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 of the Fake Hero RAW novel - Chapter (174)
가짜 용사 이야기-174화(174/310)
#70 :
[11. 엇갈리는 운명] 빛의 계승자, 어둠의 계승자 (4)박혜림은 병실에서 얌전히 책을 읽는 아이였다. 책을 좋아했고, 사색을 좋아했다.
병문안을 갈 때마다, 최근에 읽었던 책들의 독후감을 들려주곤 했다. 박현수는 그걸 조용히 들으며 미소를 지었다.
그 고요가 좋았다.
병원 밖의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좋았다.
여동생의 목소리가 좋았다. 죽은 어머니를 닮아서 맑고 카랑카랑한 그 목소리가 좋았다.
단 하나 남은 가족, 이제는 서로에게 서로가 전부인 가족, 서로가 서로에게 유일했고 무이했다.
그러므로 서로가 서로에게 하나의 세계이자 우주였다.
– 오빠야. 절대 나 때문에 후회할 일 하지 마라.
그날, 정확히는 북진 통일 작전령이 떨어지고 임무에 투입되기 직전, 혜림이는 그렇게 말했다.
– 뭔 말이야, 그게.
– 나 생각 하느라 목숨 사리지 말라고. 죽어야 하면 먼저 콱 달려가서 죽어삐라. 오빠도 아빠보단 못하지만 사나이 아이가?
말은 거칠었으나, 요는 자기 때문에 전우들의 목숨을 등한시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 아빠도 그것 땜에 평생 후회하며 살았던 거 알제? 오빠는 절대 그러면 안 된다. 알갔제, 박 중사?
박 중사래, 박 중사…… 그렇게 말하며 피식 웃던 혜림이의 얼굴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전쟁이 끝나고, 상사로 특진해 돌아온 뒤로는 그 쉬운 미소조차 지을 수가 없었기에.
겨우 백두산 정상에 태극기를 꽂고 돌아왔을 때, 혜림이의 몸 상태는 최악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 보호자님, 보시면 아시겠지만 폐에 경화현상이 심각합니다. 머지않아 산소호흡기로도 감당할 수 없는 순간이 올 겁니다.
– 예……?
– 현대 의학으로는 이 이상은…… 슬슬 마음의 준비를 해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진실로 궁금했다.
희귀병이 이 아이를 너무 일찍 어른으로 만들어놓은 걸까.
너무 일찍 어른이 되고 노인이 되게 만들어서, 너무 일찍 죽어야만 하는 걸까. 이것이 혜림이에게는 자연사란 말인가.
[타인의 생명을 자신의 자아실현에 이용해서는 안 된다.]현수는 병실 의자에 허탈하게 앉아서, 늘 소중하게 간직해온 종이를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었다.
엄청난 격전이었던 평양 전투를 앞둔 날에 혜림이가 보낸 편지에 적혀 있던 글귀였다.
누가 한 말인지는 모르지만, 현수는 그때부터 이걸 평생 마음에 새기며 살아왔다.
[이제 오빠가 그만 동생이라는 족쇄에서 해방되어 세상 멀리 날아갈 수 있기를.]매일매일 병실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혜림이의 손을 붙잡고 눈물을 흘렸다.
하루하루가 두려웠다.
하루하루가 무서웠다.
그 하루하루, 1시간, 일분일초마다 혜림이가 점점 멀어져가는 것처럼 느껴졌으니까. 손이 닿지 못하는 저 머나먼 곳으로.
– 사막에서의 약속, 기억하고 있습니까?
이번에도 분명 그런 꿈이었을 텐데, 뭔가가 달랐다.
이번에는 정철이 저 붙잡을 수 없는 세계의 끝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러니까, 케슈렌다크의 어둠 속에서 그 입가에 덧없이 맺히던 미소를 마지막으로,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고, 끝으로, 끝으로.
“……!”
현수는 눈을 번뜩 떴다.
어둑한 주위로 숲 비린내가 자욱했고, 소나기가 잎새를 튕기는 소리가 났다.
“아저씨, 괜찮아?”
아직은 흐릿한 시야로 신태엽의 얼굴이 잡혔다.
“괜찮아…… 악몽을 좀 꿨어.”
온몸이 땀범벅이었다.
배틀로얄에 들어온 이후로 항상 같은 꿈을 꾸고 있었다. 근데 정철이 나온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정말 괜찮은 게냐?”
