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 of the Fake Hero RAW novel - Chapter (183)
가짜 용사 이야기-183화(183/310)
#79 :
[11. 엇갈리는 운명] 빛의 계승자, 어둠의 계승자 (13)거울의 사당은 증축된 건물이었다.
지상 건물은 요정들이 자연을 엮은 것이나, 지하 건물은 <온 것들>이 빛으로 만들어 두었다.
이는 곧 거신 0식의 힘으로 반파된 지상과 달리, 지하는 그 압도적 폭력에 견딜 수 있단 뜻이 된다.
“여기인가?”
정신없이 계단을 내리달렸다.
붕괴하는 건축물의 잔해와 흑염의 마물들의 추격을 피하면서.
“더 내려가야 합니다!”
그때, 발론이 발을 헛디뎠다.
그대로 계단 아래쪽으로 굴러떨어졌을 것이다. 샬롯이 순간적으로 낚아채지 못했더라면 말이다.
“역시, 몸을 쓰는 일은, 저에게는 조금…… 벅차군요…….”
그렇게 지체된 틈을 레이블헤인의 하수인들은 놓치지 않았다. 현수는 움직였다. 흑염의 괴조들이 찢어지게 울었다.
“제손녀손녀손녀딸좀찾아주시라우…….”
아…….
베어야 했으나 벨 수가 없었다.
아직 인간의 목소리가 남아 있는 이 마물은…… 아까 보았던 그 노파인 것이다.
‘엘리트 아처…….’
그러나 노파는 현수를 공격하는 데 망설임이 없었다.
‘……엘리트 아처, 너 이 자식.’
비틀거리며 물러서던 현수의 오른손으로 내달려온 것이다.
“박현수!”
그때, 샬롯이 청강검을 박현수를 향해 던졌다.
박현수는 그 뜻을 이해했다.
청강검을 계단 위에 꽂은 이후 그 힘을 발현시켰다. 청강세가 장벽처럼 넓게 펼쳐지더니, 몰려드는 흑염의 진군을 막아주었다.
“얼마 못 버틸 거다! 잘해야 10초겠지. 어서 가자!”
10초조차 버티지 못하였으니 상황은 점차 최악으로 치달아갔다. 이제 세 사람은 비무장에 가까웠다. 그에 반해 흑염의 마물들은 더욱 증강되어 갔다.
“이제 다 왔습니다.”
계단은 더 이상 지하로 연결되지 않았다. 벽으로 막혀 있었다. 그래서 막다른 길처럼도 보였다. 그러나 초과학적인 윤곽이 어렴풋이 보였다.
문……?
표면에 음각 장식처럼 새겨진 것은 문의 윤곽이었던 것이다. 그 윤곽으로 빛이 흘러나왔다.
“베르켄시아의 파편을…… 여기에 꽂으십시오……! 어서……!”
발론이 숨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현수가 즉시 홈에 회귀석을 집어넣었다.
그러자 철컥…… 기계장치가 맞물리는 소리가 났다. 문이 미닫이 식으로 열리기 시작했다.
“성공이다!”
샬롯이 소리쳤다.
“아직입니다…… 달리십시오…… 다시 닫히기 시작할 테니……!”
열린 문 너머로, 3개의 문이 더 보였다. 문마다 대략 50미터 간격이었다. 그 문들도 차례로 열렸다가…… 다시 닫히기 시작했다.
“잠깐.”
문이 닫혀가던 길을 다급히 주파하던 그때, 발론이 옆에 없다는 걸 깨달았다.
“발론.”
문이 닫히고 있었다.
케슈렌다크의 어둠 속에, 그리고 렐타론의 흑염 속에 정철과 발레린을 두고 올 때의 불쾌한 감각이 기시감처럼 떠올랐다.
현수와 샬롯은 닫히는 문 이쪽에 있었고, 발론은 첫 번째 문 저편에 혼자 남아 있었다. 달빛의 결계를 통로 위아래로 펼쳐 흑염의 진군을 막아내며.
‘뛸 수 없던 건가? 왜 그렇게 말하지 않았지? 아니, 처음부터 막을 생각이었던 건가?’
현수는 뒤돌아서 달리기 시작했다. 닫히던 문들은 인기척을 확인하고는 다시 열렸다.
단 하나의 관문만 제외하고.
바로 첫 번째 관문이었다.
“빛이 되어 주십시오.”
흑염의 파도가 발론을 덮치기 직전이었다. 세계가 느려진 것처럼, 그 장면이 생생하게 들어왔다.
