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 of the Fake Hero RAW novel - Chapter (193)
가짜 용사 이야기-193화 (시즌3)(193/310)
가짜 용사 이야기 시즌3
Prologue :
Prequel, 검은 여름
「라미네아 알터 아라다만텔.」
황금시대, 화룡 벨’다키둔이 스스로의 육신을 불살라 세상의 끝에 화염의 벽을 일으켜 세웠으니.
그 이름, 화염만리(火焰萬里).
그 태고의 불꽃은 심연을 문명으로부터 격리시키고 어둠으로부터 생명의 빛을 지켜왔다.
「이제, 너는 성검의 선택을 받게 되었으니.」
한 시대가, 황금의 빛으로 물들 수 있도록.
「네 생(生)과 명(命)을 다하여 세상의 불을 밝혀 선(善)을 이루며 덕(德)을 세우겠노라고 서약하겠느냐?」
그러나 어떤 불이든 장작이 사위면 꺼지는 법…….
화염만리 또한 강대했던 화염의 힘이 서서히 약화, 천 년이 지난 이후 결국 잔불만이 남게 되었다.
그 결과 마(魔)의 군세가 결집, 잔재만이 남은 화염의 틈새를 뚫고 문명 세계를 침식하기 시작하니…….
“에이, 잘 알고 계시면서 뭘 또 새삼스럽게 묻고 그러신대.”
이것이, 역사의 시작이다.
바로 이것이, 영웅시대의 개막이자 후세에 ‘붉은 여름’이라 일컬어지는 마지막 전쟁의 전초전이다.
그래, 역사는 이 전쟁을 ‘검은 여름’이라 부른다.
시즌 3 : 1화
안녕(安寧), 그 슬픈 인연의 눈부신 시작 (1)
– 스, 스승님……?
기억…….
슬픔으로 아로새겨진 기억…….
– 라미네아, 네 스승은 <시라프> 대공세에서 죽었다.
어째서…….
보여드리고 싶었는데…….
– 스승님, 저, 이것 좀 보세요, 제 머리, 스승님처럼 새하얘져서, 어때요, 예쁘죠, 스승님, 그만 자고 눈을, 눈을, 좀 떠보셔서…….
돌아올 수 없는 세상으로 가버린 스승의 주검 앞에서 통곡하던 소녀(小女)는, 긴 머릿결을 여름의 벌판에 새하얗게 풀어헤친 여걸이 되어 눈을 떴다.
라미네아 알터 아라다만텔.
벌판에 드러누운 채 낮잠에 들었던 모양이다.
라미네아는 잠시, 뒤통수에 깍지를 느긋하게 끼고 초여름의 하늘을 우러렀다.
“날씨는 좋네.”
뽀얀 비단에 휘감긴 듯, 구름이 태양 주위를 흘러가는 날이었다. 마음까지 따스해지는 초여름의 아침이었다.
그날은…….
냄새조차도 잿빛이었는데…….
잠결에 투명하게 배어 나온 눈물을 훔치던 그때, 시야 가장자리로 불쑥 스며드는 불순물이 있었다.
“날씨가 좋아?”
그 불순물이란, 심술궂은 인상과 마법사 로브가 부조화를 이루는 사내였다.
안경을 신경질적으로 치키는 이 남자는 현 제국 10인의 글라도스(4성) 등위의 마법사.
한 줄로 설명하라면 라미네아의 친우이자 용사 파티의 일원, 델프레드 울프 블라도였다.
“야 인마, 뚫린 입이라고 그런 말이 나오냐? 추기경 오주(五柱)들께서 어서 제자를 구하라 했는데 전국 순회 여행이나 다니면서 날씨 타령하는 게 말이 돼?”
“힝, 맘에 드는 애가 없는 걸 어떡해?”
“힝? 힝? 몇 살 처먹은 놈이 힝은 뭔 놈의 힝! 이게 진짜.”
델프레드 옆에서 얌전하게 마도서를 탐독하던 소년이 황망히 스승의 옷자락을 잡았다.
“진정하세요, 스승님.”
