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 of the Fake Hero RAW novel - Chapter (167)
가짜 용사 이야기-167화(167/310)
#63 :
[10. 앤티키아] 결전, 엘리트 나이트 (9)이상한 일이다. 분명 더 큰 전투를 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왜 이 기억을 되돌아보고 있지?
─카아아앙!
허공에서 맞부딪친 칼날.
침묵이 흐른 한순간, <성검 : 샤릴리온>과 <니블랑제>가 수차례 격돌했다.
– 역시…… 근접전은 내가 밀리는군.
리샤르가 그렇게 중얼거리며 뒤로 여러 번 구르는 순간, 영상이 멈췄다.
– 우후후후후! 벌써부터 화끈 달아오르셨군요!
[시청자들이 관리자의 행패에 항의합니다!]– 엘리트 소서러와 엘리트 나이트의 대결. 그 맛보기 영상은 어떠신가요?
맛보기 영상이라니…….
시청자들이 야유하는 역겨운 소리가 귓가에 들려올 정도였다.
샬류안, 이러니저러니 해도 장사 하나는 끝내주게 잘한다.
[VVIP, K(*0@가 당신에게 전속 계약을 요청합니다!]– 레벨업 포인트 (+100)을 은밀히 후원했습니다!
[VVIP, *Y32L이 당신에게 전속 계약을 요청합니다!]– 레벨업 포인트 (+110)을 은밀히 후원했습니다!
역시, 게임이 진행될수록 후원되는 레벨업 포인트 평균치도 높아지는 모양이었다.
엘리트 어쌔신과 나이트의 급성장이 납득이 안 가는 것도 아니었다.
VVIP들로부터 계약 요청 및 포인트 후원이 갈무리되었을 때였다. 갑자기 스포트라이트가 내게로 떨어져 내렸다.
[시청자들이 의아해합니다!] [몇몇 시청자들이 느린 진행에 불만을 품습니다!]샬류안이 손을 들어 시청자들을 진정시켰다.
– 일등상 수상. 그 승부를 보시기에 앞서, 엘리트 소서러의 중대 발표가 있겠습니다.
요토스가 말한 순간이 온 것 같았다. 내가 영좌에서 엉거주춤 일어서자, 샬류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
요토스는 시청자들을 홀려줄 것을 주문했다. 샤르홀린의 힘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
– 이번을 포함한 세 차례의 정산 동안, 저는 전속 후원을 맺지 않겠습니다.
[시청자들이 관리자들의 언질이 있었냐고 물어옵니다.]– 없었습니다. 그저 여러분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하고 싶을 따름입니다. 전속 계약 엘리트들을 사냥하는 비계약 엘리트 플레이어. 흥미롭지 않겠습니까?
[시청자들이 웃음을 터뜨립니다.] [몇몇 시청자들이 당신의 생각을 건방지다고 생각합니다.]건방져?
– 후원. 그거 정말 대단한 거 맞습니까? 전속 계약을 체결한 리샤르 후에 대해서 말해보죠. ‘이킬라스의 신’과 계약을 맺었다는 엘리트 나이트. 별것 아니던데요.
나는 리샤르 후와, 그 머리 위에 떠 있는 백색 행성을 가리켰다.
– 후원자인 VVIP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킬라스의 신’은 룰 위반을 하면서 플레이어인 제게 굴욕적인 모습까지 보였습니다. 곧 확인하시게 될 거고요.
– 스, 스포일러를 하면 어떻게 해요!
샬류안이 빽 소리를 질렀지만, 시청자들의 흥분 소리에 묻혀버렸다.
– 계약 엘리트 사냥. 그 첫 번째 시작은 리샤르 후 너다. 약속한다. 넌 반드시 내 손으로 죽여줄게.
[시청자들이 그 이유를 묻습니다!]– 약한 놈부터 차례로 죽여 나갈 예정이기 때문입니다.
