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 of the Fake Hero RAW novel - Chapter (190)
가짜 용사 이야기-190화(190/310)
#86 :
[12. 이 모든 이야기의 서장] 베르켄시아 알두아리아 (3)113번째로 죽었다.
113번째의 죽음을 넘어 선공을 가한 박현수의 실력은 놀라울 정도로 성장했다.
그럼에도…….
정철의 공세에서 허점을 찾는다는 건 매번 죽음에 이르기 전까지는 불가능했다.
정철이 간신히 거리를 좁히며 멱통을 노리려고 하자, 박현수가 언월도를 내던지더니 다른 무덤에서 단검 두 자루를 빼들었다.
여기 오기까지 128번째 죽었다.
이제 박현수는 단검의 달인이 되었다. 거리를 좁힌 것이 정철의 화근이 된 순간이었다.
상황에 맞춰 모든 병장기를 달인처럼 다루는 존재를 상대한다는 건 여간한 일이 아닐 것이다.
장검, 장창, 장궁 같은 기본적인 무기부터 철퇴도 있었고 현수가 평생 보지 못한 무기도 있었으며 첨단 병기도 있었다.
146번째 죽었다.
이 순간, 현수는 그 무기 모두의 달인이었다.
157번째로 죽었다.
다음 순간, 쇠사슬이 날아가 정철의 오른손을 휘감았다. 빛의 사슬이었다. 살갗이 타들어가는 격통 속에서 그 팔이 녹아내렸다.
정철의 오른손이 무력화되었을 때, 박현수는 쇠사슬을 내던지고 기괴한 대검을 움켜잡았다.
거기에서 모두 끝낼 수 있었다. 정철이 칼을 놓으면서 휘돌린 발이 복부에 꽂히지만 않았더라도.
이 과정에서 169번째로 죽었다.
박현수가 낙법으로 지면을 밀쳐 일어섰다. 그 앞에는 대궁 형태의 베르켄시아가 있었다.
여기까지 오느라 197번 죽었다.
그러던 차에 정철의 전투 본능이 이 공간의 약점을 간파해냈다.
A라는 무기를 다룰 때와 B라는 무기를 다룰 때 그 움직임이 완전히 다르다. 마치, 다른 사람의 움직임처럼. 그렇다면…… 저 무기의 존재가 트리거인가.
그렇게 판단한 것이 틀림없다.
204번.
다음 순간, 정철의 머리 위에서 심연의 칼날이 태산보다도 거대하게 합쳐졌으니까.
209번.
이는 흑혈검 혈괴참의 응용.
혈괴참이 음속 폭음을 터뜨리며, 고분 지대를 휩쓸었다.
216번.
혈괴참이 지나간 자리에 있던 무덤들이 쓸려 나가면서 무기들 또한 광입자로 바스러지며 사라져간다.
이로써 248번 죽었다.
똑같은 과정, 똑같은 전투 속에.
정철은 이제 박현수와의 교전을 최대한 피해가며 무덤 곳곳을 파괴해가고 있었다.
자, 이제 266번 죽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는다.
이제 남은 무기는 고작 열 자루. 그러나 승산이 없는 건 아니다.
이 혼상세계 속에서는 심연이 재생되지 않는다. 요컨대 정철이 부릴 수 있는 심연이라곤 이제 갑주를 이루는 놈들이 전부였다.
현수는 90번째의 베르켄시아를 움켜잡았다.
“이제, 모든 걸 끝낼…… 아니, 시작할 때입니다.”
* * *
총격전은 좀체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UDT/SEAL, 진짜 괴물이구만…….
[메시지 입력 : 님, 봐준다면서요.]전투사격에 자부심을 품은 적은 없어도, 그래도 누구에게도 꿀리지 않을 것이란 생각은 갖고 있었는데 말이다.