“그래서 이 가엾은 세상을 밝혀주세요.”
발론은, 마지막으로 눈을 감으며 미소를 지었다.
흑염이 그 육신을 불사르기 시작하던 순간, 첫 번째 관문이 육중한 충격음과 함께 닫혔다.
현수는 관성을 억제하지 못한 채 관문에 얼굴부터 처박혔다. 세계는 어둠에 잠겼다.
현수는 주먹으로 외벽을 때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
마지막으로 미소 짓던 발론은, 아이들에게 작별 인사를 건넬 때부터 이렇게 될 거란 걸 알고 있던 것일까.
이제는 질문할 대상이 없는 의문만이 난폭하게 머릿속에서 메아리쳤다.
‘아니, 아니지.’
되돌리면 된다. 회귀석을 쓰자. 발레린은 이 힘이 30분 전의 과거로 보내줄 것이라 했다.
숨을 삼키며 회귀석을 붙잡았다.
지금 여기서, 내가 내 목을 자르면, 내 심장을 박살 낸다면…….
현수는 입을 벌렸다. 혀를 깨무는 수밖에 없었다. 아무것도 없는 지금은 그게 최선이었다.
[아직 그대는 베르켄시아의 계승을 이루지 못했으므로 시간 역행의 힘을 쓸 수 없다.]현수는 심장이 크게 뛰는 걸 느꼈다. 저 너머의 어둠 속에서 순백의 인광이 번득인 것이다.
순간, 정철이 온 줄 알았다.
정철이 휘두르던 성검의 검광과 똑같은 빛이 눈앞에 나타났으니까.
“에델? 에델 씨?”
그러나 다음 순간, 조명들이 환하게 켜지기 시작하며 광활한 복도가 눈에 들어왔다.
감탄이 나올 정도로 진보적인 기술이었다.
하지만 그런 기술력도 지금 눈앞에서 움직이는 존재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다.
[동료의 선택을 욕보이지 마라. 이보다 좋은 결과는 나오기 어려울 터. 이렇게 망설이다 외우주의 사도가 <타르키리텐>을 초토화시키면 모든 것이 끝난다.]그 복도 중간에, 한 기계형 생물체가 서 있었다.
로봇이라는 말로는 그 위엄을 다 설명할 수가 없다. 지구에 존재하는 투박한 외형의 로봇과는 규격 자체가 달랐던 것이다.
샬롯은 그 존재를 이렇게 칭했다.
“……천사님?”
천사라니…….
각진 철제 두상에, 순백색 구슬 하나가 눈처럼 박혀 있는 저 모습이 천사의 모습이란 말인가? 골격은 강철 프레임처럼 보였다.
눈에 띄는 점은, 순백색 비단 망토를 의상처럼 입고 지팡이로 땅을 짚고 있단 점이었다.
그 존재가 박현수에게 절도 있게 손을 내밀었다.
[내 이름은 에누엘. 이 관리 시설의 수호자다. 테르시아 님께서 그대를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고 계신다.]* * *
[어서 이쪽으로.]자신을 에누엘이라 부른 로봇은, 현수를 복도 끝으로 인도해갔다.
로봇은 영국 신사 같은 인상을 풍겼다. 언행 하나하나에 신사도(紳士道)가 깃들어 있던 것이다.
샬롯은 에누엘이 진성검 샤릴리온의 원래 주인이라고 했다. 영웅 샤릴리온은 2대 검주였단 것이다.
‘그래서 아까 정철과 재회한 것처럼 착각한 거였나…….’
복도의 끝이 보일 무렵, 현수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테르시아 님 말고 다른 분들도 계신 겁니까?”
<온 것들>이 모두 강대한 힘을 갖고 있다니, 그 숫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을 것이다.
로봇의 두상에서 순백색 구슬이 명멸했다. 한숨을 쉬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니, 이곳에 계신 분은 테르시아 님 한 분뿐이다.]<온 것들>은 최초의 플레이어…… 몸이 노쇠했다고 해도 놀랄 일이 아니었다.
샬롯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처연한 달, 테르시아 님이 정말 계시는 겁니까?”
[그렇다.]테르시아는 베르켄시아의 첫 계승자인 동시에 <온 것들>의 지도자. 이 세계의 거주민인 샬롯으로서는 느끼는 바가 많을 것이다.