[시청자들이 엘리트 나이트가 가장 약한 거냐고 물어봅니다.]– 그런 당연한 것까지 대답해야 합니까?
우하하하하하하하하하!
– 또한 기존에 ‘이킬라스의 신’이 건방지거나 엿 같다고 생각하시던 분들도 제게 후원금을 내어주시길 요청드립니다. 가히 치욕적이라 할 만한 장면들을 약속하겠습니다.
정산장이 조용해졌다.
샬류안이 입을 떡 벌린 채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 생각을 읽어볼 만했다. ‘너 미쳤어, 이 새끼야?’ 이런 식이겠지.
군중들 어디선가, 나에게 강렬한 살기를 뿜어대는 존재가 느껴졌다. 아마 셰라슐’토뤼악이리라.
몸이 비틀릴 것만 같은 위압감이었지만, 나는 허리를 곧추 펴 태연함을 가장했다.
그렇게 생각하던 순간, 한 시청자가 웃음을 터뜨렸다. 웃음은 폭발적으로 번져가더니, 열렬한 후원금으로 되돌아왔다.
리샤르가 입을 연 건 그때였다.
[VVIP, OD*&X가 엘리트 나이트에게 발언권을 줄 것을 요청합니다!]– 예……?
샬류안이 머뭇거리자, 시청자들이 재밌을 것 같다며 허락을 재촉했다.
– 좋아, 얼마든지 와보라고. 그런데 이걸 어쩌나? 그렇게 무섭게 나오면 나도 무섭게 나갈 수밖에 없는데.
– 네가 무섭게 나와봤자지.
– 네 공대원들을 모조리 죽여도 그런 말이 나올까?
……뭐라고?
– 그 약해빠진 것들을 끔찍하게 아끼더군. 흐흐흐흐흐, 너무 슬퍼하진 마라. 네가 죽기 전에 그것들 먼저 황천길 동지로 보내놓을 테니. 즉, 몰살이다.
[시청자들이 그것들을 잡아서 어떻게 할 거냐고 물어봅니다!]– 이킬라스 절대자에게 산 제물로 바치겠습니다.
[시청자들이 환성을 터뜨립니다!] [몇몇 시청자들이 엘리트 나이트에게 열렬한 지지를 표합니다!]– 약한 적들만 골라서 잡는 게 딱 너답군.
– 약한 엘리트들부터 잡겠다고 한 게 누구였더라?
우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
[시청자들이 광분하며 머리를 잡아 뜯습니다!] [몇몇 시청자들이 사레에 걸렸습니다!] [시청자들이 당신의 추후 행보를 기대합니다!] [몇몇 시청자들이 VVIP, OD*&X를 통쾌하게 박살 내주기를 바랍니다!]현기증으로 머리가 아찔했다.
셰라슐’토뤼악의 정신 공격 때문이었다.
내 정신력이 한계인 걸 확인했는지, 샬류안이 곧바로 앞으로 나섰다.
– 자, 그러면 지금부터 영상을 확인하시도록 하겠습니다!
그때, 뼛속, 아니, 영혼조차도 얼어붙게 만드는 한기에 기억이 깨지고 현실감이 각성했다.
뭐가…….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시간이 멈춘 것인가. 아니었다. 하지만 시선 말고는 움직일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이제야 관객이 입장하셨군. 의식을 되찾았다고 표현해야 하려나?”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힘을 갖고 존재하는 모든 것이.
그 모든 혼돈이 고요라는 이름으로 새하얗게 얼어 있었으므로.
“자, 그럼 시작해볼까?”
세 번째 참격으로 리샤르를 파멸시켰어야 할 환영난무도.
그 칼날을 휘두르고 있던 나도.
심지어 ‘꿈틀거리는 혼돈’ 패턴을 마무리하고 다음 패턴을 준비하던 켈렉─샼과, 공허의 회랑으로 이어지는 아공간 균열까지도.
<잊혀진 왕들>과 공허의 힘까지 얼려 버린다고……?
그러나 리샤르는 달랐다.
