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 of the Fake Hero RAW novel - Chapter (181)
가짜 용사 이야기-181화(181/310)
#77 :
[11. 엇갈리는 운명] 빛의 계승자, 어둠의 계승자 (11)등 뒤에서 내성의 순은 장식이 도드라진 떡갈나무 문이 닫히며 절망적인 굉음을 터뜨렸다.
믿을 수가 없었다.
온갖 사선을 넘어서 간신히 도달했는데, 테르시아를 만나기는커녕 쫓겨나다시피 도시를 떠나야 하는 형편이라니……?
‘정철, 발레린……, 지금 당신들은…….’
미래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아 컴컴했다. 현수를 기다리고 있을 정철과 발레린과 성도의 모두를 볼 면목이 없었다.
“고개를 들어라.”
샬롯이 현수의 어깨를 잡으며 그렇게 말했다.
“너는 잘못한 게 없다. 어깨를 펴고 당당히 걸어라. 왜 죄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냔 말이다.”
하지만 샬롯의 손도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심야였다. 현수 일행은 내쫓기듯 왕궁을 떠나야 했다.
뒤쪽에서 왕궁 내성의 성문이 닫혔을 때에야, 신태엽이 위로하듯 말했다.
“……사실, 이렇게 될 것 같기는 했어. 요정들 특, 답도 없이 고지식함. 철이 형아가 여기 왔어도 아무것도 못 했을걸.”
“아무고또 모태떠요!”
“그래, 아무것도 못 했어.”
신태엽이 스케사리랑 키득거리자 크세리니아가 말했다.
“실력 행사를 하는 것도 생각해보는 게 좋겠는걸.”
“실력 행사?”
“우리는 타르키리텐에 도착한 이후 요정들의 사정을 아주 열심히 배려해줬어. 하지만 녀석들은 어땠지? 지금도 로우가 엘리트 아처와 싸우고 있을 텐데 마냥 기다리는 건 내 성미에 안 맞아.”
실력 행사…… 마른침이 넘어갔다.
또 그때처럼, 그때 첫 퀘스트처럼, 생명체끼리 죽이고 또 죽여야 하는 건가.
샬롯도 그것만큼은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다급히 물었다.
“발레린 왕제는 분명 <온 것들>이 너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했다. 어디에 있는지 말은 안 해줬나?”
“네, 그분이 절 기다리고 있으니 타르키리텐을 찾아가면 된다는 식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종교적인 성지를 돌아보는 편이 좋겠어요. 타르키리텐은 태곳적의 성지가 상당히 많아. 거울의 사당이나 월희전(月熙殿) 같은…….”
그때였다.
“하지만 현재 타르키리텐은 심야 통행이 엄격히 금지되고 있기도 하지요. 그러니 지금은 모든 걸 내려놓고 편히 쉬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형제님.”
모두가 화들짝 놀라며 소리의 진원지를 돌아보았다.
등불이 보였다.
그리고 그 등불 위로 자루를 쥔 발론이 빙그레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때 그는 왕족이라기보다는 순진한 목동 소년처럼 보였다.
“미안합니다. 음울한 표정을 보니 잘 되지 않으신 것 같군요.”
“발론 대군, 무슨 일이지?”
“딱히 머무르실 곳이 없으시다면, 제가 여러분들께 식사와 잠자리를 대접하고 싶습니다.”
현수가 두 눈을 커다랗게 떴다가 이내 시선을 내리깔았다.
“마음은 감사하지만 지금 저희에게는 시간이…….”
“모든 일에는 이루어지도록 정해진 때가 있으며, 그것은 사람이 원하는 때가 아니라 오직 빛이 원하는 때에 성립한다.”
“잠언 8장 17절.”
발론의 말을 샬롯이 받았다.
발론이 고요한 미소를 지었다.
