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 of the Fake Hero RAW novel - Chapter (172)
가짜 용사 이야기-172화(172/310)
#68 :
[11. 엇갈리는 운명] 빛의 계승자, 어둠의 계승자 (2)나는 일부러 청자를 슈’율큘라로 고정시켰다.
샬류안을 배제하기 위함이었다.
슈’율큘라의 촉수가 신경질적으로 꿈틀거렸다. 대답은 없었다. 날카로운 침묵만이 경내를 뒤덮었다.
“대답해라. 이건 명령이다.”
「명령? 너는 아직 본좌에게 명령을 내릴 자격이 없다.」
“그렇다면 한번 시험해볼까. 위대한 슈’율큘라께도 고문이 통하는지 안 통하는지를.”
「본좌를 공격하겠단 말이냐?」
“1인 공략도 지금이라면 못 할 것도 없지. 요토스가 말하길, 너희들은 지금 원래 힘을 절반도 못 낸다던데.”
리샤르와의 일전 때 사용했던, 검푸른 안개가 내 온몸을 휘감자 슈율켈리스의 심연이 폭주하다 못해 비명을 터뜨려대기 시작했다.
「본좌가 없이는 그대의 계획은 성립하지 못할 것이다. 그조차도 모르느냐?」
“심연은 내게 복종한다. 복종하지 않는 장기말은 필요 없다.”
이미 알고 있었다.
그 개념은 슈’율큘라의 심연체들에게도 적용된다는 것을.
「지도자가 없으면 훌륭한 군대도 오합지졸에 불과하다.」
“네 휘하에 지도력이 출중한 놈이 있을 텐데. 그라베론이었나?”
모름지기 공격대장이라면 중간 보스나 네임드 몬스터들에 대한 정보를 꿰고 있어야 하는 법.
“그라베론이라면 네 뒤를 훌륭히 계승할 수 있을 듯한데.”
「오만이 지나친 것 아닌가?」
슈’율큘라가 강렬한 심연을 방출하기 시작했다. 온몸이 짓이겨지는 듯한 힘.
놈도 명색이 왕이라는 거겠지.
하지만 아무리 계산해봐도 놈한테 질 것 같지가 않았다. 25명의 공격대가 아니라, 일대일로 붙어도 말이다.
“경고하는데, 처음부터 전력을 다하는 게 좋을걸. 부하들한테 개처럼 처맞는 꼴 보이기 싫으면.”
「말하는 것만큼은 청산유수로구나! 아직 필멸의 육신에 갇힌 주제에 이토록 오만한 심성을 가지다니. 본좌가 직접 겸손이란 무엇인지 가르쳐주마!」
“누구보다 오만한 네가 겸손을 논해?”
나와 슈’율큘라의 심연이 사납게 뒤엉키려던 바로 그 순간, 샬류안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잠깐!」
“비키십시오.”
「안 돼.」
내가 으르렁거리자, 샬류안도 맞받아 소리쳤다.
「내가 알려준다고, 이 새끼야!」
「샬류안!」
「큘, 됐어. 어차피 이제 알 때도 됐지. 전속 계약을 한 거나 마찬가진데. 옛날의 너처럼 말야.」
* * *
– 이쪽은 피터, 검사 클래스입니다.
현수는 꿈을 꾸고 있었다.
성도의 내전이 갈무리되고, 기둥의 도시로 향하기 전에 새로운 동료를 소개해주던 때였다.
– 여, 열심히 하겠습니다!
정철이 한 명 한 명을 새로이 소개시켜줄 때마다 공대원들은 어색하게나마 박수를 치며 새로운 동료를 환영했다.
– 여기는 야나, 폐인 클래스고.
– 폐, 폐인 클래스라니! 그, 그런 건 없어!
– 근데 맞잖아.
– 마, 맞긴 한데, 마, 말이 너무 심하잖아!
그러자 사쿠라이가 까르르 웃었다. 그때의 웃음이 맑고 깊어서 아직까지도 기억나는 것일까.
– 이쪽은 브뤼나, 사기꾼 클래스입니다. 그런 느낌이 물씬 풍겨요.
– 무슨 소리예요? 저처럼 정직하고 상냥한 여자 어디 가서 못 찾을 텐데. 그런 여자에게 스타폴을 선물해서 프러포즈를 할 기회를 드릴게요.
