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 of the Fake Hero RAW novel - Chapter (160)
가짜 용사 이야기-160화(160/310)
#56 :
[10. 앤티키아] 결전, 엘리트 나이트 (2)“정산이 이미 이뤄졌다고?”
뭐가 어떻게 된 거냐.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던 그때, 리샤르의 손바닥 위에서 무언가가 번뜩였다.
기이한 주문식이었다. 순백의 냉기가 회오리쳐서 주문식의 형상을 이루고 있었다.
“저런, 얼마나 무능하면 관리자한테까지도 버림받은 건지. 불쌍한 놈.”
지면을 박차려다가 순간 정지 동작으로 회선, 칼날의 방향을 위로 올렸다.
챙, 웬 기괴한 도끼날이 성검과 맞부딪쳐 온다. 눈보라가 악마의 형상을 갖춘다면 이런 모습일까.
기형적인 팔다리는 각각 4개. 눈동자는 9개, 그 텅 빈 눈구멍에서 악몽이 꿈틀거렸다.
“처음 보는 거라 놀랐나? 너무 원망하지 마라. 세상사라는 게 원래 불공평한 거니까.”
순간적으로 공략법을 생각해 보았다. 거구니까, 다른 거구형 몬스터와 공략법도 비슷하지 않을까.
일단 한번 해보면 알 터.
성검을 잡아 빼는 것과 동시에 악마의 팔모가지를 올려쳤다. 역겨운 신음 소리가 들리며 도끼가 허공을 날 때, 빙글 돌아 나머지 팔들을 내리 가른다.
“PhyShyaaAaaaaaaaaaaaaK……!”
악마가 중심을 잃고 휘청거리던 순간, 그 대가리를 샤릴리온의 칼날이 꿰뚫었다.
“VVIP의 힘, 생각보다 별거 없는데?”
“이걸 보고도 똑같은 말이 나올까.”
딸랑…… 딸랑…… 딸랑…….
사방에서 음산하게 울리는 방울 소리.
허연 수염을 기른 악마들이 지팡이를 쥐고 걸어오고 있었다. 방울의 역할은 곧 알 수 있었다. 냉기를 토하는 쥐 떼가 그 곁에서 무리를 이루어 으르렁거린다.
“사, 살려, 살려줘, 제발……!”
미쳐버린 플레이어가 한 악마의 손에 붙잡혀 있었다. 리샤르가 싱긋 웃은 순간, 악마의 손에서 그 남자의 몸이 으스러졌다.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저게 네 미래다.”
균형 잡힌 체격에 귀족적인 인상을 가진 프랑스의 중년인.
사슬 갑주와 망토 차림은, 피에 흠뻑 젖은 것만 제외하면 지나치도록 단정하다.
그럼에도 내가 놈에게서 받는 인상은 혐오감과 공포뿐이었다. 정체 모를 병적인 한기가 내 머릿속을 떨게 만드는 것이다.
“끝장내 버려.”
리샤르가 말했다.
놈의 소환수보다도 내가 먼저 움직였다.
곧바로 엘리트 플레이어들 간의 특전 스킬 대결이 시작됐다.
[플레이어, 리샤르 후가 전용 스킬, 《검신의 극의 : 참마격》을 시전합니다!] [플레이어, 에델 바이스가 전용 스킬, 《현자의 극의 : 대마력방호》를 시전합니다!]지력 85. 예전보다 더욱 견고해진 《대마력방호》의 힘이 순백의 검기를 상쇄시킨다.
채애애애애애앵!
힘에 밀렸는지, 아직 혹한의 힘이 남아 있긴 하나 피하기에는 충분하다.
검기와 마법진이 깨부숴진 그 장소 너머에서, 나와 리샤르의 칼이 처음으로 칼을 맞부딪쳤다.
“마법 못 쓰는 소서러라. 엘리트 특전이 울겠군.”
리샤르의 표정에서 경멸의 빛이 감돌았다. 놈은 외형과 목소리의 괴리감이 너무 심했다. 다른 사람이 내는 목소리 같기도 했다.
“칼 못 쓰는 엘리트 나이트보다는 나을 것 같은데?”
놈의 칼을 간단히 밀쳐낸 뒤, 열린 허점을 노리고 쇄도해 들었다.
