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 of the Fake Hero RAW novel - Chapter (188)
가짜 용사 이야기-188화(188/310)
#84 :
[12. 이 모든 이야기의 서장] 베르켄시아 알두아리아 (1)– 지금부터 <유진 수도원> 공략전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7회차, 대륙에서의 이벤트 중 가장 인상이 깊은 건 바로 이 유진 수도원 공략전일 것이다.
중요한 시나리오는 아니다.
이데아 반도에서는 다짜고짜 켈렉─샼이 강림하는 것과는 달리 친절하게도 심연의 재림을 암시하는 이벤트지.
근데 왜 이 이벤트일까…….
아마도, 그 이벤트 속에서 너를 잘 알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 이 수도원은 석벽의 높이만 10미터. 기적의 힘으로 보호되는 성문을 시작으로 일반적인 성채보다도 견고한 방어 체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시대의 수도원은 현대 지구의 수도원과 많이 다르다.
수도원이란 하나의 공동체.
많은 재화를 보유하고 있기에 도적 떼를 대비해 군사적 방비를 갖추는 게 기본이었는데, <유진 수도원>은 그 수준이 성채와 견줄 만한 것이다.
– 하지만 이 철옹성 같은 곳에도 허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 말을 시작으로 여태껏 백 번은 넘게 성공시켜온 공략을 그대로 옮기기 시작했다.
적의 군사 배치, 약점, 주의해야 할 점, 서든데스 패턴…….
공략 설명이 끝나자 갈채가 나왔다. 이미 여러 퀘스트로 정치적 입지를 다져 놓았으므로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 질문 있습니까?
그러자 그레인 베일리가 손을 들었다.
하늘로 뛰어오르는 두 마리의 송어, 베일리 가문의 문장이 수놓인 전포를 입은 그가 헛기침을 했다.
– 아직도 믿을 수가 없군. 유진 수도원은 성인 율리아노께서 머무르는 장소이거늘. 그렇다는 말은 율리아노께서 심연에 잠식되었단 말이 아닌가?
대성인 율리아노.
성배 전쟁의 시기에 분열되는 인간을 종교로 화합시키려 했던 인물이었다.
종교 및 정치적인 입지가 상당했으며 청렴한 도덕심으로 만인의 존경을 사는 인물이었다. 그의 변절을 믿을 수 없는 건 당연했다.
– 사실입니다. 그리고 지금 공략해두지 않으면 그분의 심연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갑니다.
– 흐음…… 저곳을 공략했는데, 사실 온전한 수도원이었다면 어떻게 된다는 말이오.
– 그게 무슨 말입니까?
이 질문의 의미와 이어질 말도 다 알면서도 묻는다. 크리스가 성기사 클래스였으므로 당연히 직면해야 할 이벤트다.
– 종파가 다르니, 이 기회에 종교적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수를 쓴 것은 아닌지?
몇 장성들은 무례하다며 소리쳤지만, 몇 장성들은 동의하듯 수군거렸다.
종교적 정적이라고…….
예전에는 저 말에 발끈했었지만 이제는 헛웃음도 안 나온다. 대륙의 인류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연합하지 못한다.
– 확실히 일리가 있는 말이오.
– 서두를 필요가 어디에 있겠소? 조금 더 정보가 확실해진 다음에 진군해도 늦지 않을 터.
그때 너는 어벙하게 서 있었다.
자기 때문에 일이 뒤틀린 건 아닌지 걱정하는지 나를 걱정스레 돌아보며.
그러나 걱정할 필요 없다.
대륙의 인재풀은 대체로 쓰레기들뿐이지만 이 진영은 다르니까.
– 그만.
그때 회의석 상좌에서 ‘이 진영이 다른 이유’가 책상을 세차게 내리쳤다.
회의실에 정적이 감돌았다.
우아한 은발이 어깨 위로 곱슬거리며, 눈빛이 날카롭게 번득이는 여걸.