– 보시다시피 이런 속물 녀석이니 절대 믿지 말 것.
정철은…… 공대원들을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아꼈다.
장교 출신이라서 그런 것일까.
그 추측은 반쯤은 맞았고 반쯤은 틀렸던 것으로 밝혀졌다. 신태엽에게 정철의 그런 성격을 물어보게 된 날에.
– 통일 전쟁 쏘가리(소위의 은어) 시절의 일이래. 형아 판단 실수 하나로 소대원 전부 전멸했었다나?
– 뭐?
– 원래 이 게임 공대장들이 어떻게든 클리어 회차 올려서 랭킹 올리려고 혈안이라, 공대원들 그냥 개같이 버릴 때 많은데 철이 형아는 그런 적이 한 번도 없었어.
신태엽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 이 미친 배틀로얄에서 그런 형아의 공대에 처음부터 들다니, 아저씨는 운도 참 좋아.
왜일까. 아아, 왜일까.
다시는 저런 풍경을 볼 수 없을 거란 직감 속에서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파오는 건.
꿈의 정경이 몽롱하게 흩어지고, 현실이 단조로운 리듬 속에서 펼쳐져 나갔다. 쿠궁, 쿠궁, 하고…….
증기기관차였다.
객실을 병실로 개조한 이곳은 구제 기사단 소유의 의료용 증기기관차, 청성(淸聲).
청성이란 영웅시대를 선도했던 백룡 미른가디아의 이명이다.
미른가디아는 온 세계를 다니며 병들고 다친 자들을 치료하고 보살폈다고 전해진다. 구제 기사단이 그 이명을 기관차에 붙인 건 그런 이유에서였다.
“박현수.”
샬롯 칸드라군이 말했다.
반가운 목소리로 외치고 있었으나 박현수를 밤새 간호하느라 지친 두 눈은 어둡고 퀭했다.
“여기는…….”
“안심해라. 북부를 벗어났어. 곧 성도에 도착할 수 있을 거다.”
“성도…….”
성도에서 정철과 함께 웃던 기억이 떠올라, 다시 한번 머리에 현기증이 치밀었다.
“에델 씨는…….”
“나도 그 이야기를 들었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더군……. 하지만 그 여자가 아니었더라면 북부에서는 생존자가 단 한 명도 나오지 않았을 거야. 우리도 거기에서 전멸했을 거고. 전하와 아르츠레히드의 목숨도…….”
요르한 4세와 아르츠레히드는 무사한 건가. 그나마 한시름을 놓을 수 있는 소식이었다.
“그 여자라 하심은?”
“발레린 말이다. 발데마르의 여동생이지. 어린 시절에 종적을 감춰서 지금까지는 반쯤 전설로 여겨져 왔는데, 이런 상황에 나타날 줄이야.”
발레린.
그 울림에 북부에서 벌어졌던 모든 혼돈과 죽음과 광란이 떠오르면서 구역질이 치밀었다.
현수는 병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휘청거리면서 두 발로 땅을 짚고 섰다.
“발레린은 어디에 있습니까?”
“아직 안정을 취해야 한다!”
“발레린, 어디에 있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제발…….”
몇 번의 실랑이 끝에, 샬롯 칸드라군이 박현수를 부축하여 병실 객차를 나섰다.
1번 객실은 병실이 아니라 기사(구제 기사단의 기사는 모두 의사다)들이 약재와 의료기를 관리할 수 있게 개조되어 있었다.
그 1번 객실로 향하는데 고성이 점점 커져왔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
“……부정한다고 부정된다면 그게 진실이겠는가…….”
“……답답해 죽겠네, 진짜! 철이 형아는 그럴 사람이 아니란 말이야……!”
그때 박현수와 샬롯이 문을 열고 1번 객실로 들어섰다. 순간 모든 고성이 가라앉고 정적이 깔렸다. 신태엽이 반쯤 울상인 얼굴로 다가왔다.
“아저씨, 말 좀 해줘봐! 저 녀석이 자꾸 철이 형아가 외우주의 사도인지 뭔지래. 나쁜 놈이라고 매도한다고!”
