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 of the Fake Hero RAW novel - Chapter (191)
가짜 용사 이야기-191화(191/310)
#87 :
[12. 이 모든 이야기의 서장] 베르켄시아 알두아리아 (完)「제 목표는 겔드하리아의 신격을 온전히 흡수하는 겁니다. 제가 지금 가지고 있는 겔드하리아의 신격은 6할 정도입니다.」
요토스가 베르켄시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 베르켄시아에 나머지 4할이 있겠지요. 저 4할로, 당신이 뭘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겁니까? 6할을 가진 저조차도 초시간 역행을 하지 못하는데?」
“당신이 가진 것이 1할이고, 베르켄시아가 가진 것이 9할일지도 모르는 일 아닙니까?”
가장 중요한 순간이었다.
나는 하나하나 모두 의심하기로 작정했다. 요토스가 거짓임을 인정하고 나를 죽이겠다면 죽겠다.
그렇다면 어머니를 살려낼 방법은 어디에도 없고, 내가 살아갈 이유는 없으니까.
「일단 잘 보십시오.」
요토스가 피리를 내 눈앞까지 들이댔다. 피리일 뿐인데, 그 어떤 칼날보다도 간담이 서늘해졌다.
「신격의 맹세가 거짓이라면 저는 여기서 당신을 죽이고 베르켄시아를 차지하면 됩니다. 하지만 그러지 않고 있습니다.」
요토스가 피리를 거두고는 손바닥을 들어 올렸다. 신격의 맹세를 할 때 맞댔던 손이었다.
「그 영민한 두뇌가 왜 이렇게 하찮아진 겁니까? 베르켄시아에 몇 대 두들겨 맞더니 지능이 퇴락했습니까?」
「오빠. 정철이 아무래도 베르켄시아를 상대하면서 인간성을 좀 흡수한 모양인데…….」
샬류안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러자 요토스가 한숨을 쉬었다.
「이래도 모르겠습니까? 모두 당신과 한 맹세를 지키려고 이러고 있는 거란 말입니다.」
……확실히.
나와의 약조가 거짓이었으며 요토스의 목표가 그저 베르켄시아였다면 이 반항 행위를 용납할 이유가 없었다.
얼마 전인가 쟈렌키가 찾아와 말하길, 요토스만큼 무자비한 신도 없으니 언행에 조심하라고 귀띔을 해주기도 했었다.
“전…… 그저 불안할 뿐입니다.”
「당신의 어머니를 만나지 못할까 봐? 대체 누가 그런 의심을 심어준 겁니까? 그러면 선택권을 주도록 하지요.」
요토스의 손에서 피리가 가루처럼 사라졌다. 그러자 내 몸의 통제권이 돌아왔다.
「이대로 반항 행위를 계속하여 자살할 것인지, 아니면 저를 믿고 잠잠히 물러날 것인지 말입니다. 신격의 맹세가 과연 효력이 있는지 아니면 요토스의 거짓말인지 직접 확인해 보시죠.」
그 무렵에는 봉화지기의 무덤이라는 결계 스킬이 모두 깨어져 있었다.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곳은 성도 캐슬베이아도 아니었다. 정산장이었다. 하지만 시청자들은 없었다.
요토스가 내 영좌에 걸터앉더니 피식 웃었다.
「이미 배틀로얄은 끝났습니다. 이제 당신이 양보하기만 하면, 당신은 원하는 걸 얻고 여길 떠날 수 있어요.」
“……?”
「엘리트 아처는 외우주의 힘도 잃었고 거신도 폭파되었으니 이제 어디에서도 힘을 못 씁니다. 이제 당신에겐 적이 없어요.」
요토스의 눈짓을 받은 샬류안이 손바닥을 마주치자, 화면 수십 개가 허공에 떠올랐다.
「뒤처리는 켈이 하고 있어.」
그 화면에, 성도의 상황이 비쳐지기 시작했다.
성도로 돌입해왔던 이무기들이 켈렉─샼과 그 권속들의 손에 하나씩 처단되어 가고 있는 광경.
참으로 <황녀를 위하여> 세계다운 결말이라는 생각만이 들었다. 어떤 슬픔도 안타까움도 들지 않았다.
“그래도 아직 세계가 멸망하지는 않았군요.”
「멍청한 소리는 그만. 이제 남은 이들은 켈렉─샼 하나 상대하지 못합니다.」
나도 왜 내가 저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 왜지?
