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 of the Fake Hero RAW novel - Chapter (169)
가짜 용사 이야기-169화(169/310)
#65 :
[10. 앤티키아] 결전, 엘리트 나이트 (11)정철의 맹공을 간신히 쳐낸 리샤르는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뭐지?’
이마에서는 진땀이, 왼쪽 옆구리에서는 피가 흘러내렸다. 칼을 또 맞부딪치는 순간에는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치받친다.
고작 한순간이었을 뿐이야.
그런데 뭔가가 바뀐 거지? 외형상 바뀐 것은 갑주뿐이었다.
늑대 두상을 본뜬 투구.
갑주는 의장 하나 없이 추레했고 망토는 누더기와도 같았다.
‘저 형태에서 오는 위압감? 외팔이한테서 위압감이라니? 위기의 순간에 각성한 건가?’
정철은 칼끝을 힘없이 늘어뜨린 채 비틀거리며 걸어올 뿐이었다.
기존의 정철과는 달랐다.
검술의 정석을 보여주는 것 같던 안정적인 자세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대신 느껴지는 것은 초심자의 불균형이었는데, 오히려 그 불균형에서 알 수 없는 위험이 감지되었다.
정철이 한순간 도약했다.
허공에서 몸을 빙글 돌리더니, 그 회전력을 더한 참격으로 리샤르를 내려찍었다.
카아아앙……!
냉기의 권속, 아자트카르의 팔이 거칠게 울면서 그 손목에 균열이 일었다. 식은땀이 등골에 흘렀다.
아자트카르가 힘으로 압도된다?
간신히 막았다고 생각할 때, 정철이 허공을 땅처럼 밟아 도약하더니 또다시 칼을 내리 휘둘렀다. 폭발, 폭발, 폭발.
한 번, 일곱 번, 열다섯 번.
쉴 새 없이 몰아치는 공세.
그것은 한 사람의 공세라기보다는 마치 수백 마리의 이리 떼가 활개를 치는 것처럼 느껴졌다.
열세, 리샤르는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다. 간격을 벌린다는 것은 불가능, 움직임을 좇아 반응하는 게 고작이다.
‘마치 한 마리의 광견…….’
물 만난 고기처럼 날뛰면서도 말은 일절 하지 않았고, 칼이 맞닿을 때마다 늑대처럼 울며 허연 입김을 뿜어댔다.
‘왼쪽 팔 전체를 제물로.’
눈앞이 샛노래지는 고통 속에서 왼쪽 팔을 찢었다. 제물을 바쳐서 절대의 힘을 이곳으로 부른다.
정철이 순간 자리에서 멈추었다. 암청색 안개가 그 전신을 휘감으며, “GUAAAAAAAAAA!” 고통스럽게 비명을 내질렀다.
그러자 안개가 사방으로 폭발했고, 팔의 절단면 너머에서 이곳으로 현현하려던 힘의 물결이 힘을 잃고 냉기로 스러졌다.
광역 술식 무효화……?
도대체 뭐냐? 뭐지? 흑기사한테 저딴 힘이 있었다니, 들어보지도 못했는데.
[흑기사는 광기에 취한 광전사. 그들의 전투에 이성이란 없다.]기억에 따르면 분명…….
그때 지고한 절대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엘리트 소서러는 흑혈이 아니라 심연을 휘두르게 되었다. 주의하라.」
리샤르는 정철을 제외하고도 흑기사를 1명 본 적이 있었다.
정철보단 못했지만…… 그래도 녀석도 나름 실력자였다.
흑기사는 본래 정철처럼 싸우는 클래스가 아니었다. 하나의 절대적인 검법에 전투의 판도를 맡기는 도박형이지.
“GUUUUAAAAAAAAAAAAAAAAA!”
말이 안 되었다.
검강이 천지를 가르는가 싶으면 벚꽃처럼 흩어지고 한 번의 참격이 수십 번의 참격처럼 흐드러지며 덮쳐왔다.
‘거리다. 일단 어떻게든 거리를 벌려야…….’
리샤르는 소환수들을 대거 흩뿌린 다음, 간격을 벌리기 위해 물러섰다. 그러려고 한 순간, 등 뒤에서 정철이 샤르홀린을 치켜들고 있었다.
뭐야, 이 자식.
어떻게 이렇게 빠르지?
시간, 시간이라도 멈춘 것처럼.
