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 of the Fake Hero RAW novel - Chapter (177)
가짜 용사 이야기-177화(177/310)
#73 :
[11. 엇갈리는 운명] 빛의 계승자, 어둠의 계승자 (7)<타르키리텐>.
아르몬 하스 산맥의 협만에 위치한 이곳은 백(白)요정의 수도다. 성채라기보단 예술품에 가까웠다.
장벽이 산세를 따라 사중(四重)으로 늘어섰는데, 인류나 아인의 투박한 석조 기술과는 무언가 결이 다른 조화의 품위를 거느리고 있었다.
그 <타르키리텐>은 사방에서 밀려든 피난민으로 붐볐다.
협만의 항구로부터 성문 앞까지, 길게 늘어선 피난민들의 행색은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그들은 그 행렬 속에 서 있었다.
이들을 제치고 앞으로 나아가고 싶었건만, 그랬다가는 요정들의 반감을 살 것 같단 게 크세리니아의 판단이었다.
“매형, 이대로 있다간 해 질 녘까지도 성안으로 들어가지 못할 것 같은데?”
신태엽이 말했다.
“모탈 거 가타요!”
스케사리가 말했다.
경이롭도록 연푸른 머리칼을 신태엽과 똑같이 말총머리로 묶은 모습이었다. 형제라도 됐는지 둘은 항상 붙어 다녔다.
스케사리가 두건을 만지작거리며 짜증스럽게 신음을 흘리자 신태엽이 머리를 다독여 달래준다.
현수는 그 모습에서, 먼 예전 혜림이와 함께하던 나날을 떠올리며 슬프게 웃었다. 그리고 사쿠라이와 떠들던 정철의 모습을.
그들 모두 요정들의 반감을 피하기 위해 두건을 눌러쓰고 있었다.
요정의 길쭉한 귀는 할례(割禮)의 상징으로 용인은 당연히 갖지 않는 형질이었다.
“그냥 이대로 밀고 나가자! 샬롯 칸드라군도 있으니 인간을 대표해서 전령이 왔다고 하면 될 거 아냐.”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서두를 이유는 충분해. 우리에게는 대의가 있지 않나. 피난민이 아니라 평화사절이잖아.”
현수는 피난민들을 돌아보았다.
헐벗은 그들 모두가 굶주려 있었다. 서 있는 것조차 고역인 노인과 아이들도 많았다.
“아니요. 저희들을 통과시키느라 또 소동이 일어나겠고, 시간이 오래 걸리게 되겠죠. 여기 모두 성내로 들어가는 게 절실해 보이는데 예의가 아닐 것 같습니다.”
현수는 결국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죄송합니다, 샬롯. 그냥 기다리는 쪽으로 하죠.”
“아오, 매형. 이 NPC들의 꼴이 가여운 건 맞아. 하지만…… 정말 괜찮겠어? 발레린이 지금 어떻게 됐는지도 모르는데.”
현수는 목에 걸린 회귀석을 다시 한번 비참한 심정으로 꾹 붙잡아야 했다.
발레린…….
당신은 지금 살아 있습니까……?
엘리트 플레이어들은 모두 정철과 동급인 괴물들이라 했다. 하지만 리샤르를 보건대 정철과 달리 일말의 자비도 없었다.
‘또 남겨두고 왔다.’
그때, 거기에서, 정철을 두고 온 것처럼…… 이번에는 발레린을.
– 이건 잘못됐어요. 이건 잘못됐단 말입니다! 저 혼자서는 갈 수 없는─!
배 위에서 의식을 차렸을 때, <렐타론>까지 헤엄쳐서라도 돌아가려는 현수의 몸을 얼리며 크세리니아가 이렇게 설득했다.
– ─당신이 <온 것들>을 만나지 못하고 죽으면 온 세계가 <렐타론>처럼 될 텐데요. 걱정하지 마요. 로우가 함께 싸우러 갔으니까, 적어도 죽진 않을 거예요. 베니와 가이네이브도 함께 갔고.
그럴 수 있었을까.
정철은 로헤이리츠가 NPC 중에 몇 안 되는 영웅급 NPC라 했다.
그런 NPC와 함께였으니, 상대가 아무리 엘리트 아처라고 해도…….
