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 of the Fake Hero RAW novel - Chapter (184)
가짜 용사 이야기-184화(184/310)
#80 :
[11. 엇갈리는 운명] 빛의 계승자, 어둠의 계승자 (14) [그 게임은 <여신의 무덤>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습니다.]<여신의 무덤>.
<온 것들>의 세계에 어느 순간 등장해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는 게임.
특이하게도 시나리오 대부분이 ‘탐사’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고 했다.
[그 이유는, 요토스는 플레이어들로 하여금 겔드하리아 님의 흔적을 찾게끔 유도한 겁니다. 자신이 삼킨 겔드하리아 님의 혼이 완전하지 않단 걸 깨달은 거죠.]하지만 그 흔적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고, <여신의 무덤>, 즉 시론이라 불리던 이 세계는 ‘시나리오’대로 종말을 맞이했다고 한다.
겔드하리아의 흔적 따위는 없다고 판단한 요토스는 배틀로얄 계획을 본격적으로 실시한다. 그 두 번째 표적은 <온 것들>의 고향이었다.
“잠시만요. 방금 이 세계라 하셨나요?”
샬롯이 물었다.
[네, 요토스가 점거해 발라돈이라고 불리기 시작하기 이전 당신의 세계는 시론이라 불렸습니다. 겔드하리아께서 친히 거하시고 다스리시던, 진실로 아름다운 땅이었죠.]“……!”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자면, 저는 그 첫 번째 배틀로얄에서 겔드하리아 님의 흔적을 찾아냈습니다. 요토스에게 보고하지 않았을 뿐이죠.]현수는 간신히 침을 삼킨 다음, 입을 열었다.
“설마 그게…….”
[네. 바로 발레린이 당신에게 전해준 그 보석입니다.]테르시아의 녹슨 손가락이 현수를 가리켰다. 현수는 곧, 자신이 아니라 회귀석을 가리키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설명하기보다는 직접 보시는 게 빠르겠군요.]테르시아의 말에, 갑자기 회귀석이 폭발하듯 빛을 내뿜었다.
현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다시 떴을 때는 다른 세계로 와 있었다.
“테르시아 님?”
그저, 눈발만이 흩날리는 들판이었다. 테르시아도 샬롯도 사라져 있었다.
“샬롯!”
눈으로 뒤덮인 들판은 황량하였는데 이상하게도 기름진 벌판의 비린내가 났다.
‘정말 기이한 장소다.’
아니, 낯익어.
들판 곳곳에서 솟아오른 고분, 그리고 그 위에 묘비처럼 솟아오른 병장기(兵仗器).
창칼, 총포, 활…… 냉병기와 열병기를 망라한 무기들. 개중에는 듣도 보도 못 한 형태의 무기들도 있었다.
‘마치 무기의 무덤처럼 보이는 이곳은……?’
그때 발레린이 보여준 것과는 느낌이 달랐다. 그때의 그 벌판은 제한적이며 한정적인 느낌이었으나 이 공간에는 끝이 없었다. 하염없이 걷던 현수의 눈에 낯익은 무기가 들어왔다.
‘<거울의 사당>에서 보았던 칼과 거울의 방패…… 베르켄시아.’
가까이 가보았다. 멀리서 볼 때는 몰랐는데…… 베르켄시아는 평범한 칼이 아니었다.
큼직한 칼자루와 날밑에 비해, 칼날이 바늘처럼 가늘었던 것이다.
‘리암은 이걸로 싸웠단 건가?’
호기심에 베르켄시아의 칼자루를 쥐어보았다.
바로 그 순간, 아찔한 현기증을 느끼며 뒤로 물러서야 했다.
이게 무슨 일인가? 머릿속에서 누군가의 기억이 생생히 그려져 나가고 있던 것이다.
‘용사, 리암의 기억.’
반요로 핍박받던 어린 시절부터.
<온 것들>의 선택을 받고 베르켄시아의 칼자루를 쥐던 청년 시절.
최후의 전쟁을 앞두고, ‘타르혜 론델’을 목 놓아 외치던 영웅의 시절.
‘아…….’
그의 기억은 진실로 눈물겨웠다.
– 내가 지금 회귀하면, 샤릴리온을 살릴 수 있을지도 몰라.