막을 틈도 없었다. 동작이 아까보다 몇 배는 빨랐다. 이미 그 모습을 본 순간, 거대한 칼날이 흉부를 꿰뚫고 솟아나 있었다.
‘아직이다. 주인님이 재생 능력을 선사하신다면, 아직, 희망이…….’
그러나 칼날에서 꿈틀거리던 심연이 매섭게 용솟음치면서, 칼날이 닿은 부위의 몸과 마음과 영혼을 모조리 썩게 만들기 시작했다.
“끄, 끄아아아아아아!”
그러자 어떻게, 정말 어찌 형언할 길이 없는 격통 속에서 리샤르의 몸이 한기로 뒤덮였다.
사지가 전부 찢겨 나간다.
그 찢겨 나간 사지의 단면으로부터 저 외우주의 절대 행성 이킬라스의 권속들이 무수히 돋아난다.
「음, 허, 허…… 두려움이란……, 곧……, 혼돈을 향한……, 경외심일지니…….」
그때 켈렉─샼의 패턴이 다시 시작되었으나, 이상하게도 정철을 향한 공격은 일절 없었다.
켈렉─샼의 포자가 무수히 분열하여 권속들을 녹이는 가운데, 정철이 나머지 권속들을 베고, 또, 베고, 베면서, 다가온다.
냉기가 하나로 엮여서 리샤르의 결손된 신체를 새로 빚어내기도 전에.
“안 돼, 이 세, 이 세계를, 이 세계를 멸망시켜야 하는 건, 나, 나 리샤르란 말……!”
방금, 그 죽음의 체험과도 같은 고통 때문이었을까. 리샤르는 멍하니 절규하다가 순간 멈칫했다.
‘잠깐, 왜지? 왜 이 세계를 멸망시켜야 하는 건 나였던 거지?’
뭔가…….
중요한 것을 잊고 있던…….
아니, 잊었다기보다는…… 길을 가다가 벌레를 짓밟았던 것이 오래 기억되지 않도록…… 그게 중요하다고 생각이 들지 않게…….
내 딸.
이제는 새하얗게 얼어붙고 산산이 깨져버린 인간성의 파편, 완전히 버려지지 않은 기억의 한 부분에서 딸의 모습이 떠올랐다.
뭐지?
왜지?
아내를 죽게 만들었던 희귀병에 똑같이 걸려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은 보이는데, 왜 얼굴은 떠오르지 않는 거지?
‘이름조차도 떠오르지 않아.’
절대 권속들과의 싸움을 마치고 온 정철의 타격은 막심했다.
심연의 흉갑이 벗겨져, 상반신은 나신이었다. 광분 상태도 해제된 건지 눈에 초점이 잡혀 있었다.
샤르홀린에서 솟구친 심연의 물결이 리샤르의 심장을 꿰뚫고 들어왔다.
영혼이 썩어 내리는 듯한 격통.
멀어져가는 의식.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영혼을 가득 채우던 셰라슐’토뤼악의 은총도 사라져간다. 너에게는 실망했다……라는 웃음소리와 함께.
‘웃기지도 않은 일이군…….’
딸 때문에 이곳에 왔는데…… 지금은 딸의 이름도 생각나지 않는다니…….
– 리샤르, 외우주의 신은 당신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아요! 그들에게 필요한 건 장난감일 뿐입니다. 소원 성취니, 힘이니 하는 것들로 사람들을 매혹시킬 뿐이래요. 그러니 제발…….
엘리트 헌터인가, 그 헛된 환상에 빠진 여자가 했던 소리가 왜 지금 떠오르는지…….
‘하, 장난감이라.’
정철이 리샤르의 심장에서 샤르홀린을 비틀어 빼냈다. 그러나 심연은 여전히 심장에 남아 있었다.
‘네 상대가 이놈이었어도 똑같은 선택을 할 수 있었을지.’
심연으로 만들어진 심장이 맥동하며 리샤르의 온몸 구석구석으로 심연을 내보냈다. 리샤르의 혈관이 검푸르게 빛나게 시작했다.
그 빛이 점점 영롱해져 가자,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밀려들었다.
근육이 찢어지고 뼈가 녹아내리는 아픔에 리샤르는 끝내 비명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러나 비명은 곧 웃음으로 변했다.
“흐, 흐흐, 흐흐흐흐흐흐, 너에게도…… 나와 똑같은 지옥이 기다리고 있길 바라마……!”
정철은 어떤 대꾸도 없이 죽어가는 리샤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래, 이게 내 복수다…….
