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 of the Fake Hero RAW novel - Chapter (189)
가짜 용사 이야기-189화(189/310)
#85 :
[12. 이 모든 이야기의 서장] 베르켄시아 알두아리아 (2)“이런…….”
모두가 그런 탄식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다시 눈앞에 펼쳐진 성도 캐슬베이아는 심연 속에 파묻혀가고 있었다.
넓적다리까지 차오르는 심연의 바다와 늪이 성도를 에워싸고 있었는데, 그 심연의 농도는 카듀엘조차도 측정해내지 못했다.
“……정말 이대로 할 생각이냐?”
엘리트 아처, 파울 리드의 물음에 현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방법 말고는 없을 겁니다.”
파울 리드는 엘리트였으므로 각 <잊혀진 왕들>의 특징을 꿰고 있었다. 상대법부터 시작해서 끌어내는 방법까지 모두.
거신 0식은 이제 카렌덴의 힘으로 구동되고 있었다. 이 힘 정도면 2명의 왕을 상대로 3분에서 4분 정도 시간을 벌 수 있을 것이라 했다.
나머지 하나는 크세리니아 일행의 몫이었다. 늪지대에 있던 이무기들은 더 높은 격을 가진 스케사리를 본능적으로 따랐다.
다만 파울과 크세리니아 일행의 공동전선은 불가능했다. 그들은 파울을 불신하고 있었으므로.
“여러분, 부디 죽지 마십시오. 잠시 시간을 벌어주는 걸로도 충분하니까. 그리고 즉시 이탈하시고.”
로헤이리츠가 투덜댔다.
“말은 쉽게 하는군.”
바이로니카가 로헤이리츠를 말리는 사이 가이네이브가 말했다.
“얼마나 기다리면 될까요?”
크세리니아가 그 말을 받았다.
“빙룡은 심연을 삼키는 용…… 심연이 강대해지면 강대해질수록 스케사리는 점차 약화되겠죠. 베르켄시아의 계승자, 당신은 정말 언제쯤 돌아올 건가요?”
어떤 답변이 가능하겠는가.
지금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은 오직 한 가지 불확실한 가정…… 아니, 소망 위에서 성립하고 있었는데.
“확언은 못 합니다.”
정철이 돌아올 것이란 소망.
관리자들의 농간에서 빠져나올 것이라는 소망.
“하지만 약속하겠습니다. 반드시, 늦지 않게 돌아오겠노라고.”
* * *
순간, 심연에 잠기나 싶던 그 순간, 모든 고요가 사라지고 이런저런 소란이 귓가로 파고든다.
사람들의 들뜬 말소리.
번잡한 발소리.
캐리어의 바퀴가 구르는 소리.
비행기 도착을 알리는 공항 AI 안내음.
여기가 어디더라……?
멍하니 고개를 들어 공항의 높은 천장을 올려다보는데, 옆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막상 실제로 만나보려니 긴장되시는 겁니까?”
말끔한 인상을 강조하는 스포츠 커트에 순수한 듯하나 강인한 이목구비, 190센티미터는 족히 넘는 강골.
“현수 씨.”
그 이름을 불렀다.
그 이름이 이렇게나 자연스럽게 나온다는 게 신기했다.
마치, 수백 년 만에 불러본 느낌이었다.
“오빠야, 그 일본 가시나한테 무슨 이상한 감정 있던 거 아닌가 모르겠네. 혹시 로리콘이가?”
“혜림아!”
“호들갑 떨기는! 장난친 거다. 이 오빠야도 좋아하잖아.”
박현수와는 조금도 닮지 않은(그래서 정말 다행인) 이 소녀는 박혜림, 그래, 박혜림이다.
오늘은 약속의 날이었다.
마침내 배틀로얄을 끝내고, 서로가 소원을 성취한 이후에, 정박사 공대의 초기 공대원들이 다시 만나기로 한 날.
맞아.
■■■■가 일본에서의 일을 마무리하고 한국에 올 수 있는 날짜를 약속 날짜로 잡았지.
박현수와는 여기 인천 공항에서 먼저 만나서 이것저것 이야기를 나누었었다.
박혜림과도 처음 만났는데, 오빠와 달리 장난기가 조금 있긴 해도 오빠와 마찬가지로 정말 착한 아이였다.
잠깐, ■■■■……?
이상하다. 기억에 혼선이 있었다. 전장에서 전파방해를 받을 때처럼, 지지직, 머릿속이 떨린다.
“정철 씨! 저기 옵니다.”
그 이름이 정확히 무엇인지, 얼굴이 어땠는지, 목소리가 어떠하였는지는 하나도 기억이 안 나고 있건만.
심장이 떨린다.
긴장? 아니, 이건 공포다. 왜인지는 모른다. 지금 만나게 될 존재가 과연 나를 용서할 것인가, 에 대한 막연한 공포와 불안.
“おにいさん(오빠)!”
그 모든 공포, 불안, 공황조차도 새하얗고도 눈부시게 녹여버리는 목소리가 있었다…….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들었다…….