– 내가 지금 회귀하면, 리드워즈를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 지금이라도 회귀해야 하나? 하지만 다음 세계선에서 여기까지 도착할 수 있을까…….
영웅의 업적 뒤에 숨겨진 절망의 기억들.
발레린과 정철의 삶을 통해 그것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어서일까,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현수는 손바닥을 들여다보았다.
눈물 때문에, 시야가 희뿌예서 잘 보이지 않았다. 보이지 않았지만, 손에 깃든 새로운 감각은 분명히 느껴졌다.
그리고…….
저기 저편, 새롭게 솟아난 무덤에는 한 쌍의 마도(魔道) 장갑이 놓여 있었다.
발레린의 것이었다.
저것이 뜻하는 의미는 명백했다. 박현수는 떨리는 숨을 토하며 고개를 마구 저어야 했다.
「어떤가요?」
그러다가 화들짝 놀라며 뒤돌아섰다.
언제 나타났는지, 현수의 뒤에 한 여인이 서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정신을 빼앗기게 만드는 미색의 여인이었다.
은백색의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찰랑거리고, 비취색 눈동자는 호수보다도 맑았다. 아담한 체격에 어울리는 소복 차림도 귀여웠다.
“……샬롯?”
하지만, 동시에 너무나도 낯익은 미모였다. 샬롯 칸드라군이 머리를 기르면 저 느낌일까?
「샬롯? 이거 왠지 섭섭한데요. 저는 테르시아랍니다.」
“예?”
「여긴 베르켄시아가 구현해낸 혼상세계(魂箱世界). 제 원래 모습을 투영할 수 있지요.」
테르시아가 입을 가리고 쿡쿡 웃었다.
「퉁명스러워 보이지만 당황하는 얼굴에는 어딘가 귀여운 구석이 있군요. 테르벨을 닮았어. 저를 본떠 만든 아이가 당신에게 푹 빠진 이유도 이해가 가네요.」
“본떠 만들다니……?”
「엘미네 황가는, 심연이 다시 깨어났을 때 제국이 분열되지 않고 통합되어 있게 만들려고 카렌덴이 만든 제 클론입니다.」
“클론이라고요? 아니, 잠깐, 그런데, 어라…….”
「네, 하지만 실패하고 말았죠. 오히려 계승식마다 싸움이 더 커져갔다고 하니…… 이에 대해서는 설명할 시간이 없어요. 본론으로 돌아가서, 어땠나요?」
어땠냐니?
테르시아가 방긋 웃으며 현수의 손을 가리켰다. 현수는 그제야 질문의 의미를 깨달았다.
“……리암의 검술을 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가 사용해왔던 기적도요.”
리암이 평생 동안 연마해온 검술을, 한순간에 익히는 게 어떤 원리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냥…… 느낌이었다.
「따라오시겠어요?」
현수는 테르시아와 들판을 나란히 걸었다.
테르시아는 이따금씩 어떤 무기를 가리키며, 사용자의 이름과 성격과 일생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 목소리가 너무나도 처연했다.
“그래서 저는 이곳을 ‘봉화지기의 묘지’라고 이름 붙였답니다.”
테르시아는 어떤 장봉 앞에 도달하고 나서 걸음을 멈췄다. 육척봉은 무덤의 끝처럼 보였다. 그 너머로는 어떤 무기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제 여기가 어떤 공간인지 감이 오시나요?」
“……선대 계승자들의 기억이 잠든 곳입니까?”
「기억이라기보단 의지가 형상화된 것으로 보아야 옳아요.」
“의지?”
「외우주의 농단을 끊어 내겠다는 의지. 저들의 의지는 봉화처럼 세계를 초월해가며 이어져 왔어요. 단 한 명이라도 봉화지기의 사명을 거절했더라면, 불꽃은 마지막 봉화까지 전해지지 못했을 거랍니다.」
마지막 봉화.
그러고 보니, 예전에 숨겨진 직업 <봉화지기>로 각성했다는 알림을 받았었는데.
“마지막 봉화는 언제가 되어야 오르겠습니까?”
「지금 오르고 있어요.」
테르시아가 현수의 명치를 검지로 눌렀다.
「박현수. 바로 당신이 마지막 봉화지기니까.」
“그럴 리 없습니다.”