“……리암이 긴 여정을 마치고 죽었을 때, 테르시아께서 흘리신 눈물이 보석이 되었다고 한다. 그게 전설의 보물, <테르시아의 눈물>이지. 그게 어디에 있는지 실존하는지조차 모르는데, 진짜 테르시아 님이라니.”
샬롯은 흥분을 금치 못하는 것 같았다. 현수가 천사에게 말했다.
“……여긴 천사님 혼자만 계신 겁니까?”
[그리운 표현이군, 천사라……. 예전에는 더 있었다만, 모두 뿔뿔이 흩어졌고 이제는 나 하나만으로도 이곳의 가동 동력이 한계다. 그대들이 기적적으로 오늘 오지 못했더라면, 나 역시 이곳에 있지 못했을 터.]왜일까. 기적적이라는 말에, 현수가 고개를 떨구고 입술을 깨물어야 했던 이유는.
모두 발론 덕분이란 게 떠올라서였을까?
타르키리텐 입성부터 이곳에 도달하기…… 그러한데, 발론은 여기에 오지 못했다.
[여기다.]천사가 복도 끝에서 멈춰 섰다.
이곳 또한 벽면에 문의 윤곽이 숨겨져 있었다. 태양과 달이 초과학적인 기술로 음각되어 있었다.
웅…… 웅…… 웅…….
그 음각 장식에서 빛이 명멸한다. 그 빛을 바라보던 현수는 날카로운 통증에 이를 악물었다.
통증의 원인을 찾아보니, 목 언저리에서 회귀석이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회귀석의 공명…… 이 비췻빛 돌은 이제껏 보지 못했던 열기의 빛으로 진동하고 있었다.
……타르혜 론델이라고?
로봇은 분명 그렇게 말했다.
그 한순간, 음각의 빛이 푸른빛으로 뒤바뀌었다.
그에 응답하듯, 문 안쪽에서부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코드 승인 : 개문 허가.]푸쉬이이이이익……!
압축된 공기가 풀려 나가는 소리가 들리면서 문이 순식간에 개문. 동시에 눈부시도록 밝은 빛이 쏟아져 나왔다.
[안에서 테르시아 님이 기다리고 계신다…… 내 동력은…… 여……기까지……인 듯하…… ■.]천사의 목소리에 잡음이 섞이나 싶더니 이내 멎었다. 그동안 현수는 눈을 뜰 수조차 없었다. 간신히 눈을 뜨기까지 5분은 걸린 것 같았다.
“……허.”
실내의 광경이 눈에 들어온 순간, 현수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전체적으로 둥그런 방이었다.
다만 그 벽면마다 무수한 스크린들이 타일처럼 세공돼 있었다. 화면은 온 세계를 비추고 있었다.
“박현수, 저걸 봐라.”
한 화면에서는 성도 캐슬베이아.
다른 화면에서는 타르키리텐.
또 다른 화면에서는 흑염에 의해 완전히 일소된 대륙의 상황이 나오고 있었으니까.
“성도가 심연에게 공격당하고 있어.”
그리고 그 방의 중심에, 거대한 의자가 놓여 있었다. 거기에도 어떤 ‘로봇’이 눕듯이 앉아 있었다.
“왕들이 셋이나……?”
천사 로봇과 외골격은 유사했으나, 두상은 달랐다. 두상이 TV 모니터였던 것이다.
그것 말고도 기이한 부분이 있었다. 신체 구석구석에 전선이 연결되어 있던 것이다.
연결된 전선들은 천장으로 뻗어 나가서 벽면의 스크린들과 연결되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나무처럼 보였다.
“세계수……?”
샬롯도 비슷한 인상을 받은 모양이었다. SF적인 지식이 만무한 그녀였기에 표현 방식이 고풍적이었지만.
“온 세계를 굽어살피는 나무, 세계수는 청성 미른가디아와 함께 소멸했을 텐데…….”
샬롯이 그렇게 중얼거린 순간.
(^-^)
로봇의 TV 모니터에 이모티콘이 출력되었다. 이 무슨…… 현수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두려워할 건 없습니다. 제가 바로 테르시아입니다.]이상해. 말이 안 된다.
<온 것들>의 지도자이자 베르켄시아의 초대 계승자이며 심연을 토벌해 새벽을 밝힌 존재.
……그 테르시아가, 저런 로봇이었다고?
테르시아는 현수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이, 곧바로 대답했다.
[제 육신은 일찍이 한계에 달했습니다. 정신만이라도 살리기 위해, 몸을 바꿔야만 했지요.]샬롯이 혼란스럽다는 듯이 이마를 움켜잡자, 테르시아를 자칭하는 로봇이 고개를 들었다.
