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 of the Fake Hero RAW novel - Chapter (182)
가짜 용사 이야기-182화(182/310)
#78 :
[11. 엇갈리는 운명] 빛의 계승자, 어둠의 계승자 (12)“제게 시간을 조금만 주십시오.”
발론이 요청한 시간은 아이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는 시간이었다.
고아들을 하나씩 끌어안고는, 그 이름을 축복하며 눈물을 흘렸다.
발론이 마지막으로 고아 중에 최연장자인 소년을 불렀다.
“그랜, 만약 내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네가 이 편지를 가지고 왕궁으로 가거라. 경비대원에게 내 이름을 대면, 이 편지를 톄레한 재상(宰相)에게 건네줄 거다.”
“왜요? 왜 돌아오지 않는데요?”
“내가 늘 말해오지 않았느냐. 사람에게는 신들이 택하신 때가 있다고. 내 때가 왔구나…….”
발론의 화법은 상냥했다.
‘죽는다’라는 말은 절대 언급하지 않았다. 종교적으로 에둘러 말할 뿐이었다.
그 모습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신태엽은 입술을 깨물어야 했다.
‘절대 말 못 해.’
내가 이미 이 세상의 멸망을 한 번 보고 왔다고는.
그리고 정철이 이 <거울의 사당> 지하를 밑바닥까지 샅샅이 뒤졌었다고도.
그리고 거기 어디에서도 <온 것들>은 없었단 것까지도…….
“자, 이제 갑시다.”
시간이 촉박했으므로, 현수 일행은 곧바로 임무를 개시했다.
도심지로 들어서던 무렵, 갑자기 종이 맹렬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진에 가까운 파장이 지축을 뒤흔들었다.
소름이, 너무나도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는 소름이 현수의 전신을 뒤덮었다. 그 소름의 까닭이 저절로 입 밖으로 나왔다.
“엘리트 아처.”
엘리트 아처가 여기 왔다면…….
저 거신을 온전한 상태로 끌고 이곳에 오는 데 성공했다면, 발레린과 로헤이리츠는…….
신태엽의 외침이 그 소름 끼치는 생각을 중단시켰다.
“매형, 어서 가!”
“너는!”
“매형 앞에서 멋진 척 좀 해보려고! 제가 살아 돌아오면 이제 그만 여동생을 허락해 주십쇼!”
장난을 치고 있었으나 그 얼굴은 식은땀으로 흥건했다.
타르키리텐에는 2개의 발전소가 있다. 도시에 빛을 공급하는 <온 것들>의 유산이다.
이 발전소가 온전해야 <온 것들>의 도시 방어용 포탑들이 정상적으로 작동한다. 그걸 지켜야만 한다.
“아니야, 안 돼, 같이 가! 저놈 앞에선 지렁이랑 다를 게 없다며!”
이미 정철도 발레린도 두고 왔다. 신태엽마저 이곳에 두고 가야 한다면?
그리고 신태엽마저 죽는다면?
정철이 신태엽과 재회했을 때 어떤 미소를 지었던지는 지금도 확실히 기억하고 있다. 그 미소마저 무너지게 놔둘 순 없었다.
“가라고! <렐타론>이 몇 분 만에 초토화되던 거 잊었어?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어볼 테니, 빨리!”
흑염성(黑炎星), 레이블헤인의 권능이 천공을 새까맣게 불사르며 작열했다.
타르키리텐의 월광 결계가 눈부시게 펼쳐졌다. 외우주로부터 밀려드는 파멸의 물길에 저항했다.
달빛의 결계는 금방이라도 깨질 듯이 경련하며 명멸했다. 가냘프고, 또 가련하게.
“빠리이이이이이!”
스케사리가 맑게 짖었다.
시원한 냉기의 소용돌이 속에서 다시금 용의 형상을 입는다.
그 꼬리로 신태엽의 식은땀으로 젖은 머리를 닦아주었다. 크세리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폭식공의 전진도 둔화시킬 수 있었어요. 영웅시대에 할바론이 탑승한 거신 49식은 0식으로 개량되기 전에 폭식공에게 패배했다고도 하죠. 요약하자면 해볼 만하다는 소리니까 어서 가세요!”