늘씬한 몸매 위에 자줏빛 예복을 걸쳤는데, 삼두룡 아수라가 금실로 정교하게 수놓여 있다.
그러나 이런 귀족적인 복장이 없어도, 공간을 압도해 버리는 존재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
이 여걸이 바로, 성배 전쟁의 패자(覇者)가 되는 제1황녀 힐더.
– 그레인 변경백. 그대의 신심이 투철한 건 누구나 알고 있다. 하지만 그걸 꼭 이 자리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내야만 했나?
변경백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 화, 황녀 전하. 그것이 무슨 말씀이시온지 모르겠나이다.
– 그대는 영리한 남자다. 정말 몰라서 묻는 게 아닐 터. 나는 전쟁의 논점을 신앙으로 변질시키지 말라고 한 것이다.
힐더가 탁상 위 지도의 중심을 손가락으로 집었다.
<리치랜드>.
라고 적힌 이곳은 대부분이 평야 지대였고, 엘레아노르 대하(大河)가 세 줄기로 갈라져 흐르는 비옥한 땅이었다.
– <유진 수도원>은 리치랜드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 하르바도니아에서 아쉬론의 흔적이 발견된 지금, 한시라도 빨리 제국을 규합해야만 해. 저곳을 차지해야만 한단 말이다. 리치랜드의 부흥의 구심점이자 남진(南進)의 전진기지로 쓸 수도 있지.
– 저, 전하. 수도원을 군사기지로 삼으실 거란 말입니까?
– 안 되는가?
– 종교 시설을 군사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성황(聖皇) 아누벨 1세께서 법률로 엄격히 금지하신─
– 닥쳐라!
피곤에 절어 보이던 힐더가 자리를 박차며 소리쳤다. 그레인이 헉 소리와 함께 입을 다물었다.
유순한 인상을 가진 크리스와 달리, 그녀는 위엄차도록 고고한 인상을 가진 여걸이었다.
– 누가 황법을 정하는가? 지금 이 땅 어디에서 황법이 작용하고 있는가? 온 백성이 죽어가고 있다. 망자에게 참살당하거나, <잊혀진 왕들>의 광기에 취해 미쳐간다. 혹은 다른 백성들에게 잡아먹힌다. 인육을 식량으로 삼기 위해.
힐더는 언제나 영주들을 압살했다. 아무리 황녀라도 대영주를 저렇게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될 텐데,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 전하. 현재의 환경이 처참한 것은 사실이오나, 황법마저 없어진다면 이 대륙의 기강이…….
– 누구의 백성인가? 그들 모두가 나의 백성이다. 황제는 백성의 지아비다. 나의 아들딸이 죽어가고 있는데 그깟 황법이 대수란 말이냐? 백성이 있고 법이 있는 것이거늘, 그대는 어찌 법이 우선이라는 말을 자랑스레 늘어놓고 있는가?
몇몇 제후들은 고개를 숙였고, 몇몇은 끄덕였으며, 몇몇은 전율한 눈동자로 황녀를 바라보았다.
– 부끄러운 줄 알라! 그렇다면 내 그 황법이란 걸 모두 철폐시켜 버리겠다. <아이덴>을 탈환한 뒤 제국 법전을 불태워버릴 거란 말이다. 내 뜻을 알겠느냐? 그리고 그 법전을 불태우는 과업은 공에게 하명하도록 하겠다.
힐더는 안색이 새파랗게 질려 부들부들 떠는 그레인 변경백을 외면한 채, 상좌 바로 옆자리에 앉은 남자를 불렀다.
– 대공.
– 하명하십시오, 전하.
근엄한 인상의 사내가 대답한다.
사슬 갑주 위에 백호 모피 망토를 걸친 중년인. 가슴팍에 재상(宰相)의 지위를 상징하는 삼두룡 휘장을 달고 있었다.
저 사내가 바로 영웅급 NPC, 케빈 듀렌이다.
– 공의 의견을 말하라.
