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 of the Fake Hero RAW novel - Chapter (179)
가짜 용사 이야기-179화(179/310)
#75 :
[11. 엇갈리는 운명] 빛의 계승자, 어둠의 계승자 (9)크리스가 정철을 처음 만났던 때는, 상담사의 업무에 절망했던 시기였다.
정말, 도와주고 싶었는데…….
정말, 구해주고 싶었는데…….
그 아이는 총으로 자기 머리를 쏴서 자살했다. 늘 술에 취해 어머니와 동생들을 때리던 아버지를 먼저 쏜 뒤에.
게임이라면 다를까.
게임이라면 이런 상황을 바꿀 수 있을까. 이 게임이 현실이랑 그렇게 똑같다는데, 여기에서 모든 걸 잊고…….
가면적인, 어쩌면 직업적인 미소밖에 지을 수 없던 그 순간에 정철을 만났다.
– 왜 다른 랭커들이랑은 플레이 방식이 다른 거야?
나중에, 상당히 친해진 뒤에 그렇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왜일까. 진심으로 궁금했다.
그냥 단순한 과몰입이라고 하기에는…… 다른 플레이어들과는 무언가가 달랐다.
– 통일 전쟁에서 나 때문에 소대 하나가 전멸한 적이 있었거든.
– 아, 2차 한국전쟁……?
– 그때는 아무도 돕지 못했는데…… 지금도 눈을 감으면 그때 죽던 애들 목소리가 떠올라.
– 어…… 저기, 미안해.
– 미안할 거 없어. 그런 경험 때문일 거야. 게임에서만큼은 다르길 바라는…….
지금도 기억한다. 그때 정철이 지었던 멋쩍은 미소를. 그때가 반한 순간이었을 테니까.
이 남자는 나와 같구나…….
나처럼 저 밖의 아픔을 품고 이 세상으로 들어온 거였구나…….
“에델, 자네 괜찮나!”
그때 성도의 군대를 지휘하던 수상 아르츠레히드가 정철에게로 달려갔다. 그 뒤를 영목 기사 10여 명이 따른다.
“아, 안 돼요! 거긴 위험해요!”
황급히 제지했으나 늦었다.
아르츠레히드가 정철을 부축하려던 순간, 그 일대의 심연이 폭주했고…….
초월의 독기가 확산하며, 피조물들을 속박하고 있던 시간(時間)의 섭리가 뒤틀렸다.
* * *
그래, 소원을 들어준다는 게 따져보면 거짓이 아니긴 하다.
사실이지만 상황을 교묘하게 뒤틀어놨을 뿐이지. 로또 100% 당첨, 대신 당첨 직후 세금 100% 이런 느낌.
그러니까, 로또를 당첨시키는 능력은 있는 거 아니야? 정말 신이고, 한 세계의 멸망을 주관할 수 있다면.
“정철, 나를 봐.”
크리스가 손바닥을 펼쳤다.
그 위에서 빛의 열쇠가 은은히 빛났다.
“거짓말을 하진 않을게. 이 열쇠를 잡으면 너는 지금까지 이뤄온 모든 걸 잃게 돼. 외우주와의 연결 고리를 끊어내는 열쇠야. 그 갑옷도. 마검도. 외우주가 후원한 포인트로 올린 레벨도. 그 모든 걸 버려야만, 간신히 너를 꺼내올 수 있어.”
요토스가 크리스의 말을 비웃으며, 현실적인 사항을 지적했다.
「당신의 마지막 숙적인 엘리트 아처는 이미 걷잡을 수 없이 강해졌습니다. 소서러, 설마 저런 말도 안 되는 리스크를 감수할 생각입니까?」
“걱정하지 마! 이 세계가 너를 전력으로 도울 거야.”
「이 세계가 엘리트들에 의해 얼마나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왔는지 잘 알 겁니다!」
요토스가 내 쪽으로 피리를 내밀었다. 팔을 뻗으면 닿을 거리였다.
「대체 무엇을 망설입니까? 이제 남은 엘리트도 한 명뿐이고, 곧 당신이 원하는 모든 걸 이룰 수 있는데.」
내가 원하는 것?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파격적이다. 그럼에도 나는 망설였다. 왜 망설이는 거지? 망설일 이유가 없는데. 나는…….
“우리 함께 가자, 정철.”
요토스의 권능이 격렬하게 소용돌이쳤다.
간담이 서늘해지는 위력이었다.
크리스가 찬란한 빛을 뿜어내 그 신격을 차단했다. 잠깐 동안의 공방, 결국 온몸으로 피를 쏟은 건 크리스였다.
