친위대였지요. 공작님을 도울 수 있다면야, 기꺼이 포기할 생각입니다.”
NPC에게는 입에 발린 소리만 잘 해줘도 반은 먹고 들어간다.
[NPC, 아비가일이 당신에게 상당한 호감을 품습니다. (+80)]지금처럼.
“정말 마음에 드는 사내로군. 고맙다. 나는 영빈관 2층 상실에 머무르고 있다. 오늘 저녁에 날 찾아와 주겠느냐? 자세한 내용은 그때 알려주겠다.”
아비가일이 마지막으로 속삭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메인 퀘스트 도착 : 또다시 꿈틀거리는 혼돈 (1)]– 아비가일이 전한 종말의 전조가 심상치 않습니다. 구더기가 북부를 휩쓸고 있다고 합니다. 깊은 숲에서는 망자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고도 하는군요. 아비가일이 당신과의 대화를 원합니다.
* 경고 : 심연의 기운이 짙게 느껴집니다.
이상하군. 퀘스트 내용이 아비가일의 말과는 따로 논다. 갱신이 안 된 건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또 시나리오가 뒤바뀌기라도 했다는 소리인가? 사이코 플레이어 그놈이 또 뭔가 개수작을?
부우우우우우우우우……!
그때 성가대의 찬송이 끝나고 나팔 소리가 일제히 울렸다. 광장의 소란을 진정시켰다.
요르한 4세가 단상으로 올랐다.
한 손에 두루마리를 쥐고 있었다.
“나는 로바르 아르휀의 딸도, 엘리아 왕녀의 딸도 아니다.”
요르한 4세가 그렇게 말하며 두루마리를 펼쳐들었다.
“나는 오로지 요르한 3세의 후계자일 뿐이다. 그리고 지금 내가 그대들에게 말할 내용은 선왕의 유지이다.”
요르한 3세의 유지라고? 나는 그 유지를 들으며 몸을 떨어야만 했다.
당신의 이름으로 강경파를 모두 처형한 뒤, 당신을 광인으로 기록하고 처형하라는 내용. 모든 것은 성도의 평화를 위해서.
잠시 동안 탄식이 광장을 뒤덮었다. 눈물을 흘리는 이들도 있었다.
“이 서한은 본래 고명대신들만이 아는 내용이었다. 내가 왜 그 중요한 내용을 그대들에게 공개했는가? 그건 이 자리에 모인 그대들 모두가 선왕의 고명대신이 되길 희망하기 때문이다.”
“……!”
“나는 선왕의 뜻을 따를 것이나, 또 따르지 않을 것이다. 따르지 않는다 함은, 이 서한을 법황과 황제에게 보내지 않을 것을 말하며, 따를 것이라 함은 선왕께서 일구어 내셨던 ‘봄’을 계승하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환각이었을까.
요르한 3세가, 그 증기로 뒤덮인 몸이 아니라, 설정상으로만 존재하는 총명한 소년 왕 시절의 모습으로 저 앞에 서 있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
“성도는 이제 인류의 영토가 아니다. <온 것들>과 영웅시대의 위인들께서 바라셨던 것처럼, 인간과 요정 모두의 땅이 될 것이다. 나, 요르한 4세가 지금 이곳에서 공표하노라!”
“……!”
“‘여름’의 바람이 불어오고, 심연은 땅속에서 터져 나오고 있다. 괴롭고 힘겨운 여름이 될 것이다. 하지만 함께라면, 인요를 막론한 우리 모두가 합심한다면. 저 찬란했던 영웅시대처럼, 심연을 능히 물리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그 길을 나와 함께 걸어가 주겠는가? 요르한 3세의 고명대신들이여.”
영주와 귀족과 기사와 군사와 백성들이 일제히 외쳤다.
“예, 전하! 그럴 것입니다!”
나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요르한 4세, 소녀는 부모의 망나니 기질은 조금도 배우지 않고, 요르한 3세에게서 총명함만을 배워왔구나.
쉼 없이 울리는 갈채를 진정시키고 아르츠레히드가 다른 두루마리를 들고 앞으로 나섰다.
“나, 수상 아르츠레히드가 새로운 왕의 시대를 이끌어갈 인재들을 호명하겠다.”
대폭적인 인사이동이 있었다.
강경파 영주 세력들이 대거 일소되었기 때문이었다. 그중에서 가장 큰 대우를 받은 건, 역시 나와 박현수였다.
“에델 바이스, 박현수, 그대들을 여왕의 친위 기사로 임명한다.”