“약속하지요. 타르키리텐을 불바다로 만들고 이 힘없고 가냘픈 이들을 학살하는 것보다는 절 따라오는 것이 더 시간을 절약하는 방도가 될 것입니다. 따라오시지요.”
크세리니아가 눈을 가늘게 떴다.
“무례를 무릅쓰고 질문할게요, 발론 왕제. 왜 우리를 그렇게까지 도와주죠? 발레린 때문에?”
“그렇게 거창한 이유가 아닙니다.”
발론의 미소는 진실로 따스했다.
“그저 물을 주셨던 답례를 하고 싶을 뿐이지요.”
“물 한 잔으로는 설명되지 못할 친절을 베풀고 있는데요.”
“풍요의 시기에 주었던 물이라면 자매님의 말씀이 맞을 겁니다. 하지만 그때 그 피난의 행렬 속에서 물 한 잔의 가치는 정말 어마어마했습니다. 그 상황에서 형제님께서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물을 모두 내어주셨던 겁니다. 요컨대 그 물은 어떤 금은보화보다도 값지다는 것이었지요.”
발론은 발데마르와 발레린과는 다른 품위를 가진 왕족이었다. 언행으로 주위를 압도하는 게 아니라 따스하게 물들이는…….
“매형, 따라가자.”
신태엽의 판단이었다. <황녀를 위하여>에서, 이런 거물급 NPC가 도움을 주는 일은 흔치 않다.
그리고 그런 도움은 반드시 메인 퀘스트 또는 히든 퀘스트로 직결되고는 했다.
그러므로 이게 정답이다. 정철이 있었어도 이 길을 선택했을 거다.
“뉴비니까 고인 물 말 들어.”
결국 일행은 발론을 따라, 밤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밤거리는 낮처럼 밝았다. 초미래적인 전조등들이 길 양옆으로 늘어서 있는 덕분이었다. 현수가 물었다.
“발론, 당신은…… 성직자가 아닙니까?”
“부족한 몸입니다만, 맞습니다. 왜 물으시는지요?”
“저희를 증오하시지 않는 겁니까?”
인간에게 적대심을 품지 않은 요정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성도에 거주하던 요정들만 제외하면 말이다. 발론이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
“우선, 오늘 낮에 제 형제들이 당신에게 보였던 만행을 용서해줄 것을 청하겠습니다.”
“아, 아닙니다. 그걸 원하고 한 말도 아니고.”
“그들의 증오는 진실로 가여운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저마다 삶의 자양분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 자양분을 잃으면 살 의미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지요. 자녀를 키우는 행복, 가족과 밥상을 함께하는 기쁨…….”
왜일까, 그 말을 들은 순간, 머릿속에 바로 정철의 얼굴이 떠오른 것은.
그때, 그곳, 케슈렌다크의 어둠 속에서…… 모든 슬픔과 울음이 뒤죽박죽으로 섞여 있던 얼굴을.
정철은 사쿠라이를 심연의 제물로 바쳐 리샤르를 상대로 승리했다고 했다. 그 승리에는 과연 무엇이 남았을까?
“평화의 시기에는 저런 긍정적인 자양분이 주류를 이룹니다만, 전란의 시기에는 그렇지 못합니다. 사랑하는 자녀도 가족도 친구도 잃은 마당에 어디에서 기쁨을 얻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그래서 증오할 대상을 찾게 되는 겁니다. 굶주린 사자처럼 말입니다. 그래야만 이 끔찍한 세계에서 살아갈 수 있으니까요.”
“…….”
“그래요, 그들의 증오는 생존을 위해 선택한 수단일 뿐입니다. 악(惡)한 게 아니라 약(弱)하기 때문에. 부디 그들의 연약함을 이해해 주십시오.”
현수는 발론의 정연한 신학 논리와 어우러지는 이성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샬롯이 말했다.
“에오스 님의 가르침이로군…… 달을 섬기는 그대가 그걸 꿰고 있다니 놀라운걸.”