“나도 요한같이 귀엽고 참한 애가 있었으면 냉큼 받았을걸.”
소년의 이름은 요한 프로스트. 라미네아가 볼을 쭉 잡아당기자 얼굴을 수줍게 붉혔다.
지위와 명성에 어울리지 않게 일행은 그렇게 셋뿐이었다. 심지어 라미네아는 산책을 나가는 평민의 복장이었다.
그녀는 용사였으나 늘 그렇게 평화를 만끽했다. 신분을 숨긴 채 세계의 면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그 아름답기로 유명한 성검 아라다만텔을 패용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다.
다른 누군가에게, 칼의 세계를 모르는 이들에게 위압감을 주는 게 싫다는 이유로.
델프레드가 한숨을 내쉬었다.
“라미네아, 넌 늘 너무 대충대충이야. 전선 상황이 심상치 않잖아. 언제 또 마족들이 <시라프> 대공세 같은 일을 벌일지도 모르는데.”
전시에, 페이쿼리어의 평균 수명은 20대 중반에서 30대 초반에 불과했다.
수명을 깎아 힘으로 전환하는, 자신의 몸을 태워서 세상을 밝히는 촛불의 삶을 살아가는 그녀들의 수명은 처참하도록 짧았다.
그렇기에 페이쿼리어들은 반드시 제자를 받아들여서, 그 아이들에게 칼의 길을 지도해야만 했다.
자신이 전장에서 예기치 못하게 죽게 되었을 때, 의지와 실력이 모두 계승될 수 있도록.
‘하지만 이 녀석은…….’
일성칠검(一聖七劍)을 대표로 하는 유명 검파와 삼대검가에는 유망한 소녀들이 적잖이 많았다.
페이쿼리어의 제자가 되는 것은 그런 소녀들의 비원, 꿈과도 같은 상황이다.
그렇기에 라미네아의 제자가 되기 위해 많은 소녀들이 몰려들었으나, 이 녀석은 대화 몇 번에 그걸 죄다 거절하지 않았던가.
“인생 전부를 바쳐도 페이쿼리어가 되지 못하는 애들이 불쌍하지 않아? 네가 누구보다 그 고통을 잘 알 테니, 좀 끼가 있다 싶으면 이제 그만 받아주라고.”
울타리를 장식한 꽃을 보며 딴청을 부리던 라미네아의 눈빛에 문득 진솔한 날카로움이 깃들었다.
“델프레드, 넌 음식을 먹을 때 어떻게 먹어? 먹고 싶은 것? 아님 영양 위주로?”
“달달한 것 위주로 먹는다. 지식을 쌓기 위해서는 당분으로 뇌를 활성화시켜야 하니까.”
“그래서 뱃살이…….”
“닥쳐.”
“난 내가 먹고 싶은 것만 먹어. 제자도 마찬가지야. 난 내가 키우고 싶은 아이를 키울 거야. 다른 아이는 필요 없어.”
라미네아는 정색에 가까운 어조로 말하고는 빙글 몸을 돌렸다.
제자 요한이 식은땀 흘리며 남녀의 눈치를 살피는 가운데 델프레드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쯤이었다. 농원 마을 저편에서 짤막한 비명이 들린 것은.
“지금 주셔야죠, 나중에 주겠다니 그게 대체 무슨 말입니까.”
“하, 거참! 이놈의 여편네가 사람 진짜 귀찮게 하네. 돈을 안 주겠단 게 아니고 다음에 왔을 때 같이 지불하겠단 거 아냐.”
“쉰 명이나 되는 병사를 몰고 와서 봄 양식을 다 먹어놓고 돈을 지불하지 않겠다면 우리는 다 굶어 죽으란 소리잖아요. 저번에도 전쟁 세금으로 겨울 식량도 다 가져갔었으면서!”
그러자 위병들 사이에서 이쑤시개로 앞니의 고깃점을 빼내던 거한이 아낙네 앞에 가서 위압적 그림자들 드리웠다.
“계집, 지금 그 요망한 발언은 뭐지? 벨체스터 가문을 섬기는 기사인 나 알론드가 지금 너희들을 착취하는 것처럼 들리겠는데?”