성검의 칼날이 녀석의 목을 잘라내기 직전, 내 양쪽에서 시공간이 찢어지더니 악마의 손아귀가 짓쳐들었다.
뒤로 세 번을 굴러 낙법으로 일어섰다. 그사이 악마들이 차원의 균열을 찢고 이 세계로 발을 내디뎠다.
역시, 소환술 계통인가…….
본래 소환사 클래스였을지도 모른다. 전속 계약을 통한 권능은 저런 식으로 받는 건가?
“PhyShak!”
일어서면서, 덮쳐드는 악마의 포효를 가볍게 피했다. 직후 그 팔과 다리들을 차례로 분쇄, 머리통에 칼날을 내리쳐서 마무리.
악마는 피조차도 새하얬다.
눈발이 날리는 듯도 했다.
수십의 악마 쥐들이 덤벼들지만, 어린갑의 심연 방출 앞에서는 별것 없는 잡몹들이다. 그 숫자가 끝도 없단 게 문제지.
이상해.
이상하다.
이렇게 많은 소환수를 소환했는데, 어떻게 마력에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을 수 있지?
그렇다면…….
소환사의 마력이 다 고갈되길 바라는 소모전보다는, 속도전으로 단숨에 끝장을 내는 게 맞겠어.
잠시, 칼끝을 내렸다.
손가락에서 따스한 빛을 발하고 있는 내 ‘필살기’의 존재 유무를 재확인한다.
가능할까?
가능해.
정산에 참여하지 못했기에, 녀석은 내 힘을 모른다. 넌 내가 어떤 힘을 쓸 수 있게 됐는지 몰라.
유감이다.
그걸 알게 되는 순간이 네가 죽는 순간이 될 테니.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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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성 미른가디아는 빛의 결사, 제레니온을 조직했다.
영웅시대, 카셋두르는 제레니온의 단장이었는데 그 호기가 결연하고 청성에 대한 존경심과 충성심이 누구보다 컸다고 한다.
그래서, 청성과 비슷한 최후를 맞이했다.
켈렉─샼의 육신 부위 중 하나를 자신의 몸에 봉인한 것인데, 청성은 네이갈라스 전체를 봉인했으나 인간의 몸으로는 육신 부위 하나가 고작이었다.
그럼에도 그의 희생은 벌레 군주 토벌전에 큰 영향을 남겼다.
* * *
현수는 카셋두르 성묘에 이르기까지 총 두 번의 도움을 받았다. 하나는 플레이어에게, 또 하나는 NPC에게였다.
한 걸음.
언덕이 점점 가팔라져 갔다.
성묘의 입구는 산악의 한가운데에서 자연과 일체가 되어 세워져 있었다.
또 한 걸음.
모두의 숨이 점점 거칠어졌다.
제일 거친 건 역시, 엘더 사인을 계속 유지하고 있는 야나와 그걸 업고 산을 오르는 박현수였다.
“저 안에서 빛이 새어 나와요!”
사쿠라이가 말했다.
강령술로 계속 길을 열어댄지라 안색이 창백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걸 계속 지켜주던 브뤼나도.
“근데 어떡하죠? 이제는 강령술로 이용할 수 있는 사체가 없어요!”
“아, 젠장! 바로 앞인데!”
“나, 나, 이제, 정말 한계…….”
“조금만 더 버티십시오!”
사방에서 냉기의 악마들이 튀어나오고 있었다. 눈보라가 더욱 격렬해져 가며 영혼까지 얼어붙는 듯한 오한을 느꼈다.
거기에 맞서던 한 줄기 빛, 엘더 사인의 원진은 점차 작아져 가기만 했다.
[플레이어, 갓스프링이 전용 스킬, 《화장방혈(火場防穴)》을 시전합니다!]화염은 그때 솟구쳤다. 솟구쳤다기보다는, 벼락처럼 하늘로부터 내리꽂혔다.
불길이 눈보라를 삼키며 달려와, 겨울의 권속들을 잿더미로 만들면서 휘몰아쳤다.
브뤼나가 입을 떡 벌렸다.
“와, 화장방혈? 이건 5성(成) 마법이잖아.”
제국의 7성 마법 체계에서 5성 마법은 대마법사들이 사용하는 마법으로, 전황을 뒤집는 것조차 가능한 힘이 있었다.
“이쪽으로!”