[샬롯, 그대에게는 이해하기 힘든 말이겠군요. 하지만 일일이 설명할 시간이 없습니다…… 과학 문명이 이곳보다 더 발달한 세계에서 온 박현수 당신이라면 이해할 수 있겠지요.]현수는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죽음을 초월하기 위해 로봇에 뇌를 이식하는 수술은 이미 지구에서 여러 번 이슈가 되었던 것이다.
그 이전에는 SF나 사이버펑크 영화 등지에서 주구장창 나오는 소재였고.
……쿠구구구구구구.
그때 땅이 거칠게 흔들리더니, 벽면의 모니터들이 꺼질 듯이 깜빡거렸다. 지상에서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설명해야 할 것들이 많습니다만, 그 전에 이것부터 말하겠습니다.]테르시아가 신체를 살짝 움직였다. 가동부가 심하게 녹슬었는지, 끔찍한 쇳소리가 났다.
[삶의 마지막에 와서, 당신들을 만날 수 있어서 진실로 기쁩니다……. 끝까지 버텨서, 살아 있길 잘했다고,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그렇게 생각합니다.]테르시아의 말은 무언가 뭉클한 데가 있었다. 발론의 미소가 떠오르는 건 왜일까…….
“테르시아 님.”
샬롯이 울먹이며 테르시아 앞에 무릎을 꿇었다.
“도와주십시오. 온 대륙이 황폐화되었고 이제는 반도까지 심연과 외우주에게 위협당하고 있습니다. 제 자매들은 모두 죽었을 것이고…….”
[제게 부탁한들 이제 저는 보시다시피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그런……?”
[하지만 당신 옆에 있는 남자라면 다르겠지요.]테르시아가 팔을 움직여, 그 누렇게 녹슨 손가락으로 현수를 가리켰다.
현수는 숨을 삼켰다.
그리고 고개를 마구 저었다.
“사실, 여기에 오면 꼭 말씀드리고 싶던 게 있습니다. 뭔가 이상합니다. 저는, 제가 선택을 받았다는 건 정말 이상합니다. 왜 발레린이 아니라 접니까? 왜 정철이 아니라 저죠? 저만큼 무력한…….”
[사람은 누구나 연약합니다. 그렇게 지음을 받았으니까요…….]“강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빛은 외면이 아니라 내면의 중심을 봅니다. 당신이 말한 이들은 마음이, 영혼이 약했기에 외우주의 광기에 마음을 내주고 말았죠. 그러나 당신은 그 속삭임 앞에서 굳건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당신이 선택받은 이유일 겁니다.]이유일 겁니다……?
화법이 이상했다. 추측이라니, 그러면 다른 존재가 현수를 선택했다는 소리가 되지 않는가.
[외우주의 속삭임에 대항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 없습니다. 그 속삭임은 ‘본성(本性)’이라는 탈을 쓰고 접근해오기 때문입니다. 이건 네 본성이야, 본성에 충실해, 위선자들에게 현혹되지 마. 이런 식으로 말이죠.]“대체 외우주란 무엇입니까.”
무엇이기에, 이 세계가 이토록 고통받아야만 하는지.
대체 얼마나 잘났기에, 세계의 멸망을 여흥으로 삼는 것인지.
발레린과 발론 같은 인물은 왜 죽어야만 했는지, 타당한 이유가 없이는 납득할 수조차 없었다.
[태초에 빛들께서 계셨습니다. 그분들을 일컬어 창세신이라 합니다. 창세의 신은 넷이라고도 하고 일곱이라고도 하는데, 넷이 맞는 말입니다. 다른 셋은 신이기는 하나 창조된 심복이었으니까요.]테르시아가 말하자, 벽면의 화면들이 하나의 화면으로 통합되었다.
[창세의 근본은 창조…… 어둠을 삼키고 빛을 만들어 내지요. 그래서 창세신들은 여러 세계를 빚어내었습니다. 이때는 외우주가 빛의 세계에 개입하지 못했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세계였을까요?]어째서일까.
테르시아의 표정 없는 얼굴에, 잠시 정철의 미소가 겹쳐지던 까닭은.
그때, 그 대관식의 날에, 현수와 함께 나누던 그 미소가.
[그 세계를 볼 때마다 참으로 좋았더라, 라고 창세신들은 그리 말씀하셨습니다만…… 거기에 연결 고리가 생기고 말았습니다.]화면에 한 여신이 비쳐졌다.