팔짱을 낀 채 창가에 기대서 있었던 로헤이리츠가 입을 열었다.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 정철은 사쿠라이인가 하는 그 꼬맹이를 심연에 제물로 바쳤어. 자신의 여동생을 말이다.”
정철이 사쿠라이를, 제물로 바쳤다니…….
그럴 리가 없다.
두 사람이 얼마나 친했었는데, 설정상 남매 관계로 지냈으나 여동생이 있는 현수가 봐도 두 사람은 친남매처럼 가까워보였다.
“하지만 그건 여기 이 금발 꼬맹이의 말대로 악의적이라 볼 수는 없었다. 불가항력이었지. 그게 아니었더라면 그 쓰레기도 나도 죽었을 테니.”
“그렇다고 제물로 바쳤다는 사실이 사라지던가?”
발레린이 단호하게 말했다.
다른 요정 간부들이 그 양쪽으로 시립해 있었다.
“지금까지 세계가 반복되면서, 외우주의 사도 중에 갈등하던 존재들이 없던 건 아니다. 하지만 어떤 형태든 간에 놈들은 외우주의 하수인이 되었고, 이 세계를 파멸시키는 데 앞장섰다.”
“세계가 반복되다니…… 난 아직도 그 말이 믿기질 않아.”
크세리니아 옆에 있던 바이로니카가 관자놀이를 누르며 말했다. 발레린이 다시 말했다.
“세계는 정확히 다섯 번 반복되었다. 그때마다 출현한 사도들은 모두 달랐다.”
세계가 다섯 번 반복?
현수는 신태엽과 멍하니 시선을 주고받았다. 생각이 날 수밖에 없던 것이다.
배틀로얄 설명회 때 관리자 샬류안이 말했던 ‘이전에 있던 다섯 번의 배틀로얄’이란 문구와.
“세계의 파멸을 거듭 겪으면서 나는 계속 강해졌고…… 그리고 마침내 외우주의 사도를 압도할 만한 힘을 갖추게 되었다. 그렇게 생각했지…….”
“생각했다고?”
“그렇다, 공허의 사도. 하지만 가까이에서 본 네가 제일 잘 알겠지만 이번 외우주의 사도들은 지난번 사도들과는 격 자체가 달라. 부리는 힘이나 그 신격이 절대(絶對)에 가깝다고 볼 수 있겠다.”
“그래서 네이갈라스의 봉인을 푸는 척해서 그 쓰레기 놈을 끌어들인 거냐?”
“그래, 거기에서 네가 그놈을 돕지만 않았어도 이미 파멸을 막았을 거다. 확실히 죽일 수 있었어.”
“그렇게 내버려 두었다가는 그때 저기 저놈도 죽였겠지. 네가 그 쓰레기가 달고 다니던 짐짝 하나를 죽게 만들었던 것처럼.”
발레린의 눈빛에 당혹이 스쳤다.
발레린의 시선을 받은 현수야말로 그런 당혹감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대체 무슨 소리지?
네이갈라스의 봉인을 푸는 척해?
정철이 달고 다니던 짐짝을 죽게 만들어?
정보의 포화란 이런 것일까. 안 그래도 깨질 듯한 현기증에 신음하고 있었는데, 정보의 쇄도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용서해 달라는 말은 하지 않겠다. 하지만 그것에 대해 설명할 기회를 줬으면 좋겠군.”
“예……?”
“내가 왜 플레이어, 즉 너희들을 처단해 왔는지를 말이다. 왜 그래야만 했는지 설명할 기회를 주면 고맙겠단 소리다.”
현수는 가슴을 주먹으로 움켜쥐고 숨을 헐떡였다. 과호흡으로 머릿속이 새하얘져 가고 있었다.
“박현수, 괜찮느냐? 박현수!”
어쩌면 그때, 받아들일 수 없는 잔혹한 운명을 본능적으로 느껴서 그런 걸지도 몰라.
언젠가, 웬 악몽에서 보았던 환상, 거기에서 현수와 정철은 서로에게 칼끝을 겨누고 있었다.
그 어렴풋했던 환상이 서서히 실체를 갖춰 나가고 있는 것만 같아서 그랬던 걸지도 몰라.
“듣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머리가 나빠서, 그 설명을 잘 이해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내가 잘 설명하겠다. 어차피 환상 세계로 널 데려갈 작정─”
“─예, 그러니까 여기 이 신태엽도 저와 같이 그 환상 세계로 갈 수 있게 해주십시오.”
