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 of the Fake Hero RAW novel - Chapter (17)
가짜 용사 이야기-17화(17/310)
제17화
“아라다만텔……?”
어머니가 사용했던 칼의 무게는 어째서인지 낯익었다. 어머니의 소검만큼이나 가벼웠던 것이다.
분명 처음이건만,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칼이 가르쳐주는 느낌이었다.
– 베어라.
칼이 그렇게 말하는 듯, 보이지 않아야 할 붉은 선이 시야를 가로질렀다.
최단 거리였다.
키슌의 목을 베고 지나갈 검의 궤적이었다.
라미네아와 카밀라 같은, 절정 고수들만이 볼 수 있는 일합의 선이었다.
당황하고 있을 여유가 없단 듯이 명멸하는 선이었다.
“쯔아아아─────!”
그 한순간.
키슌의 클로가 코앞까지 쇄도해온 한순간.
우루크들이 어서 끝내 버리라며 아우성을 터뜨리던 그 한순간.
“─────아아아아아아!”
카이센이 칼을 휘두른 한순간, 극위성검 아라다만텔이 처절하도록 붉은 광휘를 토해냈다.
검강, 검강이었다.
사납게 뻗어져 나온 기운이 키슌의 클로를 불살라 버리고 그 손을 자르고 팔의 근골 속으로 파고들어 비스듬히 솟구쳐 올라가더니 이내 경추를 끊고 나왔다.
챠아아앙…………………!
길게 끄는 칼의 울음이 멎었을 때, 자리에 서 있던 건 오직 한 사람.
카이센.
아라다만텔의 칼끝을 늘어뜨린 채 격한 숨을 헐떡거리고 있었으나, 소년은 분명히 서 있었다.
그렇다면 키슌은?
키랄 부족의 맏아들이자 차기 족장 후보였던 그 우루크는 목이 없었다.
오직 몸만이 남아, 잘린 목의 단면으로 피거품을 뿜으며 한참 비틀거리고 있었다.
몸이, 갑작스러운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듯이. 솟구쳤던 머리통은 비바람 속을 빙글빙글 돌다가 젖은 흙바닥에 처박혔다.
그 두 눈은 경악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뒤이어 몸이 지면에 처박히며 쿵, 지축이 울렸다.
적막이 내려앉았다.
방금 전까지 승리를 확신하고 환성을 터뜨리던 우루크들이 멍하니 얼어붙었다.
참격의 순간 비조차도 숨을 죽였을까. 고요했던 빗소리가 이제야 다시 쏴아아…… 거칠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키슌의 친동생 키쉐는 무릎이 풀려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때.
“Ketakose……!”
한 우루크가 울부짖었다.
죽여 버려라, 라는 뜻이었다.
죽이라는 말이 숲과 하늘에 가득 차며, 우루크 중 절반이 분노에 겨워 무기를 치켜들었다.
“Ketakose……!”
“Ketakose……!”
상황이 일순 급박해졌다.
우루크들이 카이센을 에워싸듯 다가왔을 때, 카이센에게는 기력이 없었다.
아라다만텔의 칼끝을 치켜세우는 게 고작이었다.
그건 요한도 마찬가지였다.
우루크들은 키슌의 죽음의 울분을 카밀라와 요한에게 풀려는 것처럼 보였다.
우루크들이 다가와 도끼날을 치켜들 때, 요한은 칼자루 쥔 손이 떨리는 걸 느꼈다.
그 절체절명의 순간.
키랄 부족 우루크들이 옛 규율을 지키라고 소리치면서 다른 우루크들의 앞을 막아섰다.
쏟아지는 빗속에서, 우루크들이 순식간에 동족에게 병장기를 겨누는 기이한 상황이 벌어졌다.
“Sheketase(그만)!”
그때 키쉐가 격렬하게 소리쳤다.
우루크들끼리의 내분이 일어나기 직전이었는데, 모든 우루크들이 키슌 다음가는 전사인 그의 언행에 집중되었다.