목소리의 주인이 저 먼 성묘 앞에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불길의 파도가 벽이 되었다. 성묘까지 연결되는 벽.
그 벽이 발치의 눈을 태워 흙을 드러내고, 들이닥치는 악마들로 하여금 비명을 흘리며 물러서게 만들었다.
“빨리!”
금발을 묶어 내린 말총머리.
처음에는 백인 소녀인 줄 알았으나 목소리는 높긴 해도 아직 변성기가 오지 않았을 뿐, 황인 소년이었다.
그래도 목소리만 아니면 누구나 여자로 착각할 정도로 예쁘장하고 하얀 피부를 갖고 있긴 했다.
갓스프링이라는 플레이어 텍스트를 가진 소년은 현수 일행이 성묘 안으로 들어오기 무섭게 외쳤다.
“팬도라!”
그러자 성묘의 어스름 속에서, 누군가가 양손을 기도하듯 맞잡았다.
빛, 빛이었다.
빛의 결계가 성묘 출입구에 둘러쳐지며, 일행을 바싹 뒤쫓아 오던 악마들은 그 빛을 감히 범하지 못하고 절규만 내질렀다.
“아슬아슬했어. 저것들은 불 속성이나 빛 속성이 아니면 안 통하더라고…… 어라?”
갓스프링이 저마다의 자세로 성묘 내부에 늘어진 일행을 살피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댁들은 누구야? 처음 보는 얼굴인데. 플레이어…… 맞지?”
“맞아. 그리고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정박사 공대의 브레인인 사쿠라이 노야라고 해. 나한테 빚을 지울 생각을 하다니 대단하네.”
가장 먼저 숨을 고른 사쿠라이가 그 앞에 당당히 섰다. 또래 소녀들 중에 키가 큰 편인지라 그런지 둘의 눈높이가 비슷했다.
“정박사? 영문으로는 닥터 정? 그 다단계 느낌의 공대 이름은 어떤 멍청이가 지었어?”
“까불지 마. 나 챌린저 원딜이야. 머리통에 헤드샷 맞고 싶어?”
“나는 황족 미드로 챌린저 찍었는데? 어디서 숟가락만 딸깍 얹는 포지션이.”
“숟가락? 어이가 없어서! 원딜은 영문으로 AD Carry야! 미드는 미드 라이너고! Carry를 못 하니까!”
“이게 어딜 숟가락 주제에 황족 미드님한테 따박따박 말대답을 하고 자빠졌나, 어!”
저것들은 왜 싸우고 있나…….
내부의 등불이 어스름하긴 했으나, 둘 다 상태가 좋지 않단 건 확연하게 보였다.
브뤼나가 사쿠라이를 붙잡고 말렸으나 사쿠라이의 얼굴은 이미 격노 상태로 진입해 있었다.
“너 누구야! 정철 오빠한테 모든 총애를 받고 있는 나한테 까불고도 무사할 것 같아?!”
“흥, 이 천재 마법사 갓스프링이 누구인지 모른다면 알려주는 게 인지상정. 정철 공격대의 에이스로 엔딩까지 봤던 태엽태엽 신태엽…… 엥, 지금 뭐라고?”
사쿠라이와 갓스프링은 서로 멍하니 쳐다보았다.
“정철 공격대?”
“정철 공격대. 너두?”
신태엽이 손뼉을 마주쳤다.
“뭐야, 그럼. 형아가 지금 여기로 오고 있단 거야? 캬, 우리 형아, 등장도 아주 예술로 하는구먼.”
“오빠를 알아?”
“형아라고 부르는 거 보면 몰라? 영혼을 나눈 형제 같은 사이지.”
“나는 피를 나눈 남매야.”
“뭔 헛소리야! 형아가 한일 혼혈이란 말은 듣지도 못했는데!”
두 꼬마가 싸우는 사이, 현수는 야나를 편평한 곳에 눕혔다. 그때 내부에 있던 다른 한 사람이 입을 열었다.
“정말 위험했습니다. 지금 밖에서는 외우주의 사도들끼리의 대전이 벌어졌으니…….”
성묘 강대상에, 피투성이로 주저앉아 있는 여성. 언뜻 수녀의 복장을 입은 듯 보였다. 현수가 말했다.
“당신은…….”
온화한 목소리에 수려한 미모. 긴 갈색 머리 아래로, 눈동자는 감겨 있었다.
