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 of the Fake Hero RAW novel - Chapter (187)
가짜 용사 이야기-187화(187/310)
#83 :
[11. 엇갈리는 운명] 빛의 계승자, 어둠의 계승자 (17)“……뭐 하는 거지?”
베르켄시아의 칼날은 엘리트 아처의 머리 옆에 꽂혀 있었다.
그 빛이 지극히 눈부셔서, 그는 게슴츠레하게 눈을 뜨는 게 고작이었다.
“훗, 날 가지고 놀 작정이라면 마음대로 해라…… 그런 일을 당해도 싸겠지.”
그때 여기저기서 적대적인 얼굴들이 나타났다.
“매형, 뭐 하고 있어! 어서 끝내버려! 저놈이 무슨 짓을 할지 어떻게 알고 여유를 부려!”
“그렇다, 박현수! 끝을 내라!”
“저 사도의 횡포로 살아남은 <타르키리텐>의 인구는 천 명도 채 안 돼요. 대륙은 이미 멸망했고요! 자비를 베풀 이유가 없죠.”
현수는 베르켄시아의 칼자루를 놓으며 뒤돌아섰다. 양손을 든 채 내저었다.
“죽이지 않겠습니다.”
모두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뭐?”
“무슨 소리냐, 박현수.”
“지금 장난할 때가 아니라고요!”
죽일 수가 없었다. 벨 수도 없었다.
자신의 모습이 겹쳐져서 그랬다.
정철의 모습이 겹쳐져서 그랬다.
만약 지금 자신이, 이곳에서 파울 리드를 용서하지 못한다면 정철 또한 용서할 수 없게 될 것이었다.
“파울 리드는 엘리트 플레이어입니다. 죽음은 이놈에게 있어 너무 가벼운 속죄입니다.”
“고문이라면 불 고문도 있고 얼음 고문도 있어, 매형.”
“그건 시간을 너무 헛되이 쓰는 거야.”
“그럼 어떻게 쓸 생각이지?”
“성도 캐슬베이아를 돌파할 때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겁니다. 엘리트 플레이어니까요. 리샤르나 에델 바이스처럼 공략 지식이 풍부하지 않겠습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 마, 매형! 저놈은 엘리트 플레이어라고! 외우주와 계약해서 대륙 전체를 불태우고 요정도 9할 이상을 학살한 놈이라고! 그런 놈을 어떻게 믿어! 형을 속여서 또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걸!”
“이놈이 한 짓을 용서하겠다고 하는 게 아니야. 나도 용서할 수 없어. 이놈은, 이놈은, 발레린을, 그리고 발론을…….”
“그런데 대체 왜?”
“다른 방식으로 쓰겠단 거야.”
“당신이 하고자 하는 게 이해가 가지 않는데요. 스케사리도 마찬가지일 거고요.”
크세리니아의 말과 달리 스케사리는 맑은 눈으로 현수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하기만 했다.
“태엽아, 만약 여기 누워 있는 게 정철이었다고 해도 똑같이 말했을 거야?”
“뭐? 아니, 잠깐, 그건…….”
“너도 나도, 이 튜토리얼에 들어온 이후 많은 NPC를 죽였고 또 플레이어들이 죽게 방치했지. 너도 나도 다 죄인인 거야.”
“매형이랑 나랑 저놈은 클래스 차이가 커도 너무 크잖아! 저놈은 학살을 자행했다고!”
“맞아. 하지만 난 이놈의 죽음을 조금 더 가치 있게 쓰고 싶어. 지금 성도에는 왕이 셋이나 있어. 거길 돌파하려면 엘리트 아처의 도움이 필요해. 그러고 나서 안식을 주겠어.”
모두가 반발하려던 그때.
「외우주는 이성 자체를 빼앗아 가지만 저 친구는 타르혜 론델에 노출되어 정신을 좀 차린 모양이로군.」
초월적인 인기척을 느끼고는 하나둘씩 뒤를 돌아보아만 했다.
돌아보니, 로헤이리츠가 있었다.
그런데 느낌이 이상했다. 로헤이리츠라고 하기에는 너무 차분하며 또 말에 품격까지 깃들어 있는 게 아닌가.
「외우주에 사로잡힌 자들에게는 대화가 통하지 않아. 광기가 마음과 혼을 지배하기 때문이지. 또한 힘에 대한 과신으로 거만해져서 저렇게 얌전히 기다리지도 않고. 면종복배(面從腹背)의 자세를 취하지도 않지.」
“로우……?”