– 용기사 바르켄데르 경의 정찰 보고에 따르면 남부에서 망자의 군세가 폭주하고 있다고 합니다. 동향이 심상치가 않은데, 그것이 참 오묘하다고 하옵니다.
용기사는 최전방으로 나아가 정찰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가 급히 보낸 서한이라면 그 중요도를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 자세히.
– 바르켄데르 경의 추측으로는 <잊혀진 왕들> 안리달이 깨어난 건 아닌지…….
잠깐의 침묵.
힐더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 결국 시작된 건가?
– 혹은 시작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중요한 건 이 추측성 사안이 아닙니다. 하르바도니아를 지키는 하얀 늑대들로부터도 원군 요청이 쇄도해들고 있사옵니다.
– 모두 들었나? 결론을 내려야 해……. 지금 이게 기회일지도 모른다. 함정일 수도 있겠지만.
– 그러하옵니다.
– <유진 수도원>을 확보하면, 지휘부를 리치랜드의 중심부에 둘 수 있어서 유동적인 군사 운용이 가능해질 터.
궤멸한 도시.
망자로 들끓는 섬.
서부의 레인랜드(Rainland)가 폐허로 변했다는 첩보. 세계는 미쳐가고 있었다.
– 공성 개요를 정리하여 군사작전을 준비하라. 그리고 진군할 방향과 날짜를 정하도록. 군량이 부족하니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가장 빠른 노정을 선택해야 한다는 걸 잊지 말라. 백성들의 식량을 징발하는 일은 결코 허용치 않겠다.
– 여부가 있겠나이까, 전하.
힐더의 리더십과 카리스마는 볼 때마다 놀랍다.
하지만 수백 번을 봐왔기에.
저 리더십과 카리스마로도 감당할 수 없던 세계의 파멸도 수백 번 봐왔기에, 이제는 감흥이 없어졌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 봤어? 엄청나더라! 그냥 대귀족들이 찍소리도 못 하고!
회의가 끝나고 힐더의 품위에 대해 들뜬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너에게서, 과거에 똑같이 흥분했던 내가 겹쳐지더라.
똑같이 기뻐하고.
똑같이 기대하던, 그때의 내가.
– 나도 저렇게 되고 싶어. 난 말이야. 우유부단하거든. 나도 저렇게 단호하고 또 강할 수 있었더라면…….
순간 네 얼굴에 깃드는 수심의 암흑을 볼 수 있었지만, 그걸 물어볼 용기는 없었다.
말하는 날이 오지 않길 바랐다.
그러면 나도 내 마음의 어둠을 말해야 될 수도 있었으니까. 그런 건 원치 않았다.
그리고 애초에…….
너에게서 내 모습을 겹쳐 보던 건 너무나도 무례한 행동이었을지도 모르겠다.
NPC를 사람처럼 대하면 호감도를 쌓기 좋다고 조언한 건 맞다. 그러나 넌 나와는 차원이 달랐다. 진정 모든 NPC를, 그리고 이 게임 세상을 사랑으로 대했으니까.
– 저는…… 제 손으로 엄마를 죽였어요.
성배 전쟁 시기에는 성기사 클래스도 고해성사를 받을 수 있었다. 사제들이 많이도 죽은 탓이다.
– 얼마나 힘들었니…… 또 얼마나 괴로웠고.
크리스는 지어미를 살해했다고 고백한 열두 살짜리 소년 NPC를 끌어안으며 눈물을 흘렸다.
눈물, 눈물을 말이다.
모든 것에 무덤덤해진 듯 표정조차 없던 소년은 그 눈물의 온기 속에서 결국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 평소처럼 공장에서 벽돌을 만들고 돌아온 날이었는데요…… 엄마가 제게 다짜고짜 달려들더니…… 목을 조르면서 입을 쩍 벌리더군요…… 그렇게 무서운 엄마의 얼굴은 처음이었어요…….
뒷이야기는 듣지 않아도 훤했다.
이 미쳐가는 세계에서 혈육 상잔의 비극은 흔했던 것이다.