나도 너 때문에 외우주에 영혼을 팔았으니, 너도 나 때문에 외우주에 영혼을 팔게 되었지.
나와 똑같은 결말이…….
아니, 나보다도 더 잔혹한 기만의 결말이 네놈을 기다리기를…….
* * *
나는 리샤르의 시체를 못마땅하게 내려다보았다. 살과 지방과 뼈가 녹아내려서 뒤엉킨 웅덩이.
리샤르의 몸속에 심연을 주입하고 폭발시킨 결과다.
저 죽음의 과정을 생생하게 느끼게 할 생각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럽게 죽일 작정이었다.
그런데 왜…….
피를 토하고 있는 건 나인지, 가슴이 찢어질 듯이 고통스러운 건 나인지…….
샤르홀린…….
이 미친…….
이렇게 꿇어앉는 지금 이 순간에도 샤르홀린은 손에 붙들린 채 떨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마치, 하나의 족쇄처럼.
흑기사 때는 없던 권능, 심연충(深淵蟲)들이 질퍽한 날갯짓 소리를 내며 내 곁으로 모여들었다.
“──넌 대체 뭐냐.”
그 순간, 내 관자를 정확히 겨누는 총구. 그 위에 얹힌 화살에서 전류가 파지직 튄다.
“왕보다도 강대한…… 영혼부터가 심연 그 자체로군…… 역시 그때 널 죽였어야 했나…….”
로헤이리츠였다.
이킬라스의 냉기며 왕의 심연에 오랫동안 노출되어 있던 만큼 그 몸은 만신창이고 호흡은 가빴다.
그러나 그 눈동자에서 번득이고 있는 건 분명한 적개심과 투쟁심. 지금까지의 무수한 회차에서 흑기사가 된 뒤에 그러했듯.
게임, 게임이라…….
그런데 게임에서는 대사가 저러지 않았던 것 같은데.
“그만둬…….”
나직이 말했다.
이 말을 들으면 로헤이리츠가 아니겠지만, 애초에 나도 이놈에게 말한 게 아니다.
“그만두라고 했다, 켈렉─샼!”
꿈틀거리는 혼돈의 포자들로 로헤이리츠를 녹여 버리려던 벌레 군주, 켈렉─샼이 움직임을 멈췄다.
로헤이리츠가 숨을 삼키며 켈렉─샼을 돌아보았다.
왕의 공격을 감지하지조차 못하다니, 녀석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왕보다 더 강대한 심연에 노출된 것도 아니고서야…….
아니, 답지 않은 건 내 쪽인가.
왜 지금, 켈렉─샼이 명령을 들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행동했지? 그게 당연하다는 듯.
원래대로였다면 로헤이리츠를 밀쳐서 구했을 것이다.
「음, 허, 허……, 절대 그릇의 명령인가……, 괘씸하나……, 순리를 따를 수밖에 없도다…….」
그때 케슈렌다크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다섯 번의 흔들림 때에는 보스룸에 구멍이 뚫렸다.
케슈렌다크는 살아 있는 도시, 5성 화염 마법 화장방혈의 힘에 도시의 내벽이 비명을 지르며 불살라진다.
“에델 씨!”
“형아!”
“로우!”
그리고 그 너머로 눈부시게 비쳐드는 빛, 그 빛 속에서 나타난 친구의 얼굴.
“지금 도우러 가겠습니다!”
박현수가 모두를 데리고, 나를 도우러 왔다. 신태엽, 크세리니아, 가이네이브, 바이로니카, 타키아르, 아비가일, 셀레스티나.
“아니…… 멈춰……! 이쪽으로 오지 마!”
반가움보다는 까닭 모를 불길함이 솟구친다. 이번에도 역시나 불길한 예감은 확실하게 적중했다.
「흐흐, 오늘 당신 운이 엄청나게 좋은데요. 엘리트 소서러.」
어느 틈일까, 요토스처럼 소리도 기척도 없이 나타나 내 옆에 서 있다.
일등 관리자, 샬류안.
박현수나 신태엽보다 이 녀석이 더 반갑게 느껴지게 만드는, 영혼 어딘가, 형태 없는 벌레에 파먹힌 부분이 두려웠다.
「눈앞에 버그가 알아서 나타나 줬잖아?」
샬류안이 그 기괴한 장우산으로 땅을 짚으며 씩 웃었다.
