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 of the Fake Hero RAW novel - Chapter (178)
가짜 용사 이야기-178화(178/310)
#74 :
[11. 엇갈리는 운명] 빛의 계승자, 어둠의 계승자 (8)크리스를 처음 만난 건, 7회차의 튜토리얼을 막 끝냈을 무렵이었다.
– ……저기요?
쭈뼛거리며 다가오던 크리스의 모습은, 어째서인지, 지금도 생생하다.
– 혹시…… 여기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세요?
– 네, 뭐.
– 아시죠? 역시! 딱 보니까 아는 표정이시더라고요! 튜토리얼도 엄청 잘하셨으니까 당연한 걸지도!
그 튜토리얼의 해결법은 두 가지였다.
스타팅 NPC를 죽이거나, 돕는 것. 전자가 압도적으로 쉬울뿐더러 보상도 많았다.
후자는 고생길의 시작이었다.
– 님한테 할당된 스타팅 NPC를 죽이면 돼요.
– 네?
– 저기 저 꼬맹이들 죽이면 된다고요.
다른 모든 사람이 그랬듯 너도 고개를 끄덕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너는 달랐다.
– 왜 그래야 하죠?
크리스가 눈을 도전적으로 빛냈다. 나는 약간 당황했다.
– 공략법을 알려 달라면서요.
– 그렇다고 아이를 죽여야 하는 거예요? 오직 그 길뿐이라고요……?
– 다른 방법도 있긴 한데…….
그 말에 크리스가 양손을 맞잡으며 환호를 질렀다.
– 역시 대단해요! 그러─
– ─근데 난이도가 돌았어요. 뉴비 절단기죠. 그냥 죽이는 편이 나을 텐데.
……어차피 여기서 살려봐야 오래 살지도 못하고. 그 말이 입가를 맴돌 때, 너는 그저 활짝 웃었다.
– 그냥 어려운 쪽을 선택할래요.
– 왜요?
– 그 편이 사람답고 좋잖아요? 그리고 그 방식을 다 알고 계신 걸 보니 다 해보신 거 아니에요?
그때, 바로 그날 첫 만남의 순간. 내 안에서 죽었던 무언가가 조용히 울었다.
이런 사람이 있구나…….
나랑 똑같이 말하는 사람이…….
그 울음을 들으며 온몸으로 전율했었다. 잃어버렸던 가슴 떨림을 돌려주었던 여자가, 지금 다시 내 앞에 나타났다.
“잘 지냈어?”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입이 열리지 않았다.
“아무것도 안 물어봐?”
크리스의 모습은 기억 그대로였다. 태양처럼 따스한 분위기도. 다른 것은 복장뿐이었다.
“내가 보낸 편지, 안 읽었지? 섭섭하지만…… 괜찮아! 너라면 당연히 그럴 것 같았어.”
눈빛 법복 위에서, 은빛으로 찬란한 저 판금과 사슬이 혼합된 갑옷은 <실레움>이다.
달빛을 간직한 갑주.
고유 능력은 어린갑처럼 달빛을 전 방위로 발산하는 것. 신화시대의 대천사 중 하나, 슈르비엘의 보구.
“여긴 어디지?”
그렇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느닷없이 휘황한 빛이 시야를 가득 메우더니, 성도의 풍경이 사라지고 다만 순백의 공간이 펼쳐졌으니까.
“슈르비엘의 힘으로 구현한 공간이야. 오직 너와 나만 들어올 수 있어.”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대천사 슈르비엘의 힘이라, 이것도 내가 모르는 힘인데…….
괜스레 쓴웃음이 나왔다.
“날 속였었구나.”
“아니야.”
“초심자를 가장하고 내게 접근했던 이유가 뭐였어?”
크리스도 쓰라린 미소를 지었다.
나는 시선을 피했다.
네 미소는 언제나 그랬다. 어떤 상황이든, 내 마음을 흔들리게 만든다.
“화났어?”
“당황스러울 뿐이야.”
“정철, 내가 말로 설명해봐야 듣지 않겠지.”
심장이 저릿해왔다.
어떻게 굳힌 결심인데.
어떻게 나아온 길인데. 마침내, 다른 엘리트들처럼 인간성까지 버렸는데.
“설명할 필요 없어. 듣고 싶지도 않고.”
그 상황에 네가 나타난 거냐.
엘리트 아처 같은 멸망 루트를 타서 스피드런을 해볼까 했었던 7회차를 시작하던 그때처럼.
“싫어. 나도 억지 한 번쯤은 부려도 괜찮잖아.”