맹인인가?
특이점은 또 있었으니, 피부색이 검었고 귀가 뾰족했다. 흑요정이다.
“이곳은 위험하니, 샛문을 통해 빠져나가십시오…….”
사쿠라이는 세계의 기억을 통해 그녀의 정체를 읽었다.
빛의 결사, 또는 계시(啓示) 결사 제레니온의 부단장, 팬도라 데인.
숨이 끊어지기 직전인데도, 오기로 이 성묘를 지키고 있었다.
세계가 몇 번을 바뀌어도 그녀는 여전히 이러고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팬도라는 도저히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현수를 보았다.
“이런, 이럴 수가…… 마침내 와주셨군요.”
“예?”
“눈이 없기에 당신의 내면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안에 깃든 빛의 축복…… 이처럼 강대한 빛은 처음 보는군요. 당신을 뵈었으니 이제 이 죽음에 미련은 없습니다.”
“잠시만요. 지금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외우주의 사도가 뭔지도.”
“외우주의 사도란 계시록에 적힌 악신의 다섯 사도. 우주의 유희를 위해 세계를 파멸로 이끄는 자들, 바로 그들이 지금 밖에서 싸우는 중입니다.”
계시록이라니…… 다섯 사도라는 말은 다섯 엘리트와 정확히 일치하고 있었다.
야나와 멍하니 시선을 마주쳤다.
야나가 고개를 저었다. 계시록이라는 아이템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단 뜻이 되겠다.
이상하다.
이상하잖아.
배틀로얄 버전이 되면서 NPC들의 지능도 업데이트가 된 건가? 하지만 저렇게 노골적으로 엘리트에 대해 알고 있다니.
“저들에게 사로잡혀서는 안 됩니다. 어서, <타르키리텐>으로 가셔야……!”
결계 밖의 악마들의 공격이 격렬해졌다. 결계를 유지하던 팬도라가 바닥에 피를 쏟았다.
현수가 급히 달려오자 팬도라가 품에서 목곽을 꺼내 건넸다.
불이, 신성한 불꽃이 그 안에서 빛을 발하고 있었다.
“홍염의 핵(核), 이걸 가지고 가십시오…… 가야만 합니다…… 당신은 봉화지기, 세상의 마지막 불을 지키고…… 그 불로 세계를 밝혀야 할…….”
* * *
똑같다. 베는 느낌 자체가 똑같아.
아니, 느낌만이 아니다.
성검이 악마들의 몸을 찢어발길 때마다, 그 절단면이 새하얗게 타오르는 게 보인다.
……혹시?
성검 샤릴리온은 외우주의 존재라는 것들 모두의 천적인 건가?
“제법 버티는군.”
리샤르 후에게로 질주하자, 악마 두 마리가 양쪽에서 덤벼들었다. 곧바로 성검이 날았고, 악마들은 차례로 처절한 비명을 터뜨렸다.
“SSHHIIAAAAAAA!”
성검에 쓰러진 악마들도 기이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죽처럼 흘러내리는 게 아니라, 불에 타들어가듯 재가 되어 소멸해 간다고 할까.
마치 정화되는 것처럼.
악마의 심장에서 성검을 회수한 다음, 리샤르에게로 돌진했다. 샤릴리온과 소검 니블랑제가 맞부딪치면서 청명한 쇳소리가 울렸다.
─카가가가가가각!
칼을 맞댄 채 서로를 노려보던 우리는, 동시에 서로의 칼을 쳐내면서 끝없는 공방전에 들어갔다.
챙챙챙챙챙!
《검신의 극의》 덕분인가, 리샤르는 성검의 공세를 제법 잘 받아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봐야 기본기가 뉴비보다 나은 수준에 불과한데!”
내려찍던 성검의 세를 한순간 바꿨다. 역시, 리샤르는 교묘히 뒤바뀐 공격을 간파해내지 못했다. 성검이 곧바로 그 틈을 파고들려 했을 때,
[플레이어, 리샤르 후가 전용 스킬, 《검신의 극의 : 파천검강》을 시전합니다!]소검으로부터 뻗어 나온 검강이 성검을 아슬아슬하게 맞받아쳤다.
파천검강(破天劍罡)…….
이 또한 기존의 보랏빛이 아니라 순백색이었는데 오리지널보다도 더 강렬했다.