뒤쪽에서 고통스러운 기침 소리가 들려온 건 그때였다. 돌아보니 젊은 성사가 서 있었다.
어딘가 묘한 인상을 주는 청년이었다.
법복은 누더기이며 얼굴은 흙먼지로 뒤덮였고 체구는 야위었다. 그런 행색으로도 고고한 분위기를 풍겨내고 있던 것이다.
“형제님, 물을 조금이라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성사가 힘없이 웃어 보였다.
현수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물을 내밀었다.
“물론입니다.”
“아, 제가 아니라.”
성사는 고개를 젓더니, 턱으로 자신의 양쪽을 가리켰다.
그러자 보였다.
소년 둘이 제각기 성사의 손을 맞잡고 있었다. 피골이 상접했는데 초점까지 멍한 녀석들이었다. 고아 구제?
“저는 괜찮습니다. 이 아이들에게 주시지요. 제 손을 놓으려 하지 않아서 아쉽게도 물을 받을 수가 없군요.”
현수는 한 소년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물통의 마개를 따서 건네주자, 소년은 잠깐 망설이다가 결국에는 물통을 받아들더니 훌쩍거리며 마시기 시작했다.
“천천히 마셔. 안 뺏어가. 다 마셔도 돼. 괜찮아.”
물통이 반대편의 아이에게로 넘어갔을 때에야 성사가 나직이 속삭여왔다.
“형제님께서는 인간이시군요.”
순간 현수는 머리가 새까매지는 걸 느꼈다.
아…….
당연히 통역 시스템이 요정의 언어로 말했을 거라 생각했는데, 인간의 언어가 나온 건가? 아니, 애초에 지금 앞에 있는 성사가 인간의 언어로 물어왔던 건가?
함정수사였다는 건가?
인간에 대한 요정의 증오는 절정에 달해 있었다. 종교적 견해가 뚜렷한 성직자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이 성사에게서는 적대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왜 이 아이들에게 귀한 물을 내주셨습니까, 형제님? 이 아이들은 요정이지 않습니까.”
청년 성사는 시선으로 묻고 있었다.
요정은 적이 아니냐고.
현수는 통일 전쟁 시기에 비슷한 질문을 받았던 걸 기억했다.
– 이 새끼들은 빨갱이들의 자식이야, 박 중사.
……그때 어떻게 대답했더라.
아마.
“생명의 존엄성에 국가나 인종은 관계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랬을 터였다.
그때처럼 비웃음과 함께 정강이가 걷어차이지나 않으면 다행이었겠건만, 성사는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요는…… 그저 존엄하기에 물을 주었다는 것인지요? 그것이 하나의 생명이기에.”
소란이 벌어진 건, 현수가 대답하려던 순간이었다.
“인간 놈들이다!”
한 여자가 이쪽을 향해 기함을 터뜨렸다. 힘없이 늘어서 있던 피난민들이 하나둘씩 머리를 쳐들었다.
“인간이라고?”
“인간이 여기까지 왔어?”
“아, 아, 안 돼!”
부녀와 아이들은 비명과 함께 뒤로 물러섰고, 험악한 남정네들은 주먹을 앞세우고 가까워왔다.
“와…… 좆됐네.”
스케사리와 장난을 치고 있던 신태엽이 중얼거렸다. 스케사리가 그 말을 따라 했다.
“와, 조때써여?”
과연 그 말대로였다.
상황은 순식간에 현수 일행이 피난민들에게 에워싸인 절체절명으로 변했으니까.
“루 엘루이 두 카루…….”
한 장정이 앞으로 나서며 손에 침을 뱉었다.
“인간이 여기까지 숨어들어 와 뭘 하려던 거냐! 우리의 왕을 죽인 것으로도 모자라 <타르키리텐>까지 불태우려고?”
“오해다! 우리는 발데마르 왕을 시해하지 않았어! 또한 금년에 인류는 요정의 도시를 공격한 적이 단 한 차례도 없다!”
샬롯이 나서서 인류를 변호하고 나섰다.
그 순간 돌멩이가 날아와 샬롯의 이마를 때렸다. 이마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샬롯!”
현수가 샬롯을 감쌌다.
더 많은 돌멩이들이 피난민들의 증오의 외침과 함께 날아오기 시작했다.