샬롯 칸드라군이 조심스레 박현수의 안색을 살폈다.
샬롯과 신태엽은 불침번이었다.
현수가 이계에서 왔다는 걸 알고 대부분의 NPC들은 그를 조금씩 경계했으나, 샬롯만은 예전과 다름없는 태도로 대해주었다.
“예.”
“아마 지쳐서 그런 걸 거다. 조금 더 쉬고 있어라. 해가 뜨려면 아직 시간이 남았다.”
신태엽이 샬롯의 눈치를 보다 박현수 옆에 주저앉았다.
슬슬 용의 풍채를 갖추어 나가는 스케사리가 함께였다. 스케사리는 어미와 함께 있을 때가 아닌 시간 대부분을 신태엽과 함께 보냈다.
그 이유는 아무도 몰랐다.
그래서, 여행용 망토로 몸을 두른 신태엽에게 자꾸만 사쿠라이의 모습이 겹쳐졌다. 스케사리가 사쿠라이도 잘 따랐었는데…….
– 그 쓰레기가 그 건방진 꼬맹이를 제물로 바쳤다는 건 사실이다.
제물이라니…….
제물로 바쳐졌다는 게 무슨 뜻이지? 완전히 죽어버렸단 건가?
“매형, 매형 정말 봉화지기라는 클래스로 각성했어? 어떻게?”
“나도 자세히는…….”
“끝내준다. 그거 알아? 봉화지기라는 클래스, 철이 형아가 항상 찾아다녔었거든.”
“에델 바이스가?”
샬롯이 관심을 보였다.
“응. 형아는 이 게임 설정도 엄청 좋아했거든. 봉화지기 전설도 당연히 있었어. 그래서 형은 이게 텍스트로만 존재할 리가 없다, 해피 엔딩으로 이어지는 통로가 될 거다, 이러면서 그걸 엄청 찾아다녔었는데…….”
미친 것일까. 이 순간, 이 이야기가 오가는 와중에 환상을 보게 된 것은.
악몽의 찌꺼기가.
아직 완전히 헤어 나오지 못한 꿈의 찌꺼기가 빚어낸 환각일까.
‘현수 씨, 정말 봉화지기라고요?’
‘오빠, 봉화지기가 뭔데요?’
‘봉화지기란 말이야…… 베르켄시아의 계승자를 뜻하는 건데, 모든 기적을 쓸 수 있다고 해. 나도 자세히는 몰라. 근데 아마 해피 엔딩의 실마리가 있다면 그게 아닐까 싶더라.’
다른 플레이어도 NPC도 없이, 오직 그들 셋이 이 숲속 모닥불 앞에 둘러앉아서, 예전처럼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는 환각이.
“봉화지기라. 나도 들은 적이 있다.”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샬롯의 눈동자에서 물기가 반짝였다.
“일곱 살? 여덟 살이었을까. 선황께서 나와 내 누이들을 모아놓고 그걸 이야기해 주고는 했지. 우린 그분이 오실 때까지 대륙을 정돈하기 위해 창조된 종족이라고 하면서…… 레베카 언니가 그 배움의 시간을 몹시 좋아하여 선황의 총애를 독차지하곤 했었지만.”
현수는 알 수 있었다.
샬롯이 누이들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다는 걸.
“아니, 레베카 황녀가 황제의 총애를 받았던 게 그런 이유 때문이었어요?”
설정을 꽤나 잘 알고 있는 신태엽이 묻자 샬롯이 빙그레 웃었다.
“그래, 그래서 남부의 직할령이 장녀인 힐더 언니가 아니라 레베카 언니의 것이 된 거다.”
현수가 대화에 끼어들지 못하는 것을 슬픔 때문이라고 생각했을까, 샬롯이 조심스레 말했다.
“모두 비난하기만 하지만…… 에델 바이스에게도 분명 중요한 사정이 있었을 거라 생각한다. 그게 아니고서는 그의 행적이 설명되지가 않아. 내 자매들에게도 제각기 대의가 있었듯…….”
샬롯이 말했다.
대륙에서 자신의 형제자매가 모두 죽었다고 하는데도, 같은 플레이어인 현수를 원망하지 않고.
그 한밤의 수다 속으로 다른 인물이 끼어들었다. 용부인 크세리니아였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사실, 당신보다는 제 쪽이 더 봉화지기를 기다려 왔거든요.”