– 그래서…… 그래서 저는, 저는요, 마당에 있던 톱으로…….
– 그만해.
– 여기가 너무 아파요…… 그때요…… 제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 아시나요……? 망설이지도 않고…… 살고 싶어서…….
똑같은 상황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었다. 들어도 또 들어도, 이런 이야기는 익숙해지지 않는다고만 생각하고.
하지만 너는 달랐다.
그러나 너는 NPC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슬픈 미소를 짓고 있었다.
– 그 기억 때문에, 그 고통이 견딜 수 없는데, 지금까지 버티고 살아와줘서 너무나도 고마워…….
– 제가 용서받을 수 있을까요?
– 지금 이렇게 고통스러워하고 있단 게 인간성이 살아서 빛나고 있다는 증거란다. 인간으로서의 존엄함이 남아 있단 증거고. 네가 해친 건 네 어머니가 아니야. 아니야. 알겠니? 네 엄마가 아니야.
고해성사를 위해 모여든 다른 사람들은 성호를 긋거나, 소년과 함께 울어주었다.
– 세상에는 여러 사람이 있네. 불 같은 사람이 있고, 물 같은 사람이 있고, 나무 같은 사람이 있지.
그걸 나와 함께 지켜보던 노장이 말했다.
오른쪽 어깨에 기대 세운 장창은 바로 그 유명한 전설급 무기 용골창, 근력 수치가 MAX가 아니면 다루지도 못한다.
이 NPC가 바로 바르켄데르.
힐더를 선택해야 하는 두 가지 이유 중 하나다(하나는 케빈 듀렌이다).
나는 그가 이런 말을 한다는 것에 놀랐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대사 스크립트인데.
– 차가운 사람, 난폭한 사람, 조용한 사람, 평범한 사람, 떠들썩한 사람. 하지만 그들 중에서 옆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사람이 있다네.
– 예?
– 나는 그런 사람을 빛 같은 사람이라 한다네. 저 친구가 바로 그런 사람이야. 세상에서 가장 희귀하지. 절대 놓치지 말게.
노장이 피식 웃으며 수염을 쓸어내렸다. 그러자 그 옆에 서 있던,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품은 금발의 숙녀가 말했다.
– 나의 어머니, 세츠넨께서는 이보다 더한 시대에 그런 인물이 되셨었지. 정말 내가 너무나도 보잘것없게 느껴지는구나.
이 용인이 바로 황룡 글리아륜.
반도에 빙룡 스케사리가 있다면, 대륙에는 황룡 글리아륜이 있었다.
스케사리는 애송이지만 용으로서의 격이 높고, 글리아륜은 격은 낮으나 온갖 상황에 숙련된 달인이란 차이가 있다.
– 그럼 더 노력을 하면 되는 것 아닌가.
– 나이가 80이 넘으니 꼰대가 되었구나, 바르켄데르.
– 그대의 나이는 이제 300을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누가 누구더러 꼰대라 하는 건지 원.
바르켄데르와 글리아륜이 시답잖은 말장난을 나누며 웃었다.
이래서 기억에 남는 건가.
보고 싶었으나 보지 못했던 풍경을 볼 수 있었기에, 너는 내 기억에 이렇게도 선명한 흔적을 남겨놓을 수 있는 것일까.
선명해서.
저토록 선명하다 못해 눈부셔서.
떠올릴 때마다 이토록 눈시울이 야릇해지고 또 눈물겨울 수 있는 것일까.
– 너는 어떤 NPC가 제일 좋아?
언젠가, 네가 그렇게 물은 적이 있었다.
그 대답을 줄 수 있을 때까지 꽤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게 어느 정도였냐면, 아마 7회차 엔딩을 보기 직전이었을 것이다.
– 샤릴리온.
– 샤릴리온? 그…… 영웅시대의?
– 요정 진영에 리암이 있다면, 인류 진영의 대영웅은 바로 샤릴리온이지.