「하등한 필멸의 힘으로 어딜 덤비는 겁니까? 소서러, 잘 봐두세요. 저들이 얼마나 나약한지를. 그리고 계약 사항을 위반하면 어떤 결과가 닥칠지 말해두었을 터입니다!」
크리스의 빛은 요토스에게 점차 밀려가고 있었다.
요토스의 힘은 과연 절대적.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 크리스가 내 손에 깍지를 껴 맞췄다. 피에 젖은 입으로 내게 미소를 지었다.
“나 역시 널 전력으로 도울 거야. 늘 그래왔듯이.”
“왜 나지? 왜 하필…….”
“이 세계를 구할 수 있는 건 너뿐이니까.”
“나는 엘리트 플레이어─”
“─너는 내게 세계의 빛을 보여주었어. 넌 다른 랭커들과 달랐어. ‘어쩔 수 없다’고 말하면서 NPC들을 죽이는 경우는 적었지. 넌 죽이지 않은 게 아니야. 죽이지 못한 거였어!”
“아니야.”
“이 세계를, 그 사람들을 누구보다 사랑했으니까. 내 이런 모습을 보고 어떻게 된 거냐고 물었지? 바로 네 덕분이잖아! 네가 알려 줬으니까, 네가 길을 보여 줬으니까, 네가 먼저 싸워 왔으니까!”
“아니라고 했어.”
“왜 네 주위에서만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정말 모르겠어? 나도 박현수도 모두 너라는 불에 불을 이어받은 것에 불과해.”
“네가 박현수를 어떻게…….”
“슈르비엘이 말해줬어. 네가 말했잖아. NPC도 사람처럼 진심으로 대하라고. 그 가르침이 박현수가 그렇게 되게 만든 거겠고, 내가 슈르비엘을 만날 수 있도록 만들어준 거야. 정철. 네가 해야 해. 이 세계를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네가. 일곱 번의 클리어 동안 그 많은 절망을 겪고도 이 세계를 포기하지 않았던, 바로 네가.”
그 말을 끝내면서 크리스가 내 품으로 열쇠를 내밀었다.
「엘리트 소서러, 당신은 우승자가 될 자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거기서 끝나지 않고, 집행 관리자가 될 자질조차도 타고난 게 바로 당신입니다! 필멸의 몸으로 절대의 힘을 얻을 수도 있단 말입니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그러면 그 길로 인도해 드리겠습니다!」
요토스도 고함치며 내게로 피리를 내뻗었다. 빛과 어둠이 다시 한번 격렬하게 맞부딪치며 굉음을 터뜨렸다.
고민의 시간은 짧았다.
짧은 만큼 고통스러웠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한쪽 팔을 뻗어서 ‘그것’을 붙잡았다.
* * *
심연의 태풍(颱風)…… 그 기류에 휘말린 모든 것이 섭리로부터 연결 고리를 잃어버리고 만다.
늙은 것은 어려지고.
어린 것은 늙어지며.
낡은 것은 새로워지고.
새로웠던 것은 낡아진다.
아르츠레히드를 비롯한 영목 기사 몇몇이 백발의 노인이 되어 땅바닥을 기어 다녔다.
“안 돼…….”
몇몇은 젖먹이가 되었는데 또 몇은 태내의 핏덩이가 되어 땅바닥에서 꿈틀거리다가 죽었다.
“……아, 안 돼에에에에!”
정철이 답답하다는 동작으로 투구를 벗어 내던졌다.
늑대가 아가리를 벌린 형상의 투구가 사라진 자리로, 심연에 찌든 이목구비가 드러난다.
칠흑의 더벅머리 아래, 눈동자가 외우주의 별빛으로 매섭게 빛난다. 밤하늘에서 홀로 빛나는 새벽별처럼.
그 무감정한 눈빛에는 인간성의 자취조차 없었다.
[슈르비엘 : 이, 이건…… 요, 요토스와 똑같은 절대 심연……? 조, 조심해…… 요, 요토스의 힘은 시간 자체를 멈출 수 있어……!]갑주에 이식된 대천사 슈르비엘의 의식이 말을 걸어왔을 때는 이미 정철의 모습이 사라진 뒤였다.
시간이 멈추어진 것처럼.
그리고 거짓말처럼, 바로 등 뒤에서 나타나면서 살기(殺氣)를 폭발적으로 방출한다.
시공간의 착란.
이는 절대 심연의 권위.
그 공격을 간신히 쳐낼 수 있었던 건, 슈르비엘이 일순간 육신의 통제권을 빼앗아간 덕분이었다.
퍼어어어어엉─────!
빛의 망치와 타락의 칼날이 격돌했다. 옆구리 깊숙이 스며든 칼날을 간신히 쳐냈으나…….