“발크루쉬 잡놈들과 똑같아질 생각이냐?”
우루크들이 항변했다.
키슌을 죽인 개자식을 살려 보낼 겁니까?
“저놈이 칼타케에서 이겼으니, 저놈이 옳다.”
영원처럼 긴 시간 동안, 우루크들이 섬뜩하게 카이센과 울프를 노려보았으나 끝내 하나둘씩 병장기를 내렸다.
“Jekia, Roke no kirmea.”
키쉐가 조용히 명령하자 곧 우루크 한 놈이 말을 끌고 왔다. 인간에게서 빼앗아 가지고 있던 게 분명했다.
“칼타케의 법률에 따라, 앞으로 한나절 동안은 너희를 쫓지 않겠다.”
키쉐가 카이센에게 다가왔다.
싸울 의사가 없다는 듯, 양손을 들어 보이며.
“또한 다른 우루크들이 건너갈 수 없게 이 다리는 우리 키랄 클랜이 지키겠다.”
키쉐의 말을 인간의 말로 해석하자면 이랬다. 카이센이 눈썹을 찌푸리며 우루크의 말로 비아냥댔다.
“어울리지 않게 신사적이시군.”
“내가 죽었다면 키슌 또한 이렇게 행동했을 거다. 우리 키랄은 발크루쉬 같은 근본 없는 잡종들과는 다르다.”
키쉐의 목소리는 슬픔과 분노로 떨리고 있었지만, 그래도 살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키쉐가 돌아서며 말했다.
“빨리 떠나는 게 좋을 거다. 홍련의 아들 카이센. 내가 널 죽이러 출발하기 전에.”
카이센과 울프는 시선을 주고받은 다음, 카밀라를 말의 등에 걸쳤다.
울프가 고삐를 잡았고 카이센은 아라다만텔의 칼집을 회수해 칼을 납도했다.
그런 카이센이 대교를 건너갈 때, 규율을 지키라고 소리쳤던 키랄의 우루크들이 비켜서며 자신의 가슴을 주먹으로 때려 예를 표했다.
“어울리지도 않는 개짓거리를.”
카이센이 짓씹듯 중얼거렸다.
우루크 사회에서는 강자만이 진리, 승자만이 숭배할 만한 존재이며 사귈 수 있는 벗이었다.
우루크들은 카이센을 강자로서 인정하고 존경을 표한 것이었다.
[당시 키슌은 키랄 클랜의 족장이 될 전사로서 발카로만큼은 아니어도 우루크 사회에 엄청난 명성을 떨치고 있었던 전사였다.]울프는 당시 우루크 사회에 대해 그렇게 기록해 놓았다.
[유년기의 끝자락에서, 카이센이 칼타케로 쓰러뜨린 전사가 바로 그런 전사였다…… 우루크들이 존경심을 표하지 않으면 이상한 것 아니었을까.]유년기의 끝,
아리스타포 공방전 (8)
카이센은 승리했지만 내상 또한 깊었다. 절뚝거리며 앞서 걷는 카이센에게 울프가 말을 걸었다.
“카이센……?”
“어?”
“아라다만텔이 무겁지 않아?”
“그냥저냥 들 만한데, 크흡…….”
울프는 당혹스러웠다.
극위성검은 선택된 대리자가 아니고서는 겨우 드는 게 고작이고, 휘두르는 것은 아예 불가능한데.
성검이 곁을 허락해 주었다는 증거…… 그렇기에 헛웃음을 흘렸다.
그래, 그렇구나.
아라다만텔이 너를 새로운 주인으로 정했다는 거구나. 단장님의 아들이자 카밀라의 제자인 너를.
아라다만텔의 전대 주인이 손을 뻗어 울프의 어깨를 만진 건 바로 그때였다.
“내려줘…….”
아…….
아직 이 순간이 남아 있었구나. 인연이 절단되는 눈물의 순간이.