크세리니아는 리드 가문의 직계, 즉 신성 기사 샤릴리온의 혈육이었다.
샤릴리온의 맹우, 용사 리암이 전대 봉화지기였던 만큼 더 큰 책임감을 느낀다고 봐도 무방하리라.
“성검 샤릴리온은 그 남자를 선택했어요. 그리고 그 순간까지도 함께하고 있었고…… 여기 무슨 의미가 있지 않을까요. 그래야만 해요. 그래야 제 동생도…….”
트라이폴 사태 때 죽은 남동생을 말하는 크세리니아의 슬픔은 단조로웠으나 그래서 더 깊어 보였다.
만약…… 만약 내가 저렇게 혜림이를 잃었다면…… 저렇게 의연할 수 있을까.
현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결가부좌를 튼 채 마력을 운용하던 발레린에게 다가갔다.
“무슨 용무지?”
“절 훈련시켜 주십시오.”
“이거 의외로군. 네 쪽에서 먼저 나에게 그 이야기를 꺼내다니.”
* * *
한 흑기사가 고대의 사막으로 들어서니, 원시인들이 일제히 고개를 조아렸다. 그는 잠깐 멈춰 서서, 용암이 폭발하는 사막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여긴 변한 게 없군.”
등 뒤에 찬 대검과, 늑대의 형상을 본뜬 갑주의 표면에서 모래바람이 음산하게 부서졌다.
그는 바닥의 모래를 한 줌 움켜잡아 보았다. 헌데 펼쳐보니, 모래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그렇게 손바닥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더니, 다시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의 심연은 초월적이었다.
지면에 발을 디딜 때마다 세계가 전율했고, 심연이 융단처럼 깔려 나갔다.
흑기사는 기둥의 도시를 계속 걸어 나갔다.
협곡 지대를 지나고, 모래가 늪처럼 펼쳐진 지대에서도 가볍게 걸었다.
그의 등에서 검푸르게 펄럭거리는 누더기 망토가 없었더라면, 이곳에 강풍이 몰아치고 있다는 사실을 아무도 몰랐을 정도로 부드러운 걸음걸이였다.
흑기사는 마침내 화산 지대의 어귀에까지 올랐다.
108개의 기둥 가운데, 가장 높고 큰 기둥이 서 있는 그 화산은 잠잠했다.
흑기사는 화산 지대의 어귀에 오랫동안 머물렀다.
거기서, 아래쪽 모래 지대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보이는 건 모래밖에 없는데도 말이다.
잠깐 동안이지만 그는 추억을 회상하는 필멸체처럼 보였다.
흑기사가 마침내 등에서 대검을 빼들더니 지반 속으로 거칠게 박아 넣었다.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거뭇한 칼날이 탁하게 울어 젖힌 순간, 화산 지대가 맹렬히 떨려오더니, 산봉우리가 용암을 게걸스럽게 토하기 시작했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기둥 위로, 용암이 거대한 뱀눈의 형상을 이루며 돋아나 포효하기 시작했다.
「SHuiiiiiiiiakkkkkkkKKKKK!」
그러자 황량한 모래 속에서, 렙틸리언들이 하나둘씩 나타나기 시작한다.
골공왕이나 폭식공 같은 옛 귀족들도 긴 잠에서 깨어나 화산 지대 아래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여왕이 그들을 부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잊혀진 왕들> 중 하나, 울부짖는 파멸에게 속박된 권속들은 죽음에서조차 자유롭지 않았다.
화산의 폭발과 포효가 절정에 달한 순간, 화산 지대가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마치, 탈피가 이루어지듯이.
그 산속에 갇혀 있던 위대한 존재가 몸을 일으켜 세우면서 산맥이 붕괴한 것이다.
아아…… 그 위대한 존재가 재림함에, 백팔 기둥들이 하나둘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외우주로부터 밀려드는 파멸의 기운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이다.
흙먼지가 맹렬히 휘몰아친다.
그 모래 폭풍 속에서, 흑기사는 가만히 서 있었다.
바위 파편과 돌 부스러기들은 흑기사의 갑주에 닿자마자 걸쭉하게 녹아내렸다.
흙먼지가 걷혔을 때는, 원시시대 이전의 저주받은 화산이 생명을 입고 흑기사 앞에서 혓바닥을 날름거리고 있었다.