「자, 엘리트 플레이어의 이름으로 버그를 척결하세요. 보상도 엄청나게 후하다고요.」
몸이 삐걱거리기 시작한다.
육신이 제멋대로 움직여서, 샤르홀린의 칼날을 힘껏 움켜잡는다.
“형아, 대체 왜 관리자가 난입해서 저러는 거야?!”
몸의 통제권이 다른 어딘가로 넘어간 듯이, 몸 전체가 어떤 실에 연결되어 꼭두각시가 된 듯이.
한 방이다.
심연충들을 이용한 검기를 방출한다면, 지금 저들이 서 있는 시공간 전체를 녹여버릴 수 있다.
“상태가 이상해! 어서 도우러 가야겠어!”
검푸른 검기가 샤르홀린의 칼날에서 어지러이 휘몰아치며 적멸(寂滅)의 기원에 닿는다.
심연의 근원은 시공간 통제.
그 시공간의 흐름을 자유자재로 통제하여 부패를 일으키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피조물의 노화를 극도로 앞당기는 원리다.
「여기 이 잔챙이는 내가 처리해줄 테니.」
샬류안이 우산 끄트머리로 로헤이리츠의 가슴팍을 짚었다.
「……?!」
바로 그 순간, 심연의 칼날이 그 우산을 튕겨내며 귀가 쪼개질 듯한 굉음이 터진다.
“……가, 로헤이리츠!”
한 끗 차이로 목숨을 부지한 로헤이리츠가 나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무슨 속셈이냔 듯.
“목숨을 살려준 보답을, 해라…… 모두를 데리고 빠져나가……!”
샬류안이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헛숨을 뱉고 삼키기를 반복하다가 빽 소리쳤다.
「이 새끼야, 너 미쳤어?! 지금 감히 누구한테…… 그런 힘을 갖고 이딴 NPC나 버그 플레이어 따위를 수집해서 뭘 하겠다고?」
그 분노가 힘이 되어 폭주한다.
샬류안의 주위에서 넘실거리던 심연의 기운이 폭발하며, 그 주위로 검푸른 꽃이 무수히 피어난다.
시공간 자체가 헝클어지는 듯한 위압감.
「아, 생각할수록 빡치네. 켈, 저 새끼 붙잡고 있어 봐.」
켈렉─샼의 공격 패턴이 다시 시작되었다.
“샬류안───!”
아까 리샤르와의 전투에서 날 공격 대상으로 삼지 않던 것과는 완벽하게 다른, 적대감이 실린 육중한 공격들.
“───내 공략에 간섭하지 말고 꺼져!”
켈렉─샼은 왕, 애초에 쉬운 상대가 아니나 지금처럼 몸을 움직일 때마다 고통이 동반되는 상황에서는 더욱 최악이다.
“저것들은 필요 없는 NPC나 플레이어들이 아니라──!”
그러나 지금이라면.
“──내 공략에 필요해서!”
이성이 아니라 본능으로 칼을 휘두르는 것이 가능한, 흑기사로 각성한 지금이라면.
“내가 직접 고르고 키운 놈들이란 말이다────!”
켈렉─샼의 공격을 이리저리 피한 다음, 박현수 일행을 겨누고 솟구치는 부패의 꽃잎들을 대신 쳐내는 것도 가능하다.
「이 새끼가 진짜! 켈, 뭐 하는 거야!」
「음, 허, 허……, 저 존체를 상하게 했다가……, 심연의 주인께 어떤 꾸지람을 듣게 될지……, 나는 그것을 염려한다…….」
“로헤이리츠, 이 멍청한 놈아, 서둘러……!”
내 말의 진의를 의심하던 로헤이리츠가 샬류안의 맹공 앞에서 끝내 공허의 회랑을 열었다.
영원처럼 길었다.
로헤이리츠가 주요 NPC들을 모두 이끌고 공허 회랑으로 사라지기까지의 시간이.
그 영원의 마지막 순간에, 주제를 모르는지 한사코 떠나지 않고 나를 도우려 하던 박현수와 시선이 맞닿았다.
나는 눈동자로 말했다.
……사막에서 나누었던 약속, 기억하고 있습니까?
바로 그, 입으로는 말할 수 없던 말이 제대로 전달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음 순간 박현수는 다른 이들의 손에 이끌려 공허의 회랑 속으로 사라졌으니까.
그리고 나는 켈렉─샼과 샬류안에게 거칠게 제압되어 지면에 처박혀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