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 of the Fake Hero RAW novel - Chapter (175)
가짜 용사 이야기-175화(175/310)
#71 :
[11. 엇갈리는 운명] 빛의 계승자, 어둠의 계승자 (5)성도의 수상 아르츠레히드와 성문 앞에서 재회했다.
영목이 새하얗게 펼쳐낸 반구형 결계, 그걸 경계선으로 두고 나는 그와 마주 섰다. 양쪽 다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았다.
그 안으로 막무가내로 들어가면 내 몸이 정화되어 녹아내릴 것이고, 아르츠레히드 또한 밖으로 나오면 심연의 광기에 머리가 폭발할 것이었으니까.
“에델, 정말 자네인가?”
질문이라기보다는 폐부를 찌르는 칼날 같은 말이었다. 형아, 정말 형아 맞아…… 그렇게 묻던 신태엽의 말이 떠올랐다.
나는 나다…….
이제 망설이지 않기로 결심했는데, 왜 목소리를 내는 것이 이토록 힘든 것인가.
“성도를 포기하면 목숨은 부지할 수 있을 겁니다.”
칼집에서 뽑은 샤르홀린으로 동쪽을 가리켰다.
그러자 성도를 포위하듯 감싼 심연이 양쪽으로 갈라지며 길을 만들어냈다.
심연을 통제하는 권위, 그게 칼질 한 번으로 모두 이루어진다.
“요정의 땅으로 가십시오, 아르츠레히드. 여기가 아니라면 어디든 좋으니, 성도를 떠나십시오.”
이것이 무의미한 문답이라는 걸 알면서도, 왜 나는 여기에 나와 있는 것일까.
아직도…… 아직도 마음의 찌꺼기가 남아 있는 건가.
이제는 너무나도 단순하고 분명한, 시나리오의 흐름을 그대로 좇고 있는데 마음은 왜 더 복잡하고 어지러운가.
“아르츠레히드.”
“그러지 못한단 걸 알잖나.”
“무릎 꿇고 빌면 가시겠습니까? 그러면 몇 번이고 꿇겠습니다.”
“내가 어떻게 대답할지, 자네가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지 않나.”
“그렇지요.”
“박현수는 살아 있네. 먼저 저 동쪽으로 갔지.”
“그렇습니까?”
박현수라는 그 말은, 이 세상이 아닌 어딘가, 이제 곧 서로가 서로를 죽이고 베어야 할 운명이 없는 세계로 가는 길처럼 느껴졌다.
인연을 잇는 통로인 것인가.
서로 함께 추억할 수 있는 무언가라서 그런 것인가.
“그거 다행이군요.”
허탈한 미소가 지어진다.
이게 배틀로얄이 아니었더라면, 박현수가 아니라 내가 그곳에 있었을까.
심연에 맞설 방도를 찾기 위해 요정의 땅으로…… 아르츠레히드는 여기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을까.
그런 미래를 몇 번이고 몇십 번이고 몇백 번이고 그렸었건만, 결국 진짜 시나리오 앞에서 내가 서 있는 자리는 여기인가.
한참 동안 그와 마주 보고 있기만 하다가, 공허한 날숨으로 그 환상을 지워버렸다.
“그럼.”
그 한마디로 협상을 마무리하며 돌아섰다.
애초에 협상도 아니었다.
조금이라도 죄책감을 덜고 싶었던 걸까? 뭘 위해 아르츠레히드를 호출해서 이야기를 나눈 걸까.
살릴 방법이 없어서.
살릴 수가 없는데.
살리고 싶은 마음만큼은 아직도 완전히 버리지 못해서, 지금 이 자리에 나와서 이야기를 하게 된 것일까.
“에델!”
세 발자국 쯤 멀어졌을 때 불현듯 아르츠레히드가 외쳤다.
“예전에 자네가 내게 말했지. 평생을 후회할 선택을 하지 말라고.”
“……!”
“자네가 한 그 선택이…… 그런 선택이 아니기를 간절히 기도하겠네. 그대는 나의 친구이니.”
그러지 마.
그런 표정으로 말하지 마.