“모든 것이 빛일 뿐, 태양과 달을 나누어 섬기는 것은 본래 없던 일입니다. 이 분단에는 분명 심연의 수작이 있었을 겁니다. 발레린 누님께서도 그리 말씀하셨고요. 그러니 그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놀라웠다.
그러면 리암과 샤릴리온의 시대에는 이런 종교적 분단만큼은 없었단 소리가 아닌가?
두 영웅이 죽고 난 뒤로 심연은 이 세계를 다시 빼앗기 위한 작업을 해오고 있었던 것인가.
“아…… 그들의 행동에 좌절하긴 했습니다만, 원망한 적은 없습니다. 제가 묻고 싶었던 건…… 종교인들에게는 마치 인간을 미워하라는 교리가 있는 것 같던데 말입니다. 대군만큼은 이렇게 친절하신 게 의아해서 그랬습니다.”
“그런 교리는 없었습니다.”
발론이 제 허리춤을 툭 쳤다.
거기에 요정의 성서가 줄로 매달려 있었다.
“하지만 있었다 해도 따르지 않았을 겁니다.”
“예?”
“교리란 것은 본질이 사람의 뜻으로 생겨난 것입니다. 저희가 우선적으로 섬겨야 하는 건 계명이지요. <온 것들>께서는 서로를 열렬히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발론이 현수에게 미소를 보내며 이렇게 덧붙였다.
“‘요정끼리만’이 아니라, ‘서로’ 말입니다. 영웅시대의 용사 파티는 그래서 성공한 게 아닐는지요? 인간, 요정, 아인, 수인, 네 종족의 영웅들이 서로를 섬기며 또 사랑하는 가운데.”
그때쯤 저 멀리에서 웅장한 사당이 모습을 드러냈다.
진실로 몽환적인 위용이었다.
오각탑(五角塔) 5개가 오각형을 이루며 솟아올랐는데, 기둥의 면 모두가 거울이었던 것이다!
달빛과 별빛과 전조등 빛을 반사시키는 거울의 기둥들은 그 미색이 실로 찬란했다.
“마침 나왔군요. 저곳이 거울의 사당입니다. 모든 것이 5개로 통일된 건, 영웅시대 용사 파티의 다섯 일원의 빛을 상징하지요.”
“왕제께서는 저곳에서 신학을 공부하시고 계신……?”
“아니요. 거울의 사당은 신관께서 기거하시는 장소입니다. 대의회가 개최되는 곳이기도 하지요. 한낱 성사인 제게는 과분한 성역입니다.”
현수는 발론 같은 인격자가 부족하다면 누가 감히 성직에 귀의할 수 있겠냐고 묻고 싶었다.
거울의 사당은 끝없이 넓었기에, 지나쳐 가는 데에만도 엄청난 시간이 걸렸다.
대문에서는 월명교의 문장을 가진 위병들이 불침번을 서고 있었다.
안마당 쪽에서는 성직자들이 바삐 움직이며 부상자들을 이송하고 있었다. 병원 업무까지 수행하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저건 무엇입니까?”
현수는 대뜸 묻고 말았다.
다섯 탑의 중심, 그곳에 거대한 바위가 놓여 있던 것이다.
놀라운 건 바위가 아니라 바위에 꽂혀 있는 칼이었다. 바위에는 이 문구가 크게 음각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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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도 용사였고.
현재에도 용사이며.
미래에도 용사일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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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수는 저토록 아름다운 칼은 지금껏 본 적이 없었다. 중세의 장검에 미래의 영감이 담긴다면 저런 느낌일까.
반쯤 박힌 칼날은 투명하게 빛났고, 날밑은 은빛으로 빛났으며 칼자루는 금빛이었다.
영웅과 거울이라면, 가리키는 영웅은 단 1명뿐이었다. 발론은 그 검명(劍名)을 조심히 말했다.