[슈르비엘 : 위, 위험해…… 심연이 몸과 영혼으로 순식간에 퍼지고 있어.]크리스가 피를 토하며 한쪽 무릎을 꿇고, 칼날이 들어갔다 빠져나간 곳을 짚었다.
몸의 상태가 이상하다.
살점이 태아처럼 기괴하게 쭈글쭈글해지거나 노인처럼 주름이 자글자글해지고 있었다.
그 앞으로 정철이 다가온다.
일전의 광견 같은 통제 불가 상태가 아니라, 지극히 여유로운…… 어쩌면 우아하기까지 한 귀족적 몸놀림으로.
물론 의식이 없는 건 똑같았다.
그때, 창공에서 황룡의 일갈이 들려오더니 눈앞에서 황금빛 섬광이 폭발했다.
황룡의 숨결.
황룡 글리아륜이 매서운 속도로 급강하해 정철을 내리찍었다. 그 위에 타고 있던 바르켄데르가 소리쳤다.
“엘디아 각하, 글리아륜의 빛을 쓰겠습니다. 뒤를 맡기겠습니다!”
황룡의 몸이 찬란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눈을 뜰 수도 없도록 밝은 빛. 네이갈라스의 비명이 절정에 달해갔다.
「그대가 끝을 맺도록 하라, 슈르비엘의 딸이여!」
글리아륜의 다급한 목소리.
크리스는 글리아륜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것은 나의 선택이다. 내 선조들께서 하셨던 일이다.」
그 순간, 글리아륜의 몸이 폭발하며, 세계를 한순간 빛으로 물들였다. 심연의 폭풍도 그 빛에 바스러져 갔……어야 했다.
그러한 상황이 ‘이루어지기 직전의 시간’이 멈추었다.
멈춘 시간 속에서 글리아륜의 몸이 반으로 찢어지고, 바르켄데르는 그 육중한 날에 짓뭉개졌다.
– 글리아륜은 뇌향의 세츠넨이 자신의 파편으로 만든 딸인데, 이야기를 해보면 알겠지만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고…….
빛의 폭발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대신 피와 살점이 폭발했을 뿐.
– 글리아륜의 파트너는 바르켄데르라는 NPC거든…… 근데 둘이 70년 동안 동고동락했어.
시간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폭발하듯 흩뿌려지는 피와 근막과 뇌수의 소용돌이를, 흑기사가 칼날을 털며 똑바로 걸어온다.
– 그 둘 사이에 엮인 재밌는 이야기가 있는데.
모두, 기억하고 있는데.
네 미소와 눈물을.
그 가슴 깊숙이에 숨겨진 회한까지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지금 내 앞에 있는 저건…… 대체 누구지?’
* * *
나는 요토스의 피리 쪽으로 손을 뻗었다. 크리스가 다급히 내 팔을 잡았다.
“정철, 제발…….”
“한평생, 나는 나만을 위해 살아왔어.”
“지금 이 선택이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낳게 될지 잘 알잖아…… 이 세계가 어떤 꼴을 당해왔는지 누구보다도 잘 알잖아!”
요토스와의 동맹은 분명 파멸의 길이었다. 나의 세계도, 관리자들의 놀이판이 되겠지.
샬류안은 무슨 제목을 붙일까? <대통령을 위하여>? <총통을 위하여>?
“그리고 너, 네가, 네 몸과 마음과 영혼이 완전히……!”
안다. 하지만, 어머니의 세계는 온전할 터다. 요토스가 약속 사항을 제대로 이행한다면.
그거면 족하다.
그것이면, 족한 것이다.
“난 어찌 되어도 좋아.”
“좋지 않아!”
“내가 만약 이 세계를 구하고, 현실 세계도 구한다고 치자. 그러면 나 때문에 죽은 어머니는? 내 부족함 때문에 죽은 공대원들은? 그냥 버림받아야 하는 건가? 내가 내 마음, 내 욕심을 위해 그 선택을 내리는 그 순간 다 버려지는 거잖아.”
“정철, 네가 겪어온 상실은 정말 슬픈 일이야. 하지만, 그렇다고 권리가 생기는 건 아니잖아…….”
“무슨 권리?”
“네 실수를 되돌리기 위해, 두 세계를 지옥으로 만들 권리.”
지옥…….
왜일까, 그 말에 웃음이 나온 이유는…….
“분명 이 요토스랑 손을 잡으면 난 그 지옥이란 곳보다 더 깊은 곳에 처박혀 있겠지.”