[아주 강한 Emperor : 이것도보ㅏ주는거ㅂ니다만?] [메시지 입력 : 아 ㅋㅋ] [아주 강한 Emperor : 어떠ㅎ게 더사ㄹ살해드리는?]확실히 무결점 전투 병기이기는 하나, 지금 그 단점이 확실히 보였다. 그 단점을 파고든다.
[메시지 입력 : ■■■■와 ▲▲▲가 정말 잘 어울리던데요.]가상현실 게임 한번 해본 적 없다더니, 채팅이 무슨 할아버지 채팅도 아니고.
[메시지 입력 : 근데 객관적으로 평가하자면 ■■■■가 훨씬 더 귀엽게 생긴 것 같습니다.]전투에서 가장 중요한 건 승리라고 배웠다. 비겁하다는 소리를 듣든 말든!
[아주 강한 Emperor : 그무스ㄴ말도아ㄴ되ㄴᅟᅳᆫ]뒤통수, 완벽히 포착했다!
박현수는 우스꽝스럽도록 부자연스럽게 허공에 떠오른 가상 키보드를 두들기고 있었다. 심지어 독수리 타법이었다.
그러나 이 작자는 현실에서도 살기(殺氣) 감지가 가능한 것일까, 순간 앞으로 구르며 모든 총격을 피하는 미친 반사 신경을 보인다.
“아니, ●● 씨!”
“아니, 왜요!”
이제는 서로 목소리가 닿을 거리, 채팅 따위는 필요 없다. 목소리뿐만 아니라 웃음소리도 선명히 닿는다.
즐겁다.
행복할 정도로 즐거워.
예전에는 총의 그립만 잡아도 PTSD의 현기증과 구역질이 밀려왔는데, 지금은 신기할 정도로 재밌기만 하다.
총탄이 오간다.
수류탄이 폭발한다.
흙과 잔해가 어지러이 솟구치고, 그 사이사이로 총탄의 발화와 격발음이 끝없이 울린다.
쏘고, 쏘고, 또 쏘고.
피하고, 구르고, 또 피하고.
엄폐하고, 던지고, 또 엄폐하고.
쏘고, 피하고, 구르고, 엄폐하고, 던지고, 다시 또 쏘고, 피하고…… 그러기를 얼마나 반복했을까.
나는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내 이마 위로 박현수가 권총의 총구를 겨누고 있었다. 이 상황이 놀라울 만큼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다.
“이거 진짜 살살 한 거 맞아요?”
애초에 비겁한 수작질이 어긋난 순간부터, 정정당당한 전면전이 시작된 시점에서, 이 결과가 정해져 있던 것만 같이 느껴진다.
액션 영화들의 클리셰처럼 말야.
비겁한 수만 쓰던 악당이 결국 정의의 주인공에게 제압당해 죽게 되는 그런 전개 있잖아.
“하 참, 정말 대단하시네. 나름 최선을 다했는데, 역시 ★★ 씨는…….”
위화감이 솟구친다.
첫째는 그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는 데 있었다.
“어라?”
방금 전까지 서로의 이름을 부르면서 웃고 있었던 것 같은데. 왜 기억이 나지 않지?
둘째는 ★★의 표정에 있었다.
당연히 서로 멋쩍게 웃으면서 이 승부를 마무리할 줄 알았는데, ★★의 표정은 웃음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래, 웃고 있기는 했다.
당장, 지금 당장이라도, 부서지고 무너지고 깨어질 듯이 슬픈 미소로.
“여기까지 오는 데 332번이나 죽어야 했습니다. 정말, 대단하시단 말밖에 안 나오는군요.”
그러면서 총구의 방향을 이마에서 관자놀이로 바꾼다. 내 이마에서, 자신의 관자놀이로.
“이제, 한 조각, 베르켄시아의 한 조각을 당신의 영혼 속에 심어두고 가겠습니다.”
그리고 당긴다.
끼리리릭…… 방아쇠가 당겨지며 격철이 긴장되었다가 소리가, 꼭 멈춘 세계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더없이 느리게 들려온다.