“꺼져라!”
“여기서 꺼져!”
“됐어요. 그냥 죽여버리죠!”
순식간에 살기(殺氣)가 성문 앞을 뒤덮었다.
현수는 숨을 막혔다.
이들과 어떻게 화평을 이뤄낼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이 처음으로 들었다. 그것은 불가능처럼 보였다.
‘발레린…… 역시 내가 아니라 당신이 여기에 와야 했습니다.’
그게 아니면 정철이 왔어야 했다. 정철이라면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도 몇 가지나 알고 있었을 텐데.
“죽여라! 죽여라! 죽여라!”
죽음의 합창이 절정에 달하기 직전에 크세리니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스케사리.”
합창과 돌팔매질이 일제히 멎었다. 그 순간, 냉기 속에서 돋아난 순수(純粹)의 위엄 때문에.
빙룡 스케사리.
용의 형상을 입은 스케사리가 일행의 상공에서 날갯짓을 하며, 냉기의 장막으로 돌멩이들은 모두 막아냈다.
“용이다.”
“용이야.”
“용이시여, 왜 저딴 하등한 생명체들과 함께 다니는 겁니까!”
신태엽이 소리쳤다.
“요정은 인간이랑 어울리면 안 된다고 누가 정하기라도 했어? 그랬다면 제발 알려줘 봐요! 그딴 법을 정한 놈 면상 좀 보게.”
“인간 놈들이 우리들의 고향을 불태웠다!”
“인간들은 다 똑같아! 은혜란 걸 모르지!”
다시 피난민들이 돌멩이를 쳐들던 바로 그때를 기점으로.
“이게 도대체 무슨 소란이냐!”
<타르키리텐>의 도시 경비대가 달려왔다.
순백의 망토와 은빛 법랑을 입힌 갑주를 걸친 그들은 일반 경비대원이라고 하기에는 무장이 너무 화려했다.
거기에다 외형이 선발 기준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전원이 미남 미녀였다.
“우리는 평화협정을 위해서입니다. 저는 성도의 인류를 대표해서 왔습니다. 아주 급한 일입니다.”
“웃기지 마라.”
“사실입니다.”
“대체 어느 나라의 평화사절단이 너희들같이 거지꼴을 하고 나타나냔 말이다!”
현수는 뜨거운 침을 삼켰다. 이들을 처리하는 건 손쉬운 문제였다.
하지만 그 뒤는?
인요 간의 화평은 그걸로 끝나고, 새로운 전쟁이 시작될 터였다. 도대체 이 상황에서는 어찌해야…… 도대체…… 그때 크세리니아가 말했다.
“발레린.”
“발…… 뭐라고?”
“발레린이 이곳에 오면 평화가 있을 거라고 약속했다. 우리는 그와 함께 <렐타론>까지 왔었거든. 나는 트라이폴의 백작 크세리니아, 내 말에 한 치의 거짓도 없다.”
“발레린 왕제께서 너희들에게 평화를 약속했다고?”
“네, 그렇습니다.”
“믿을 수 없다. 증거라도 있나? 수호자의 반지나 왕족의 물품이라도? 그러면 믿겠다.”
현수는 즉시 회귀석을 그들에게 보여주었다. 그러자 보석을 들여다보던 병사들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웃어댔다.
“발레린 왕제 전하를 팔아먹으려 했으면 수호자의 반지가 어떤 모습인지는 조사해 봤어야지! 우리가 멍청이로 보이더냐? 이딴 거짓말에 속아 넘어갈?”
회귀석을 모른다?
아니, 모르는 게 당연한 건가?
“아니…… 이건 정말─”
“─체포하라!”
대장의 명령이 들리기 무섭게 경비대원들이 오라를 꺼내들고 접근해왔다.
“지금 죽여야 합니다!”
피난민 몇몇이 소리쳤다.
“어떤 짓을 벌일지 모른다고요. 지하 감옥에 잡히는 게 계획일지도 모릅니다요, 나리들.”
증오의 도가니.
현수는 혼란스러운 심정으로 일행을 돌아보았다. 일행들도 현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내게 판단을 요구하는 건가? 이들을 떨쳐내라고 말해야 하는 건가?’
현수는 숨을 헐떡이며 생각했다.