「그런 곳은 진즉 사라졌습니다. 겔드하리아가 절 가두려고 만들었으나 허사였지요!」
“정철, 제발. 네가 다 알려줬잖아. 제1황녀 힐더가 어떤 마음으로 성배 전쟁에 임하는지, 용기사 바르켄데르와 황룡 글리아륜이 얼마나 슬픈 인연을 갖고 있는지!”
“어머니께서는 늘 말씀하곤 했어. 모든 일에는 신의 뜻이 있다고.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거라고. 그러니까 철아, 힘을 내라고.”
「이제 필멸의 감각을 버릴 때입니다, 엘리트 소서러! 인간성을 버리는 게 아니라 인간을 초월하여 신이 되는 것이죠!」
“네 덕분에 저 영웅들과 여기까지 올 수 있었어! 엘리트 아처로부터 모두를 지키고, 여기로 와서, 널 만날 수 있었다고! 그 손을 이쪽으로 돌려줘, 제발…….”
“그렇다면 어떤 신이 얼마나 대단한 뜻이 있기에, 한쪽 발목을 빼앗아간 걸까. 가진 거 하나 없는데, 어머니까지 빼앗아가야 했을까.”
「당신의 손으로, 당신이 직접 신이 되어서 모두 되찾으십시오. 내 절대 신격과 내 모든 심복들의 신격을 걸고 약속하겠습니다. 그렇게 만들어 주겠다고!」
어머니의 미소, 어머니와의 추억, 또 사쿠라이와의 약속…….
나의 무지한 행위로 잃어버렸던 그 한 줌의 행복만큼은 돌려받고 싶다.
그렇게 결심한 것인데, 방금 그렇게 결심했을 텐데, 왜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는 것인가.
“정말, 정철, 너 정말…… 이 세계를 멸망하게 만들 작정이야? 네가 그토록 사랑하던 이곳을?”
바꾸고 싶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박현수가 해왔던 것처럼, 그 모든 걸 바꾸고, 보고 싶었던 걸 보고 싶은데…….
“크리스.”
행복하겠지.
PTSD로부터 나를 보듬어 주었던 게임의 해피 엔딩에 도달하는 건. 그 대관식을 본 것만으로도 그렇게 기뻤었는데.
“이제 나는…… 나를 위해 살면 안 돼.”
나는 이제 오직 하나의 세계만을 위해 살리라.
그 세계의 이름은 김수민.
바로 내 어머니의 이름이다.
그러므로 이 세계는 멸망해야만 한다. 그 일념으로 크리스의 팔을 뿌리치고 요토스의 피리를 잡았다. 요토스가 빙긋 웃었다.
「현명한 판단이십니다, 엘리트 소서러.」
파멸의 힘이 피리를 잡은 손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갔다. 맹렬한 격통. 숨을 쉴 수조차 없었다. 형체 없는 벌레가 내장을 파먹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크리스의 상태가 이상했다.
이제는 이목구비로 피를 토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 몸 전체가 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요토스, 계약 조건입니다. 크리스는 그냥 돌려보내 주세요.”
「무슨 소리십니까, 소서러. 지금 저는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습니다. 힘의 손잡이를 쥔 건 당신이죠. 전 이제 이 세상에 간섭할 기회가 딱 한 번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요토스, 장난치지 말고……!”
그렇게 소리치려던 그때, 크리스가 몸을 질질 끌면서도 기어이 다가와 내 볼에 손을 얹었다.
“나, 너한테, 그리고 모든 사람한테…… 거짓말한 게 있어…….”
자신이 본래 엘리트 플레이어였다는 사실을 고백하려던 것이었을까.
그때 너는 웃고 있었다.
피와 고통으로 얼룩진, 슬픈 미소. 그러나 거기에 나를 원망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나 말이야…… 말은 거창하게 했지만 사실 이 세상을 구하고 싶은 게 아니야…….”
“요토스, 지금 이 짓거리를 그만두지 않으면 계약을 무효로──!”
“내가 구하고 싶은 건 말이지, 바로 너였거든…….”
뭐라고?
지금, 뭐라고 한 거지?
“미안해…… 그래도 믿어줘…… 이게 내가 너한테 한 처음이자 마지막 거짓말이라는 걸…….”
그리고 크리스의 눈에서 생기가 사라졌다.
동시에 내 가슴 떨림도 멎었다.
새하얬던 환상의 공간이 완전히 사라지고, 검푸르게 썩어가는 성도의 풍경이 다시 펼쳐진다.
크리스가 내 앞에 있었다.
샤르홀린의 칼날에 복부를 관통당한 채로, 내 몸에 기댄 채로.
“아니야…….”
머리가 새하얗게 정지된다.
뭐지?
무슨 일이 있던 거지?