“빛의 칼날, 베르켄시아의 모조품입니다. 영웅의 검이지요.”
저것이 베르켄시아……?
발레린이 찾으라 했던 빛의 모조품인가? 현수는 목에 걸린 회귀석을 매만져야만 했다.
확실히 달랐다. 회귀석의 빛은 비췻빛인 반면 저 베르켄시아는 달빛 같은 은빛이었다.
성직자와 피난민들이 그 칼 앞에 엎드려 울면서 기도하는 것도 보였다. 현수는 그 이유를 물었다.
“영웅시대가 끝날 때 뇌향의 세츠넨께서 예언을 남기셨습니다. 멸망의 때에 거울의 기사가 다시 나타나, 멸망의 어둠을 걷어내 줄 것이라는.”
“……300년 전의 전설이군요.”
“예언입니다. 그게 정말 전설이라 할지라도 저는 예언이라고 말할 겁니다.”
크세리니아가 눈썹을 치켰다.
“왜죠, 발론 왕제?”
“전설은 과거의 이야기로 느껴집니다만 예언은 미래를 비추는 등불과도 같기 때문입니다, 샤릴리온의 후예시여. ‘과거에 영웅이 있었다’가 아니라, ‘훗날에 영웅이 올 것이다’ 같은 느낌이란 거죠.”
그 예언을 남길 때, 뇌향의 세츠넨이라는 존재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다만 남기고 가고 싶었을까.
이 절망뿐인 세계에 희망의 빛을 한 움큼이라도 전해주고 가고 싶었을까.
현수는 처연히 시선을 내렸다.
그 희망을 움켜잡기 위해 정철과 발레린은 수백 번의 절망을 맛보아왔던 것일까.
발론은 이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도시 남쪽의 변두리에 위치한 고아원에 도착할 때까지.
주변에 민가가 하나도 없는 게 어째선지 으스스했다. 왕제가 이런 곳에 산단 게 믿어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금방 밝혀졌다.
고아원 앞에 도착하기 전부터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아이들의 웃음소리였다.
“스케사리야, 형아 무서워. 형아가 공포 게임을 잘 못해.”
“무떠워요오오?”
몇몇 아이들이 고아원 안마당에서 공놀이를 하고 몇몇은 현관에 앉아 친구들을 응원하고 있었다.
조명이라곤 현관에 매달린 등불이 전부인데, 아이들은 놀랄 만큼 잽싸게 움직였다.
일행이 안마당에 들어설 무렵, 한 아이가 기쁜 소리를 냈다.
“성사님!”
그러자 아이들이 공놀이를 마치고 일제히 달려와 발론의 다리에 안겼다.
나이는 아무리 많아봐야 열 살 정도일 터였다. 한순간에 버려진 공이 저쪽으로 굴러갔다.
“누가 이기고 있었니?”
발론은 땀투성이 아이들을 스스럼없이 쓰다듬으며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그랜의 팀이요. 그랜 형이 요즘 너무 기술이 좋아졌어요.”
“너희가 약해진 것뿐이야. 멍청이들아.”
그랜이 앞으로 나서며 툴툴거렸다. 많아봐야 열세 살 정도로 보이는 소년이었다.
“그랜, 그렇게 험하게 말할 필요가 없지 않니.”
“죄송해요, 성사님.”
현수는 이곳이 도심에서 동떨어져 있는 이유를 그제야 알았다. 아이들 중에는 요정뿐만 아니라 인간까지도 있었던 것이다.
밤에 노는 것도 비슷한 까닭 때문일 것이다.
인간이 요정들의 눈에 띄면 어떤 짓을 당할지 모르니 말이다.
“그랜, 식사 준비는 끝났니?”
“네. 방금 막 끝내고 놀던 참이었어요.”
발론의 애정 표현은 한량없었다.
발론이 그랜에게 “잘했다”라고 말하며 머리를 마구 쓰다듬어 주자, 그랜은 하지 말라며 튕겼으나 내심 기뻐하는 듯했다.