놈과 그 하수인들은 이 새하얀 세계를 자유롭게 활보했다.
활보해서, 공허의 회랑에서 브뤼나와 야나와 사쿠라이와 로헤이리츠를 차례로 끌어내 리샤르 앞에 꿇어앉히고 있었다.
우리들의 공통점은 오직 얼굴만이 얼어붙지 않았단 점이었다.
“너, 너 이 자식, 지금 뭐 하자는 거야.”
“난 내 딸에게 늘 말했거든. 약속만큼은 반드시 지키는 사람이 되라고. 그렇게 말해놓고 아빠가 약속을 안 지켜서야 쓰겠나?”
가장 먼저, 리샤르가 브뤼나의 얼굴로 손을 뻗었다.
“캡틴.”
나를 바라보는 리나의 표정은 절박하지 않았다.
“도와주세요.”
비를 좋아하는 소년이 있었어요…… 그때, 비가 쏟아지던 성도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던 처연함만이 어려 있을 뿐.
“어떻게 할까, 도와 달라는데?”
“하지 마.”
“음? 그건 부탁을 하는 태도가 아닌 것 같은데.”
리샤르의 손이 그 얼굴에 닿은 순간, 그 한순간, 브뤼나의 온몸이 새하얗게 얼어붙더니 다음 순간 산산이 깨어져 부서졌다.
야나가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탕, 탕, 탕…… 시야 한구석에서는 브뤼나가 캡슐 밖으로 끌려 나가 처형당하는 영상이 재생된다.
그 총성과 비명 속에서 내 몸은 이 얼어붙은 육신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쳤다.
계속, 계속, 계속.
그러나 영혼조차 얼려버린 힘 앞에서는 그 어떤 발악도 무의미했다. 힘 자체가 들어가지 않는 것이다.
“이딴 쓰레기들을 왜 데리고 다니는지 궁금했어. 도대체 왜지? 위험한 곳에는 데리고 다니지도 못하는 짐 덩어리들이잖아.”
리샤르가 싱긋 웃더니 이번에는 야나 앞에 쭈그려 앉았다. 야나가 고개를 미친 듯이 젓다가 이내 토악질을 하기 시작했다.
“저런, 공대장에게 사람 대하는 예의를 못 배운 모양이군.”
리샤르가 야나의 머리를 사랑스럽게 쓰다듬기 시작했다. 야나의 숨이 점점 가팔라지더니 눈자위가 뒤집혀가기 시작했다.
“그래도 너무 심려치 마라. 이킬라스의 황천의 간수가 하나하나 다 가르쳐줄 것이라고 하니.”
안 돼…….
모두 깨어져 버리고 말아…….
그때, 별빛의 황야에서, 모두와 함께 꿈꾸었던, 함께 엔딩을 보게 되는 그 모습이…….
“기다려! 기다리라고! 야나는 엘더 사인을 쓸 수 있어. 너한테도 도움이 될 거라고. 분명. 너도 엘더 사인의 가치를 알잖아!”
“이런 멍청한 놈이, 이 상황을 보고도 아직도 모르겠냐? 우리 엘리트 플레이어한테 이딴 쓰레기들은 없는 것만도 못하다는 걸?”
“뭐가, 뭐가 그렇게 다른데!”
“우린 저 켈렉─샼과 같은! 아니! 그 이상도 가능한 왕의 운명을 타고났단 말이다! 이것들은 그런 자격조차 없이, 아무리 잘나봐야 권속이 최대인 벌레들이고!”
그리고 그 순간, 아…… 야나의 몸이 무수한 서리 조각으로 깨어지며 바닥을 튕겼다.
그 힘은 고요해서, 튕길 때조차 소리가 없었다.
들리는 소리는 오직, 브뤼나의 뒤를 이어 캡슐 밖으로 끌려 나온 뒤 행해지는 처형의 총성뿐.
“궁금했단 말이지. 넌 엄청난 놈이야. 단순히 플레이어의 자질로만 따지면 나보다도 한 수 위다.”