보인다. 두 손을 정답게 흔들며 달려오는 소녀가 보인다. 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 얼굴은, 희뿌옇게 아롱지는 세상에서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소녀를 심연(深淵)의 제물로 바치던 그때처럼.
* * *
베르켄시아의 힘, 타르혜 론델의 빛이 성도 캐슬베이아를 휩쓸었다.
그 흑암의 권세가 소리 없는 비명 속에서 쓸려 나가자, 왕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때, 현수의 몸은 붉은 벼락으로 변했다. 카렌덴이 설계한 갑주에 내장된 알카이오스의 능력이 그것을 가능하게 만든다.
영목…….
영목의 줄기에 기대앉아, 요르한 4세가 어떤 빛을 끌어안은 채 몸을 떨고 있는 게 보였다.
빛은 한 줌뿐이었다.
영목에 둘러쳐진 빛 또한 한 줌이었다. 그러나 그 앞에 있던 암흑은 눈이 아플 정도로 깊고 매서웠다.
벼락의 궤적이 일순간 급강하의 그것으로 비틀렸다.
벼락이 지면에 내리꽂힐 때, 흑기사는 지극히 최소한의 절제적인 동작만으로 그 충격을 가볍게 피해냈다.
그 검고 푸르게 빛나는, 심연의 눈동자가 현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초월적 싸늘함 속에 감정이라고는 없었다.
“정철 씨.”
자신의 목소리가 닿지 않을 것이란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면서도, 현수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되돌려주러 왔습니다.”
그때, 정철의 머리 주위에서 심연이 뒤엉키며 늑대 두상의 투구를 만들어냈고, 현수의 머리 주위로는 빛이 엮이며 광염의 투구로 합쳐졌다.
“당신이 제게 주었던 것을.”
* * *
“오빠, 아저씨, 저거 한번 해보면 어때요? 서바이벌 훈련이요!”
■■■■가 신바람 들린 목소리로 말했다. 브레인폰의 통역 AI가 일본어를 즉시 해석해 주었다.
백화점의 게임 코너였다.
나와 박현수는 지친 표정으로 양손에 쇼핑백을 한가득 들고 있었는데, 두 소녀는 5시간에 걸친 쇼핑 끝에도 지친 기색 하나 없었다.
저 녀석들은 초인인가?
국방부에서는 한국과 일본의 여자들의 몸을 집중 연구하여 전투 체력에 대한 새로운 이론을 정립할 필요성이 있었다. 행군 따위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하, 인마야. 우리 오빠가 누군지 모르나? 우리 오빠 UDT/SEAL이다! 땅개가 상대가 되겠나!”
▲▲▲가 한심하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가 도전적으로 팔짱을 꼈다.
“나는 챌린저 원딜이거든?!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안다고!”
“우리 오빠 키 안 보이나? 딱 봐도 10센티미터는 더 크잖아. 총 실력도 마찬가지일 거다 안 카나.”
“오빠, 이 녀석 코 좀 납작하게 눌러주세요! 진짜 답답하고 억울해서 눈물이 나오려 그래!”
“힘들어. 그만 좀 가자.”
“오빠야, 저 일본 땅꼬마한테 UDT/SEAL의 간지를 함 보여줘라! 진짜 답답해 죽겠네!”
“▲▲아, 오빠도 좀 지치는데.”
한사코 거절하려 했으나 몇 번의 공방이 오간 뒤에는 게임 코너 이용객들이 여기저기 모여서 수군거리고 있었다.
“와, 저 떡대 아저씨 UDT/SEAL이래.”
“저 사람은 통일 전쟁 때 훈장을 받았다네.”
“재밌겠다. 저거 신체 피지컬도 좋아야 하잖아.”
나와 박현수는 반쯤 동시에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가, 이내 덧없는 웃음을 주고받았다.
“살살 해주세요. 저 진짜 그냥 땅개라서 총 잘 못 쏩니다.”
“봐드리고 싶긴 한데, 동생이 보고 있기도 하니……. 그래도 명예로운 죽음을 약속해드리죠.”
“그거 아주 기대되네요. 초탄 헤드만 좀 봐주시면…….”
■■■■와 ▲▲▲ 때문에 접속하게 된 게임은 캡슐 접속형이 아니라 증강 헤드기어를 장착하는 증강현실 게임이었다.
러닝머신 같은 벨트 위에서 실제로 몸을 움직이게 되는 구조지만, 밖에서 지켜보는 이들에게는 게임 맵 속에서 총싸움을 하는 것으로 비쳐진다.
게임에 구현되어 있는 총기들은 라이선스를 다 따온 만큼 실로 다양했으나, 역시 손에 익숙한 걸 쓰는 게 최고다.
G-22 권총과 K-2A1P 소총.
각각 40년대 장교 제식 권총과 육군 보병 제식 소총이다.
총기 부착물 또한 거창하게 두르는 것보다는 통일 전쟁 때 사용하던 것으로 사용한다.