울프는 카밀라를 안아들고, 그녀를 메말라 붙은 솔나무 줄기 앞에 앉혀주었다.
“뭐 해, 울프! 빨리 가야지! 피를 이렇게 흘리고 있는데…… 쉴 틈이 어딨다고!”
“카이센. 카밀라는 더 살지 못해.”
“그걸 어떻게 알아! 누가 정했어, 누가 그딴 걸 정했는데?”
복부에서 피거품이 끝없이 솟구쳐 나오는 카밀라의 눈동자는 싸늘했다.
머리카락에서 비린내가 났다.
어머니가 죽던 날 저녁에 밤하늘에 깔리던 별들과 울면서 그 무덤을 파던 새벽이 떠올랐다. 모든 일들이 겹쳐졌다.
“죽어……?”
“…….”
“카밀라가 죽는다고……?”
말끝에서 울음이 터졌다.
어째서…… 이 4년간 운 적이 없는데, 늘 때리고 괴롭히고 욕만 하던 이 여자 때문에 왜 몸속에서 울음이 끓는 거지?
울프가 그 의문에 답을 주었다.
“카이센, 이건 내 생각이지만, 카밀라는 네가 단장님의 아들이라서 모질게 대한 걸 거야.”
“뭐……?”
“곧 이렇게 이별해야 될 테니까, 네가 슬퍼하지 않도록…….”
말하지 마.
카밀라가 핏물을 껄떡였다.
네가 그걸 말해버리면…… 난 지금까지…… 뭘 해온 게 되냐고…… 저 녀석이 지금까지 들어온 온갖 욕설은 뭐가 되냐고.
“장난하지 마, 집어치우라고!”
카이센이 카밀라의 어깨를 움켜잡고 힘없이 흔들었다.
“넌 그냥 날 질투했던 거잖아! 엄마를 빼앗아 갔다고 생각해서! 다 알아, 그러니까 어울리지도 않는 짓거리 집어치우라고!”
소년의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는 빗물이 꼭 눈물처럼 보였다.
“야, 카이센…….”
카밀라가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지금까지 미안했다…….”
“사과하지 마, 사과하지 마! 평소처럼 욕하라고! 어디서 아가리를 터냐고 소리치라고! 왜 안 멈추는 거야, 피가, 피가……!”
시야가 힘없이 꿈틀거린다.
눈물을 흘리며 카밀라의 상처 부위를 필사적으로 누르는 소년의 얼굴이 보였다.
미치도록 사랑했던 스승님과 너무나도 닮은 얼굴이.
– 우리 카미는 정말 귀엽네.
그 얼굴에 겹쳐서.
목소리가.
차갑게 밀려드는 단말마 속에서 과거의 목소리가 따스하게 마음속에 속삭여온다.
– 그, 그럴 리가 없습니다!
– 정말 귀여운걸. 있잖아, 나는 언젠가 카미처럼 귀여운 아이들을 낳아보고 싶어.
그때 자신이 뭐라고 했을까.
아마 질투했던 것 같다. 두려웠으니까.
스승님이 아이들을 낳으면 자신 따위는 뒷전으로 밀려나게 될 상황이 두려웠다.
– 페이쿼리어는 금혼 서약을 하지 않습니까?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말했더랬지.
그러자 스승님은 맑게 웃으시더니 카밀라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 애를 낳고, 그 애들이 말을 배울 때쯤에는 카미를 내 친동생이라고 소개할 거야.
– 네……?
– 그럼 그 아이가 카미를 이모라고 부르면서 따라다니겠지? 귀엽게 아장거리면서…….
일반인에겐 사소한 꿈이었다.
하지만 칼의 세계에서 피고 지는 그녀들에게는 너무나도 크고 먼 꿈이었다.
그렇기에 스승님은 꿈을 꾸듯이 말했던 걸까.
– 그 아이가 언젠가 울먹거리며 너한테 이렇게 이르는 날도 있지 않을까? 이모, 엄마가 간식을 안 줘요…….