* * *
현수는 달리고 달리고 또 달렸다.
광란 상태에 빠진 요정들이 어디론가 달려가고 있었다. 누군가가 짓밟히고 서로를 밀치고…….
그 과정에는 기원의 시대에 <온 것들>을 도와 <잊혀진 왕들>을 몰아냈다는 첫 번째 자손들로서의 품위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요정들이 거울의 사당에 모여들고 있다!”
샬롯이 손나팔을 만들어 외쳤다.
발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됐습니다! 경비 인력 또한 정문으로 모여들고 있겠군요!”
거울의 사당의 남서쪽에는 샛문이 존재했다.
발론이 그 위로 손을 올리자, 결계가 해제되며 문이 열렸다.
발론의 예상대로 샛문을 지키고 있어야 했을 경비병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현수가 물었다.
“어디로 가는 겁니까!”
“일단 별관을 경유해서 본관으로 이동할 겁니다!”
발론이 <거울의 사당> 별관의 뒷문을 두들기자, 기다렸다는 듯이 문이 열렸다.
문간에 한 사제가 등불을 들고 서 있었다. 그녀는 현수 일행을 재빨리 안쪽으로 끌어당긴 다음, 문을 닫고 굳게 잠갔다.
“늦었잖아!”
“곧바로 온 거야, 튜륀.”
발론이 미소를 짓자, 튜륀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튜륀은 발론보다 의장이 화려한 성복을 입고 있었다.
눈동자가 유난히 맑게 빛나는 요정이었는데, 발론에 대한 호감이 한눈에도 보였다.
“빨리 이동해야 해.”
일행은 곧바로 어두컴컴한 복도를 뛰듯이 걸었다.
양쪽 벽면으로, 기도굴이 벽감으로 늘어서 있었다.
이동하면서, 발론이 튜륀에게 나직이 속삭였다.
“내가 부탁한 건?”
“당연히 이미 준비해뒀지! 날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복도의 끝자락에 다다랐을 무렵, 튜륀이 돌연 어떤 기도실로 들어갔다. 다시 나온 튜륀은 양팔에 옷 두 벌을 안고 있었다.
“제일 큰 사이즈랑, 제일 작은 사이즈의 수사복이야. 네가 말한 그대로지? 내가 말이야. 이거 챙겨두다가 큰일 날 뻔했어. 글쎄, 홀리안 성녀가 갑자기 이유를 캐묻지 뭐야.”
“그렇구나. 덕분에 살았어. 고마워.”
“감사 인사 들으려고 한 거 아니거든? 이건 그냥 네가 불쌍해 보여서 도와준 것뿐이야.”
발론이 튜륀에게 수사복들을 건네받았다. 그러고는 큰 쪽을 현수에게, 작은 쪽은 샬롯에게 주었다.
“혼란을 틈타서 본관을 주파해야 합니다. 수사로 위장할 필요가 있어요.”
발론의 제안은 타당해 보였다.
현수와 샬롯이 성복을 몸에 걸치는 동안, 튜륀이 팔짱을 끼며 툴툴거렸다.
“인간들에게 성복을 내주는 날이 오다니…… 그나저나 발론, 정말 괜찮은 거야……? 나쁜 일에 끼어들게 된 건 아니겠지?”
발론은 그저 인자한 미소로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이 앞부터는 위험한 거 알지? 정말 고마웠어. 여기부터는 도와주지 않아도 돼.”
현수와 샬롯의 준비가 끝나자마자, 발론은 다시 앞장서서 길을 잡았다.
“사실, 영웅시대에는 저 다섯 영웅만 있던 게 아니었습니다. 삼영룡이라는 위대한 용들이 영웅들을 보좌하였다죠.”
“삼영룡?”