「나를 깨우다니 기특하구나, 호, 호, 호, 예쁜 아이구나.」
머리만 무려 7개, 꼬리의 숫자는 그 2배이며 온몸을 검푸르게 뒤덮은 비늘의 틈새에서 용암이 맥동하고 흘러나온다.
“잡담은 필요 없다, 네이갈라스.”
흑기사가 칼끝으로 그 화산을 겨누며 나직이 명령했다.
“복종하기만 해라.”
그 단 한마디에, 세계가 한순간 멈춘 것처럼 보였다.
세계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순간, 네이갈라스가 사납게 울부짖었다.
그러자 옛것들이, 무언의 명령을 받은 듯이 팔을 높이 치켜세우며 이렇게 소리쳤다.
「쿄로나 레나와프라 에델 바이스 라리엔 와르바르.」
그러고는 뒤돌아서서 힘차게 걸어가기 시작했다. 지상으로 이어지는 통로를 향해.
원시인과 렙틸리언들이 그 뒤를 질서 정연하게 뒤따랐다.
병력은 라리엔 전역에서 떼거리로 계속 모여들었다. 순식간에 셀 수조차 없는 숫자로 불어났다.
삐걱거리는 뼛소리가 북소리이며, 렙틸리언들의 울음이 나팔 소리인 그 군대는 과연 죽음의 군대라고 칭할 만했다.
지상으로 몰려 나가는 망자의 군대는, 네이갈라스의 포효에 박자를 맞춰 이하의 주문을 거듭 복창해대고 있었다.
“쿄로나 레나와프라 에델 바이스 라리엔 와르바르.”
“쿄로나 레나와프라 에델 바이스 라리엔 와르바르.”
오직 흑기사만이, 고지대에 가만히 서서 그 행진을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쿄로나 레나와프라 와르바르.
어떻게 할 수 없는 상실감 속에서, 저 고대 주문의 뜻을 허탈하게 중얼거리면서.
“라리엔의 주인, 에델 바이스가 깨어났다, 라…….”
* * *
발레린의 훈련은 신비한 황야에서 시작되었다. 그래, 황혼이 내리비치는 신비한 땅에서.
“봉화지기는 계승자다. 힘을, 의지를 계승하는 존재지. 둘러보면 뭐가 보이나? 창, 검, 활, 봉. 모두 선대 봉화지기들이 다루었던 베르켄시아의 여러 형태들이다.”
“이것들이 다 베르켄시아……?”
“베르켄시아의 계승자들은 모두 시스템, 즉 요토스의 적으로서 외우주의 사도들과 싸워왔다. 그러면서 더욱 강해졌지. 왜인지 아나? 마음에 드는 무기가 있다면 하나 쥐어봐라.”
묘소였다. 고분 지대였다.
그런데 묘지마다 비석 대신 병장기들이 꽂혀 있었다. 병장기들의 종류는 각자의 개성에 따라 모두 달랐다.
머뭇거리다 한 창을 붙잡은 순간, 두개골에 못을 박는 듯한 충격을 느끼며 뒤로 물러섰다.
뭐지?
대체 뭐야?
이 아찔하기까지 한 전율감은.
“감상은?”
“이걸 도저히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창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스스로 말하고도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UDT/SEAL에서 총포술을 연마할 때 어땠나? 정말 틈만 나면 총을 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 훈련과 실전 경험이 축적되어야, ‘다룰 줄 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건만…….
“그럼 한번 시험해볼까?”
발레린이 이 환상 세계 속으로 켈렉─샼의 옛것을 본뜬 소환수를 불러냈다. 놈은 현수의 창에 2합도 견디지 못하고 꿰뚫렸다.
“이제 최후의 봉화지기가 왜 제일 강력한지 알겠나? 바로 기억의 계승 덕분이다. 힘과 능력을 이어받는 거지! 선대들은 누리지 못했던 특권이야.”
“그렇다면 당신도?”
“아니, 나는 정통 계승자도 아니고 최후의 계승자도 아니라 그런 힘을 취할 수가 없다.”
발레린이 현수가 쥐었던 창으로 붙잡자, 강렬한 전류가 폭발하면서 발레린의 손을 튕겨냈다.
“봤지?”
발레린의 목소리는 어딘가 씁쓸해 보였다.