그가 좋았다. 아이템 툴팁으로서 이 게임 세계 곳곳에 흔적을 남겨놓은 그의 행적이 좋았다.
비록 게임이지만.
비록 가상이지만.
비록 시나리오지만.
칼 한 자루로 동란을 평정하고 심연을 토벌하여 새로이 새벽을 밝힌 그의 삶이 좋았다.
– 흐흣.
– 왜 웃어?
– 아니야.
– 말해.
– 싫어.
– 말 안 하면 공격대 추방한다.
– 화 안 낼 거야?
– 어.
– 약속해.
– 약속.
너는 그 양쪽 무릎을 다소곳이 끌어안으며, 그 무릎 사이로 미소를 숨기고는, 이렇게 말했다.
– 너는 샤릴리온처럼 되고 싶었던 거구나.
그 말이 꿰뚫고 있는 진실의 무게에 숨이 막혔다.
나는…… 그랬던 걸까.
이 세상에는 구원이 없고 신들도 없고 영웅도 없기에, 스스로 그런 존재가 될 수 있기를 바라고 있던 걸까.
그래서.
그랬기에.
이 배틀로얄에서 성검 샤릴리온의 선택을 받을 수 있던 것인가. 그랬는데 나는 지금…… 그래, 나는 지금, 어둠 속에 있다.
“쿄로나 레나와프라 에이델웨이즈 캐슬베이아 와르바르.”
“쿄로나 레나와프라 에이델웨이즈 캐슬베이아 와르바르.”
“쿄로나 레나와프라 에이델웨이즈 캐슬베이아 와르바르.”
지금 내가 손에 쥐고 있는 것은 가짜 성검. 형태만, 껍데기만 성검의 그것을 취하고 있는 악(惡)의 결정체.
곁에 있는 것은 오직 어둠뿐.
심연의 부산물인 타락의 잔재뿐.
심연의 힘으로 다시 일어선 나의 종복들은 망자에 불과하며, 그들에게 나누어줄 신격이 아직 나에게는 없었다.
어서, 어서 신격을 얻어야 해. 그러기 위해서는 이 미친 세계를 멸망시켜야만 한다.
“이게, 정녕…… 그대가 바라던…… 광경인가?”
한 소녀가 고통스럽게 헐떡거리며 물었다.
이 썩고 부패하는 세계 한복판에서 유일하게, 새하얀 나무와 함께 인간성을 지키고 있는 소녀.
그래, 이 소녀는 <온 것들>의 마지막 핏줄. 그 이름이…… 이름이, 이름이……?
“성도는 무너지지 않는다. 지금 여기에, 내 혼과 육을 사용해서 이 공간의 시간을 멈추리니…….”
소녀는 어떤, 항성 같은 구체를 품에 안고 있었다. 태양처럼 밝고 달처럼 아련한 빛을 뿜는 광휘. 그 광휘가 점점 강렬해진다.
그때였다.
빛, 태초의 빛, 태고의 빛이라 할 수 있는, 거룩의 파도가 해일처럼 들이닥치며 저 모든 심연의 잔재를 쓸어낸 것은.
「음, 허, 허…… 왔도다, 베르켄시아의, 계승자가…….」
아, 아니, 안 돼…….
「본좌는 염려한다. 저 빛이 그대의 새로운 권속들을 모조리 살육하게 되는 사태를.」
저 빛에 노출되면, 이제 막 안정 궤도에 들어선 권속화 작업에 지장이 생긴다. 이미 한 번 죽은 이들은 저 빛 속에서 완전히 죽어버리게 되리니.
「느흐흐흐흐…… 레이블헤인의 애송이도 왔구나. 오랜만에 유희를 즐겨볼까.」
심연이, 다시 나를 삼킨다.
심연이, 다시 내 영혼을 삼킨다.
아무런 감정도 없고 인간성도 없고 기억도 없으되 빠져나갈 길도 없는, 오직 살육과 타락만을 탐하는 존재로 만드는 그 영겁의 늪 속으로.
나는.
가라앉는다.
이제.
영원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