지금 무슨 짓을, 저지하려고 해도 몸이 제 것이 아닌 것처럼 말을 듣지 않는다.
“언젠가, 이 한 조각의 씨앗이 열매를 맺어서 당신의 길을 안내할 수 있도록.”
모든 게 이상해진 그 세상에서는 소리조차도 이상했다.
공이가 뇌관을 때리는 소리도, 그리고 총이 격발하며 들리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 대신 울렸다. 들렸다.
푸하아악…… 육중하면서 날카로운 쇠붙이가 살과 근육과 뼈와 내장을 잔혹하게 꿰뚫으며 짓뭉개는 소리만이.
그 소리가, 모든 환상을 찢었다.
마지막으로 한 줌 남아 있던 인간성의 단말마, 그 소리 없는 비명 속에서 백일몽의 환영이 깨져 사라진다.
현실이 눈앞에 펼쳐진다.
이제는 이름도 모르고 기억조차도 없는 거구의 누군가가 샤르홀린에 복부가 꿰뚫려 있었다.
그 손에 들린 빛의 칼날, 베르켄시아. 그 베르켄시아 또한 내 가슴을 꿰뚫은 채였다.
두 칼날이 교차했던 듯했다.
서로가 서로의 허점을 겨누고 마지막 일격을 가했는데, 나는 정확히 심장과 영혼의 핵을 노린 반면 상대는 안타깝게도 한 끗 차이로 나를 절명시키지 못했다.
못한 건가?
아니…… 안 한 건가? 샤르홀린을 비틀어서 빼내는 내내 그런 의혹을 거둘 수가 없었다.
이 간격에서 이걸 적중시키지 못하는 게 말이 되나?
빛의 갑주를 잃은 거구가 지면에 고꾸라졌다. 베르켄시아 또한 내 배 속에서 미끄러져 나와 지면을 튕겼다. 맑은 쇳소리가 울린다.
뭘까, 이 감각은.
누굴까, 이 작자는.
모든 인간성을 제물로 바치며 소원을 향해 달려온 과정 속에서 모든 것이, 그 모든 일들이 공허하고 허망하기만 했는데…….
이 가슴이 부서질 듯이 찌르르 아픈 이 감정 또한 허망함일까?
아니…….
신격의 논리로 판단해보면, 인간일 때 나는 이 감정을 슬픔이란 이름으로 불렀을 거야.
안면의 근육에는 미동조차 없는데…… 오직 눈물만이 댐이 무너진 듯…….
끝없이…….
한없이…….
흘러나오는 이 감정은……, 분명 슬픔이란 감정이었을 거야…….
그때, 이 황량한 묘소의 결계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음산한 선율의 피리 소리가 그 균열을 넓히고 있었다.
즉시 온몸을 타고 흐르는 힘이 느껴졌다. 나는 그 방대한 힘에 또다시 전율했다.
심연이, 다시 내게로 흘러든다.
심연이 완전히 박살 났던 갑주를 다시 형성시킨다. 격렬한 쾌락이 영혼 구석구석을 휩쓸었다.
피리 소리가 머릿속에서 맴돌던 복잡한 감정을 지웠다. 흐르던 눈물이 멎었다.
갑주가 재생되는 동시에 잘려 나갔던 팔 또한 재생되었다. 새로이 생겨난 손을 베르켄시아로 뻗었다.
이걸로, 끝이다.
이걸로 나는 어머니의 품으로 돌아간다. 그 생각만을 반복하며 칼자루를 쥐려던 그때였다.
「머, 멈춰, 이 새끼야!」
결계에 생긴 균열.
그 틈새로 샬류안이 넘어왔다.
그 뒤쪽으로 요토스도 함께 오고 있었다.
「그걸 쥐면 큰일 나!」
“어째섭니까?”
「자칫하다가 겔드하리아의 신격을 흡수해 버리면 요토스 오빠가 너를 삼켜버리고 말 거라고.」
“그 재창조의 권능 말입니까.”