그 모습 위로 다시 한번, 자신과 혜림이의 모습이 겹쳐졌다. 그리고 정철과 사쿠라이의 모습도.
– 오빠야, 이 책 읽어봤나? 주인공이 진짜 웃긴 놈이다.
– 오빠, 오늘은 이 책 읽어봤어요! 게임 설정이 엄청 자세하게 나와 있더라고요!
가슴이 찢어지는 느낌이었다.
나도 정철도, 다시 그 순간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인가.
사쿠라이를 제물로 바칠 수밖에 없었던 정철은 지금 어떤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을까.
“그만 들어가자. 손님들께서 시장하실 테니까.”
고아원 건물은 보기보다 넓었다.
1층은 휴게실이었고 2층은 거주 구간이라고 했다.
휴게실에 둥근 식탁이 있었는데, 각 자리마다 빵과 스튜가 차려져 있었다.
“전란의 시기라 준비된 음식이 변변찮습니다.”
“아니오.”
발론의 말에 샬롯이 곧바로 나섰다.
“발론 왕제. 그대의 친절에 언젠가 반드시 보답하겠소. 지금은 인류가 하잘것없지만…… 언젠가는…….”
현수 일행은 낮부터 굶주려 있던 터라, 자리에 앉자마자 곧바로 식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정말 변변찮긴 하군.”
신태엽이 모두를 대표해 말했다.
스튜는 맛이 밍밍했고 빵은 먹다가 이빨이 부서질 것처럼 딱딱했다.
스케사리만이 위대한 용의 이빨과 턱뼈로 빵을 아예 깡그리 박살 내면서 먹을 수 있었다.
그런 모습조차 사랑스러운지, 크세리니아가 아들의 하늘빛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네 앞을 가로막는 건 모두 다 부숴버리렴.”
샬롯과 현수는 크게 당황하여 입을 떡 벌리고 신태엽을 바라보고 있었다. 신태엽이 장난스레 웃었다.
“뭘 그리 놀라고 그래? 발론 성사님? 죄송합니다만 주방 좀 쓸 수 있을까요.”
발론은 자신에게 대군이 아니라 성사라는 표현을 써준 게 고맙다는 표정이었다.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형제님?”
“제가 직접 요리를 하려고요.”
“음…… 식자재가 없습니다만. 요리를 할 줄 아십니까?”
“요리 전문 특성화 고등학교 출신이라서요.”
“특성화……?”
“여하튼 저희들에게 있는 걸로 충분해요. 아이들은 총 13명이 전부인가요?”
“오늘 2명이 더 와서, 15명입니다.”
“예압. 아 참, 그리고 주방에는 아무도 들어와서는 안 돼요. 요리에 방해가 되니까. 매형, 나 좀 도와줘.”
신태엽의 억지에 현수는 따를 수밖에 없었다.
주방은 작고 협소했지만 필요한 건 다 갖추고 있었다.
“뭘 하려는 거야, 태엽아.”
CCTV라도 찾는지 주방 곳곳을 살피던 신태엽이 씩 웃었다.
“요리.”
“무슨 요리.”
“재료가 인원수에 비해 부족해. 이럴 땐 부대찌개지.”
신태엽이 왼손으로 주먹을 쥐었다 폈다. 인터페이스를 조작한다. 그 손가락을 움직일 때마다, 음식이 난데없이 나타나 조리대에 쌓여갔다.
“햄, 고기, 소시지, 고기, 소시지, 치즈, 배추.”
“혼자서도 잘하네. 왜 나한테 도와달라고 한 거야?”
“아저씨 군인이었다며. 부대찌개 끓일 줄 알 것 같아서.”
……이래서 미필들은.
“내 병과는 취사병이 아니었어. 기동보병이었지.”
“헐.”