“언니, 야나 언니이이이이!”
“근데 왜지? 유일하게 모든 VVIP에게서 계약 제안을 받았으면서 왜 계약을 맺지 않는 거지? 왜 여전히 이딴 NPC들에게 집착할까?”
리샤르가 로헤이리츠의 까마귀 가면을 벗기자 로헤이리츠의 눈에서 안광이 살벌하게 번득였다.
“이거 놔라, 널 죽여 버리겠다.”
리샤르가 큭큭 웃으며 나를 돌아보았다. 얼음 속에서 미친 듯이 발악하고 있는 나를, 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를.
“그러면 너는 또 말하겠지? 로헤이리츠는 아주 중요한 NPC야, 네 부하로 삼으면 아주 유용할걸.”
“리샤르……!”
“관리자가 처음부터 말했을 텐데. 소원을 이루고 싶다면 이 세계를 멸망시키라고. 근데 넌 대체 무슨 생각인 거냐?”
죽는다.
로헤이리츠가 죽는다.
공허의 사도 NPC로서 여러 퀘스트에서 맹활약해야 할 로헤이리츠가 여기서 죽는다.
“네 행동은 너무 모순적이야. 물리학 교수인 나로서는 네 행동의 모순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이 세계를 멸망시키고 싶은 게 맞냐? 내 눈에는 멸망을 막기라도 하겠단 것처럼 보이는데.”
리샤르가 싱긋 웃더니, 손을 치우면서 일어났다. 로헤이리츠는 죽지 않았다.
“네 진심을 한번 확인해보고 싶어졌다. 나랑 하나 거래를 하자.”
“뭐?”
“10초 줄 테니 혀를 깨물고 자살해라. 그러면 여기 이 꼬맹이랑 로헤이리츠는 살려주지. 어때? 네가 출혈로 죽어가는 모습을 즐거이 감상하지.”
“뭐?”
“엘리트가! 그것도 가장 촉망받던 엘리트가! 짐꾼만도 못한 쓰레기들을 구하려고 혀를 깨물고 자살! 하, 하하하하! 그보다 더한 최후가 있을까? 자, 카운트다운을 시작한다.”
입을 망연히 벌리는 내 모습을 보며, 리샤르가 웃었다.
“10초다. 그러게 상대를 보고 까불었어야지. 9초. 집행 관리자의 힘을 얻으면 절대자를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냐? 7초. 절대 옥좌에서 쫓겨난 놈의 힘으로? 이제는 5초군.”
뇌가 새하얗게 물드는 혼란감 속에서 사쿠라이와 눈이 마주쳤다. 죽는다? 사쿠라이가 죽는다?
그 죽음을 그저 방관해야 하나?
그때, 중대원 전부가 몰살하던 그 전투처럼, 무수한 회차 속에서 죽게 내버려둔 NPC들처럼?
“하지 마세요, 오빠, 절대 그렇게 하지 마세요!”
“오우~ 이 무슨 눈물 나는 희생정신인가. 4초.”
“리샤르, 제발.”
“오빠가 혀를 깨물어봐야 어차피 이 미친놈은 다 죽일 거예요! 그러니까 오빠!”
“이것 봐, 손이 점점 가까워져 가고 있잖아. 네 소중한 꼬마에게. 3초쯤인가?”
“리샤르 멈춰, 멈추라고!”
“이런, 마음이 약해지는군. 그거 아나? 수학에서 시간은 주관적 체감에 따라 달리 흐른다는 이론이 있어. 상대성 이론이 이렇게 적용될 수도 있는 건가? 시간이 상당히 느리게 흐르는 기분이야. 이미 10초는 훌쩍 넘은 것 같지만 내 주관적 시간으로는 아직 2초가 남은 것 같군그래?”
도와줘.
누구라도 좋으니, 제발 도와줘.