“…….”
“그리고 한 가지만 확실히 짚고 넘어갈게. 난 널 속인 적이 없어. 초심자를 가장한 것도 아니야. 그때 난 초심자가 맞았으니까.”
* * *
정신세계의 외부에서는 빛과 어둠이 수십 번 격돌하며 제각기의 포효를 내지르고 있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빛의 망치가 세상을 눈부시게 밝히고 나면, 어둠의 검이 다시 그 빛을 삼키는 식이었다.
“Gu, GuaaaaAAAAAAAA……!”
크리스 마이어스는 숨을 헐떡이면서, 눈앞에서 광견처럼 미쳐 날뛰는 타락의 힘에 맞서고 또 맞섰다.
맞설 때마다.
격돌할 때마다.
의식 공명의 빛이 저 마음속 어둠 속으로 전해지며, 이곳이 아닌 심층 세계에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크리스 성하, 왕들이 진군하기 시작합니다!”
용기사 바르켄데르가 말했다.
바르켄데르는 전설적인 무기 용골창을 계승한 노장으로, 제국의 영웅 등급 NPC.
저 용골창도 강력하나, 역시 그가 영웅인 이유는 지금 상공을 맴도는 황룡의 존재 때문이다.
마지막 황룡, 글리아륜.
그 빛은 사방에서 밀려드는 심연에 맞서 맥동하고 있다.
“조금만, 조금만 더 버텨주세요!”
곧 동쪽에서 옛것 큘륜들의 질퍽한 신음과 해저인 루틀웨들의 킬킬거림이 들려왔다.
쇳소리와 인간들의 비명 소리가 멎지 않았다. 성도는 난장판으로 변해 있었다.
어느덧 발목까지 바닷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그냥 바닷물이 아니라, 살갗을 찢고 몸을 녹이는 심연의 바다다.
……해저터널.
단순한 지하 터널이 아니라, 바다와 연결된 터널. 성도를 바다에 잠기게 했다는 말인가. 내륙에 위치한 성도에서, 슈’율큘라의 권속들이 판칠 수 있게 만든 전략.
이런 비현실적인 전략을 낼 수 있는 사람은, 크리스가 알기로는 한 명뿐이었다.
그리고 이 말도 안 되는 전략을 깨부술 수 있는 사람도, 바로 한 명뿐이었다.
“제발, 눈을 떠……!”
* * *
“초심자가 아니라고?”
어이가 없어서 냉소가 지어졌다.
“엘리트로 선발된 것부터, 대천사의 보구를 입고 있는 것까지 어떻게 설명─”
순백의 공간.
그 끝에 커다란 터널이 생겨나자, 크리스가 앞장서서 그 터널 안으로 들어섰다.
“─이곳에서 나가고 싶다면 따라와. 싫음 말고.”
나는 잠깐 망설이다가 뒤따랐다.
그리고 아연해졌다.
터널로 들어서자마자, 주변 정경이 우주 공간으로 뒤바뀌어 있던 것이다! 총총히 빛나는 별들은 헤아릴 수조차 없었고, 태양처럼 보이는 항성들도 수없이 많았다.
대단해…….
경이적인 장엄함에 압도된 채로, 잠깐 동안 모든 걸 잊고 그 광경에 넋을 빼앗겼다. 그때 크리스가 내 손을 잡았다.
“이제 따라와 줘. 위험하니까 손을 잡고─”
“─놔.”
나는 그 손을 곧바로 쳐냈다.
“알아서 따라갈 테니까.”
이 공간에 대한 평가가 뒤집히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몇 걸음 떼었을까.
영화처럼, 기이하도록 새하얀 별이 클로즈업되며 커다랗게 다가왔다.
“저곳이 이킬라스야.”
설백의 행성이 보인다.
눈을 깜빡였다. 그러자 다음 순간 나는 그 별 속에 들어와 있었다.
……외우주의 악몽이 새하얗게 펼쳐진 세계였다. 눈보라가 휘몰아쳤다. 얼굴에 닿은 눈(雪)이 불쾌하도록 끈적끈적했다.
그 눈보라 속에서, 광포하게 날뛰는 사람들이 보였다.
“이건 대체 뭐지?”
“여긴 이킬라스의 단면. 진짜 이킬라스는 아니야. 그리고 저건 숭배 의식의 일종이지.”
“저게 의식이라고?”
새하얀 거석.
그 주변으로, 시체들이 나선형으로 펼쳐져 있었다. 끔찍하게 난도질당한 상태였다.
