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 of the Fake Hero RAW novel - Chapter (168)
가짜 용사 이야기-168화(168/310)
#64 :
[10. 앤티키아] 결전, 엘리트 나이트 (10)– 오빠, 그때, 그 사막에서 한 약속 기억해요?
심연이 사쿠라이의 몸을 삼켰다.
리샤르가 당혹감을 느끼며 사쿠라이로부터 멀어지는 게 보였다.
심연이 쐐기처럼 일어서서 사쿠라이의 심장을 꿰뚫은 것이다.
– 그렇게 우승한 뒤에…… 아저씨랑 같이 우리를 찾으러 와줘요.
사쿠라이가 저 몸이 녹아내리는 고통 속에서 어떤 생각을 했을지는 상상할 수 없었다.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UI에서는 플레이어의 처형자 영상이 활성화되었지만,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
꿈틀거리고 꾸물거리는 심연에 뒤덮여가는 사쿠라이가 마지막으로 내게 손을 내뻗었다.
그 떨리는 손.
그 떨리는 입술로 말했다.
“……오빠, 이겨요…….”
빛이 점차 스러져가는 눈동자를 바라볼 때, 성도의 도서관에서 고서를 읽던 사쿠라이가 생각났다.
탕.
첫 번째 총성이 들려올 때, 어젯밤 읽었던 게임 스토리를 이야기하며 울고 웃던 사쿠라이의 순진함을 생각했고, 트라이폴에서 각오를 굳히며 고개를 끄덕이던 사쿠라이의 비장함도 생각했다.
탕.
두려움과 공포로 점철된 이 세계에서, 얼마나 무서웠을까.
얼마나 슬펐을까.
또래였던 피터가 죽고, 언니처럼 따르던 브뤼나가 죽고, 야나가 비명 속에서 죽었을 때.
탕.
서머포트에서 새 옷을 입고 해맑게 웃던 사쿠라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으려고, 결코 슬픔이나 두려움을 내보이지 않던 모습이 떠올랐을 때 나는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이제 이 세계에서 수천수만의 사쿠라이를 죽이게 될지도 모르는 내가, 고작 1명의 죽음에 이토록 슬퍼한다는 게 우스웠다. 우스웠지만, 그 웃음으로 슬픔은 부정되지 않았다.
“무슨 짓을 한 거냐.”
리샤르가 말했다.
“소서러, 너, 뭔 짓을!”
죽이겠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마음의 칼이 혼신의 울음에 응답한 그 순간, 심연(深淵)이 내 온몸을 휘감기 시작했다. 심연의 늪이 사악한 기류를 일으키며 폭주한다.
[각성 퀘스트 완료 : 흑기사.]– 전용 스킬, 《흑혈검법》이 활성화됩니다.
– 전용 패시브 스킬, 《심연의 이름으로》 활성화.
=> 심연 지대에서 220%의 전체 능력치 보정을 받습니다!
– 클래스 자동 변경, 《소서러》 -> 《나이트》.
=> 각종 장비에 가해지던 페널티가 해제됩니다!
[《나이트》 클래스가 당신의 검술 재능을 평가합니다.]– 당신의 재능은 (달인)입니다.
– 직업 패시브 스킬, 《기초 검술》, 《중급 검술》, 《상급 검술》, 《검성의 경지》가 활성화됩니다!
[경고 : 광기 수치 : 240%] [경고 : 광기 수치 : 480%]내 몸을 감싼 심연이 갑주의 형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심연에 찌들어, 녹슨 갑주는 볼품없었고 그 위에 걸쳐진 암청색 망토도 낡아서 추레했다.
하지만, 이 갑주야말로 심연을 다스리는 흑기사의 상징.
“……흑기사?”
동시에, 내 몸을 구속했던 절대 권위의 얼음들이 걸쭉하게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심연에 잠식된 것들의 최후다.
“어떻게 그분의 냉기를…… 저놈을 죽여, 허튼짓하지 못하게 죽여버려!”