“그들 중 뇌향의 세츠넨께서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랑으로 어루만지고 하나로 엮으셨다고 합니다. 저도 사람의 마음을 약간이나마 들여다볼 수 있긴 하나, 저는 그분과 달리 아무것도 이루지를 못했지요.”
왜 지금 저런 말을 하는 것일까?
곧 그들은 아치형 복도를 지났다. 별관과 본관을 잇는 통로라고 했다.
혼란의 비명이 점점 가까워올 즈음, 발론이 뒤돌아서며 이렇게 경고했다.
“‘순백의 그림자’들이 중앙 계단을 지키고 있을 겁니다. 그 전에 본당을 가로질러야 합니다만, 혼란에 휩쓸리지 마시고 저만 잘 따라오셔야 합니다. 아시겠습니까?”
“혼란에 휩쓸린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본당엔 병자와 피난민들이 수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본당은 생각보다 밝은 편이라, 앞이 잘 보였다.
천장에 오각형의 채광창이 설치되어 있기 때문인 듯했다. 그럼에도 비명은 끊이지 않았다.
“시, 신들이 노하신 거야.”
“오…… <온 것들>이시여, 저희를 굽어살피소서…….”
혼란의 도가니 속에서 발론을 뒤따르던 현수의 옷소매를 누군가가 잡았다. 화들짝 놀라 돌아보니, 한 노파가 울면서 소매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수사님, 제 손녀딸 좀 찾아 주시라우……. 분명 여기 있었는디 갑자기 어둠이 깔리면서 사라져 부렸우.”
노파의 어깨 너머로는, 등불을 든 병사들이 쇳소리를 울리며 다급히 몰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노파가 목을 놓아 울기 시작했다.
“제 손녀딸 좀 찾아 주시라우. 어둠 속에서 울고 있을 거유.”
저쪽에서는 장정 하나가 아들의 이름을 목 놓아 외치고 있었다. 구석에서는 아이들이 울면서 흐느끼고 있었다.
그 순간, 샬롯이 현수를 뒤에서 밀어주지 않았더라면 그 노파에게 하루 종일 잡혀 있었을지도 모른다.
발론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가고 있었다. 이 참상을 눈에 담기 힘겨운 건지도 모른다.
정신없이 발론을 뒤따르다 보니, 현수는 어느새 중앙 계단 앞에 도착해 있었다.
중앙 계단은 나선형 계단이었는데, 참으로 크고 웅장했다. 성인 남자 10명이 지나갈 만큼 폭이 넓었던 것이다.
그 앞에 새하얀 갑주를 입은 창병 5명이 초승달 대열로 도열해 있었다.
무장이 기묘했다.
어깻죽지엔 천사의 날개 같은 장식이 솟아나 있었고, 갑주 위에는 성복을 걸치고 있던 것이다.
“멈추십시오.”
초승달 대열의 중심에 있던 여성이 소리쳤다. 동시에 창을 내밀어 발론의 앞을 가로막았다.
“심문관 라한테르! 저는 발론 성사입니다.”
현수는 심문관이 내뿜던 적의가 한순간에 누그러진 것을 느꼈다.
심문관 라한테르가 투구의 면갑을 치켜들었다.
요정의 신비한 미색을 그대로 품은 미녀, 얼굴에서 땀이 번들거리고 있었다.
“발론 대…… 성사, 중앙 계단엔 어쩐 일이십니까?”
“세례의 성수를 얻어가기 위함입니다.”
발론이 현수와 샬롯을 가리켰다.
“새로이 주님들의 자녀가 된 형제자매들입니다. 일손이 부족하여 제가 직접 물과 성령으로 세례를 주고자 하는데, 성수가 부족하기에.”
라한테르가 현수와 샬롯에게 성호를 그었다. 샬롯이 대답하듯 성호를 따라 그었다. 현수도 재빨리 그 동작을 따라 했다.
“참으로 기쁜 일입니다만, 중앙 계단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제사장의 허락이 필요합니다. 특히나 지금처럼 뒤숭숭한 시간에는 더더욱 말입니다.”
“이미 제사장님의 허락을 받아 두었습니다.”