– 간식을 안 주실 거예요……?
– 들어봐. 그때 카미가 그 아이한테 몰래 간식을 쥐여주며 이렇게 말해. ‘알지? 엄마한테는 비밀이야’라고.
그리고.
서로 고개를 끄덕이며 해맑게 웃는 거야.
아.
딸랑, 기억의 메아리와 함께…… 결코 붙잡을 수 없는 꿈이 눈앞에서 눈부시게 반짝였다.
라미네아가 만든 샌드위치.
푸르른 잔디밭에 앉아, 그걸 베어 물며 시끌벅적하게 떠드는 카이센과 카밀라와 라미네아의 모습이 보이는 꿈이.
세상이 희뿌옇게 변해갔다.
세상이, 세상이 조금만 더 평화로웠더라면…… 그런 날을 직접 보고 만질 수 있었겠지요, 스승님?
“울프, 울프, 가만히 서서 뭐 해! 어서, 어서 마법을 쓰라고!”
“카이센.”
“상처 부위를 얼리기만 하면 돼! 지혈, 일단 지혈만 하면! 사제나 마녀가 있는 곳까지 갈 수만 있다면, 그래서 용혈 혈청을 얻을 수만 있다면! 몸을 다시 회복시킬 수 있잖아!”
울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력하게 짓씹은 입술에서 배어 나온 피의 맛은 처참했다. 살리고 싶어도, 살릴 수가 없는 단계다.
카밀라는 이미 머리색부터 시작해 눈썹까지 백발로 세어버렸다. 이것은 모든 생명력을 사용했다는 뜻이었다. 카밀라가 말했다.
“카이센…… 시간이 없으니까 되묻지 말고 들어…….”
“시간이 없긴 왜 없어? 이것만, 이것만 고치면 되잖아!”
“너…… 너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냐……?”
“뭐?”
“그냥 칼 좀 쓰는 얼라? 아니면…… 페이쿼리어의 제자……?”
이제 너와 더 함께 있을 수 없으니, 너에게 들려줘야 할 이야기를 전해준다.
스승으로서, 제자에게.
내가 그렇게 물려받았듯, 너에게도 이 이야기가, 이 의지가 계승되기를.
“이런 썅, 지금 그딴 게 뭐가 궁금해!”
“중요하니까 묻는 거야…….”
“안 중요해! 하나도 안 중요해! 닥치고 어서 일어나 걷기나 해! 말에 올라타라고!”
“너 말이야…… 이 전쟁이…… 모든 것이 끝나면…… 칼 따위는 버리고 멀리 떠나봐…… 사랑하는 사람이 함께라면 더 좋고…….”
전쟁이 끝나고……?
그게 가당키나 한 일이란 말인가. 그 언어가 두려웠다. 벅차고 이질적이었다.
머릿속에 새하얀 무언가가 들어찬 것처럼,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피 냄새는 조금도 안 나는 곳에서…… 행복해지라고…….”
그건 카밀라의 꿈이었다.
나는 그 꿈을 포기해서 이런 마지막을 맞았지만, 너는…….
이제는 이룰 수 없는 꿈을 말하는 카밀라의 말투는 처연한 듯하나 거룩했다.
“그래서 언젠가…… 낙원에서 만날 때…… 나와 스승님에게 말해줘…… 얼마나 행복하게 살아왔는지…….”
숨이.
카이센의 숨이 멈췄다.
행복, 행복이라고…… 이딴 세계에서 행복하게 살라고? 슬픔밖에 없는 이 세계에서? 어떻게?
“그러겠다고 약속해…….”
행복이란 말은 말장난처럼 보였다.
백일몽처럼 들렸다.
머나먼 꿈속의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그렇기에 침묵했다.
아니, 아니다.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대답하는 순간…… 소중한 무언가가 도려져 나갈 것만 같아서. 그날, 어머니가 그렇게 떠나갔듯이.
“이걸 약속하면, 어디로 가든, 누굴 만나든…… 당연하게 말해도 된다고 허락할 테니까…….”