「만약 인간성이 없었더라면, 저 마음에 사랑이란 게 없었더라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겠지. 사랑을 알기에 광기에 빠진다, 이것이 요토스가 타락한 이유다. 피조물들이 창세신이 아니라 자신을 닮길 원하는 이유이기도 하고.」
“로우, 너 로우 맞아? 그런 걸 어떻게 아는 거야. 칼레이브가 말해준 내용이니?”
로헤이리츠가 쓴웃음을 지었다.
「이 몸은 그 아이의 것이 맞다. 다만 잠시 빌려 쓰고 있다.」
“……빌려 쓰다니?”
「그러지 않았다면 이 시건방진 녀석을 비롯해서 모두 죽었을 거다. 길게 설명할 시간이 없군.」
모두가 경계했으나 오직 ‘시건방진 녀석’이라 불린 스케사리만이 그 곁으로 다가가 다리에 정답게 머리를 비볐다.
믿기 힘든 일이었다.
스케사리는 여태껏 로헤이리츠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었으니까.
“설명을─”
크세리니아가 깊게 따지고 들려던 그 순간, 갑자기 차원의 벽면에 금이 갔다.
거기서부터 가공할 만한 열기가 흘러들어 왔다.
동시에 잔혹한 현악기의 소리가 들려왔다. 사람의 영혼을 불사르고 삼키고 굴복시키는 불꽃의 메아리.
디링…… 디리링…… 디링…….
악령들의 울음소리가 그 현악기의 고혹적이고 소름 끼치는 떨림에 포개어지기 시작한다.
모두가 숨을 겨우 헐떡거렸다.
심장이 미친 듯이 방망이질 치다 못해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레이블헤인의 주인이 자신의 사도를 되찾으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는 거다. 룰을 깨뜨리고 이 세계에 직접적으로 개입해서라도.」
그때 오직 현수와 로헤이리츠만이, 태연하게 서 있었다.
「자네의 마지막 일을 도와주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내 소명은 이곳에서 끝날 것 같군.」
균열은 점점 더 벌어지고 있었다. 그 너머로 시커먼 죽음의 세계가 어렴풋이 보였다. 끔찍했다.
「자, 이 몸을 받게.」
로헤이리츠가 눈을 흰자위로 뒤집고는 쓰러졌다. 그 몸을 받아내던 크세리니아는 놀라고 말았다.
로헤이리츠가 서 있던 자리에, 새까만 안개가 사람의 형상으로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박현수는 놀라지 않았다.
이 광경 또한, 지켜보았으므로.
「역시 자네는 놀라지 않는군. 이미 봤나?」
“네, 바꾸려고도 했습니다만…… 모두 실패해서.”
「바꿀 수 있을 리가 없지. 자네 잘못이 아니야. 여기가 내 사명의 종착지일 뿐이지.」
안개가 씩 웃었다.
그러자 차원 바닥에서, 공허가 폭포처럼 솟아올랐다. 로헤이리츠가 다루는 것과는 위력 자체가 달랐다.
「자, 실패작들아. 창조주를 도와 일할 시간이다.」
공허의 폭포에서, 헤아릴 수조차 없는 나이트 페이스들이 꾸역꾸역 밀려 나왔다.
나이트 페이스들은 차원의 균열로 날아갔다. 그러고는, 꼬리와 팔로 서로의 몸을 엮더니 균열에 달라붙기 시작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나이트 페이스들이 벽면에 눌어붙으면서 균열을 메워가는 것이 아닌가?
“대체 당신은…… 누구죠?”
크세리니아가 물었다.
안개가 곤란한지 안경을 추켜세우는 듯한 동작을 했다.
「흠. 끝까지 말 안 하려 했지만, 말 안 했다간 네가 여기서 끝까지 죽치고 있겠지?」
“…….”
「카렌덴.」
모두가 그 말에 심장이 멍하니 정지하는 것을 느꼈다.
「이제는 로덴칼이라는 이름이 더 익숙하지만, 본명은 카렌덴이네. 이제 됐나?」
“잠깐, 검은 태양…… 카렌덴이란 거야?”
신태엽이 멍하니 중얼거리자, 샬롯이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불가능해요. 카렌덴께서는 <온 것들> 중 한 분이죠. 빛이란 말이죠. 하지만 로덴칼은 공허가 아닌가요? 정확히 말하자면 어둠에 가깝죠.”
안개는 그 말이 재밌는 듯했다.
「그렇게 느껴질 수밖에……. 공허란 내가 심연을 본떠 만든 과학 생명체들이니까. 심연은 적을 말살하기 위해 만들어진 힘, 연구해서 모방할 가치는 충분했지.」
“과학 생명체요?”