발론이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라한테르의 눈동자의 초점이 순간 풀렸다.
“그렇군요.”
라한테르가 휘하 심문관들에게 돌아서며 길을 열라고 신호했다.
‘이렇게 쉽게?’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 현수는 라한테르의 눈동자에 새겨진 만(卍)자를 볼 수 있었다.
눈의 힘을 저렇게도 쓰는 건가?
현수 일행이 심문관들을 통과하던 그때였다. 뒤쪽에서 엄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발론 성사, 자네에게 허가증을 내려준 제사장이 누구인가?”
발론이 우뚝 멈춰 섰다.
돌아서는 그의 입술이 떨리고 있었다.
“소레가론 대제사장…….”
대제사장.
현수 역시 그 명칭에 담긴 마술적인 힘에 전율하면서 뒤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대제사장은 요정 종교계의 정점.
인간들은 그들을 대신관이라고도 불렀으나 요정들은 모두 제사장이란 명칭을 썼다. 기원의 시대 때부터 사용되어온 신성한 명칭이기에.
“내가 물었지 않는가. 자네에게 허가를 내려준 제사장이 누구인지를.”
소레가론의 첫인상은 병약한 노인에 불과했다.
성복이 발론보다도 소박했기에, 이마에 쓴 오각관(五角冠)이 아니었다면 그가 대제사장이라는 것조차도 몰랐을 터였다.
양옆으로는 심문관을 무려 10명이나 대동하고 있었다.
“대제사장님, 설명할 시간이 없습니다. 시간이 촉박합니다.”
대제사장이 껄껄 웃었다.
“자네가 사당을 더럽힐 시간 말인가, 발론?”
대제사장의 말에는 칼날이 숨어 있었다. 현수는 심장이 멎는 듯한 긴장을 느꼈다. 그 시선은 말하는 것 같았다. 나는 다 안다, 라고.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여기 온 이유는…….”
“안 그래도 그걸 물으려던 참이었네. 자네가 인간들을, 그것도 이계의 악한들을 이곳으로 몰래 끌고 들어온 이유를.”
그 말이 끝난 순간, 심문관들이 일제히 창으로 현수 일행을 겨누었다.
한순간에 포위된 형세가 되었다.
전원이 실력자들인 게 당연한지 창끝에서는 가공할 살기가 풍겨 나왔다.
발론이 결국 거짓말을 단념하고 한숨을 쉬었다.
“빛의 뜻을 이루기 위함이었습니다. 제발, 저희를 보내 주십시오.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아쉽지만 그건 안 되겠네. 자네는 ‘샤르반’이 아닌가?”
샤르반?
샬롯이 인상을 찡그리며, 현수에게 설명해 주었다.
“요정들의 종교적 언어다. 탕자를 뜻하지. 탕자란 속세에서 엄청난 죄를 지었다가 종교에 귀의한 성직자들을 일컫는다.”
……그 발론이?
대제사장이 계속 말하고 있었다.
“자네 같은 죄인은 본래 <온 것들>의 성지에 발을 들일 수 없네. 자네의 과거가 얼마나 악질이었는지는 자네 스스로가 누구보다 잘 알 텐데?”
발론이 무어라 항변을 하려고 하자 대제사장이 손을 내저었다.
“들을 것도 없다. 심문관들이여, 저들 모두를 포박해서 기도굴에 가둬라.”
심문관들이 서로의 눈치를 보며 망설이자, 대제사장이 호통쳤다.
“뭣들 하는 거냐? 왕족이라고 교리의 칼날을 피해갈 수 있는 게 아니거늘!”
심문관 1명이 하릴없이 사슬을 들고 걸어 나왔다. 현수와 샬롯은 거의 동시에 계단 쪽을 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채광창 위로 보이던 타르키리텐의 결계가 구슬프게 울며 광입자로 흩어졌다.
동시에 도시 저편이 어둠의 불꽃에 잠기며 비명이 솟구쳤다.