[시스템 : 양측 모두 준비 완료! 곧 전투가 시작됩니다!]3, 2, 1……!
* * *
“요토스의 말은 모두 거짓입니다!”
현수가 소리치기 시작했다.
“소원을 이뤄 주겠다는 것도. 요토스와 샬류안은 그런 식으로 지금껏 사람들을 그렇게 기만해 왔지요! 당신의 삶 또한!”
정철에게서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마치, 심연 그 자체를 상대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는다.
정철이 먼저 자신을 상대로 그렇게 행동해 주었으니, 자신 또한 그렇게 하는 것이 옳았다.
이겨야 한다…….
아니, 이길 필요는 없다…….
파울 리드가 변했듯, 정철도 잃어버린 인간성을 되찾게 해줄 수 있다면…….
빛의 칼날 베르켄시아와 타락의 별 샤르홀린이 연거푸 맞부딪치며 비명을 내질렀다.
한 번, 세 번, 열 번, 열여덟 번.
죽고, 싸우고, 또 죽고.
한 마리 광견처럼 날뛰며 압박해오는 공격. 정철은 뒤로 구르며 물러섰다가, 허공을 빙그르 돌며 검격을 가해왔고, 다시 뒤로 물러섰다.
‘강하다.’
현수는 공격을 가할 틈도 찾지 못한 채, 수세만 거듭하며 뒤로 물러서야 했다.
‘강할 줄 알고 있었지만, 이건 너무나도…….’
리암의 방패 검술로도 쇼졔란의 거검술로도 감히 정철의 공세를 당해내지 못했다.
마법을 쓸 여유 또한 없었다.
모든 클래스의 상대법을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현수가 간격을 벌릴 때마다 정철 또한 심연의 권능을 흩뿌렸다.
[카듀엘 : 견갑부 손상률 76%. 다음 공격이 직격될 경우 파손됩니다!]빛과 심연이 얽히고 부딪치고 깨어지고 울고 흐느끼고.
[알카이오스 : 빠져나가, 당장!]한순간, 현수의 주위에서 솟구친 심연의 칼날들이 목을 겨누고 달려들었다.
그와 동시에 정철도 돌진해왔다.
심연의 칼은 생명이 깃든 늑대 떼처럼 현수를 여기저기서 덮치더니 다시 정철의 손아귀로 돌아가 대검의 형태를 갖추었다.
[카듀엘 : 견갑부 직격! 갑주의 형태가 흩어집니다!]정철의 칼날은 현수의 육신뿐만 아니라 마음 깊숙한 부분까지 도려냈다.
정철.
당신은 언제나 저보다 강했죠. 실력도 있고, 결단력도 있으며 아량도 넓었고.
제가 이렇게 된 건 모두…….
당신이 알려준 방법을 그대로 따른 결과에 불과합니다. 그러니까 정상적인 상황이었더라면, 당신이 지금 제 자리에 있어야 한단 소리지요.
‘내가 아니라.’
카앙…… 베르켄시아가 심연의 칼날에 부딪칠 때마다 울었다.
지금 이 순간, 확신했다.
이 끝없이 이어지는 장난을 끝낼 수 있는 건 바로 이 남자뿐이라는 것을. 그러니까 계획한 그대로 행동하겠다.
[알카이오스 : 뭘 하는 거지?]현수는 정철의 참격을 아슬아슬하게 피해낸 다음, 가슴팍의 동력부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그 속에 있던 회귀석을 움켜잡고 꺼내들었다.
[카듀엘 : 동력부 손상! 갑주가 형태를 잃습니다!]현수의 손아귀에서 휘황한 빛을 뿜는 베르켄시아, 그 빛이 새로운 세계를 이끈다.
그 빛에 주춤거리나 싶던 정철이 다시 현수에게로 달려들었다.
현수는 회귀석을 강하게 움켜잡아 손에서 으스러뜨렸다. 그 한순간, 보석으로 정제되어 있던 빛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천지개벽(天地開闢).
세계의 형태가 바뀌었다, 황량한 인상을 풍기는 고분 지대로.
황혼이 내리비치는 이 장소엔 무덤밖에 없었다.
특이한 점을 굳이 말해보라면, 무덤마다 꽂혀 있는 병장기들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정철…….’
당신이야말로, 사실 그 누구보다 이곳에 오고 싶지 않았을까요.
정철이 여러 무덤들을 경계하듯 훑어보고 있을 때, 현수가 입을 열었다.
“이곳은 봉화지기의 무덤.”
자신의 옆쪽으로 한 무덤이 있었다. 그 위에는 언월도가 묘비처럼 돋아나 빛으로 명멸하고 있었다.
“외우주에 맞서온 99명의 영웅들과, 영웅이 되려 했으나 되지 못한 이들의 의지가 묻힌 장소.”
박현수가 그 언월도의 자루를 움켜잡았다.
“그리고 그 의지가 당신에게 이어질 장소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