“아저씨?”
“태엽이는 영리해요. 단박에 알아듣고 저한테 알기 쉽게 설명해줄 테니까요. 부탁드리겠습니다.”
* * *
“……그렇게 된 거야.”
샬류안이 들려준 이야기는 간단했다. 너무 간단명료해서 오히려 신뢰가 갈 정도였다.
아니…….
이미 머릿속에서는 형태의 얼개를 갖춰가던 의문이 확실하게 정립된 것 같다고 해야 하나.
“<잊혀진 왕들>이 요토스의 계약 플레이어들이었다니.”
즉, 이미 한 세계를 멸망시킨 우승자들이란 소리였다.
선임이란 건 그런 뜻이었나…….
도합 5명의 우승자를 모은 신은 관례대로 <황녀를 위하여> 같은 세계에 우승자들을 풀어 멸망을 주도하고, 그곳을 자신의 영지로 삼을 수 있었다.
「오빠는 발라돈을 자신의 직할 세계로 삼았어. 그래서 최고 심복인 론(아쉬론), 큘(슈’율큘라), 켈(켈렉─샼), 달(안리달), 네이(네이갈라스)를 이곳의 지배자로 삼았지.」
“그런데 <온 것들>이 왔군요.”
「그래! 그 시팔 날벌레 놈들이 이 바보 멍청이들을 봉인시켜 버렸다고!」
날벌레, 즉 <온 것들>이 언급되자 슈’율큘라가 한숨을 거칠게 쉬었다.
「계약이란 힘을 빌려주는 것이다. 채무 관계라는 걸 그대도 알고 있을 터. 그러한데 그 빌려준 힘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절대신들은 서로 끊임없이 반목하는 사이라고 한다.
다른 절대신들은 요토스에게 생겨난 허점을 놓치지 않았다.
요토스는 그렇게 절대 우주에서 실각되어, 본래는 자신의 하수인에게 맡기던 집행 관리자를 맡게 된 것이다.
“요악하자면, <잊혀진 왕들>이 모두 풀려나면 요토스도 절대신의 권좌에 다시 오른다는 겁니까.”
「응.」
“그리고 그걸 해낼 플레이어가 저란 말이고.”
요토스가 나한테 그토록 집착하던 이유도 그것 때문이었나.
「네, 이번 배틀로얄은 요토스 오빠의 복귀전인 거죠. 후후후, 셰라슐’토뤼악 그 멍청이 덕분에 일이 훨씬 쉬워졌어. 아, 모두 당신이 엘리트 나이트를 그렇게까지 압박한 덕택도 있죠.」
참으로 소름 끼치는 기분이었다. 이 모든 상황이, 요토스의 계획대로 움직여가는 듯한 느낌을 받은 것이다.
손바닥이 식은땀으로 흥건했다.
이 샤르홀린을 받을 때, 손아귀에서 놀아나던 건…… 요토스가 아니라 나였나?
“근데 <온 것들>이 도대체 뭔 힘이 있다고 절대신들을 상대로 그토록 설치고 다닐 수 있죠? 그놈들 정체가 뭡니까?”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들이 최초의 플레이어라는 거예요. 엘리트 헌터 같은…….」
엘리트 헌터, 크리스 마이어스.
순간 가슴에 어떻게 말할 수 없는 아픔이 일었으나 표정에는 드러내지 않았다.
다시 한번 의문이 떠올랐다.
크리스고 박현수고, 그 잘난 처형 방식으로 죽이면 그만 아닌가? 이렇게 못 잡아서 안달이면서 왜 그렇게 죽이지 않는 거지?
「그리고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창세신들의 계약 플레이어라고 할 수 있죠.」
“창세신?”
「<온 것들>이 사용하는 기적, 그런 기술 있잖아. 그런 힘이 바로 창세신의 권능에서 비롯된 거라고요.」
그때 샬류안의 입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샬류안이 움찔하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이 이상은 더 말해줄 수 없어. 절대신들이 이 유희를 시작하면서 세운 방침이야. 우승하고 나면 알려줄게. 지금은 그냥 우리와 적대하는 녀석들이라고 생각해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