아니, 저거, 리샤르 후가 행하던 의식과 유사하잖아…….
“위란글, 글롄리프. 셰랴슐. 셰라슐리아로 토뤼아크.”
사람들이 불길한 음절을 합창하며 광란의 축제를 벌여댔다. 크리스가 짧게 말했다.
“외우주의 신들이 원하는 게 뭔지 알아? 바로 인간성의 상실이야.”
병적인 한기가 내 뼈마디들을 훑고 지나갔다. 그러자 기억의 심연 속에 가라앉았던 기억들이 깨어났다.
둥. 둥. 둥.
북소리의 난타…… 미지의 비명 소리…… 셰라슐’토뤼악의 웃음소리…… ■■■■■■■…… 으흐흐히히히하하하하하하하…….
“정철!”
크리스가 내 손을 잡았다.
그 순간 모든 환각이 멎었다.
“미안해. 그리고 괜찮아. 이제 다 괜찮아질 거야.”
나는 멍하니 숨을 헐떡였다.
공포에 질린 채 주변을 살폈다. 다시, 우주 공간이었다. 이번에도 살아서 놈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온 것이다.
안도감의 한숨을 토하듯 내뱉으면서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크리스가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 시선, 네 시선을 받을 수가 없어 눈을 피했다.
“이킬라스에 가본 적이 있었어?”
“……기사회생 찬스로.”
“미안해. 몰랐어.”
그걸 왜 네가 사과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넌 언제나 그랬다.
모든 분쟁에서 자신이 책임을 졌고, 먼저 사과를 했으며, 물러서 주었다.
“내가 보여준 건 환상의 공간이야. 그러니까 슈르비엘이 가진 대서고의 데이터를 기반으로…… 아, 설명하기가 어렵네. 쉽게 말하자면, 슈르비엘의 기억으로 영상을 만든 거라고 보면 돼.”
“그럼 넌 대체 누군데? 뭐 하는 놈이야? 슈르비엘 본인이냐?”
“아니야. 그 아이는 내 안에 깃들어왔을 뿐이야.”
크리스가 나를 일으켜 세워주나 싶더니 불현듯 입으로 피를 쏟았다.
뭐지?
누구한테 공격당하고 있는 건가? 그걸 물으려 하자마자 크리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시간이 얼마 없어. 어서 가자. 가면서 설명해줄게.”
* * *
카아앙…… 짓쳐든 타락의 칼날을 막아내면서, 고막을 찢는 굉음이 터진다.
강대한 힘의 충돌.
크리스와 정철을 중심으로, 바닷물이 한순간 바깥쪽으로 밀려나면서 뭍이 드러날 정도였다.
“RuaaaaaAAAAAAAAAAA!”
방금 받아낸 일격은 깊었다.
받아칠 수 있던 것부터가 기적이었다. 아이자이야의 표면에 균열이 갈 정도로.
크리스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아파, 아프고 고통스럽지만, 계속 서 있어야만 했다.
“크리스 성하!”
그때 슈르비엘 갑주의 견갑(肩胛)에서 빛의 날개가 휘황하게 펼쳐진다. 근력으로 막아낼 수 없던 힘에 버틸 수 있게 해준다.
“……병사들이여, 영목이 이 바다에 침식되는 순간 모두 끝난다! 용전분투하여 굳건히 맞서라……!”
제1황녀 힐더의 외침 속에서 마법사들이 불을 부리고 사제들이 빛의 장벽을 두르는 게 보인다.
– 힐더는 대륙에서 제일 중요한 NPC예요.
그 목소리가.
지난날의 목소리를 끌어당긴다.
너무나도 듣고 싶었고, 또 너무나도 만나고 싶었던 그 목소리.
– 능력도 좋고, 황녀들 중에 인품도 제일 좋습니다. 이 진영에 소속되면 스타일에 맞는 플레이를 할 수 있을 겁니다.
– 음, 인품이요? 인품이 좋은 건 어떻게 알아요?
– 어, 음, 그게…….
그 질문에 쑥스러워하며 이마를 긁던 정철의 모습은 아직까지도 생생하다.
“제발, 빨리 눈을 떠줘, 이건 네가 원하는 게 아니잖아……!”
크리스가 손아귀에 힘을 준 순간, 빛의 날개가 폭발했다.
순간적으로 빚어진 추진력.
망치와 대검을 맞댄 상태로 정철을 앞으로 밀어낸다. 시가지의 외벽들이 수십 번 부서질 때까지 그 출력은 사라지지 않는다.