그래도 현수는 어릴 때부터 동생 혜림이를 챙겨온 경력이 있었다. 나름 노련한 자취 요리사를 자부하던 현수였다.
“뭐 어찌 되었든 도와줄게. 뭐부터 하면 돼?”
* * *
“……마, 맛있잖아?”
“매콤하면서도 달달해…… 이 오묘한 맛은 도대체……?”
휴게실에서 신태엽의 요리에 대한 호평이 사방에서 쏟아졌다. 신태엽은 겸연쩍게 코밑을 훑으며 이렇게 대답해 주었다.
“아아…… 이것은 <부대찌개>라고 한다. 한국의 전통 음식 김치의 풍미로 완성되는 최고의 요리지.”
신태엽은 정말 숙련된 요리사였다. 현실에서뿐만 아니라 게임에서도.
20인분가량의 부대찌개를 만들어내는 데까지 3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시간 가속》이라는 마법을 요리 과정에 적절히 섞어놓은 덕분이었다.
《물질 해체》라는 마법으로 빵을 밀가루로 분해해 라면 사리 반죽을 했고, 쌀은 순식간에 씻어내더니 《시간 가속》으로 몇 분 만에 밥을 지어냈다.
– 김치 맛은 어떻게 내려고?
현수는 중요한 사항을 지적했다고 생각했었는데, 신태엽은 고기를 썰면서 태연하게 대꾸했다.
– 환술 계열 마법을 섞을 거야. 미각에만 혼동을 주는 거지.
그 결과물은 과연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어려서부터 산해진미를 먹어왔을 황녀 샬롯조차 인정한 맛이었으니까.
“정말 맛있구나. 국은 하등한 음식 계열에 속한다고 알아왔건만…… 이 음식은 네 고향의 것이냐, 박현수?”
음식을 맛있게 먹는 아이들을 바라보던 발론의 눈에서 눈물까지 흘러내렸다.
“또 신세를 지게 되는군요. 식사를 대접하려 했는데 오히려 대접받는 셈이 되다니…….”
아이들이 음식을 감사히 먹는 건 매번 보아왔으나, 맛있게 먹는 건 참으로 오랜만이라고 발론은 덧붙였다.
현수의 목에서 회귀석이 반짝인 건 그때였다.
발론은 그 빛을 똑바로 보았다.
그 얼굴에, 처연한 미소와 이제 길을 끝마치는 자의 안타까움과 안도감이 동시에 깃들었다.
“마침내 저의 때가 왔군요.”
“예?”
“거울의 사당으로 가시죠. 그곳 지하로 말입니다. 발레린 누님께서도 자세한 내용은 이야기해 주지 않았으나 그 빛을 신호로 삼으라 했습니다.”
“발론, 지금 대체 무슨…….”
그렇다면 발레린은 살아 있는 건가?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래야 신호를 보낼 수 있을 테니까.
분명 그럴 것이었다.
그러나 발론의 목소리의 기저에 깔린 슬픔이 자꾸만 불안한 상상을 부추겼다.
“발론 왕제, 우리들이 거울의 사당으로 들어갈 수 있겠는가?”
“본래 외부인의 출입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습니다. 결정적으로 지하는 절대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지하실은 수도사와 신관들의 영역이니까요. 불법 침입은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처형으로 다스리고 있습니다.”
처형…….
현수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가을날의 밤이 지고 새벽이 익어가고 있었다. 망설일 틈은 없었다.
“도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든…… 가야 합니다.”
발론은 잠깐 동안 식탁에 놓인 그릇과 아이들을 바라보더니, 미소를 지었다.
“이 세상의 모든 인연과 우연에는 빛의 뜻이 깃들어 있으며, 그것들이 마침내 합력하여 선(善)을 이룬다고 합니다.”
발론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모든 것은 빛의 뜻대로 이루어지리니. 도와 드리겠습니다. 이제 평생 동안을 걸어온 믿음의 경주를 마칠 때가 왔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