제정신이냐, 아르츠레히드. 나는 지금 심연의 종복인데. 심연의 왕들을 이끌고 성도를 무너뜨리러 온 침략자인데.
“아르츠레히드, 당신이란 인간은 대체 얼마나 멍청한 겁니까.”
“멍청하다 보니 인복이 좋더군. 자네같이 영리한 친구를 얻게 되지 않았나.”
나는 한숨을 내쉬듯 웃었다.
우는 것처럼 웃었다.
그래도 눈물 한 방울 나지 않았고 오직 공허한 아픔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이틀 뒤 정오까지 이 길을 열어둘 테니 빠져나가십시오. 아무도 해치지 않겠다고 약속합니다. 제 자비는 거기까지입니다.”
* * *
<렐타론>.
요정 문명의 발상지이자 중심지.
요정들은 이 도시를 ‘고향’이라고 불렀다.
기원의 시대에, <잊혀진 왕들>을 이 땅에서 걷어내던 때에 <온 것들>은 이곳을 첫 번째 거점으로 삼았다고 했다.
막슈르 대하(大河) 위에 자리를 잡았기에 모든 물산이 물길로 집중되는 도시는 고상한 아름다움 속에서 풍요로웠다.
결정적으로 수도 <타르키리텐>과 물길로 연결되어 있기도 했다.
“<온 것들>의 전진기지였으므로 아직도 그 병참 시설들이 작동하고 있다.”
샬롯이 설명해 주었다. 발레린이 시장 거리를 앞서 걷고 있었고 일행이 그 뒤를 따랐다.
“그렇기에 <렐타론>을 시작으로 <타르키리텐>까지는 공간 역장을 열 수가 없어.”
요정들이 인간을 증오하였으므로 두건을 눌러써서 신원을 감추고 이동하였는데, 발레린은 지나칠 정도로 서두르고 있었다.
“어째서죠?”
그 대답은 발레린으로부터 왔다.
“가장 중요한 걸 지키기 위해.”
예전에도 게임과 현실의 경계가 희미하긴 했으나, 그 경계가 완전히 무너져 내린 지금은 이런 시가지를 보는 것조차 기분이 묘했다.
<렐타론>은 정말 아름다웠다.
7명의 <온 것들> 석상이 병풍처럼 도시를 커다랗게 둘러싸고 있었는데, 어떤 기술력으로 저런 조예가 가능했는지는 알 도리가 없었다.
“아저씨, 저것 봐.”
그때 신태엽이 어느 가게를 가리켰다.
“이데아에서 요정으로 스타팅하면 꼭 가봐야 하는 맛집인데…… 저런 게 다 진짜였단 거네.”
박현수는 그 가게를 흘끗 바라보는 발레린의 눈빛에서 지극히 큰 슬픔을 느꼈다.
“세계가 멸망한다는 건…… 여기에 있는 사람들도 모두 죽게 되는 겁니까?”
UDT/SEAL로서 북진 통일의 선봉에 섰던 박현수는 전쟁의 참상을 잘 알고 있었다.
완전히 불타서 잿더미가 되어버리는 세계, 한 북한 아이가 울면서 엄마를 찾던 목소리는 평생 잊지 못할 기억으로 늘 그를 악몽에 시달리게 하지 않았던가.
근데 그걸, 그것도 한 나라가 아니라, 세계 전체가 멸망하는 걸 몇 번이고 봐왔다는 건가.
“……발레린, 당신은 대체 어떻게 버텨올 수 있던 겁니까?”
쉬운 질문이었다.
쉬운 질문이었으나 아무나 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니었다.
같은 슬픔을 이해하는 자만이 할 수 있는 것이기에 그토록 눈물겨운 질문인 것일까.
발레린이 허망한 미소를 지었다. 물론 붕대에 가려져 그 미소는 그녀 본인만이 아는 미소였다.
“나도 지금까지는 자세히 알지 못했지만…… 이제는 알겠더군. 너를 찾을 거라는 믿음 하나로 버텨왔다는 걸.”
“발레린……?”
“나는 3대 현자 용현처럼 아수라 실혼경을 쓸 수 있게 되었고 또 창세의 힘으로 모든 병과 상처를 고칠 수 있게 되었다. 잘려 나간 팔조차도 재생시키지.”