[카듀엘 : 저분의 존함은 카렌덴이 맞습니다.]갑주에 내장된 카듀엘이 그렇게 일러주었다.
[카듀엘 : 빛의 군주들 중 한 분이시죠. 저를 만드신 주인님이시기도 합니다. 로덴칼이라는 이름은 심연의 군주들로부터 정체를 숨기기 위해 만든 거지요.]……사실이라고?
머리통을 얻어맞은 듯한 충동에 정신이 얼얼했다.
“왜 이름을 숨긴 건데요?”
경황이 없었지만, 신태엽은 가장 이해할 수가 없는 부분을 물어보았다.
“검은 태양의 이름으로…… 인간과 요정을 통합하는 길이 있었을 텐데? 그러면 이렇게 일이 어렵게 풀리지 않았을 거고!”
「정면으로 나설 수 없는 이유가 있었네. 내가 완전히 힘을 잃고 사라졌다고 믿게 할 필요가 있었어.」
카렌덴이 씁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자네가 이 세계에 처음 온 순간 바로 접촉하려 했으나 요토스가 자넬 바로 다른 곳으로 옮겨 버리더군. 그때 마지막 힘을 무리하게 짜내서 현현했건만.」
처음 온 순간?
아, 설마…….
정철이 ‘버그 플레이’를 사용했던 그때를 말하는 건가?
“설마, 그 뱀들의 수호자가 당신이었던 겁니까?”
「새로이 용 군단을 만들려 한 흔적이네. 힘이 얼마 남아있지 않아서 실패하고 말았지만. 그래도 전투 병기로 설계된 만큼 자네에게 도움이 될 거야.」
레이블헤인의 흑염이 칼바람으로 휘몰아쳐 들어섰다. 고함을 치지 않고는 의사소통이 불가능할 정도로 대기가 뒤엉키기 시작했다.
「이제 결정해라, 엘리트 아처. 레이블헤인의 하수인이 되는 길을 택해 내 손에 죽을지 아니면 베르켄시아의 계승자를 도와서 싸우고 천상의 낙원에 들어가 진짜 여동생을 만날지를.」
“그딴 게 존재할 리가…….”
「존재하네.」
“보증할 수 있나?”
「보증할 수는 없으나 그렇게 들었네. 그리고 마땅히 존재해야만 해. 그렇지 않고서야 자애가 깊으신 창세신들께서 이별이라는 개념을 만들어 두셨을 리가 없어.」
그건 조언이라기보다는 스스로의 바람, 아니 기도처럼 들렸다.
간절했다.
처절했다.
그 기도에 깃든 감정의 깊이가 너무나도 깊어서,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아쉽지만 자세한 것들은 카듀엘에게 묻도록 하게. 이무기들을 다루는 법도. 카듀엘, 정보 잠금 0단계를 해제하겠다.」
[카듀엘 : 식별 코드가 필요합니다.]「식별 코드는……? 에라이, 알아서 채워 넣어라. 그것도 기억 못 하고 있을 리가 없을 테지. 그랬다간 바로 네놈의 데이터를 삭제해 버리겠다. 그리고 스케사리.」
카렌덴이 손을 뻗자, 스케사리의 몸이 순식간에 태산처럼 거대해져 가기 시작했다.
「본래 용족은 정신적 성장이 육체의 성장으로 이어지게 설계했으나, 시간이 없어서 성장을 촉진시킬 수밖에 없었다. 내 선택을 이해해다오.」
동시에 카렌덴이 공허의 회랑을 열었다. 현수 일행이 즉시 안전한 곳으로 빠져나갈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
로헤이리츠와는 격 자체가 다른 힘, 그 회랑의 건너편은 캐슬베이아에서 반나절 거리로 이어졌다.
본래라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어야 했다. 그러나 현수는 묻지 않았다. 알고 있었으니까.
– 이 균열을 없애려면 차원 자체를 소멸시켜야만 하네. 공허의 힘이면 가능하지. 그러기 위해 만들어진 생명체니까.
이 차원을 통째로 소멸시킨다면, 카렌덴도 함께 소멸하게 될 터. 검은 태양도, 테르시아처럼 자신을 희생해서 세계를 지켜내려고 하고 있었다.
– 해야만 해. 내가 여기서 물러난다면 레이블헤인이 이 세계를 집어삼킬 거고 모든 희망이 사라지게 될 테니.
가슴이 아파왔다.