인간이 아니었고 요정도 아니었다. 단순한 빛기둥 같기도 한데…… 지구의 언어로는 그 외형을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여신이 진실로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분의 이름은 겔드하리아. 섭리의 어머니라는 이명을 가지고 계셨죠.]“섭리?”
[관장하시는 권능이 시간과 공간이기에 붙은 이명이지요. 겔드하리아께서 외우주와 분리된 시공간을 빚어내시고, 인연의 아버지 유르벨께서 경계를 그어 외우주의 접근을 차단했습니다.]겔드하리아와 유르벨은 주신.
겔드하리아는 한 마리의 늑대를 거느리고 있었다. 눈부시게 빛나는 털을 가진 늑대였는데, 풍채가 매우 고고했다.
겔드하리아가 늑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렇게 말했다.
– 요토스.
라고 속삭이자 늑대가 기분 좋은 듯이 그르렁거렸다.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겔드하리아와 요토스가 행복하게 보내는 나날들이, 화면에 계속 나타났다.
“저게 요토스…… 그러니까 그 심연의 주인이란 말입니까……?”
인간은 개를 아무리 사랑하더라도, 개를 혼인 상대로 보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종족 자체가 다르다는 것인가.
요토스는 어느 순간부턴가 겔드하리아를 멀리서만 바라보고 있었다.
겔드하리아의 옆자리를 차지한 건 창세의 주신 유르벨이었다.
“유르벨?”
[인연의 신이자 경계의 신, 엄밀히 따지자면 무신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그런 외우주의 방식으로 이분을 칭하는 건 불경입니다.]영상 속에서, 늑대는 몇백 년을 구슬피 울었다. 그 울음이 메말랐을 때, 늑대는 인간의 모습으로 몸을 바꿨다.
이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을 타고난 듯한 금발과 벽안의 미소년.
늑대였을 때의 송곳니는 대검처럼 변했다. 요토스는 자신의 체격보다도 몇 배는 큰 송곳니를 들고 겔드하리아를 찾아갔다.
겔드하리아는 요토스를 기쁘게 맞았다……. 그것이 화근이었다. 빈틈을 보인 순간, 요토스의 송곳니가 겔드하리아의 몸을 꿰뚫은 것이다.
– ……어……째서……?
–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송곳니가 겔드하리아의 가슴을 더 깊숙이 파고들었다.
–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했는데……!
요토스의 눈에서 흘러내리는 것은 눈물이었다.
“창세의 어머니가 저렇게 쉽게 죽는 게 가능합니까?”
[신들은 권능을 부려서, 핵(核) 위에 혼의 갑주를 입습니다. 그 갑주를 입고 있지 않으면…… 인간처럼 쉽게 죽는 게 신이에요.]겔드하리아의 혼이 노출되었을 때, 다시 늑대의 모습으로 변한 요토스가 겔드하리아의 핵을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테르시아가 씁쓸한 어조로 설명해 주었다.
[저것이…… 신격을 삼키는 행위랍니다. 신식(神食). 그 권능까지도 삼키게 되지요.]그렇게 요토스는 순식간에 겔드하리아의 힘을 빼앗았다.
그리고 유르벨의 심판을 피하기 위해, 겔드하리아의 권능으로 빛의 세계에 균열을 일으켜 외우주로 달아났다.
[외우주의 신들은 광기를 즐기죠. 하지만 이미 외우주는 광기로 뒤덮여 있었습니다. 그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유흥 하나 없는 따분한 세계입니다. 요토스는 그 따분함을 이용하기로 계획했죠.]요토스는 외우주의 네 절대신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 너희들에게 여흥을 제공하겠다. 창세신들이 만들어낸 세계들이 탐나지 않느냐?
겔드하리아의 신격을 삼킨 덕분인지, 요토스는 절대신들 앞에서 조금도 압도당하지 않았다.
– 천한 것, 그 대가가 무어냐?
– 나 또한 너희들과 같은 절대신의 권좌에 앉겠다.
절대신들은 그 제안을 비웃듯이 파안대소했다.
– 천한 성질은 어디로 가지 않아 두려워하는구나. 유르벨이 두려우냐?
– 너희들 또한 유르벨을 두려워할 텐데. 칼 한 자루로 너희들의 신격조차도 말살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니.
– 너에게 절대적 존재를 대하는 겸손을 가르쳐 주어야겠구나.
요토스는 겔드하리아의 권능으로 자신의 몸을 지키며 물러서지 않고 물었다.