흑기사에게는 어떤 도구도 필요 없다. 심연이, 흑기사의 칼날이자 방패이며 갑주이니까.
[경고 : 광기 수치 : 660%!]– 신격이 절정에 달했습니다.
– 시스템 UI가 비활성화됩니다!
케슈렌다크 최심부의 심연이 어린갑과 결합되며 새로운 형태를 빚어내기 시작한다.
“말했잖아.”
늑대의 두상을 본뜬 투구와 갑옷 위로 낡고 뒤틀린 천 쪼가리들이 검푸르게 흩날린다.
“여기는 내 나와바리라고.”
암청색 안광이 내 눈동자에서 터져 나오자, 주위에서 심연들이 나직이 엎드리며 속삭이는 소리가 들린다.
“오오…… 심연의 주인이시여…… 우리의 경배를 받으소서…….”
샤르홀린이 제멋대로 날아왔다.
내가 샤르홀린의 칼자루를 낚아챈 것과, 검푸른 잔상의 참격에 수백 마리의 소환수들이 도륙된 것은 동시였다.
“그리고.”
주변에 깔려 있던 심연의 늪이 샤르홀린에게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칼날이 심연의 형상으로 넘실거리기 시작하자, 대기가 걸쭉하게 요동친다.
이것이 바로 흑기사의 진정한 힘. 근방의 모든 심연을 검의 힘으로 바꾼다.
“너는 내가 반드시 내 손으로 죽일 거라고.”
* * *
정산의 전당.
요토스가 직접 명명한 이 공간에서 30여 명의 시청자들이 LIVE 중계를 시청하고 있었다.
LIVE 중계는 VIP 이상의 시청자들만이 즐길 수 있는 특별 시스템이었다.
– 알아서 살아남아라.
엘리트 나이트와 엘리트 소서러의 대결은 역대 최고의 엘리트 승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므로, 정산장은 아직도 광란의 도가니에 빠져 있었다.
[대다수의 시청자들이 입을 다물지 못합니다!] [몇몇 시청자들이 엘리트 소서러의 재치에 진심으로 감탄합니다!] [시청자들이 엘리트 소서러에게 레벨업 포인트 (+3200)을 후원했습니다.]전당의 중앙.
이등 관리자 쟈렌키는 그런 상황을 못마땅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뭔가 이상해.’
원래라면 지금쯤 요토스가 중재를 위해 내려갔어야 한다.
외우주의 간섭은 정말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행해지지 않는다.
하지만 셰라슐’토뤼악은 벌써 두 번째나 간섭해왔다.
「주인님, 저대로 놔둬도 괜찮으시겠어요?」
쟈렌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옆쪽 기둥에서 요토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시청자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각도였다.
「뭐가 말이냐, 쟈렌키?」
기둥에 삐딱하게 기대서 있었지만, 요토스는 만면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쟈렌키가 고개를 갸웃했다.
요토스의 미소가 마음에 걸렸다.
한 세계를 멸망시키고 관리자로 거두어진 이후, 요토스가 미소를 짓는 건 최초의 권속인 샬류안과 이야기할 때밖에 보지 못했었다.
「엘리트 소서러를 총애하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요.」
「아주 총애하지. 실각된 이후부터 정철의 등장만을 기다려 왔으니까.」
요토스는 본래 심연(深淵)의 주인이었다.
하지만 절대 옥좌에서 쫓겨난 지금, 그 힘은 형태를 잃고 ‘흑혈’이라는 이름으로 둔갑하고 있었다.
권능의 실체화는 절대신들만의 특권이었다. 이킬라스의 냉기, 류이니옌의 그림자처럼 말이다.
「아끼신다면서, 왜 이 상황을 방관하시는 거죠?」
「방관하면 안 되느냐?」
「이대로 두면 죽을 텐데요. 이킬라스의 절대자가 엘리트 나이트를 너무 급격하게 성장시켜 두었어요. 지난 전투 때와는 비교도 안 됩니다.」
리샤르는 정철에 견줄 만한 엘리트 플레이어다.