「아뇨. 그럴 수밖에 없어요. 기억과 의지를 계승하는 일은 마지막 봉화지기만이 해낼 수 있다고 말씀하셨으니까.」
테르시아가 현수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 손을 잡아끌어 육척봉의 자루로 가져다 댔다.
“이건 뭡니까?”
“‘시작’이요.”
현수는 육척봉을 쥐었다.
육척봉은, 현수에게 테르시아의 삶을 보여주었다. 눈물과 절망으로 점철된 <온 것들>의 눈물을.
그래…… 테르시아는 최초의 회귀자였던 것이다.
요토스에 의해 멸망한 고향 세계. 요토스를 막기 위해 세계를 넘나들던 나날들.
영목의 탄생.
에오스와 헬레니아가 당신들의 목숨을 바쳐 가면서까지 심연을 봉인한 이유.
다른 <온 것들>이 <황녀를 위하여> 세계를 뒤로하고 떠난 이유도.
“왜…… 이렇게까지 한 겁니까.”
포기할 수도 있었다.
포기하지 않은 게 이상했다.
테르시아는 저 여정을 어떻게 감당해왔단 말인가?
요토스를 막기 위해 이 세계를 떠난 <온 것들>은 모두 죽었다.
창천(蒼天)의 태양 테르벨도 죽었고 핏빛 태양 슈리간도 죽었으며 창백한 달 막센시아도 고상한 달 졔안니르도 창성(昌盛)의 달 메이안도 죽은 것이다.
“대체 어떻게 버텨온 겁니까.”
저편에서 테르시아가 씁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메이안이 마지막 생존자였어요. 하지만 ‘언니, 이제 가봐야 해. 요토스가 또 시작하고 있어’라는 연락이 온 뒤로 아무런 연락이 오지 않았죠. 그때 저는 알 수 있었어요. 그 아이마저 죽어 버렸다는 걸.」
……살아남은 건, 이 세계에 남은 테르시아와, 테르시아의 친오빠, 검은 태양 카렌덴뿐이었다.
“당신에게 무슨 보상이 있다고.”
육신을 차가운 로봇으로 옮겨 가면서까지…… 무엇을 원하기에.
「그건, 당신과 같아요. 고통을 알기 때문이랍니다.」
“아니, 아닙니다. 당신의 삶은 저와 격 자체가 다릅니다!”
「과연 그럴까요? 당신은 왜 여동생을 구하려 하는 욕망을 내려놓으면서까지 이 세계를 구하려 하나요?」
“그건 모두 요토스의 농간이란 걸 알게 되어…….”
「진실을 알게 되기 전에 말이죠. 당신은 고통을 알기 때문이에요. 가족을 잃는 고통이 어떤 건지 말이죠. 겔드하리아께서는 말씀하셨어요. 오로지 고통만이, 사람을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것이라고. 고통을 알기에 타인의 고통을 배려할 수 있게 되는 거라고.」
테르시아가 뒷짐을 지고 현수 주위를 총총히 걸었다.
「고통이란 곧 인간성이에요. 창세신이 필멸체에게 내어준 무엇보다 값진 선물. 이별의 슬픔을 모른다면 만남의 소중함을 어떻게 알 수 있나요? 겨울의 추위를 모른다면 어떻게 봄의 따스함을 찬양할 수 있나요?」
테르시아가 현수의 어깨를 부드럽게 잡았다.
「절대신들은 인간성은 인간을 연약하게 만드는 불필요한 요소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아니에요. 인간성이 있었기에 사람은 강해져올 수 있었습니다. 서로를 사랑하기에, 서로의 고통을 이해하기에 함께 싸워올 수 있던 거지요.」
“……!”
「그리고 당신은, 그 인간성이 얼마나 아름다운 건지 알고 있어요. 그리고 고통을 알기에, 이 세계를 구하겠다는 마음을 품을 수 있었던 거고요.」
테르시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시작’의 광경이 눈앞에 그려졌다.
– 요토스에게서 내 핵(核)을 되찾아야만 한다, 테르시아.
겔드하리아의 파편은 소녀 테르시아에게 이렇게 말했다.
– 그 아이를, 그 아이가 가져간 나의 신격을 되찾아야만, 외우주와 이 세계의 연결 고리를 끊어낼 수 있어.