지뢰에 다리를 잃었을 때 그렇게 애걸해도 한 번도 나타나지 않은 신(神), 어머니가 죽었을 때도 위로 한번 해주지 않은 신(神).
신(神)이라는 게 정말 있다면.
내 인생에서 단 한 번, 지금 이 순간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제발 도와줘.
그 대답으로 2개의 소리가 들렸다.
하나는 웃음소리였다.
리샤르의 웃음소리가 아니었다.
리샤르를 통해, 빛과 어둠과 시간과 공간의 영역 너머의 위대한 우주로부터 이 세계에 간섭하는 고요한 혼돈의 절대자 셰라슐’토뤼악이었다.
다른 하나는 시스템 알림이었다.
두 눈을 의심한다.
수십 번, 수백 번은 본 시스템 문구가 눈앞에 빠르게 출력되어 가고 있었다.
[각성 : 흑기사 (7)]– 이제 모든 준비는 끝났습니다. 당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바치고 위대한 심연의 힘을 손에 넣으십시오.
– 타락의 제물 (0 / 1).
흑기사 각성 퀘스트는 후반부에 활성화되어 총 7개의 퀘스트 라인을 따라야 한다.
마지막 퀘스트는 비교적 쉽다.
마음이 어려울 뿐.
호감도를 Max 수치까지 올린 NPC 5명을 제물로 바치는 것. 그런데 지금 시스템에 활성화된 제물은 왜…… 하나지?
「제가 드리는 서비스입니다, 엘리트 소서러.」
언제 왔을까, 이 새하얀 세계를 자유로이 거니는 금발 벽안의 미소년이 눈앞에 나타나 있었다.
고대부터 이어져온 모든 미의 근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미색.
그러나 리샤르는 요토스의 출현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아니, 사쿠라이나 로헤이리츠도 마찬가지였다.
「셰라슐’토뤼악은 당신에 대한 적개심으로 이 세계에 직접 개입하는 것으로 게임의 룰을 어겼습니다. 그러니 제가 당신에게 드리는 이 서비스를 다른 절대신들 모두 납득하겠죠.」
‘직접 개입……?’
「그렇지 않고서야 켈렉─샼이 아직 초월도 이루지 못한 저런 무지렁이에게 당하겠습니까? 본래의 힘을 4할조차 못 내는 상태이긴 해도, 당신보다 몇 대는 선배인데.」
‘선배라니, 그게 대체 무슨…….’
「서둘러 결정하는 게 좋을 겁니다. 내가 셰라슐’토뤼악 몰래 멈출 수 있는 시간도 길지 않아요.」
영원처럼 멈춘 것만 같은 그 시간, 느릿느릿하게 흐르는 시간 속에서 사쿠라이가 나를 보았다.
“오빠, 그때 그 사막에서 한 약속 기억해요?!”
저걸, 저걸 제물로 바치라고? 아버지를 다시 만나고 싶어서 이 세상에 들어온 저 녀석을?
늘 내 옆에 있던 저 녀석을?
여기에서 사쿠라이를 포기한다면, 게임의 엔딩까지는 대체 몇 명을 버리게 될까. 몇 명을 더 죽이고 몇 명을 더 외면하게 될까.
“바쿠 아저씨도 밖에 남아 있잖아요! 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오빠는 끝까지 싸워요! 이 나쁜 놈을 날려버려요!”
문득 세상의 풍경이, 그때, 네이갈라스의 봉인을 저지하고 야영하던 그 사막으로 되돌아간다.
– 오빠, 저 결정했어요. 제 소원은 먼저 죽은 모든 공대원을 살리는 거로 할게요.
– 뭐? 그러면 네 소원은?
– 오빠가 해주면 되잖아요. 공대원 모두의 소원을 이뤄달라고 하는 거예요.
그때 꿈처럼 이야기했던 그것이…… 이제 우리에게 남은 유일한 ‘해피 엔딩’이 되었단 말인가.
모든 걸 마치고.
모두 소원을 이루고.