아낙은 그 위압감에, 그리고 살기에 어찌 말도 못 하고 우물쭈물했다.
무슨 일인가, 싶어 몰려든 사람들도 서른 명은 족히 되어 보였으나 감히 나서는 자가 없었다.
위병들이 승리감에 야릇한 실소를 주고받는 걸 보다 못한 라미네아가 나서려던 그때였다.
“값을 똑바로 치러.”
정말 놀랍게도 그들의 앞을 가로막은 건 한 소녀였다.
이제 여덟?
열 살쯤 되었을까?
부러지기 직전인 목검을 쥔 모습도 기괴했으나, 그 의상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다. 요한이 의아하게 눈썹을 치켰다.
‘명문가의 비단옷…….’
근데 먼지와 때로 남루하고 지저분했으며 크기도 맞지 않는지 무릎 위쪽의 살이 드러났다.
훔쳐 입었다기보다는, 저 옷만 너무 오래 입을 수밖에 없는 형편으로 보였다.
하지만 그게 가능한 일인가? 명문가에서 내버린 옷을 몰래 주워 입은 게 아니고서야.
“엇…….”
“저건…….”
그 얼굴을 알아본 위병 몇몇이 주춤거린 반면, 알론드가 거만하게 침을 퉤 뱉었다.
“쫄 것 없다. 저건 벨체스터 공께서 기르는 짐승이야.”
“하지만 그래도 나리의 따님 아닙니까.”
“서녀지. 저택에서 저 녀석의 말을 들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라져도 아무도 모르지. 교회의 율법 때문에 거두고 있는 것일 뿐, 마님께선 저게 소리 없이 사라지길 바랄걸? 그러니까 다른 도련님들이 훈련받을 시간에 이런 곳이나 기웃대는 거 아냐.”
그런 모욕에 위병들이 낄낄대기 시작했고, 소녀의 양쪽 볼이 절망적으로 붉어졌다.
그러나 소녀는 비켜서지 않았고, 목검의 칼끝을 여전히 알론드에게로 겨누고 있었다.
알론드가 위병들을 끌고 그걸 무시하고 지나가려고 한 순간.
“!”
소녀가 검무를 펼쳤다.
분명 어색하고, 어딘가 교과서적이고 딱딱했으나…….
저것은 분명히 벨체스터 가문의 전령(電鈴) 검법이었다.
‘어떻게 이런…….’
저 나이에 맞는 실력이라고 보기엔 어려웠으나 한계는 명백했다.
2차 성징조차 오지 않은 소녀는 허우대가 심히 짧았다.
또한 검법 대부분이 어깨 너머로 훔쳐 배운 동작들이라, 자세는 허점투성이였다.
“가만히들 있어라. 아가씨께서 놀고 싶으시다는데 내가 좀 놀아드려야겠다.”
제국의 기사 알론드에게는 저 정도 실력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소녀의 공세를 유도했다가 발을 슬쩍 걸어 넘어뜨리자, 소녀는 땅바닥을 구르며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었다.
알론드가 소녀의 뒷덜미를 붙잡아 일으켜 세웠다.
“이게 끝입니까?”
그리고 저 멀리 내던지며 도발을 이어나갔다.
“놀아달라고 했으면 그 책임을 지셔야지요. 자, 어서.”
눈동자에 물기가 맺히면서도 소녀는 다시 일어났고 또다시 쓰러졌다.
아니, 쓰러질 뻔했다.
그때, 어떠한 기척도 소리도 전조도 없이 나타난 누군가가 그 등을 받쳐주지 않았더라면.
백발(白髮)…….
햇살 속에서 새하얗게 나부끼는 머리카락…… 그 수많은 윤곽이 흐르며 남긴 잔상을 쫓으려니 눈이 아렸다.
태양의 금빛을 품은 용안(龍眼)이 상냥하게 소녀를 내려다본 것도 잠시.
라미네아의 눈매가 잔혹하게 일그러졌고, 거기서 발출된 살기로 사방에서 짐승들이 울부짖고 새들이 날아올랐다.