정철의 그림자에 가려지긴 했으나, 사실 상대가 나빴던 것뿐이지 다른 엘리트가 이데아에 있었더라면 정철과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기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한 세계에서 총 여섯 번 벌어지는 멸망의 배틀로얄.
1~5차 배틀로얄이 맛보기라면 6차 배틀로얄이 진짜배기였다.
오직 6차 배틀로얄의 엘리트 플레이어들만이 외우주의 절대자와 계약하는 게 가능한 ‘초월의 그릇’이었으니까.
지금 리샤르도 그 가치를 완벽히 입증해내고 있던 것이다.
그런 존재가 이킬라스의 축복을 저렇게나 잔뜩 받았다. 비계약 엘리트인 정철이 이길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그런데 요토스가 싱글거렸다.
쟈렌키의 찡그린 표정이 재밌다는 듯이.
「아직 멀었구나, 쟈렌키. 내가 옥좌로 복권한 뒤에는 어찌하려고 그리 무지하냐?」
「주인님.」
「생각해봐라. 내가 무턱대고 간섭하면 셰라슐’토뤼악이 어떤 난장판을 피울지.」
「상상이 가네요.」
「정철은 엘리트 나이트를 궁지에 몰아넣는다. 비계약 상태로. 그러면 셰라슐’토뤼악이 세계에 개입하겠지. 나는 그때를 노린다.」
쟈렌키는 한참 동안 고민했다.
그때 장내가 소란스러워져 송출 화면을 흘끗 보았다.
화면 속, 멈춘 세계에서 정철이 스스로의 살가죽을 베어내고 리샤르에게로 뛰어내리자 시청자들이 환성을 터뜨려댔다.
「그게 가능할까요?」
「불가능하다면 집행(執行)의 그릇이 아니었을 뿐. 그렇다면 나도 흥미가 없다.」
「주인님께서 이번 배틀로얄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압니다. 그렇게 간단히 내치실 리가요.」
「흐흐흐흐, 너는 정철을 몰라. 그럴 만도 하다. 저렇게 완벽한 필멸체는 드무니까.」
「하지만 정철이 저 꼬마를 제물로 바칠까요? 정말로?」
「힘을 얻기 위해서는 대가를 치러야 하는 법. 가장 소중한 것을 버릴 수 있어야만 절대적인 힘을 얻을 수 있는 거다.」
순간, 흑기사 각성에 대한 이야기가 떠올라 소름이 돋았다.
샬리 언니에게 듣기로, 흑기사의 각성 퀘스트는 요토스의 신화를 본떠서 만들어졌다고 했다.
– 요토스 오빠는 겔드하리아를 죽여서 절대신이 된 거야.
– 겔드하리아? 그 창세신?
창세의 일곱 신 중 하나.
그 일곱 신 가운데에서도 겔드하리아는 유르벨과 함께 최고의 신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요토스는 겔드하리아의 권속, 본래 하급 신격을 가진 창세신이었다.
– 응. 오빠가 진심으로 사랑했던 여신이기도 했지. 겔드하리아를 죽여서 삼킴으로써, 약신(弱神)의 허물을 벗고 절대신의 권좌에 오른 거야.
거기에 숭고한 대의는 없었다. 오로지 힘을 향한 추구만이 있었을 뿐.
<황녀를 위하여> 원작에서는, 그 신화가 조금 다른 방향으로 각성이 진행된다.
호감도가 최대치까지 쌓인 NPC 5명을 제물로 바치는 것으로 플레이어는 흑기사로 각성 퀘스트를 완수하게 된다.
물론, 흑기사는 모든 ‘위하여’ 시리즈에 들어가 있다. 흑기사라는 클래스 자체가 요토스가 사도를 찾는 과정이었으니까.