「정산에 참여하고 싶으면 남아 계세요. 하지만 당신에게 이제 정산은 아무래도 좋지 않습니까?」
요토스가 한숨을 내쉬고는, 시계를 보듯이 자신의 손목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니 선택하십시오. 제 말이 거짓이라고 생각하고 도박을 펼칠 건지, 아니면 저를 믿고 물러설지.」
결국 나는 목을 뒤로 젖히며 긴 숨을 내쉬었다.
지쳤다.
어딘가 기대어 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리고 내가 쉴 수 있는 곳은…….
나는 말없이 자리에서 비켜섰다.
그것이 합의안이었다.
요토스가 베르켄시아의 칼날에 피리를 맞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빛이 부서지고, 검푸르게 타락하며, 피리에 휘감기듯 끌려 나왔다.
나는 그 빛에서 요토스에 버금가는, 아니, 그보다도 더 거대한 신격을 느낄 수 있었다.
요토스가 홍소를 터뜨렸다.
「하, 하하하하하……! 그래…… 이거야…… 느껴지는군…… 겔드하리아의 신격이……!」
요토스의 몸이 빛으로 둘러싸이는 광경은 기이했다.
그 빛이 절정에 달해가자, 호흡조차 제대로 할 수가 없게 되었다. 셰라슐’토뤼악을 대면했을 때 느꼈던 그 원초적인 공포 자체였다.
그 초시공의 빛이 검푸르게 물들면서 내 몸을 촉수처럼 휘감았다. 시공의 섭리가 뒤틀리는 격류 속에서 요토스의 목소리가 들린다.
「당신의 이상은 이제 현실이 될 겁니다. 말만 하시죠. 어느 시간대로 돌아가길 원합니까?」
* * *
“……철아.”
그 목소리에 눈을 떴다. 처음에 보인 건 천장이었다.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는 전등을 살펴보았다. 백열등이었다.
<황녀를 위하여> 세계에서 사용될 도구가 아니었다. 2040년대 한국에서 쓰는 전등이었다.
“철아, 일어나야지!”
오감이 돌아오고 있었다.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침의 햇살이 따스하게 내리비쳤다.
초봄의 바람이 창문을 타고 날아와 코를 간질인다.
방을 살펴보니 낯익은 방이었다.
통일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내가 살던 집이었다. 어머니와 형과 단란하게 살던 그 집이었다.
침대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가장 먼저 발목을 만져보았다.
……온전했다.
그때 방문이 거칠게 열렸다.
곰처럼 사나운 인상을 가진 형이, 하얀색 와이셔츠와 검은색 양복바지를 말쑥하게 차려입고 서 있었다.
얼굴이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다.
“야.”
그러더니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며 달려와 내 머리통이 부서져라 헤드록을 걸었다.
“야 이 새캬, 어서 일어나서 입학식 가야지. 친동생 Y대 입학했다고 내가 가오 안 상하게 외제차도 렌트해놨다 이 말이야.”
형의 웃음은 정겨웠다. 나도 따라서 웃기 시작했다.
근데 웃음은 저절로 나오지 않고, 의식적으로 연기해야만 나왔다. 헤드록을 좀 풀어달라고 손등을 두드리지는 것도. 사실 조금도 숨이 막히지 않았으니까.
육신이 필멸의 한계를 초월한 그대로 넘어온 거다.
“쉿.”
형이 문득 문가를 조심스레 살폈다. 여기서 형이 무슨 행동을 할지 이미 알았다. 형은 주머니를 뒤적거리며 봉투를 꺼냈다.
“엄마한텐 비밀이야. 대학 가기 전에 용돈으로 써. 궁색하게 다니지 말고, 인마. 어깨도 펴고, 인마. 예쁜 애들이랑도 많이 사귀고.”
형은 그렇게 내 어깨를 두들기더니, 강제로 들어 올려서 방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형은 언제나 강했다.
“Y대 신입생 행차요!”
식탁에는 아침밥이 차려져 있었다. 동그랑땡과 만두에서 김이 피어올랐고, 누린내를 풍기는 밥은 흰쌀밥이었다. 동그랑땡에는 계란이 입혀져 있었다. 엄마, 우리 엄마의 솜씨였다.
눈물이 핑 돌았다.
핑, 하고 돌아야 정상이었다.