– 저는 못 해요. 어떻게 제가 절대신을 상대로…….
– 봉화를 올리렴, 테르시아. 사랑하는 빛의 딸아. 마지막 봉화지기에게까지 불꽃이 닿을 수 있게. 이것이 그 연결 고리가 되어줄 거란다.
겔드하리아는 테르시아에게 어떠한 보석을 쥐여주었다. 비췻빛 보석.
– 이것의 이름이 뭔가요? 제가 이걸 뭐라고 불러야 하나요?
현수는 눈을 떴다.
겨울의 들판은 바닥부터 눈꽃처럼 흩날리면서 사라져간다. 아직 봉화지기의 묘지 위에 있었다.
그러나 기억은 이미 모두 계승되어, 현수는 회귀석을 움켜잡으며 전율했다.
“……타르혜 론델.”
회귀석의 진짜 이름.
시간축을 뒤트는 것이 아니라, 겔드하리아의 재창조의 권능이 깃든 보석.
요토스는 그저, <온 것들>이 과학기술로 만들어낸 시간축 이동기로만 알고 있는 빛의 이름.
「그래요…… 타르혜 론델, 그건 빛의 진명(眞名)이랍니다.」
타르혜 론델을 외칠 때마다 느껴지던 가슴의 떨림이, 그것 때문이었던가.
위이잉…… 현수 주위의 방바닥이 미끄러지듯이 열렸다. 열린 지하에서부터 무언가가 올라왔다.
「미안해요. 마지막 봉화지기인 당신에게 줄 수 있는 선물은 그것뿐이네요.」
빛으로 휘황찬란한 갑주였다.
초과학으로 중세의 기사 갑주를 모방하면 비슷한 형태가 나올까?
갑주는 붉은색, 푸른색, 주황색, 보라색으로 순차적으로 명멸하였는데 그 힘 하나하나에 강대한 힘이 느껴졌다.
「세계는 이제 운명의 기로에 놓여 있습니다. 요토스를 완전히 신살하고 타르혜 론델의 힘을 되찾는 것으로 세계는 외우주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게 됩니다.」
철컥…… 철컥…….
갑주가 현수의 몸에 저절로 입혀지기 시작했다. 흉갑, 각반, 건틀릿의 순서로 입혀지면서, 체격에 맞게 사이즈까지 조절되었다.
흉갑 한가운데에서는 동력기가 무지갯빛을 토해내고, 그 동력이 갑주 곳곳으로 퍼져 나가며 빛을 흩날렸다.
초과학으로 만들어진 투구는 2040년대 한국군의 헬멧 UI보다도 더 진보된 인터페이스를 활성화시켰다.
[전투 보조 AI : 온라인.]– 메인 : 알카이오스.
– 서브 : 카듀엘.
좌측 상단에는 저러한 알림까지 떠올랐다.
「사람의 운명은 사람이 개척해 나가는 겁니다. 신들이 인과율(因果律)이라는 이름으로 정하는 것이 아니라.」
현수는 몸을 움직여 보았다.
움직임에 제한을 주는 건 없었다. 갑주는 어떤 재질보다도 단단하면서도, 깃털보다도 가벼웠다. 아무것도 안 입었다는 느낌마저 들 정도였다.
무기는 없었다.
하지만 이유를 물어볼 필요가 없었다. 그 무엇보다 잘 쓸 수 있는 무기들이 이곳에 있었으니까.
「이게 마지막 기회입니다. 저희는 요토스의 우승자들, <잊혀진 왕들>을 봉인시키는 것으로 그를 절대신의 권좌에서 끌어내렸습니다. 하지만 이번 배틀로얄이 그의 계획대로 흘러가게 된다면, 그는 다시 권좌에 오르게 되겠지요. 그리고 더 신중해질 것이 분명합니다. 세계에 내려오지 않고, 권좌에서 관망만 할지도 모르지요.」
약속해야만 했다.
이러한 희생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겠다고, 당신의 의지를 계승해 요토스를 끝장내겠다고.
그렇게 약속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걸 알면서도, 그렇게 말할 수가 없었다.
“발레린에게도 말했지만…… 저는 이 일에 어울리는 인재가 아닙니다. 그리고 제가 선택받은 건 분명 착오가 있던 겁니다.”