그뿐인가.
샤릴리온의 온도가 일순 극저온까지 내려가더니, 쩡, 하는 굉음과 함께 칼날이 튕겨 나갔다.
“빙점폭발(氷點爆發)이다!”
샤릴리온의 칼날 위로 미세하게 퍼진 균열이 보인다. 어떻게 이런…… 샤릴리온은 수리도 할 수 없는데.
“방금 그게───!”
놈이 멀어지면서 휘두른 칼에서 악몽이 요동치고 있었으니까.
[플레이어, 리샤르 후가 《검신의 극의 : 참마격》을 시전합니다!]혼신의 힘을 담았는지 검기는 이전보다 맹렬했다. 순식간에 코앞까지 날아들었다.
“──네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였다고!”
이 정도의 지근거리, 분하지만 피할 수 없는 게 맞다.
《대마력방호》로 막을 수도 없다. 시전해봐야 두 권능의 충돌에 휘말려 죽는다.
답은 《형질흡력》뿐인데, 그걸 사용한 순간 사방에서 우글거리는 악마들의 먹잇감이 될 것이다. 그게 리샤르의 노림수겠지.
재밌네.
이 상황을 유도했단 말이지?
근데 이걸 어쩌나, 나도 지금 이 상황을 설계했는데. 이 상황, 네가 모든 마력을 공격에 집중하는 바로 이 상황을.
그렇기에 이 세계를 멸망시키는 건 네가 아니라 나다.
[성물, 테르시아의 눈물이 《달의 눈물》을 시전합니다!]손가락에 낀 월장석이 찬란한 빛을 토해내는 일순간 오묘한 깨달음이 시스템으로 구현된다.
[지력 수치 : 90.]– 《현자의 기억법》 제2단계 개방.
[사용할 전투 기억 선택.]– 1. 흑혈검 3식
– 2. 흑혈검 6식
– 3. 흑혈검 28식 : 혈괴참(血怪斬).
후보군이 고정이 아닌 건가?
하지만 됐다.
절식과 어깨를 견주는 최강의 초식, 28식이 나온 이상 1식이나 2식이 나왔든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다.
“28식을 선택하겠다!”
챠르르르…… 칼날을 성광이 휘감기 시작하나, 이내 극도로 강렬한 심연의 기세를 이기지 못하고 대신 흑혈이 칼날에 휘감긴다.
타락의 피, 검은 피로 이루어진 칼날이 절벽처럼 일어섰다. 날 길이만 6미터에 달하는 검강이 차갑게 빛난다.
이것은 <황녀를 위하여>의 흑기사 클래스가 가장 마지막, 즉 극후반에나 얻게 되는 초식.
“아니, 그건……?!”
승리감에 물들어 있던 리샤르의 표정이 당혹감으로 젖기 시작하나 이미 늦었다.
“막아, 저걸 막아!”
순백의 떼거리가, 검강이 완성되기 전에 매섭게 들이닥치지만 이 또한 문제없다.
[심연, 어린갑이 《심해의 회오리》를 시전합니다!]썩은 바다의 짠내를 풍기며 회오리치는 심연, 그 심연이 순백의 악마들을 소리 없는 절규만을 남기고 소멸시킨다.
“참(斬)!”
소리 없이 굽이치던 흑혈의 검강이, 음속 폭음을 터뜨리며 차원을 찢어발겼다.
광속의 검격.
넓고 크게 휩쓰는 칼날, 그 위에 놓인 모든 악마와 눈보라가 타락의 물결 속에서 녹아내리고, 그 너머의 술사, 엘리트 나이트에게로 단숨에 뻗어 나간다.
“아니, 아니야, 이건────!”
그 검격을 노려보는 리샤르의 표정이 납빛으로 굳어갔다.
놈은 움직이지 않았다.
물론 움직여봐도 소용없다. 피할 방도는 어디에도 없다는 건 너도 알고 나도 알고 지나가던 개도 알 정도니까.
“────────말도 안!”
마지막이니 마음껏 짖으라지. 운이 좋게도, 리샤르가 받은 VVIP의 힘은 아직 미완성이었다.
다행이었어.
이번에 처리할 수 있어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흑혈의 춤이 놈을 집어삼키기 직전, 세계가 멈추기 전까지는.
[집행 관리자 명령 : 게임이 일시정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