“이건, 내가, 내가 한 게…….”
시체는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모든 것이,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다만 죽어서 심연에 썩어가고 있었다.
「……실로 경이로운 전투였다, 절대의 그릇이여, 이제 본좌는 그대를 결코 의심하지 않으리……!」
「……음, 허, 허…… 오랜만에……, 절대자 요토스의 위엄을……, 떠올리게 하는……, 그런 전율의 유희였다…….」
「……호, 호, 호, 보면 볼수록 탐스러운 남자로구나. 절대자처럼 시공간을 휘어잡는 힘이라…….」
단 하나 남은 건, 영목에 기대앉아 성배처럼 보이는 무언가를 끌어안고 있는 요르한 4세뿐이었다.
지극히 작고 약한 빛의 결계…….
손을 뻗어 그 결계를 허물어뜨리려는 <잊혀진 왕들>에게로 일갈을 터뜨렸다.
“권속, 권속을 어떻게 만들지?”
「으흠?」
“네놈들은 초월을 이룰 때 동료 플레이어에게 신격을 나누어줘 권속을 만든다고 했다! 그걸 어떻게 하냐고 묻고 있잖아, 이 문어 대가리 자식아!”
「음, 허, 허……, 아직 그대의 신격은 완성되지 않았다……, 지금 그 신격을 나누어 줬다간─」
“─닥치고 대답이나 해!”
슬픈데…… 가슴이 찢어질 것같이 슬픈데…….
아니, 슬퍼야 하는데…….
웃으면서 죽은 크리스를 품에 안고 있는 지금, 어떤 슬픔도, 아니, 어떤 감상조차 느껴지지 않아…….
그저, 어떻게든 슬픔을 느끼려고 발버둥 치는, 그런 방식으로나마 인간으로 남아 있으려고 몸부림치는, 나 자신만이 있을 뿐…….
나는…….
나는 이제는 정말…….
인간이란 생물이 아니게 되어버린 건가…….
「호, 호, 호, 그러면 대체 몇 명을 권속으로 만들 생각인가? 절대의 그릇아. 그 여자 하나인가?」
* * *
종말시대, 요컨대 빛이 사라진 시대가 시작되었다. 어둠과 심연만이 세계를 뒤덮는 시대.
“쿄로나 레나와프라 에이델 웨이즈 캐슬베이아 와르바르!”
“쿄로나 레나와프라 에이델 웨이즈 캐슬베이아 와르바르!”
에이델 웨이즈라는 이름은 집행의 칼날이란 뜻이었다. 요토스가 자신의 심복 에델 바이스에게 새로이 내린 이름이었다. 그 광경을 흐뭇하게 내려다보던 요토스가 입을 열었다.
「샬리, 승리가 눈앞인데 왜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느냐?」
샬류안이 바닥을 우산으로 신경질적으로 내리찍으며 말했다.
「오빠, 저걸 왜 살려둬? 난 저 썅년 싫어! 그냥 죽여버려!」
「흐음, 지금 질투하는 거냐?」
「지, 질투는 무슨! 오빠야말로 더 싫을 거 아냐! 창세신들의 찌꺼기가 잔뜩 묻은…….」
「하지만 1회차 플레이어인 주제에 다른 엘리트들과 경쟁했을 정도로 적성은 확실해. 권속으로 거듭나는 데 성공한다면 엘리트 소서러에게 큰 힘이 될 거다.」
「아, 그냥 싫어! 싫다구우우!」
억지를 부리는 샬류안의 머리를 요토스가 사랑스럽게 토닥였다.
「걱정 마라. 엘리트 소서러의 불안정성은 내가 곧 다 해결할 테니까.」
「뭐야, 인간성을 오빠가 다 가져가서 기억 소거를 하려고? 괜찮겠어? 인간성을 스스로 다 버리는 게 아니면 결국 절대(絶對) 신격을 완성하지 못할지도 모르잖아!」
「그럴지도.」
「아, 아냐, 오빠, 내가 잘못했어.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내버려둬.」
「아, 샬리. 아직도 우주의 지혜에 몽매하구나. 원래 수족이란 완벽해선 안 된다. 어딘가 결여된 게 있어야 하지. 그래야 자신의 결여를 채우기 위해 충성을 바치거든. 결코 채워질 일 없는 결여를.」
요토스가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절대 신격을 완성하지 못해도, 아니, 못하기에 비로소 집행 관리자로서 완벽한 재목이 될 거다. 배반한다 해도 신으로서의 격 차이로 나를 결코 이길 수 없을 거란 걸 알 테니. 그렇게 굴종의 관계가 형성되는 거다. 기억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