“……역시 엘디아의 재림……!”
“……마법의 사도를 상대로……!”
그때, 정철이 칼자루를 놓고 오른손으로 일격을 가해왔다.
다, 예상하고 있었다.
대망치를 상대하는 PVP에서, 버릇처럼 보여주던 방식이었으니까. 대검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힘과 기예가 모두 있는 정철 특유의 전투 방식이었다.
크리스는 몸을 빙글 돌렸다.
옆구리에 정철의 주먹이 꽂히는 순간, 살을 주고 뼈를 취한다. 돌려 잡은 대망치의 밑동으로 정철의 명치를 꿰찌른다.
“──────!”
둔중한 타격음이 교차했다.
정철의 주먹에서는 심연이 폭발했고, 크리스의 망치에서는 빛이 폭발했다.
치명상이었을 것이다. 슈르비엘의 빛이 순간적으로 전개되어, 크리스를 휘감아주지 않았더라면.
콰과과과과광……!
빛의 쇄도에 직격된 정철은, 건물을 몇 개고 부수며 날아가 어딘가에 처박혔다.
“다, 네가 알려줬잖아…….”
첫 교전의 승패가 갈린 순간이었다.
크리스는 2차 타격으로부터 보호받은 반면, 정철은 빛에 직격당한 셈이었으니까.
결정적으로, 빛과 화염은 심연의 천적이었다.
“이렇게 싸우는 법도, 이 세상에 맞서는 방법도, 모두 다…… 근데 그러고 있으면 어떡해!”
* * *
그다음으로는 암흑성 류이니옌을 보았다. 이킬라스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환희 속에서 서로를 죽이고 또 죽였다.
“외우주의 신들은 모든 지성체들이 자신들을 닮아가기를 원해.”
“닮기를 원한다?”
“이성에 구애받지 않는 삶. 도덕과 법이 필요 없는 세계.”
“말로는 그럴듯하네.”
“그게 함정인 거야. 모두가 본능이라는 이름하에 본능에만 충실한 세계야. 뭔 뜻인지 알겠어?”
“본능이 아니라 광기 같은데.”
“광기는 본능의 뒷면이야. 누군가를 죽이고 싶으면 죽이면 되는 거야. 아무도 그를 벌하지 않아. 강간하고 싶으면 강간하고. 훔치고 싶으면 훔치고. 외우주의 관하에서는 선과 악이 아무런 의미가 없어. 그들이 선악을 나누지 않았으니까.”
“우습네. 결국에는 인간들이 서로 살육하는 걸 원한단 소리야?”
“신들은 따분한 걸 싫어해. 신들이 자애롭다는 말은 누가 한 거지? 신들은 자애롭지 않아. 오히려 잔인한 편이야.”
흑염, 그림자, 피…….
VVIP라고 일컬어지는 절대자들의 행성들을 모두 둘러보았다.
그곳엔 오로지 광기뿐이었다.
“……그래서? 내게 이런 것들을 보여주는 이유가 뭔데?”
“부정하려 들지 마. 정철. 넌 이미 답을 알고 있잖아.”
“몰라. 그러니까 그만 말해.”
“관리자들은 인간성을 원해. 멸망의 세계. 플레이어들은 망가져 가면서 인간성을 잃어버리지. 그 인간성을 모음으로써 신격(神格)이 증강되는 거야.”
“모른다고 했잖아!”
크리스가 순간 얼굴을 찌푸리며 고통스럽게 기침을 토했다.
내 말 때문이 아니었다.
너는 언쟁으로 인상을 구기는 여자가 아니었으니까. 분명 어떤 외압에 공격받고 있는 듯했다.
“샬류안은 심판을 관장하는 여신이야. 창세신 겔드하리아 님의 신격을 삼키고 난 찌꺼기로 만들어냈지.”
“심판? 그 미친놈이 어떻게……?”
“한 세계가 죄를 짓게 유도한 다음, 그 세계를 심판하는 걸 업으로 삼고 있어.”
“무슨…….”
“지구인들이 이 세계를 멸망시키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그 죄가 그대로 적용돼 지구도 샬류안의 심판의 표적이 되어 버린다고! 지구가, 이 세계랑 똑같이 되어버린단 말야!”
나는 멍하니 서 있었다.
어렴풋했던 의심이 실제로 변해가는 과정은 충격적이었다.
“그게 샬류안이 말하던 배틑로얄의 진면이라고.”
그렇다면 내 소원은 어떻게 되는 거지?
어머니가 살아나도…….