하지만 어딜 가나 흑기사 각성은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하며 심리적인 난이도까지 상당했다.
그렇기 때문인지, <황녀를 위하여>에서 흑기사라는 각성을 성취한 플레이어는 정철을 포함해 단 13명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12명이나 먼젓번의 326명이나 요토스는 폐기물이라고 평했지.’
요토스의 일등 심복으로 위세를 떨치는 아쉬론조차도 집행 관리자로 임명을 받지는 못한 것이다.
「정철은 마침내 결정했다. 인간성(人間性)을 버리고 자신이 사는 길을! 잘 봐라.」
요토스가 화면을 가리켰다.
심연이 사쿠라이의 목을 꿰뚫었다.
소녀가 제 피 위에 쓰러질 때 정철은 흐느껴 울고 있었다.
[몇몇 시청자들이 엘리트 나이트의 만행에 분개합니다!] [VVIP, 이킬라스의 절대자가 닥치라고 으르렁거립니다.]셰라슐’토뤼악은 절대신.
그 으르렁거림 한 번에 전당이 세차게 흔들렸다. 요토스가 피식 웃었다.
「저 녀석은 성질머리를 언제쯤 고치려는지. 아니, 우주의 짐승으로 태어났으니 바뀔 턱이 없나.」
하지만 쟈렌키는 요토스의 말을 듣지 못했다. 샬류안이 송출하고 있는 화면에 너무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쿠라이의 죽음.
절대 냉기에 속박된 정철.
정철의 패배는 확실해 보였다. 바로 그때 심연이 정철의 온몸을 휘감기 시작한 것이다.
– 아니……?
그 목소리가 들려온 순간부터, 대격변이 이루어졌다. 쟈렌키는 당황을 금치 못했다.
[시청자들이 예상할 수 없는 전개에 흥분합니다.] [시청자들이 개연성에 의문을 품습니다!]샬류안이 노련하게 손을 흔들며 너스레를 떨었다.
「룰을 먼저 어긴 건 VVIP 쪽이라서요, 약간의 특권을 줬을 뿐입니다! 다들 이해해주실 거요?」
역시 샬류안…….
요토스가 겔드하리아의 신격을 삼키고 그 혼의 찌꺼기로 만들어낸, 딸 같은 존재.
[대다수의 시청자들이 엘리트 소서러의 신격에 당황해합니다.]자리에서 일어선 정철의 신격에, 심연이 복종하고 있었다. 더 경악스러운 건 정철의 등에서 타오르는 검푸른 아지랑이였다.
「……신격의 형상화라고?」
아직 필멸의 육신에 갇혀 있는데도 신격의 형상화를 이루어낸다.
그 현상이 뜻하는 바는 명약관화했다. 정철이 절대신의 그릇이라는 뜻.
아직 절대신의 권좌에 오르지는 못하지만, 그럴 만한 자질을 타고났다는 것이다.
‘타고났다’는 말이 중요하다.
노력으로는 오를 수 없는 경지.
인간성을 아무리 모아도, 쟈렌키 같은 존재는 절대로 절대신의 권좌에 오를 수 없었다.
그건 요토스의 일등 권속인 아쉬론도 마찬가지.
요토스가 기괴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드디어…… 흐흐흐흐흐흐흐흐, 흐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때가 왔다, 쟈렌키.」
돌아보니, 입이 흉측하게 찢어져 귓가에까지 걸려 있었다.
요토스의 본모습이 약간 드러났다. 인간의 언어로 그의 외형을 서술할 순 없지만, 굳이 표현하자면 늑대를 닮은 편이라고 할 수 있다.
창세의 모든 힘을 삼켜 절대신의 옥좌에 있을 때는, 인간들이 말하길 용(龍)의 형상이었으나, 저것이 본디의 모습이다.
「이 요토스가! 고대 심연의 주인이며 창세의 암흑제(暗黑帝)인 이 내가! 절대신의 권좌로 복권할 때가!」
쟈렌키는 황급히 무릎을 꿇었다.