그러나 눈물 하나 나오지 않았다. 형이 날 식탁에 앉히며 키득거렸다.
“엄마가 신경 좀 썼어. 오늘은 왕처럼 살라고.”
형은 그렇게 말하며 부엌으로 갔다.
멍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거실 냉장고에는, 내 4년 전액 장학금 수석 입학을 알리는 종이가 붙어 있었다.
“입학식…….”
내가 요토스에게 말한 그 날짜 그대로였다.
볼을 꼬집어보았다. 아팠다.
손바닥을 들여다보았다. 심연과 신격은 그대로 내 안에서 춤추고 있었다.
순간 요토스의 기만에 대한 불안감을 느끼고는 신격을 펼쳐보았다. 하지만 이 세계에 나 이외의 신격은 없었다. 자취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우리 철이, 일어났어?”
심장이 멎은 것만 같았다.
나는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주방에서 내 어머니가 걸어오고 있었다. 전처럼 고우신 얼굴이었다.
미소에는 특유의 인자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아직 젊고 피폐해지지 않은 얼굴이었다.
나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그리고 귀신에 홀린 것처럼 비틀거리며 어머니에게 걸어갔다. 그리고 그 품에 안겼다.
“철아, 엄마 국 들고 있잖아. 갑자기 왜 그래. 환아, 너 철이 때렸어?”
“아, 아니. 얌마, 빨리 비켜. 왕 행세는 밥 먹고 나서부터 해, 인마!”
나는 울고 싶었다. 평생 그렇게 처절하게 울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처럼.
통곡하듯이 울고 싶었다.
목을 놓아서 울고 싶었다.
<황녀를 위하여>에서 펼쳐진 그 수많은 죽임과 죽음의 투쟁 끝에 마침내 꿈을 쟁취해낸 순간이었으니까. 이상을 현실로 만들어낸 순간이었으니까.
그러나 눈물은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다.
* * *
그 이후로 모든 삶은 그런 식이었다.
지루하기 짝이 없다고 해야 할지, 어떤 현상에 대해 당연히 느끼게 되는 감정 자체가 사라졌다고 해야 할지…….
어떻게 설명할 길이 없는 권태감 속에서 흘러갔다.
통일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나의 신격으로 전쟁 주동자들을 척살하였기 때문이다. 세뇌 작업도 벌어지지 않았다.
어머니가 살아 계신 동안 나는 평화를 필사적으로 사수했다.
다행이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관리자들은 지구에 그림자도 비치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어머니가 돌아가신 날, 이등 관리자 쟈렌키가 나를 찾아왔다.
나는 억지를 부렸다.
형의 죽음까지만 기다려 달라고.
“네가 내 동생이란 사실이…… 이 형의 자랑이었어, 인마…….”
지금 나는 형의 병실에 앉아서 그 죽음을 지켜보고 있었다.
형은 89년을 살았다.
형은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인으로 변해 있었지만, 나는 조금도 늙지 않았다.
특이한 일은 아니었다.
2056년, 러시아에서 노화 방지 기술이 발명되면서 사람들은 모두 영생을 누리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형은 그 약을 먹지 않았다. 어머니가 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형은 결혼하지 않았고 아이를 낳지 않았다. 어머니만 보필하다가 이렇게 늙었다.
나는 그렇게 형의 임종을 끝까지 지켰다. 형이 죽은 순간에도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형의 시체를 묻은 바로 그날, 샬류안이 나를 찾아왔다.
* * *
「서로를 의심하세요! 물론 협력해야 할 때도 있죠. 레이드라거나, 공략이라거나…… 하지만 뭐, 죽이는 게 가장 좋을 거예요. 그렇잖아요? 후환이 안 남을 테니까.」
샬류안이라는 미소녀가 길었던 설명을 마쳤다. 벨푸라리아 세계의 사람들은 하나둘씩 고개를 저었다.
이제 겨우 열 살쯤 됨 직한 소녀가, 살인이니 소원이니 아주 간단하게 말하는 모습이 어처구니가 없던 것이다.
“우리가 그걸 왜 해야 하는데?”
“딱 봐도 하찮은 마법 좀 배워서 쓰는 모양인데, 장난치지 말고 얼른 돌려보내 줘라. 내가 인마, 대마법사의 종자야.”
몇 명은 야유까지 날렸다.
그러나 대부분은 단지 눈을 날카롭게 뜬 채 소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시선에서 불신감이 넘실거렸다.