그 세계가 멸망한다면 거기에 어떠한 의미가…….
“아니, 그럴 리 없어…… 그렇다고 해도, 관리자들과 딜을 하면 그만이야.”
그럴 수 없다면, 나는 뭘 위해 여기에 와 있단 말인가.
애초에 나는 누구인가?
뭘 위해 모든 걸 다 버리고, 전속 계약 엘리트가 되어서…….
“읏……!”
크리스가 중심을 잃고 비틀거린 건 그때였다. 무심결에 그 몸을 붙잡아 주었다.
그 순간, 피리 소리가 아득히 들려왔다. 검푸른 벌레들이 환상의 공간을 천장에서부터 파먹어 소멸시켜 가고 있었다.
이 소리는…… 요토스?
크리스가 토혈을 다시 한번 쏟더니, 내 손을 잡고 달리기 시작했다.
“가자.”
그렇게 우리는 파먹혀 가는 터널 속을 달렸다. 터널은 내게 ‘나’를 보여주었다.
1회차, 요르한 3세의 시체를 지키려다가 로바르 아르휀의 칼에 죽던 내 모습을.
2회차, 이데아의 인간과 요정 세력을 통합하다가, 강경파 NPC들에게 저격당해 죽던 내 모습을.
“집어치워!”
발걸음을 강제로 멈추며 외쳤다.
크리스가 말했다.
“봐야 해. 네가 잃어버린 모습을! 샬류안이 왜 이 세계를 게임으로 모방해 놨는지 알아? 바로 각인시키기 위해서야! 쉽게 통제하기 위해서라고. 해가 매일 서쪽에서 뜨면 어떨까? 사람들은 해가 서쪽에서 뜨는 게 당연하다고 여기겠지.”
3회차, 성배를 살려내지 못하고 거미 군주 아쉬론에게 산 채로 잡아먹히던 내 모습도 보인다.
“샬류안이 노린 게 바로 그거야! 이 세계는 멸망해야 한다, 이 세계는 멸망할 수밖에 없다고, 그걸 너처럼 우수한 인간들에게 각인시키기 위해서……!”
4회차…… 5회차…… 6회차…….
요정왕 발데마르…… 성도의 수호자 아르츠레히드…… 환영의 사사 라이문드…… 용기사 바르켄데르…… 제1황녀 힐더…….
그 영웅들과 함께했던 찬란했던 날들. 이 세계를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기억들. 그러나 그 끝에 존재하는 건, 절망해 우는 내 모습뿐이었다.
이번에도 똑같을 터였다.
이제 환상의 터널은 반쯤 사라져 있었다. 사라진 벽면 너머로, 피리를 부는 요토스가 보였다.
주먹이 멋대로 쥐어졌다. 울면서 소리쳤다. 요토스와 크리스에게.
“어쩌라는 거냐? 내 어머니는 그냥 죽는 게 당연한 거라고? 살릴 수 없다고 말하고 싶어? 그러니까 다 포기하라고?”
그게 내 삶의 전부인데.
이 미쳐버린, 죽고 죽이고 죽게 만드는 게임에 들어온 이유인데.
죽지 않고, 살아서, 내일을 그리며 살아갈 수 있게 된 유일한 이유인데.
“잃어버린 건 되찾을 수 없어. 네 어머니도. 네 인간성도. 하지만 인간은 그 상실로부터 소중한 가치에 대한 걸 깨달아가지.”
“닥쳐.”
“정철, 그걸 되찾아 주겠다는 건 모두 농간에 불과해!”
“닥치라고!”
요토스가 피리 불기를 멈추고 말했다. 벌레들은 여전히 환영을 소멸시키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당신의 어머니도 살려내 드리겠습니다. 필멸의 무지함에 현혹되지 마세요.」
“닥쳐! 너, 방금 저거 사실이야? 소원을 이뤄 주겠다는 게 다 거짓말이라고?”
「거짓이 아닙니다.」
“이뤄주면 뭘 하나, 그 이후에 세상이 멸망한다며!”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만, 그건 모두 우승자들의 뜻이었습니다. 전 우승자들의 동의가 없이는 그런 일을 벌이지 않아요.」
“뭐?”
“듣지 마, 정철!”
「하지만 좋습니다. 이번에는 다른 조건을 적용시켜서, 예외를 적용시켜 드리죠. ‘미래의 당신’의 뜻이 어떻든, 당신이 죽기 전까지는 맹세코 당신의 세계를 멸망시키지 않겠습니다. 제 모든 신격을 걸고 약속드리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