그렇게 절망하는 카이센의 머리를 무언가가 따스하게 쓰다듬었다.
손이었다, 카밀라의 손.
카밀라가 카이센에게 스승으로서 베푼 처음이자 마지막 애정 표현이었다. 어머니를 닮아서 눈부신 미소였다.
“넌, 너는, 나 카밀라 알터 아라다만텔이 직접 고르고 키운 제자라고…….”
너에게 한 약속을 지키지 못해 미안하다, 아라다만텔. 이제 이 잔혹한 세계에 혼자 남겨질 내 제자를 부탁한다.
“살아. 살아서 행복해져, 카이센. 아라다만텔을 부탁한다.”
이후 세상이 적막에 사로잡혔다.
툭, 하고 삶의 마지막 온기가 끊긴 손이 진흙을 때리는 소리가 고요하게 울려 퍼졌다.
그녀의 스승이 그랬듯이, 카밀라도 남겨진 이들을 위한 미소를 머금은 채로 죽었다.
장마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싸늘하게 식어가는 스승의 주검을 힘없이 흔드는 소년의 두 눈동자로부터.
사랑했던 여인의 주검을 바라보며 망연히 주저앉은 청년의 두 눈동자에서.
비는 내리고 내리고 또 내렸다.
* * *
「카밀라가 정말 그 아이를 선택했단 말인가?」
용령전(龍靈殿).
광룡정교회의 본산인 법황청.
그 상층에 위치한 이곳에 모인 자들의 지체는 높았다. 울프가 대답했다.
“예, 각하. 제 눈으로 직접 봤습니다. 믿지 못하시겠다면 아라다만텔을 휘두르게 시험해 보십시오.”
교회에는 다섯 추기경이 있다.
다섯 마리의 진룡(眞龍)급 황룡을 말하는 것인데, 병든 광룡을 대신해서 중대사들을 상의해 결정하고 있었다.
이들을 법황청의 다섯 기둥이라 하였고, 이들의 모임을 오주회의(五柱會議)라고 불렀다.
「하지만 그 아이는 남아가 아닌가. 심지어 탈영병의 아들이지. 그런 자가 성검의 힘을 과연 옳은 길로 이끌 수 있겠는가?」
추기경 하곤이 우려를 표했다.
그러자 울프가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예를 표했다.
“그 말은 역대 최고의 페이쿼리어의 피를 이어받았다는 말이 됩니다. 그리고 그 제자에게 최고의 교육을 받았지요.”
「……!」
“그런 존재를 성별만으로 포기한다면, 인류에게 헤아릴 수 없는 손실이 될 거라고 사료됩니다.”
추기경들이 침음했다.
이번엔 추기경 파렘이 물었다.
「그 아이의 신원을 보증해줄 존재가 있는가? 문제가 일어났을 시 그 책임을 질 인물 말이네.」
“제가 그 아이의 신원을 보증하겠습니다.”
「그대는 서자이긴 하나 제국 북부의 선제후, 듀렌 가문의 핏줄이자 홍련 병단의 일원이었던 자. 자격은 충분하다. 하지만 신원을 보증하려면 둘 이상의──」
추기경 파렘이 눈을 지그시 감으며 반대 의사를 표하려던 그때, 추기경 요슈하르가 끼어들었다.
「──나 또한 그 아이의 길을 보증하지.」
라미네아를 딸처럼 아꼈던 자.
그리고 카이센의 고향인 땅끝 마을로 의전단을 보낸 요슈하르였다.
요슈하르가 아니었더라면 라미네아는 유예기간도 없이 즉시 끌려왔을 터였다. 가정의 행복을 누려보지 못한 채로.
「요슈하르?」
「라미네아가 삶을 포기하면서까지 지켜낸 아이다. 그리고 그 카밀라가 제자로 택했다지. 한번 믿어보고 싶네. 일어나는 문제의 모든 책임은 내가 지지.」
요슈하르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라미네아, 이게 내가 너에게 마지막으로 주는 편애다. 이제 그만 편히 쉬어라.