발레린이 정철과의 싸움에서 잘려 나갔었다던 팔을 으쓱해 보였다.
“하지만 그분처럼 세상의 혼돈을 펴서 평화의 시대를 이룬다는 건 망상에 불과하다고…… 그렇게 체념하고 있었다. 그 체념의 끝에서 널 만나게 된 거고.”
그 순간, 박현수는 억누를 수 없고 억누를 방법이 없는 슬픔과 안타까움을 느껴야 했다.
만약…….
정말 만약에…….
정철이 발레린과 다른 방식으로 만나게 됐더라면 어땠을까. 그렇게나 이 세상을 멸망으로부터 구하길 원했다던 옛 정철과.
둘은 닮은꼴처럼 보였다.
정철이 이 세상의 멸망을 일곱 번 목도하는 가운데 결국 체념하게 되었듯, 발레린도…….
“수백 번을 발악하고 또 발악해 봤지만 너와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은 여기가 한계더군.”
발레린이 문득 걸음을 멈추고는 허탈하게 웃기 시작했다.
그 웃음이, 맑고 또 슬퍼서, 잠시 동안 아무도 범접할 수 없었다.
로헤이리츠가 서두르라며 짜증을 내려던 무렵, 세계에 혼란이 시작되었다.
화마(火魔).
타오르는 형태는 분명 불꽃이다.
그러나 그 속살까지도 시커멓고 또 어둠을 밝히기는커녕 천지를 어둠으로 삼키는 불꽃이었다.
그 불길이 광장 위로 유성우처럼 쏟아지면서 극심한 혼란이 시작되었다.
“로우!”
“네, 아가씨.”
일행이 기적적으로 무사할 수 있던 건, 크세리니아와 로헤이리츠가 두건을 젖히며 힘을 발휘한 덕택이었다.
흑염의 덩어리가 허공에서 얼어붙거나, 공허의 힘에 의해 소멸되어 갔다.
섬뜩했다. 그 흑염은 꼭 살아 있는 것처럼…… 찢어지는 비명을 내질렀다.
바이로니카가 평하길, 화염 마법의 권위자라고 해도 손색이 없는 신태엽의 눈이 가늘어졌다.
“뭐야, 이 화염은…… 연소 속도가 그냥 화염이랑 비교가 안 돼.”
일반적인 불꽃이 10분에 걸쳐서 불사를 수 있는 것들을 10초도 안 돼서 재로 뒤바꾸는 것이다. 샬롯이 외쳤다.
“어서 부두로 가야 돼! 이 힘이면 도시 전체가 잿더미가 되는 것도 시간문제다!”
모든 요정들이 부두로 달아나기 시작했으므로 거리는 혼돈 그 자체였으나…….
레이블헤인의 흑염 앞에서 계속 무수한 요정들이 영혼의 절규를 남기며 소멸했다.
그 불꽃에 집어삼켜진 자는 레이블헤인의 ‘흑염의 화로’로 끌려가 영혼이 완전히 소멸될 때까지 불쏘시개가 되는 농락을 당한다.
“미친.”
신태엽이 소리쳤다.
“저것 봐! 철이 형아는 저놈에 비하면 양반 중의 양반이잖아! 저렇게 미치지는 않았었다고!”
저 불합리한 힘 앞에서, 아크라드 대륙은 사흘이란 시간도 걸리지 않아 지도가 의미를 잃었다고 한다.
나라들이 멸망하고.
지형ㆍ지리가 괴변되고.
마침내 완전히 멸망하여 어둠 속에 잠겼다. 레이블헤인의 흑염만큼 ‘일방적 파괴’에 특화된 힘은 없었다.
“앞쪽 길이 불길에 막혔어!”
“서둘러서 다른 길로!”
흑염이 일으키는 매연은 불꽃의 연기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매캐하고 새까맸다.
세계가 암흑에 잠긴다.
그 암흑 속에서, 지축이 뒤흔들린다. 그러나 살인적인 먼지와 폭연과 열기 속에서는 눈을 뜨기도 힘들었다.
‘아니…….’
현수는 달리기를 멈추었다.