「이상하다. 여러분들 소원 이루려고 온 거 아니에요? 그런 사람들만 불렀는데.」
“하, 진짜 미치겠네.”
대마법사의 종자라고 밝힌 장정이 단상 앞으로 나아갔다. 사람들은 그가 어떤 일을 펼칠지 궁금하여 길을 열어주었다.
“이 쥐새끼만 한 꼬맹이가, 세상 무서운지 몰라?”
그는 분노에 찬 시선으로 샬류안을 내려다보았다. 그 시선은 곧 음탕한 미소로 변했다.
“원한다면 직접 알려주고─”
그가 샬류안에게 손을 뻗던 순간, 갑자기 그 양쪽 손목이 절단되었다.
한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다음 순간에는 장정의 가슴에 거대한 구멍이 뚫렸다. 마치 시간이 멈추었다가 이제야 다시 흐르기 시작한 것처럼.
벨푸라리아 세계의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언제 나타난 걸까.
샬류안과 장정 사이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키가 훤칠한 흑발의 미남이었는데, 표정 없는 얼굴이 소름이 끼칠 정도로 차가웠다.
그 칼날…….
그가 두 손으로 쥔 칼자루 위의 칼날은 정형화된 형태가 없는 무형(無形)의 저주였다.
외우주의 존재들을 그 칼을 두려움을 담아 샤르홀린, 즉 타락의 별이란 이름으로 불렀다.
누군가가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샬류안이 막대기로 바닥을 내리치자, 겁에 질린 사람들은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저한테 함부로 까불지 마세요, 이 새끼들아. 우리 집행 관리자는 정말 무서운 관리자니까. 특히 나한테 손대는 남정네한테는 더 무섭지.」
샬류안은 사람들의 정적을 기분 좋게 즐기다가, 피식 웃어 보였다.
「참, 엘리트로 선발된 분들은 저 집행 관리자를 자주 보게 될 거예요. 지금부터 좋은 인상을 남기는 게 좋을걸요?」
흑발의 집행 관리자는 수십 번이고 반복된 튜토리얼 설명을 무표정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공허하고, 허망하게.
삶의 그 어떤 소망도 없이.
삶에서,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들을 기만당해 빼앗긴 건 아닐까 생각한 그 순간.
「자, 배틀로얄의 용사들이여! 그러면 이제부터 부디 즐거운 유희를 보여주시길 바라겠습니다! 우주조차도 감동할 만한 대본을 만들어 주세요!」
그리고 심연의 절대자가 그에게 품고 있던 의심을 완전히 거둔 순간…… 그 영혼 속에서 태초의 빛이 맥동했다.
– 오빠.
따스하게, 세차게, 아프게.
기쁘게, 슬프게, 행복하게, 서글프게, 처연하게, 아프게, 눈물겹게, 슬프게, 슬프게.
– 그때, 그 사막에서 했던 약속, 기억하고 있어요?
별안간, 덧없이, 흘러나온다.
눈물이.
지금까지 나왔어야 했으나 나오지 못했던 눈물들이 끝없이, 끝없이.
– 당신은 정말 상냥한 사람입니다.
가슴이 찢어질 듯한, 아니, 영혼이 갈기갈기 찢어지고 불타는 것만 아픔 속에서, 되살아난다.
왜 잊고 있었을까.
왜 잊어버리게 되었을까.
왜, 어째서, 그런 짓을, 그런, 그런, 그런 짓들을…….
– 한 조각.
그 따스함 속에서 되돌아온다.
그 온기 속에서 되살아난다.
– 이 한 조각을 당신의 영혼 속에 심어두고 가겠습니다.
인간성을 빼앗기면서 하나둘씩 잃어버렸던 기억들이, 가슴이 찢어지고 숨을 쉴 수 없는 아픔 속에서, 뇌리와 영혼 양쪽에서 흐느껴 울면서 하나둘 각성했다.
– 언젠가.
그의 친구가.
스스로의 삶을 포기함으로써.
– 당신이 암흑 속에서 울며 신음하게 될 언젠가.
그의 영혼에 새겨 넣었던, 빛의 마지막 파편이 눈을 떴다.
– 이 한 조각의 빛이, 그 어둠 속에서 빠져나오는 길을 당신에게 안내해줄 수 있도록.
빛의 칼날, 베르켄시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