「결정됐군.」
그걸 마지막으로 계속 침묵을 지키고 있던 추기경 인라히트가 눈을 떴다.
「라미네아의 아들이며 카밀라의 제자인 카이센, 그 아이의 <위용검전(僞勇劍殿)> 입교를 허가한다. 그 어미와 스승이 그랬듯, 용사가 될 수 있도록.」
* * *
울프가 빙결 마법으로 사체를 얼렸으므로, 카밀라의 몸은 썩지 않았다.
카밀라는 법황청의 제1예배당에서 화장되었다. 혼이 떠난 육신이, 심연에게 먹히지 않고 영면하도록.
카밀라의 몸은 잿가루가 되어 비가 그친 세상에서 흩날렸다.
한 움큼 남은 뼛조각을 울프는 말없이 그러모아 마법으로 얼렸다. 눈 결정을 닮은 섬세한 조각으로.
그걸 반으로 쪼갠 울프는, 명주실을 꼬아 목걸이를 만들었다. 하나는 자신의 목에, 다른 하나는 카이센의 목에 걸었다.
“카이센, 단장님의 무덤이 어디인지 기억하고 있다고 했지?”
그때, 울프의 얼굴은 고요했다.
사랑했던 연인을 떠나보낸 고통으로 마음이 찢어지고 있을 텐데도, 그는 고요했다.
카이센이 울먹거리며 대답했다.
“도토리를 심어놨어.”
“카이센, 우리 꼭 카밀라를 데리고 거기까지 가주자.”
울프가 카이센을 끌어안았다.
그 목소리가 흔들리기 시작한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처절하게 젖어든 눈동자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네가 페이쿼리어가 된 이후에…… 함께 가자…… 카밀라가 단장님 옆에서 쉴 수 있도록 해주자…….”
울프는 숨죽여 울었고, 그 눈물에 카이센도 또다시 울었다.
“응…….”
울프는 페이쿼리어가 되고 싶다는 카이센의 강력한 요청을 변호해 법황청의 <위용검전>에 카이센을 등록해 주었다.
장례식이 끝난 이후에, 카이센은 울프를 법황청 대문까지 배웅했다.
“다시 만날 때, 너를 카이센 알터 아라다만텔이라고 부를 수 있으면 좋겠구나.”
“…….”
“그만 울먹거려. 네가 그런 인물상도 아니잖아?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야. 예전에 카밀라랑 이 앞에서 헤어질 때가 생각나네.”
“울프…….”
“나는 잠시 북부의 고향으로 갔다가 전선으로 돌아갈 거야. 다시 지식을 쌓아야겠지. 지식이란 칼날과 같아서, 항상 연마하지 않으면 무뎌지거든.”
울프가 카이센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카이센의 시선이 울프의 눈 결정 조각 목걸이에 머무르자, 울프가 씁쓰레 웃었다.
“난 앞으로도 어떤 여자도 사랑하지 않을 거야. 카이센, 남자가 일생에 한 여자만을 사랑하는 건 절대 부끄러운 일이 아니란다.”
“…….”
“너도 그런 여자를 만나게 되기를 기도하마. 그럼 이걸로 작별이구나. 곧 <위용검전>의 교관이 널 데리러 나올 거야.”
울프가 미소로 슬픔을 감추며 돌아섰다.
떠나는 은인의 뒷모습을 망연히 지켜보던 카이센은 땅바닥에 꿇어앉아 절했다.
울프가 사라지고 난 뒤에도, 그 이마는 오랫동안 땅바닥에 닿아 있었고 몸은 치받치는 눈물로 여울지며 흔들렸다.
그렇게, 열일곱 살의 마지막 날이 저물었다.
이제, 열여덟 살이었다.
열여덟 살에, 소년은 아직 피 흘리는 세상 속에 있었다. 아직, 여름 속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