요토스를 보필한 영겁의 시간 속에서 그가 흥분하는 모습을 본 것은 지금이 처음이었던 것이다.
요토스의 실각은 <온 것들>에게 <잊혀진 왕들>이 봉인된 사건에 기인했다. <잊혀진 왕들>이 봉인되면서 요토스의 힘도 함께 봉인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힘이 되돌아오시는 겁니까, 주인님?」
「엘리트 소서러가 <잊혀진 왕들>을 저 세계에서 꺼내주면.」
요컨대 세계를 멸망시키고 <잊혀진 왕들>을 해방시킨다면, 요토스의 힘도 다시 돌아온다는 것이다.
쟈렌키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다가 결국 말하고 말았다.
「주인님께서 정철에게도 온갖 비극을 선사한 게…… 모두 이를 위함이었군요.」
정철의 삶에 얼룩진 비극은 그 시작부터 끝까지 모두 요토스에 의해 계획된 것이다.
정철은 줄곧 유도되었을 뿐.
전쟁에서 다리를 잃은 것부터 모친을 사고로 잃은 것, 그리고 상대 또한 엘리트 플레이어 중 적성이 대단한 호적수였던 것까지도.
왜냐고?
신의 섭리를 위해.
정철…… 넌 분명 자신이 주인님을 이용해 왔다고 생각해 왔겠지. 하지만 그건 주인님께서 심어준 환상에 불과해. 그 옛날, 쟈렌키가 당했던 것처럼.
「다만 정철이 절대신의 권좌에 오르는 날이 온다면…… 주인님을 용서하지 않을지도 모르는데요.」
쟈렌키가 요토스에게 아직도 증오심을 품고 있는 것처럼.
지금도 생각한다.
그 옛날 쟈렌키가 창세신들의 손을 잡았더라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지.
「용서? 웃기지도 않는구나, 쟈렌키. 그런 필멸의 감정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으니 네 신격이 아직도 그 모양 그 꼴인 거다.」
「……!」
「정철은 너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오히려 필멸체에 불과했던 자신을 절대신에 가깝게 만들어준 내게 감사하게 될 거다. 필멸체가 절대신의 권좌에 오른 일은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요토스가 웃기를 마치고 중절모를 눌러썼다. 그러자 흉하게 찢어졌던 이목구비가 다시 미소년의 얼굴로 되돌아갔다.
「이제 엘리트 소서러의 전투를 잘 보아두도록 해라. 내 태곳적 전투를 완벽하게 구현해내는 인간이니까.」
그 광견 같은 전투 방식 말인가.
「어딜 가시는 건가요? 끝까지 안 보셔도 되나요?」
요토스는 뒤돌아서며 팔만 휘저을 뿐이었다.
「안 봐도 뻔하다. 정철은 리샤르를 압도할 거다. 셰라슐’토뤼악이 리샤르에게 준 권능은 기껏해야 1할도 안 돼.」
1할?
절대신의 1할은 다른 신들의 전력과 차원이 달랐다.
1할만으로도 비교가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그러면 주인님께선 정철에게 대체 몇 할의 힘을 주신 거죠?」
요토스는 싱긋 웃을 뿐, 그에 대해서는 대답하지 않았다.
「정철은 아직 완전체가 아니다. 마지막 인간성을 도려냈다고 생각했겠지만, 그건 다른 곳에도 남아 있지.」
「이미 신격이 깨어났는데요.」
「저것도 완전체가 아니란 거야.」
……저 어마어마한 신격이 완전체가 아니야?
절대신의 그릇이라더니, 과연.
애초에 비계약 상태일 때 계약 엘리트와 맞먹던 것부터가 그 남다른 능력의 방증이었지만…….
「나는 해결해야 할 일이 있어서 간다. 내 ‘사도’에게 선물해줘야 할 일들이 있거든.」
* * *
공허하다.