– 너희들은 나를 해칠 수 없다. 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유르벨을 이곳으로 유도해서 너희와 싸우게 만들겠다.
– 이놈이…….
– 그만하거라, 셰라슐’토뤼악.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절대의 여흥도 이제 질리던 참이다.
– 흐흐흐흐흐…… 그래, 사나운 녀석이로구나…… 이런 것들은 보는 즐거움이 있지.
– 웃지 말고 결정해라! 내 제안을 받아들일 것이냐, 말 것이냐?
절대신들은, 끝내 요토스의 건방진 제안을 받아들였다.
과거의 이야기는 그렇게 끝났다.
화면이 천천히 꺼지더니 방 안이 어두워진 것이다.
테르시아의 설명도 그토록 허무하게 막을 내렸다.
“저게…… 답니까?”
현수의 마음도 마찬가지였다.
뭔가, 대단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왔다.
신들의 일이니까, 한 세계가 간단히 멸망해 버리는 일이니까. 당연히 인간으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 숨어 있을 거라고 생각해왔다. 그러한데…….
“신들의 여흥 때문에…… 그리고 요토스가 절대 권좌에 앉기 위해서……?”
……오로지 그것 때문에 발론은 죽은 건가? 정철은 사쿠라이를 제물로 바칠 수밖에 없던 건가? 발레린은 수천수만의 절망을 넘어와야 했던 건가……?
[신격이란 믿음이 형상화된 힘. 신자가 많을수록 증강됩니다. 한 세계를 멸망시키고, 그 세계의 망자들에게 숭배를 받으면 자신들의 힘이 강해지니까요.]헤아릴 수조차 없이 많은 사람들이 죽어왔고 또 죽어갈 이유가, 고작 이 이유 때문이라고?
“요토스, 그놈의 욕망 때문에?”
[요토스의 배틀로얄은 자신의 타락을 다른 피조물들에게 답습시키려고 하는 의도가 강합니다. 창세신들을 모독하기 위해서. 내가 욕망을 위해 타락했듯이, 너희들이 열성과 정성으로 빚은 피조물들도 나와 똑같이 타락하리라.]“그렇다면 에델 바이스의 타락도 그런…….”
[엘리트 플레이어들의 타락은 더욱 주의 깊고 섬세하게 이루어집니다. 자신의 삶에, 그리고 한 세계에 완전히 절망하게 만든 다음 이 세계로 초청하죠.]“예? 그게 무슨 소립니까. 자신의 삶에 절망하게 되다니, 그러면 그, 정철이 어머니를 잃게 되었던 이유도…….”
[네. 유르벨께서 절대신들을 압도하시고, 그들과 요토스의 힘의 경계를 긋지 않았더라면 창세의 세계는 이보다도 더 빠르게 멸망했을 겁니다.]“그렇다면 유르벨 님께선 어디 계십니까?”
샬롯이 물었다.
[저도 설명만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 이후로 종적을 감추셨다는 말만…….]현수는 고개를 들고 웃었다.
요토스의 장난에 놀아나 죄 없는 이들을 몇 명이나 죽여야 했고 또 죽게 내버려 두어야만 했던 자신의 처지가 웃겨서 웃었다.
그리고 그 장난에 오랫동안 놀아나, 이제는 희망 하나 없이, 친동생처럼 아끼던 아이조차 제물로 바쳐야 했던 정철의 처지가 가여워 웃었다.
마음속 깊이 증오했다.
냉정해 보이나 사실 누구보다도 여린 정철과 그 이전에 있던 모든 엘리트들을 바닥까지 끌어내린 요토스의 농간을.
“테르시아 님, 궁금한 게 있습니다. 어떻게 외우주의 진실을 아시게 된 겁니까? 어떤 경위로 다른 세계의 사람들을 계몽시키기 위해 노력해온 거죠? 대체 누가 그걸 알려준 건가요?”
샬롯이 물었다. 현수가 잊고 있던 질문이었다.
현수는 회귀석을 매만졌다.
뜨겁게 달아오른 회귀석은, 지금도 힘차게 명멸하고 있었다.
[…….]테르시아의 모니터가 잠시 동안 끔뻑거렸다. 1분 정도가 흐른 뒤에 테르시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긴 이야기가 될 것 같아서 말하지 않으려 했습니다만…… 다행히 카렌덴이 제때 와준 덕에 시간을 조금 더 벌었네요.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희가 어떻게 이 배틀로얄의 진실을 알게 되었는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