그 작은 방에서, 차가운 기계 육체 안에서 현수를 기다리고 있던 테르시아가 떠올랐다.
– 나는 테르시아와는 달라. 자네들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네. 인간성? 감정? 영혼? 외우주? 창세신? 본심을 말하자면, 전부터 그 모든 것들이 지긋지긋해졌다네. 외우주에 대한 투쟁을 계속해온 건 과학적 호기심에서 비롯된 행위였을 뿐이네…… 그렇게 생각해왔어.
카렌덴이 계속 말했다.
– 그렇게 생각하려 했지. 하지만 아니었어…… 친구들이 모두 이름도 모르는 세계에서 죽었을 때 진실을 깨달았네. 나는 세계를 구하겠다는 그 바보 녀석들과 같은 꿈을 꾸면서 웃었다는 사실을 말이야.
대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그 말에 절절히 묻어나오는 고독과 슬픔과 위대한 사명의 발자취는 손댈 수 없도록 깊었다.
– 테르시아께서 안부를 전해주시라 했습니다.
이 말 또한, 하지 않았다.
카렌덴의 대답을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 곧 테리와 만나게 될 텐데, 안부를 전해줄 필요가 있나? 내가 자네의 안부를 전해주겠네.
정철은 항상 이런 싸움을 해왔던 것일까.
바꾸고 싶으나 바꿀 수 없고 바꾸어지지 않는 운명의 굴레 위에서 어떤 싸움을 해왔던 것일까.
그 모든 절망과 탄식의 끝에서 지금의 정철이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 잊지 않을 겁니다. 현수 씨가 보여준 오늘의 광경을.
그렇기에, 대신, 그 촉박한 시간 속에서, 수백 번의 고뇌 속에서 결정한 사안을 입에 올렸다.
“부탁이 있습니다, 카렌덴.”
「음?」
“신태엽, 저 아이를 지구로 돌려보내 주십시오.”
“뭐? 매형, 뭔 소리야.”
“싸움은 여기서 끝나지 않아. 나중에 정철 혼자 싸우게 될 거야.”
“지금 뭐라는 거야.”
“그때 네가 옆에서 도와줬으면 해. 여기에 남아봤자 개죽음이야. 너는 지구로 돌아가 있어.”
“개, 개소리하지 마! 여기 다 남겨두고 나만 가라고? 여기가 진짜 세계인 걸 알게 됐는데? 다 버려두고 나만 살라고? 안 가! 절대 안 간다고!”
카렌덴이 현수를 쳐다보았다.
「가능하네. 하지만 지금 내 힘만으로는 부족해. 세계선을 벗어나려면 테리의 힘이 필요하다네.」
“그렇습니까?”
“거봐! 그리고 어차피 돼도 안 간다니까!”
「하지만 자네 옆에 있는 건 테리의 클론, 저 육체의 힘을 모두 사용한다면 한 명 정도는 차원을 넘게 할 수 있겠지.」
힘을 모두 사용한다는 건…….
그 말뜻을 이해한 샬롯이 현수를 바라보며 웃었다. 그 눈빛이, 맑고 깊었다.
“그게 네 뜻이라면 기꺼이 따르겠다.”
그 미소를 바라보며, 현수 또한 부서지고 깨어지는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금방 다시, 찾으러 가겠습니다.”
신태엽이 멍하니 턱을 벌리다가 이내 소리쳤다.
“미쳤어? 샬롯을 제물로 바친다고? 아니, 엘리트 아처랑 싸우다가 다들 미쳐버린 거야? 진짜 왜 그래!”
카렌덴이 재촉했다.
「어서 결정해라. 균열을 막아낼 수 있는 시간은 이제 3분도 남지 않았으니.」
현수는 신태엽의 양어깨를 꽉 끌어안았다. 어린 날에 아버지가 자신에게 그렇게 해주던 것처럼.
“태엽아, 엘리트 아처랑 싸우면서 내가 뭘 느꼈는지 알아? 나는 절대 이 싸움을 끝낼 수 없단 거야.”
“다 같이 싸우면 되잖아! 이번에도 이겼잖아! 뭐가 무서워! 뭐가 안 되는데!”
“요토스는 엘리트 아처랑 격 자체가 달라! 나는 못 해. 현실적인 판단으로 그래! 베르켄시아의 기억 속에서 나는 봤어. 그건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적이 아니라는 걸.”
“해보지도 않았잖아! 해보지 않고 어떻게 알아!”
“그래, 하지만 정철이라면, 정철이라면 반드시 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해보지 않고도 알 것만 같더라. 난 그렇게 생각해.”