1분이 1년처럼 느껴졌다.
일단 어떻게든 요정 수뇌부를 만나야 해. 발레린은 거울의 사당으로 가라고 했다. 거기 잠입하는 수밖에 없어. 이들을 해치지 말고 도망치는 선에서…….
그때였다.
“형제자매 여러분, 그의 신원을 제가 보증하겠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소리 난 방향으로 향했다.
현수도 마찬가지였다.
거기에, 아까 전의 성사가 아이들과 함께 서 있었다. 성사가 현수에게 고요한 미소를 지었다. 왼쪽의 아이가 말했다.
“저 아저씨는 나쁜 사람이 아녜요.”
“하하…… 이건 성직자나 꼬마 자식이 관여할 사안이 아닌데.”
한 대원이 비아냥거리자, 성사가 나긋하게 대꾸했다.
“아이들은 진실만을 봅니다.”
“아이들은 모두 거짓말쟁입니다, 성사.”
“그런가요? 하지만 제 눈으로 봤을 때는 거짓의 안개는 없고 진실의 빛만 보이던데요, 자매님.”
“그걸 당신이 어떻게 압니까? 독심술이라도─”
성사가 눈을 천천히 감았다 떴다. 그 순간, 어마어마한 마력이 폭발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다시 뜬 눈. 거기에서, 만(卍)자가 팽그르르 돌아가고 있었다.
“이런 맙소사.”
대장이 대원의 어깨를 잡아끌었다. 대원이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을 때, 대장은 창백한 얼굴로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바, 발론 왕제 전하.”
현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왕제라니, 그렇다면 저 남자는 발데마르와 발레린의 형제란 말인가? 신태엽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와…… 왕의 눈이야. 엘 타론. 모든 생각을 꿰뚫어보는 눈.”
외형상으로는 발레린과 닮은 점이 하나도 없었다. 인상부터가 달랐다. 발레린처럼 날카롭기보다는 부드럽고 인자했던 것이다.
“형제님, 저는 이미 빛에 귀의한 몸이니 부디 왕제라는 속세의 말로 부르지 마십시오.”
“하지만 말씀하신 바에 따르면…… 전하께서는 저 남자와 방금 만나신 것이 아니온지…….”
“오늘 만나기 전부터, 저 형제님에 대한 평판을 들어왔지요.”
“저들이 누구신지 아십니까?”
“성도의 영웅이자, <잊혀진 왕들> 네이갈라스의 재림을 저지했던 사내이며, 발레린 누님의 친우입니다. 자,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그에게 길을 열어줍시다. 화합으로 향하는 길을.”
* * *
<잊혀진 왕들>의 능력을 적재적소에 이용한다면, 성도 캐슬베이아를 함락시키는 것도 어렵지 않다.
네이갈라스의 심연은 용암, 그 힘으로 일대 전체의 지반을 녹여서 성도를 지하에 처박는다.
슈’율큘라의 바닷물이 밀려드는 지하 깊숙이…… 그리고 그 위를 켈렉─샼의 늪지대로 덮는다.
[호, 호, 호, 필멸의 두뇌로 짜낸 것치고는 기발하였기는 하나 역시 성도는 성도란 것이로구나.]어느덧 12시간째 빛의 폭발을 일으키며 저 심연의 침식을 막아내고 있긴 하지만, 빛의 결계에도 한계가 존재한다.
영목에 깃든 에오스와 헬레니아의 혼…….
내 계산이 맞다면, 그 혼의 신성력이 다하는 순간이 분기점이 될 것이다.
“성도가 깨지기 전에 내 머리가 먼저 깨지겠군.”
머리가 미치도록 지끈거린다.
이제는 숨을 쉬는 것에조차 부단한 노력이 필요할 정도다.
눈앞에 <잊혀진 왕들>이 셋씩이나 있으니 당연한 거라면 당연한 거겠지만…….
“앞서 말했듯 무차별적인 살육은 금한다.”
[음……, 허……, 허……, 약하고……, 약하도다……, 아직도……, 필멸의 감정에 좌지우지되는가…….]“닥쳐. 나에게 필요한 것까지 너희들이 죄다 집어삼킬까 봐 하는 말이야.”