「그렇게 생각하나요?」
“저는 엘리트 플레이어 하나를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벅찹니다. 엘리트를 쓰러뜨리고 정철도 쓰러뜨릴 수 있겠죠. 하지만 당신도 리암도 실패했던…… 요토스를 쓰러뜨리는 건…… 아마 불가능할 겁니다.”
「박현수.」
자신이 선택받은 게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야 그 이유가 납득이 되었다.
정철이 아니었더라면 이미 몇 번이고 실패해 죽었을 텐데, 정철이 아니었더라면 NPC를 그냥 NPC로 대했을 텐데.
요컨대 정철이라는 횃대에서 타오르던 불꽃을 잠시 받은 것뿐이다. 그렇게 받았던 불꽃을 이제 돌려주어야만 한다.
“사실, 제가 아니라 그 사람이 여기 와 있었어야 합니다.”
신태엽은 말했다. 정철은 몇 번이고, 몇 번이고, 해피 엔딩을 찾기 위해 노력했었노라고.
여기 올 수 있었을 텐데.
이 배틀로얄에 들어오기 전에,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농락당하지 않았더라면, 지금 이 자리에 정철이 서 있었을 텐데.
– 현수 씨가 보게 해준 성도 퀘스트의 새로운 종장, 평생 잊지 않을 겁니다.
박현수 자신이 이곳까지 오게 된 것도 다 그 사람이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인도해준 덕분이고.
그때, 그 순간.
현수는 문득 지금 샬롯의 자리에 자신이 서 있고, 자신의 위치에 정철이 서 있는 환상을 보았다.
이건 과연 환상에 불과할까?
요토스가, 요토스 욜레 요티아토스가 그 운명을 기구하게 만들어 능욕하지 않았더라면, 그 의지와 신념을 꺾어버리지 않았더라면, 눈앞의 현실이 되어 있었을 텐데.
그리고 자신은.
흐뭇하고도 기대되는 심정으로.
결혼식에 하객으로 참가한 친구의 마음으로, 테르시아로부터 베르켄시아를 계승하는 정철을 바라보며 누구보다 기뻐했을 텐데.
그때, 대관식의 그날처럼.
그러한 미소를 주고받으며.
그 생각을 하자, 지금 자신이 이곳에 오게 된 이유를 확실히 알게 되었다. 그래, 그것 때문이구나. 현수는 입을 열었다.
“저보다 더 적합한 사람이 있어요. 그러니까 전 이 봉화의 불을 그 사람에게까지 이어주기 위해 여기 온 게 아닐까 싶군요.”
나는 무지하다.
하지만 그 사람이라면.
다른 엘리트 플레이어들을 압도하고도 남는 그 인간이라면, 심지어 요토스조차 눈독을 들였다는 그 인간이라면…….
“테르시아 님, 그 사람이 마지막 봉화를 받고 나서 모든 걸 끝내줄 겁니다. 저는 거기에 걸어보고자 해요.”
테르시아가 물었다.
「이 세계를 위해서인가요, 아니면 단지 당신의 친구를 구하기 위해서인가요?」
박현수가 힘없이 웃었다.
그때, 대관식의 날에 정철과 나누던 그 미소처럼.
“둘 다, 라고 대답하겠습니다.”
그러자 테르시아도 웃었다.
현수의 말을 비웃은 게 아니라 함께 웃어준 것이다.
「사실, 당신이 그러한 선택을 내리지 않았더라면 저는 실망했을 거예요.」
“……?”
「당신의 모든 선택은 겔드하리아 님의 섭리로부터 비롯된답니다. 그러니 그 결정은 옳을 거예요. 겔드하리아께서도 그걸 아셨기에 당신을 택하신 걸 테니까.」
그 약속은 비단 테르시아가 하는 말이 아니라는 걸 느꼈다.
모두가 보이기 시작했다.
99대 계승자인 발레린을 시작으로 2대 계승자인 리암에 이르기까지, 타르혜 론델의 봉화를 올렸던 전대 봉화지기들 모두가.
“발레린……?”
“네 길을 가라. 네가 내릴 선택조차 빛은 알고 계셨겠지. 그렇기에 널 택한 것일 거다.”