“그리고 내가 가진 건 베르켄시아의 작은 파편이기에 보여줄 수 있는 힘도 제한적이야. 네가 취할 수 있는 기억도. 하지만 네가 테르시아 님을 만나게 된다면, 그래서 베르켄시아를 오롯이 계승하게 된다면 모든 전투 기억을 온전히 물려받을 수 있을 거다.”
발레린이 다른 병장기들 쪽으로 손짓했다.
“네 전대 봉화지기로는 도합 98명이 계셨다. 정통 계승자의 숫자고, 나 같은 이들을 포함하면 그 숫자는 배로 많아진다.”
활 쪽으로 손을 내뻗나 싶던 박현수가 문득 자신의 손바닥으로 시선을 떨구었다.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당신도 아니고, 대체 왜 플레이어 중 제가, 무능하다고 봐도 될 제가…….”
“창세의 뜻은 외우주와 다르다. 외우주는 외면만을 보지. 능력, 실적, 힘, 잔혹성, 엘리트 플레이어들처럼 말이다. 하지만 창세의 뜻은 그 사람의 내면을 본다. 그 영혼에 빛이 있는가, 없는가.”
“발레린, 에델 바이스에 대해 말해주고 싶은 게 있습니다. 그 사람은─”
“─외우주의 사도들은 체계에 완전히 복속되어 체계를 보호하게 된다. 자신의 의지가 어떻든 상관없어. 주인과 노예의 관계가 되는 거다. 주인의 명령을 거스르는 노예가 어떤 꼴을 당할 것 같나?”
“그렇다면…….”
“진실만 말하겠다. 그렇게 망설이는 마음으로는 외우주의 사도와 싸워서 이길 수 없어. 놈들은 잔혹하고 영리하다. 외우주의 선택을 받았다는 게 그 유능함을 증명하지.”
“……이긴다는 건, 죽인다는 뜻입니까?”
“사도들은 이계의 마력을 무한정 퍼부어대고 대부분의 공격을 우습게 막아낸다. 놈들을 상대할 때 죽이지 않고 포획하겠다는 여유를 부리는 게 가능할 리가 있다고 보나? 그러나 그건 내가 정통 계승자가 아니라 그런 걸 수도 있다. 너라면 뭔가 다를지도 모르지.”
그때 이 환상 세계 어딘가가 벌레에 의해 갉아 먹히기 시작했다.
로헤이리츠의 공허충들이었다.
그렇게 생겨난 틈새로 로헤이리츠의 목소리가 들렸다.
“둘 다 그만 떠들고 나와라. 문제가 생겼다.”
* * *
“저건…….”
은폐 마법을 쓴 발레린이 입가에 검지를 세웠다. 새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그러나 이 세상 그 어떤 새의 지저귐과도 달랐다.
꼭 불꽃이 우는 듯한…… 지옥 깊은 곳에서 불꽃이 울부짖는 소리를 떠올리게 했다.
……끄끄끄끄끄끄끄끄끄끄끄…….
흑염(黑炎)이 거대한 날개를 퍼덕거리며 상공을 몇 번 선회하다가 다른 곳으로 날아갔다.
“좋지 않군. 서둘러야겠다.”
발레린의 말에 로헤이리츠가 물었다.
“저게 뭔지 설명부터 해라.”
“흑염성, 레이블헤인의 악령이다. 저 불꽃을 조심해. 표적의 영혼을 완전히 불사르기 전까지는 사라지지 않으니.”
“또 다른 외우주의 사도가 왔다는 소리냐?”
한참 뒤에, 흑염의 괴조는 검붉은 두건을 뒤집어쓴 한 소년의 팔에 내려앉아 크게 짖었다.
소년의 체구에 소년의 얼굴을 갖고 있었으나, 그 눈동자나 표정에서 드러나는 중후함은 소년의 순수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바로 저 괴리감이, 소년의 인종이 노년까지 소년의 외형을 유지하는 아인(兒人; Dwarf)이라는 걸 증명한다.
당연한 일이다.
그는 본래 스물아홉 살의 청년이었으니.
이 미친 배틀로얄에 들어오기 전에, 그러니까 엘리트 아처가 되기 전에는 말이다.
엘리트 아처, 파울 리드(Rid, 샤릴리온의 성 Reed와 별개)가 소름 끼치도록 무감정한 어조로 말했다.
“절대자이시여, 목표를 찾아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