성벽 위에 설치된 <온 것들>의 회전 포탑들이 그 잔혹한 존재를 겨누고 광탄을 쏟아내던 혼란의 순간, 샬롯이 박현수의 허리춤에서 청강검을 빼들었다.
“가라, 박현수!”
그 검격을 창대로 받아낸 심문관 라한테르가 이를 악물었다.
“이 인간 놈이……!”
“샬롯!”
“명심해! 네가 망설이면 망설일수록 더 많은 이들이 죽는다! 신태엽과 크세리니아도! 서둘러!”
발론이 대제사장의 손길을 뿌리치며 현수에게로 고개를 끄덕인 그 순간.
화르르르르르륵……!
빛과 어둠조차 두려워 떠는 외우주의 불꽃이 거울의 사당을 휩쓸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본당 저편이 불길에 휘감기면서 순식간에 잿더미로 무너져 내렸다.
그 궤도 위에 있던 모든 이들이 사라졌고, 동시에 흑염의 피조물들이 벌 떼처럼 몰려들었다.
‘이건 무차별 폭격이 아니야…….’
엘리트 아처에게는 분명한 목표가 있었다. <렐타론> 습격 때부터 놈은 찾고 있던 것이다.
‘바로 나를.’
심문관들은 대제사장을 지키려고 그 존재들에게 맞섰으나, 외우주의 불을 베는 것은 불가능했다.
“어서…… 갑시다!”
발론이 소리쳤다. 계단을 뛰어내리면서, 현수는 식은땀을 흘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불에 숯덩이가 된 무언가…….
그 위에서 흑염의 존재가 발아(發芽)하고 있었다. 저것이 흑염성 레이블헤인의 망자인 것이다.
또한 그때 또 보였다.
본당의 폐허 한복판, 흑염의 마물들에게 집어삼켜지기 직전의 한 노파가. 손녀딸을 찾았는지 한 아이를 끌어안고 있었다.
이 또한 버리고 가야 한다고…….
사명을 위해…….
<온 것들>을 만나기 위해…….
스스로도 그럴 수 없으리란 걸 알고 있었다.
그때, 서로를 끌어안은 채 불타 죽기 직전이던 저들은 단순히 노파와 여아가 아니었다.
그들은 현수와 박혜림이었고, 정철과 사쿠라이였으며, 또 야나와 브뤼나였으며, 그리고 또 요르한 4세와 아르츠레히드였다.
그 마음이.
한때 정철이, 그 이전에 거울의 기사 리암이, 그보다도 더 이전에 <온 것들>이 품던 마음이.
창세의 신들이 세상의 대지를 펴고 궁창을 두를 때 품던 인애의 마음이, 빛을 부른다.
월천(月天).
월광의 격류가 하늘로부터 쏟아진다. 이는 창성의 달, 메이안의 기적.
세상이 찬란한 월광으로 물든다.
그 빛에 노출된 흑염의 존재들이 불꽃이 이글거리는 소리를 비명처럼 흘리며 흩어져갔다.
“이 빛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결계가 있는 성역이 있다면 그곳으로 사람들을 피난시키십시오!”
심문관들이 멍하니 현수를 바라보았다. 이제 감히 창을 겨누는 존재는 없었다.
“이건 이계의 힘이다. 우릴 현혹시키는 어둠의 빛이다! 저것들을 사로잡아라!”
오직 대제사장만이 그렇게 소리치고 있었다. 라한테르는 하얀 그림자들을 인솔해 피난민 피난 작전에 주력했다.
그 모든 희망이 짓밟혔다.
다음 순간,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우나 싶더니 본당 건물을 짓밟은 거신 0식에 의해.
엘리트 아처.
본당에 있던 모든 이들이, 영웅시대에 <잊혀진 왕들>과도 맞섰다는 폭력적인 힘에 저항조차 하지 못한 채 압사(壓死)했다.
“아, 아, 아아아아……!”
건물이 무너져 내리기 직전에, 내질러지지 않는 비명을 내지르던 박현수를 샬롯과 발론이 계단 아래로 잡아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