온몸에서 초월의 힘이 춤추고 있었지만, 내 마음은 공허하기만 했다. 이 힘에 대한 만족감도 성취감도 없었다.
누군가가 내게 말했었는데. 신들은 따분한 걸 싫어한다고. 그 이유를, 이제야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울분, 적의, 살의.
이제 그런 감정들은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지금 나에게 맹공을 가해오는 리샤르의 마법들도 마찬가지였다.
“지겹다.”
굳이 막을 것도 없었다.
내 몸을 감싼 심연이 절벽처럼 일어서서 방벽을 형성했으니까. 어디에서 흥미를 찾을 수 있을까?
그러나 사쿠라이의 몸이 녹아내린 곳을 본 순간, 허망하기만 했던 가슴이, 찌르르 울리며 날카롭게 저려왔다. 그쪽으로 다가갈수록 그 고통은 커져갔다.
아, 그래…….
샤르홀린의 리스크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았다.
그건 나의 인간성이 외우주의 광기에 발악하고 있던 거였구나.
– 광기, 그것은 신들의 전유물이래요.
사쿠라이가 『지혜의 보고』를 읽으며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 신들이 유일하게 쾌락을 느낄 수 있는 감정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신들은 광기에 집착한대요. 인간은 광기를 견디지 못하고 미쳐 버리지만요. <잊혀진 왕들>이 그래서 또라이처럼 구는 걸까요?
사쿠라이는 그 말을 끝으로 내게 웃었다.
– 그런데 오빠는 미쳐도 멋질 것 같아요.
멋지지 않아.
내 모습을 봐. 이토록 추하다.
나는 뼈조차도 남지 않은, 그 점액 덩어리를 양손으로 안아들었다. 눈가가 뜨거워져 갔다.
“기다려…….”
내 안에 남은 마지막 인간으로서의 감정이, 눈물에 섞여 흘러내렸다.
“……금방 찾으러 갈 테니까.”
지금 내 힘으로는, 너도 나도 살릴 수 없어. 그 말은 끝내 나오지 못했다.
그래도 괜찮아.
소원을 이루면 되잖아.
나는 사쿠라이의 점액질을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로헤이리츠가 나를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기이했다.
그 행동을 끝으로, 내 마음속에서 슬픔과 울분이 사라졌다.
무언가로 도려낸 것처럼.
다시 내 마음에 자리 잡은 건 무료함뿐이었다.
이제는 알 것만 같았다.
계약 엘리트들이 광기에 취하는 이유를. 신들은 지루한 것이다. 그래서 대리 만족을 위해 배틀로얄을 즐기며, 계약 엘리트들의 영혼을 광기로 채우고, 미친 짓을 하게끔 만들었던 거야.
“하, 하, 아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그러면 어떤가?
온몸을, 마음을, 영혼을 풍족하게 메우는 무한한 광기 속에서 전율로 몸이 떨리는데!
[광기 수치 : 1377%]– 경고 : 시스템 알림이 비활성화됩니다.
흑기사의 광기는 기본적으로 220%에 머무른다. 광기가 스킬 위력의 자양분이니까.
하지만 1377%라니!
이토록 상쾌한 기분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광기가 이토록 달콤했던 적도 없었다. 하늘을 날고자 하면 날 수도 있을 기분이었다.
“이제 제대로 놀아보자, 리샤르.”
흑기사의 ‘진짜 전투’는 광기를 완전히 해방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이성 따위는 없이, 본능으로만 싸우는 전투.
그렇기에 애초에 《현자의 기억법》, 그 이성에 얽매여 있을 때는 결코 구현해낼 수 없는 전투.
“─────!”
다음 순간, 리샤르에게로 돌진하는 나의 격세가 심연의 늑대와 같은 형상을 이루었다.
아, 신격 깃든 혼의 달콤한 맛.
놈의 영혼과 살점이 타락의 칼날, 즉 나의 송곳니에 뜯겨 고동치다가 서서히 죽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