「응.」
나는 그 대답으로 확신했다.
그리고 손에 힘을 주었다.
이 힘을 내가 갖는다면, 이제는 누구에게도 속지 않고, 내가 원하는 모든 바를 이루게 된다.
「야, 야──!」
……하지만.
「──이 미친!」
칼자루를 쥐는 악력의 감각은 조금도 전해져오지 않았다. 내 손은 칼자루를 쥐기 바로 직전에 멈춰 있었다.
내가 멈춘 게 아니었다.
‘그 동작을 행하려던 시공간’ 자체가 정지되어 있던 것뿐이지.
「미쳤습니까?」
정장 차림의 금발 벽안 미소년.
어느새 나타난 요토스가 피리를 입에 물고 있었는데, 무슨 수를 써도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수천 개의 사슬에, 아니, 벌레들의 물결에 속박된 느낌이었다.
「압니까? 당신은 신격의 맹세를 불이행한 걸로 존재가 소멸할 수도 있었습니다.」
“글쎄요. 내가 창세신의 신격을 먹어서 집행 관리자께서 완전체가 되지 못하는 게 걱정된 건 아닙니까?”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요토스가 뒤틀린 미소를 지었다.
「그나저나 궁금하군요. 왜 갑자기 이런 돌발 행동을 펼친 겁니까?」
말투는 더없이 정중했지만, 그 말에는 거대한 칼날이 서 있었다. 조금이라도 어긋난 대답을 하면, 널 죽이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샬류안이 나와 요토스 사이를 가로막으며 팔을 마구 휘저었다.
「오빠, 이 멍청이 머리통이랑 얼굴 좀 봐. 베르켄시아에 하도 얻어맞아서 제정신이 아닌 거야. 그래. 그런 거지? 아직 육신에 얽매여 있으니까.」
샬류안이 나를 열성적으로 변호해주는 건 참 기이한 경험이었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러면 뭡니까?」
“당신 관리자들의 기만질에 이제 넌더리가 났을 뿐입니다. 이번 계약도 당신이 나를 농락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아시겠습니까?”
그리고 다시 손을 뻗으려고 힘을 주었다. 하지만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는다. 심지어 이제 움직일 수 있는 건 목과 얼굴뿐이었다.
「신격의 맹세를 했음에도 저를 믿지 못한다라…… 이거 곤란하군요.」
요토스의 말투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샬류안이 다시 말리려 했지만, 요토스가 「비켜, 샬리」라고 말하자 겁먹고 물러섰다.
「엘리트 소서러, 우리 한 가지 확실히 해봅시다.」
요토스가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내 눈을 들여다보았다.
모든 생각과 상념과 기억 속으로 외우주의 혼돈이 한기로 밀려드는 느낌…….
처음이었을 것이다. 신격을 각성한 뒤로 이토록 거대한 공포로 몸을 떤 것은.
……요레이…….
아마 이때였던 것 같다.
……욜루…….
베르켄시아를 취해서 요토스를 죽이고 겔드하리아의 신격을 완전히 취한다는 작전을 포기한 것이.
……요토스 욜레 요티아토스…….
절대신의 권좌에 오른 존재들은, 나같이 하등한 존재는 아무리 날뛰어도 이길 수 없다. 벌레들이 아무리 잘나도 인간의 발길에 짓밟혀 죽는 운명이듯.
「당신의 목표는 어머니를 되살리는 것 아닙니까? 저는 이걸 분명히 약속했습니다. 원하는 시간대로도 돌려주겠다고 말입니다.」
정말 그것뿐이었던가?
어머니? 그래. 어머니뿐이다. 난 애초에 이 배틀로얄에 어머니를 살리겠다는 일념으로 들어왔다.
다행이다.
아직 그 소원을 잊지 않아서. 아직 어머니에 대한 마음을 잊지 않고 있어서.
뭔가 중요한 걸 잊고 있는 것 같은데. 아니, 잊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잊은 것은, 정말, 아무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