“매형, 제발 그러지 마. 여동생 결혼식에도 와야지.”
현수는 아하하, 하고 웃었다.
혜림이가 살아난다, 그리고 그 결혼식에 참석한다, 그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약속할게, 태엽아.”
“약속하지 마.”
“반드시 ‘온 세상의 새벽’을 가지고 널 만나러 가겠다고.”
“그런 약속, 하지 말라고!”
“정철과 함께 말이야. 그러니까, 그때까지 조금만 기다려줘.”
신태엽은 더 말을 잇지 못했다.
카렌덴이 손가락을 튕기자 샬롯은 그 몸이 광입자로 부서졌다. 그 입자가 새로이 엮이며 빛의 관문이 되었다.
그리고 신태엽은 혼절하는 동시에 그 관문 속으로 빨려 들어갔으므로. 관문 너머에서 너울거리는 풍경은 지구의 그것이었다.
“Shiiiiiiieeeeeeeee?”
스케사리가 신태엽이 사라진 빈자리를 멍하니 바라보다 처연히 짖기 시작했다.
크세리니아가 아들에게 그쪽으로 가지 말라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스케사리가 영문을 모르고 슬피 우는 사이에 관문은 닫히고 말았다. 바이로니카와 가이네이브가 함께 스케사리를 위로했다.
“……미쳤군.”
엘리트 아처가 몸을 간신히 일으키며 말했다.
“넌 미쳤다, 한국인!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이런 짓거리 끝에 뭐가 있다고? 뭘 안다고? 세상을 구하기 위해 소원을 포기하겠단 거냐? 위선 떨지 말라고 했잖아! 너도 소원을 위해 여기 들어왔을 뿐인데!”
“소원을 포기한 적 없습니다. 이게, 최종적으로 소원을 이루는 길이란 걸 알기 때문이지.”
어차피 요토스에게 붙어봤자 소원은 이뤄지지 않는다. 이뤄졌다는 착각, 즉 기만당하게 될 뿐.
“안다고? 그걸 어떻게 알지?”
“직감입니다.”
현수가 공허의 회랑으로 발을 내딛자, 엘리트 아처가 웃음기 하나 없는 헛웃음을 쏟아냈다.
“그 직감 하나로 엘리트 소서러에게 죽으러 가겠다고? 죽어서 뭘 어쩔 셈이냐!”
현수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죽으러 가는 게 아닙니다.”
뒤를, 엘리트 아처를 돌아보며 가슴에 손을 얹는 그 입가에는, 미소는 아니지만 분명 미소라고 할 수 있는, 그런 무언가가 피어나 있었다.
“받았던 걸 돌려주러 가는 것뿐…….”
현수는 그 말을 끝으로, 회랑 너머로 걸어갔다.
거듭해서 구슬피 짖던 스케사리가 크세리니아에게 이끌려 회랑으로 들어섰다.
차원은 격리돼 있었으나, 점차 레이블헤인의 흑염에 의해 균열이 퍼지고 그 틈새로 불길이 솟구치고 있었다. 파울 리드는 숨을 헐떡이다가 카렌덴을 돌아봤다.
“저런 미친 짓을 말리지 않고 뭘 하는 거지?”
「테리의 판단이니까. 테리의 판단은 이성에서 벗어난 적이 수없이 많았으나 틀린 적은 없었다.」
“저 뉴비 놈은 테르시아가 아니란 말이다!”
카렌덴이 피를 토했다.
이제 이 차원을 격리할 수 있는 힘에도 한계가 다가왔다는 뜻이다. 공허의 회랑이 덧없이 가물거리기 시작했다.
다시, 자신의 몸과 영혼을 잠식해오는 절대자의 목소리와 저 회랑 속에서 갈팡질팡하던 파울 리드가 입술을 짓씹으며 말했다.
“너를, 마지막 <온 것들>인 당신을 찾아다닌 적이 수도 없이 많았어. 한 번도 만나지 못했지만.”
「…….」
“묻고 싶은 것도 잔뜩 있었지. 당신을 찾으면 해피 엔딩 퀘스트가 해금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질문 하나 하기에도 시간이 없겠군.”
엘리트 아처는,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은 아픔과 슬픔과 고뇌 속에서 이렇게 물었다.
“용서받을 수 없는 짓을 한, 이런, 이딴, 나 같은 놈이…… 저놈을 도우면…… 정말 당신처럼 낙원인지 뭔지에 들어가서…… 여동생을 다시 만날 수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