거기에 눈물로 대답하기 전에, 모든 전대 봉화지기들이 축복의 말을 건네는 중에 혼상세계가 완전히 사라졌다.
의지를 맡긴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자신들이 이루지 못한, 멸망과 회귀의 굴레를 끊어내는 걸 후대에 맡기는 건 어떤 기분일까.
당신들이 시작했던 일을, 다른 누군가가 끝마쳐주길 바라는 건 어떤 기분일까.
아직은 모른다.
하지만 곧 알게 될 것이다.
마침내 혼상세계가 완전히 사라졌는데, 테르시아의 모니터에 (^-^) 이모티콘이 떠올라 있었다.
알 수 있을 리가 없는데, 그 웃음은 어쩐지 서글프게 느껴졌다.
[이제 헤어져야 할 시간입니다. 제 역할도 수명도 이제 끝났습니다, 박현수. 당신의 뜻이 마지막이자 시작이 될 것입니다. 진정한 빛의 시대를 여는…….]“테르시아 님.”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떠나지만, 대신 그들의 기억이 당신에게 힘과 의지를 줄 겁니다.]지이이잉…… 방의 천장이 꽃잎처럼 개문되기 시작했다. 그 위로도 문들이 열리고 또 열렸다.
무수한 문 너머로 흑염이 작열하는 밤하늘이 보이기 시작했다.
비명과 고함과 눈물의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고, 테르시아의 모니터의 밝기가 빠른 속도로 어두워져 간다.
「……카렌덴에게 안부를 전해 주시겠나요?]
“어떻게 전해드리면 되겠습니까?”
[당신의 여동생은, 마지막 순간 그 누구보다 행복했다고요…… 그리고 혼자 남겨두고 먼저 떠나서 미안하다고…….」현수는 숨을 삼켰다.
이유는 모른다. 하지만, 묘지에서 보았던 테르시아의 미소가 어렴풋이 보였던 것이다.
“……살려……주세……요…….”
그때, 다시 비명이 들려왔다.
“……엘리트 아처.”
현수는 곧바로 면갑을 닫았다.
한순간, 갑주의 견갑부에서 빛이 폭발하듯 터져 나오더니 날개로 펼쳐졌다.
[가세요. 가서, 타르혜 론델의 봉화를 올리는 겁니다. 리암이 그랬던 것처럼 당신도 할 수 있습니다. 타르혜 론델의 봉화가 오르는 순간, 이데아 곳곳에 위치한 성소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며 모든 이들이 빛 아래 결집하게 됩니다.]“……!”
[타르혜 론델, 그건 세계를 초월해가며 전해진 빛의 진명. 제가 외쳤고 거울의 용사 리암이 외쳤으며 눈물의 마법사 그라엔딜이 외쳤습니다. 이제 당신의 차례입니다. 당신이, 그 성화를 넘겨받을 차례입니다. 시작은 미약했으나 끝은 창대하리니, 당신의 성화가 전 세계를 빛으로 물들일 것입니다.]“……!”
[이제 당신이 평화의 표상이 되세요. 어둠에 빠진 이들이 당신을 보고 다시 빛으로 되돌아올 수 있도록.」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그들의 작별 인사였다. 샬롯을 품에 안고, 땅을 가볍게 박차 뛰어올랐다.
날개가 찬란한 빛을 뿜었고, 현수는 그대로 문들 사이를 통과해 밤하늘 위로 솟아올랐다.
[…….]방에 홀로 남겨진 테르시아는 그 빛을 망연히 바라보다가, 손가락을 뻗어보았다.
그러나 손가락이 빛에 닿기도 전에 테르시아의 모니터에서 빛이 사라지고 말았다.
동시에 동력을 잃은 팔이 축 늘어지다 못해 육체에서 분리되어 바닥을 나뒹굴었다.
침묵.
침묵.
침묵.
그러던 잠시 후, 갑자기 벽면의 화면들에서 메시지가 떠올랐다.
[마침내, 마지막 봉화에서 불꽃이 피어올랐어요.]누구를 향한 메시지였을까.
그건 아무도 모른다.
결국에는 벽면의 화면들에서도 빛이 사라지고 말았으니 말이다. 테르시아가 몸을 축 늘어뜨렸다. 그 이후, 그 로봇이 몸을 움직이는 일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