“아저씨, 뭐 해! 빨리 와!”
숨을 헐떡거리면서 지켜보았다. 불이 붙은 노인이 “살려주시오”라고 외치다 순식간에 사라지는 걸.
“박현수! 정신 차려라!”
한 아이가 엄마가 사라진 자리에서 멍하니 엄마를 찾는 모습을.
‘그냥 다 버리고 가야 한다고?’
먼 옛날, 정철이란 사내가 느꼈던 것과 똑같은 생각과 절망감 속에서 주먹이 파르르 떨렸다.
그냥 다 죽는 건가?
어차피 여기가 멸망할 세계라서?
그러니까 그냥 죽는 걸 무시하고 가는 수밖에 없는 거야? 그저 받아들여야만 하는 건가?
정철이 여기 있었더라면.
그냥 모두를 버리고 갔을까?
아니, 늘 포기해야 한다, 어차피 멸망할 것들이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는 살릴 수 있는 사람들은 모두 살리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런데 나는…….
[새로운 기술 해금됨 : 도화 각인(圖畵刻印)]– 도화로 펼친 풍경을 이 세계에 덧입힌다.
– 고상한 달, 막센시아가 심연에 잠식된 세상을 빛으로 보듬어 안을 때 사용했다는 기적.
– 막센시아의 도화는 창세의 세계를 아우르던 빛과 희망과 온기를 이 세상에 가져왔다.
그 순간, 다시 한번, 현수의 손에서 제멋대로 집약되고 폭발한 빛에 의해 저 모든 외우주의 혼란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흑염뿐인가.
흑염이 만들어놓은 참상조차 사라지고, 소나무가 우거지고 솔향이 풍겨오는 정겨운 오솔길이 펼쳐져 있었다.
“……!”
“……!”
“……!”
모두가 놀란 시선으로 현수를 바라보았다.
“박현수, 너란 남자는 정말…….”
어느새 달려온 샬롯이 현기증 속에서 두 무릎을 꿇던 현수를 부축해주고 있었다. 발레린이 그 앞으로 다가왔다.
“난 플레이어라는 족속이 너무나도 싫다. 대다수가 멸망을 택하지. 사리사욕을 위해서. 이 세계가 놀이판이 아니라고 아무리 말을 해줘도. 그걸 알면서도 자신의 욕심을 위해 삶을 사는 거야.”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가, 발레린 왕제? 어서 가야 해!”
“하지만 너는 달랐다.”
현수가 고개가 들었다.
발레린이 슬프고도 기쁜 눈동자로 현수를 보고 있었다.
“너는 몇십 번이고 이 세계를 구해 내겠다고 말했다. 말뿐인가, 지금처럼 행동으로 증명했지. 그 어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아무도 버리려 하지 않아. 너 같은 플레이어는 한 명도 없었다.”
현수는 생각해 보았다.
자기가 이런 일을 한 건 단 한 번뿐이었는데.
왜 발레린, 이 사람은 마치, 수백 번을 같은 전장에서 싸워온 사람처럼 말하고 있는 것일까.
“지금 내 선택은, 그런 너에 대한 나의 경의다. 세계를 구할 영웅에게 바치는 봉헌이다.”
발레린이 목에 걸고 있던 보석을 현수의 목에 걸어주었다.
비췻빛 보석이 박힌 목걸이.
뿜는 빛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아름답고, 찬란하고, 거룩했다.
“발레린, 이건.”
그때, 하늘에서 흑염이 날아들었다. 레이블헤인의 괴조들이 그들에게로 급강하해 오고 있었다.
물론 그것들은 현수에게 닿기 직전, 거대한 쇠말뚝이 땅에서 솟구쳐 놈들을 열기로 흩어버렸지만.
“그래, 회귀석이다.”
현수는 보석을 매만져 보았다.
그러자 웅…… 웅……, 보석이 환하게 명멸했다.
“네가 죽을 때마다, 그 돌의 힘이 너를 30분 전의 과거로 되돌아가게 해줄 거다.”
하늘에서 또다시 괴조들이 떼거리로 나타났다. 발레린이 현수와 샬롯을 뒤로 끌어당긴 다음 양손을 맞잡았다.