“예?”
“에델 바이스, 그대는 선왕의 마지막 친위 기사로 그 유지를 완성시켰지. 이제 나 또한 그대의 도움이 절실하다. 여왕으로서 명하니 단상 위로 오르도록.”
친위 기사의 직위가 유지된다면 나로서는 환영이었다. 아직 이데아에서는 할 일들이 꽤 있다.
박현수와 함께 단상 위로 오르자, 장교들이 왕에게 어떤 장식품을 건네주는 모습이 보였다.
우리들은 무릎을 꿇었다.
여왕은 우리들의 어깨를 칼등으로 여러 번 치지 않았다. 가까이 다가와서, 그 장식품을 가슴팍에 달아주었을 뿐이었다.
칼날 모양의 은제 장식.
아니, 이건 설마……?
“에델 바이스와 박현수, 그대들을 지금부터 여왕의 칼날로 임명하노라.”
……이 지위를, 초반 시나리오가 끝나가는 지금 얻었다고?
[축하합니다! 당신은 요르한 4세의 ‘군주의 칼날’이 되었습니다. 주군의 권세를 마음껏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데아 반도 영향력이 +10080 (+9780)이 되었습니다.
[업적 달성 : 군주의 권세를 휘두르는 자.]군주의 칼날.
이건 대륙으로 넘어간 뒤에야 ‘황녀의 칼날’이라는 이름으로 활성화되는 직위였다.
황녀가 가장 신임하는 플레이어에게 내리는 직분이기에 나는 본래 제1황녀 힐더의 칼날이 되려고 했었다.
[전용 패시브 스킬, 《군주의 칼날》이 활성화됩니다.]‘칼날’은 그야말로 군주의 대리자였다. 절대적인 권위자가 된다는 소리다.
‘칼날’의 말은 왕의 말과도 같았고, 어딜 가나 왕의 수호자에 준하는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만큼의 대가도 있었다.
바로 계약 관계에 의해, 주인의 소환에 언제 어디서든 응해야만 한다는 것.
“나의 칼날로서 심연을 척결하세요. 이데아의 모든 인간 영주들이 그대의 뜻을 나의 뜻처럼 받들 겁니다.”
꼬맹이가 제법인데…….
나를 이데아에 잡아두기 위해서 이런 방법을 쓰다니. 벗어날 방도도 보이지 않았다, 지금은.
환성과 갈채가 다시 폭발했다.
좋아…….
일단은 받들어주지.
영주들에게 지시를 내릴 수 있다면, 켈렉─샼 레이드가 수십 배는 쉬워질 터였으니까.
이건 앤티키아 공작과 친분을 쌓는 것과는 수준이 다른 일이었다. 동등한 관계가 형성되니까.
우리들이 단상 아래로 내려가자, 아르츠레히드가 마지막 두루마리를 들고 앞으로 나섰다.
“요정들이 3시간 전, 타르혜 론델의 봉화를 올렸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들이 우리에게 손짓하고 있는 것이다.”
그 말에, 켈렉─샼 레이드를 위해 머릿속에서 회전하고 있던 모든 생각이 정지했다.
타르혜 론델?
타르혜 론델의 봉화는 <온 것들>이 이 땅에 남겨둔 화합의 상징, 영웅시대에 리암과 샤릴리온이 올린 것을 마지막으로 단 한 번도 오른 적이 없다.
“왕께서 그 봉화에 대한 대답을 직접 하실 것이다. 전하.”
영웅시대, 켈렉─샼의 진군으로 궁지에 몰린 요정은 타르혜 론델의 봉화를 올리게 되었는데 당시 인류 군대를 통솔하던 샤릴리온은 이렇게 명했다고 한다.
– 인류가 화답할 때다.
그것과 똑같은 말을.
대영웅이 한 것과 똑같은 말을.
요르한 4세가 팔을 힘껏 뻗으며 외친다.
“인류가 화답할 때다.”
온몸을, 어쩌면 영혼조차도 뒤흔드는 전율(典律).
“봉화를 올려 모든 군세를 집결시켜라! 여왕으로서 첫 번째 칙명을 내리니, 인류의 모든 군대는 앤티키아로 결집하라!”
꿈에서나 그리던 시나리오가 눈앞에서 그대로 펼쳐지고 있었다.
요르한과 발데마르…….
옛 영웅시대처럼, 두 영웅의 연합 전선이 심연의 군세를 몰아낸다는 시나리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