저 원래의 세계에서 해후를 이루면서, 서로 바뀐 삶을 이야기하게 되는 ‘해피 엔딩’은 이제 저 길밖에 없단 말인가.
“그렇게 우승한 뒤에…… 아저씨랑 같이 우리를 찾으러 와줘요.”
사쿠라이의 칭얼거림과 야나의 말더듬이와 피터의 수줍음과 브뤼나의 떠들썩함이 모두 있게 되는 엔딩은.
“불쌍한 것, 우유부단한 공대장을 만나서 결국 죽게 되었구나. 너무 실망하지 마라. 곧 따라가게 해줄 테니.”
<황녀를 위하여>를 처음 접했던 시절, 나는 이 말이 정말로 싫었다. 이건 게임이다.
– 정철, 저 여자를 죽이세요.
– 왜죠?
– 아이템을 주거든요.
– 그 이유만으로 죽인다고요?
– 그러면 뭐요. 누가 뭐라고 해요? 이건 게임이잖아요.
네가 뭘 해도 안 돼, 포기해라. 이 멍청이가 돌았나, 이건 게임이잖아, 등신아. 모든 질답의 끝에는 늘 그 말이 나왔다.
게임, 게임, 게임, 게임.
잔인한 세계는 현실로 족했다. 장난처럼 망가져가는 삶은 현실로 족했다. 현실과 똑같은 사람. 땅, 하늘, 숲, 바다…… 왜 이들은 반드시 죽어야만 하며, 멸망해야만 하는가?
시나리오가 있기 때문에?
나는 바꿔보고 싶었다. 물러나기보단 싸웠고, 걷기보단 달렸다. 하지만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시나리오 앞에서 무력한 플레이어였다. 발버둥의 끝에서 돌아오는 결과는 절망뿐이었다.
몇 번이고 그랬을까.
아르츠레히드의 주검을 붙들고 몇 번 울었나. 용기사 바르켄데르의 희생, 성배를 살리기 위해 제 목을 자르던 제1황녀 힐더…….
그런 것들을 보면서, 얼마나 슬퍼했던가. 그런 죽음을 막기 위해서, 몇 번을 뛰었나.
기억나지 않는다.
모든 걸 포기했을 때, 횟수조차 잊기로 했다. 그렇게 생각했건만, 박현수의 행적을 보며 미련이 여전히 남아 있었단 걸 깨달았다.
이 세계는 멸망할 수밖에 없나?
리샤르의 말대로다.
난 도대체 뭘 하려고 했던 거지?
그렇기에 지금 이 순간, 마음속에 남아 있던 저 질문을 단언으로 바꾸기로 했다.
이 세계는 멸망해야 한다.
모든 미련도 망설임을 버리고, 어차피 멸망할 운명인 이 세계를 빠르게 파멸시키고 잃어버렸던 것들 모두를 되찾는다.
“인간성(人間性).”
NPC는 시나리오에 얽매이지만.
시나리오 밖에 있는 플레이어들은, 내가 살리고 싶은 플레이어들은 살릴 수 있어야 하는 게 당연하잖아.
“그게 바로 네 패인이다, 정철.”
NPC들은 살릴 수 없었지만.
플레이어들은 살릴 수 있어도 괜찮잖아.
“심연의 주인이시여…….”
모든 것이 동시였다.
인간일 수 있던 마지막 순간에 흘린 눈물 속에서 사쿠라이의 모습이 희뿌옇게 부서진 것과.
모든 것을 섭리 그 자체로 얼려서 깨트리는 리샤르의 손이 사쿠라이의 이마에 닿은 것과.
반쯤은 제멋대로, 홀린 듯이, 중얼거리던, 타락의 기도문이 끝난 것은.
“……이제, 당신의 종이 바치는 제물을 받아주소서.”
그다음 순간, 심연의 망토에 잠들어 있던 괼프의 눈동자가, 꿈틀, 불현듯 눈꺼풀이 크게 열리며 눈을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