“현상 체현, 아수라 실혼경.”
처음에 보인 것은 빛이었다.
그 빛이 순식간에 커지더니 새까맸던 하늘을 환하게 물들이며, 하나의 형상으로 빚어졌다.
용이었다. 그 웅대한 생명체는 기괴하게도 머리가 삼두(三頭)였다.
「KUUUUUUUUREEEEEEEEAAAAAAAAAASSSSSSSSS……!」
아수라가 포효하자, 아가리에서 고고한 화염이 터져 나왔다.
현수는 평생 그토록 아름다운 불꽃을 본 적이 없었다.
흑염과는 다른, 고귀한 불꽃. 그 불꽃이 흑염의 악마들을 불태워 버렸다.
“이제 그만 가라, 어서. 공허의 사도가 배를 구해놨을 거다.”
“도로 가져가십시오, 발레린! 이걸 왜 저한테 주는 겁니까? 그리고 함께 가야지, 무슨 말입니까!”
“앞으로 내가 널 지켜줄 수가 없으니까.”
그 말에, 잠깐 동안 세상이 멈춘 듯한 느낌이 들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박현수, 나는 오늘 여기서 죽는다.”
믿을 수가 없었다.
발레린이 죽는다고? 지금 여기에 있는 그 누구보다 강한 이 발레린이?
저쪽에서 마도 기구로 길을 잡던 바이로니카가 어서 이쪽으로 오라고 고함치고 있었다. 그 너머로 부둣가가 보였다.
샬롯이 현수의 몸을 이끌어 그쪽으로 나아갔으나 발레린은 양발을 지면에 박아 두기라도 한 듯 움직이지 않았다.
“발레린, 어서 오십시오!”
“회귀석이 있어도, 바꿀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수백……? 수천……? 횟수는 헤아릴 수조차 없다. 중요한 건, 바꾸고, 바꾸려고 발악해도, 그 끝에서 나를 기다리는 것은 오직…… 절망뿐이었단 거야. 소중한 사람은 언제나 죽고, 세계는 멸망해 버렸다. 나는 늘 그걸 뒤바꿀 수 없었다.”
“발레린, 제발, 같이 갑시다!”
“하지만 그 바꾸고 바꾸는 길의 끝에서, 나는 너를 찾아냈다.”
현수는 놀랐다.
그 발레린이, 옅은 미소를 지은 것이었다.
“어쩌면 나는 너를 만나기 위해서 그 수천 번의 회귀를 거듭한 게 아니었을까? 너를 그분께 보내주기 위해서?”
그때 지진이 지축을 뒤흔들었다.
모두가 지진이 일어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시가지를 무참히 짓밟으며 위용을 드러내기 전까지는. 두 발로 설 수 없을 정도의 진동, 육중하되 날카로운 굉음.
“아니, 미친, 저건.”
신태엽이 말했다.
폭연을 뚫고, 시가지를 짓이기다 못해 발이 닿는 지면마다 분화구를 형성시키며 그것은 계속 걸어왔다.
“거신 0식이잖아…….”
이 렐타론 시가지 전체에 그림자를 드리울 정도로 거대한 형상.
영웅시대 용사 파티의 일원으로서 만병기장이란 별호를 가졌던 아인, 할바론의 최고 걸작.
<온 것들> 황금함대의 사령선 테리토스를 거신과 융합시킴으로써 탄생시킨 기술력의 결정체. 그 크기에서 비롯되는 물리력은 심연의 군주조차도 저지하는 정도였다고 한다.
“극후반에나 탈 수 있는 걸, 대체 어떻게.”
그 거신 0식이, 수백 문의 포구로 흑염을 쏟아낸다. 시가지를 순식간에 일소시키며 거신은 더욱 위압적으로 커져오고 있었다.
“너는 <타르키리텐>으로 가라, 박현수.”
발레린이 현수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그러자 미지의 마법이 현수를 휘감았다.
그러자 현수의 몸이 제멋대로 부둣가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발레린.
안 돼. 입도 열리지 않았다.
점점 멀어져가는 그녀의 얼굴이 이렇게 말했다.
“이 세계를 부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