[본좌가 묻는다. 그게 무엇이냐? 제물인가?]아르츠레히드는 죽이고 싶지 않아. 어떤 수를 써서든…… 분명 방법이 있을 거다.
“너희들은 알 필요 없다.”
영목의 결계는 정확히 26시간 이후에 산산이 깨어져 내렸다.
무차별적인 학살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성벽을 지키던 병사들은 대부분 결계가 사라진 순간 머리가 터져 죽었다.
세 왕들의 그 초월적 존재감으로 증명하는 우주의 진실에 계몽되는 걸 뇌가 견딜 수 없었으므로.
[흐, 흐, 흐, 흐, 흐…….] [음, 허, 허, 허, 허…….] [음흐흐흐흐하하하하하…….]작전대로 혼자서 성도로 내려가 그 시가지를 걷는데, 놈들이 다짜고짜 웃기 시작했다.
“뭘 처웃어.”
[정말 그렇게 생각하느냐? 본좌는 그대의 명을 따라 어떤 심연의 기척도 발하지 않았다.]“뭐?”
[저 일들은 모두 네가 한 일이다. 절대 심연의 그릇이여.]이것들이 지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이상해…….
이상하잖아…….
단지 나와 눈을 마주친 것만으로 머리가 터져 죽는다니, 그러면 내가 벌써 너희들과 똑같은 존재가 되었단 소리냐?
“틀려…… 나는 네놈들과는 달라…… 너희들처럼 되는 일은…… 결코 없을 거다…… 지금 이 학살은, 어쩔 수 없는, 그러니까…….”
어라, 뭐지? 저런 도피성 핑계로부터 진실을 깨달았는데도 어떤 죄책감도 느껴지지 않아.
이상해…….
이상하다…….
그냥 내 머리가 지끈거려서, 어서 이 일을 끝내고 싶다는 짜증밖에 들지 않아.
“……끄, 끄아아아아……!”
“……도, 도망쳐……!”
“……사, 상대할 수가 없습니다! 싸워보지도 못하고 병사들이 모두 머리가 터져 죽어가는……!”
아찔한 피비린내 속에서 가슴을 움켜잡고 숨을 헐떡였다.
아, 젠장…….
시간이 얼마 없단 거군…….
이제 야나와 브뤼나는 이름밖에 기억나지 않는다. 전속 계약 엘리트는 힘의 대가로 인간성을 바친다던데, 인간성이란 즉 기억을 뜻하는 거였나?
괜찮아…….
나는 어찌 되어도…….
하지만 완전히 미쳐버리기 전에, 그 녀석들과의 약속은, 그리고 어머니는 반드시…….
“……모두 영목의 광장으로 향하세요……!”
미친 것일까.
헛구역질 너머에서 이제는 환영까지 보이기 시작했다.
“……그곳의 결계는 아직 온전하니까……!”
성도 공방전, 요정들의 창검 속에서 인류의 병사들이 피 흘리며 죽어가는 모습.
그리고 성도의 시가지를 아르츠레히드와 함께 미친 듯이 뛰어다니는 나, 바로 1회차와 2회차 때의 내 모습이…….
아니, 내 모습이 아니야…….
저 얼굴은 내가 아닌데. 애초에 남자조차도 아니었다.
“정철.”
낯익은, 낯익은 목소리다.
그 목소리에, 심장이 격하게 뛰는 가운데 호흡을 잃었다. 순간 두통마저도 지워진 듯했다.
그건, 너를 처음 만난 그 순간에 느낀 것과 똑같은 가슴 떨림.
“오랜만이야.”
어떻게 이 배틀로얄에 들어왔는지, 어떻게 요토스로부터 달아나 무사할 수 있었는지는 모른다.
모른다…….
모르는데…….
어떻게 대부분의 기억이 사라져가는 지금 이 순간에조차 그 이름과 추억들을 분명히 기억할 수 있는 것일까.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시야에 그 모습이 잡힌 순간, 현기증이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은발과 금빛 눈동자를 은은히 빛내며, 네가 망치를 어깨에 걸친 채 빙그레 웃는다.
“그간 잘 지냈어?”
언제일까.
처음으로 네가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던 건.
아마도, 그 옛날의 나처럼, 세계를 위해 울던 네 모습을 보았을 때가 아니었을까.
“크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