사람들은, 병사들뿐만 아니라 기사인 알론드조차도 몸이 얼어붙어 거동조차 할 수 없었다.
“벨체스터를 섬기는 기사들은 모두 네놈처럼 쓰레기인가?”
“다, 당신은……?!”
“만약 이 아이를 상대로 칼을 뽑았더라면 그 순간 네놈의 손목을 잘라버렸을 것이나, 발을 걸어 넘어뜨린 게 전부니 그 대가만 치르게 해주겠다.”
눈에 비치지도 않는 속도, 갑옷과 뼈가 부서진 소리가 들린 이후에야 통증이 치밀었다.
소녀의 발을 걸어 넘어뜨리던 발목이 으스러졌다. 알론드가 비명과 함께 땅바닥을 나뒹굴었다.
도저히 믿기지 않지만, 합판을 우그러뜨리고 발목을 골절시키는데 필요한 건 한 번의 발길질뿐이었다.
델프레드가 한숨과 함께 관자놀이를 주물렀다.
“에휴, 조용히 여행하고 싶다고 한 게 누구였는지…….”
위병들이 멍하니 그 광경을 쳐다보다가, 이내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요, 용사 나리, 저희는 그저.”
“닥쳐. 이 멍청한 기사를 데리고 저택으로 돌아가라. 그리고 벨체스터 공에게 전해. 내일 라미네아 알터 아라다만텔이 저택을 찾아간다고. 뭣들 해! 당장 꺼져!”
겁을 지레 먹은 위병들이 허겁지겁 알론드를 데리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 더러운 시정잡배들이 시야에서 사라지기 무섭게, 구경꾼들 사이에서 환성과 갈채가 일었다.
멋있다, 역시 용사님이다, 등…… 라미네아는 빙그레 웃으며 손짓으로 답례한 뒤, 흙투성이인 소녀를 돌아보았다.
“너 정말 멋지구나. 이름이 뭐니?”
그 질문에, 소녀는 입술을 떠듬거리며 시선을 떨구었다가 불현듯 몸을 돌려 도망치고 말았다.
“어라……?”
라미네아가 멍하니 눈을 끔뻑이자 델프레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다가왔다.
“아까 그런 살기를 내뿜었는데, 저런 애가 겁을 먹지 안 먹겠냐? 좀 지나쳤어.”
“저런 걸 보고 어떻게 참아?”
“저 아이의 이름은 카밀라 플라워라고 합디다.”
한 노인이 혀를 차며 말했다.
플라워는 중부 귀족들의 사생아에게 붙는 성씨였다.
“새 영주님의 서녀지요. 근데 주인마님에게서 미움을 어지간히도 받는지 꼴이 말이 아닙디다.”
“그런…….”
“영지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목검을 휘두르곤 하는데, 허, 참 불쌍한 아이요. 예전 영주님은 참 인자한 분이셨는데…….”
* * *
카밀라는 저택으로 돌아갔다.
소리 없이 담을 넘었다.
방은 3층 높이의 탑으로 격리실에 가깝지만, 이 또한 익숙하게 벽을 타고 또 기어올라 창틀 위에 올라섰다.
“왔군.”
“왔네요.”
명령을 받았는지 그곳을 하녀들이 지키고 있었고 바로 당주에게 보고했다.
벨체스터의 당주가, 아버지가 방으로 올라오는 발소리에 공명하듯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다.
소녀에게 아버지는 아버지가 아니었다.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를 수도 없었다.
쿵, 쿵, 쿵, 쿵쿵, 쿵쿵쿵쿵.
복도의 등불을 험악하게 등지고 나타난 그림자.
그 그림자가 얼굴 위로 시꺼멓게 드리워지기 무섭게, 뺨에서 불꽃이 일며 목뼈가 부러질 기세로 얼굴이 홱 돌아갔다.
“네년이 무슨 짓을 한 줄 아느냐? 알론드를 막아 세워? 그래서 페이쿼리어한테 우리 가문을 욕보여?”
“나쁜 짓을 한 건 알론드 그놈이라고요! 가문을 욕보인 건 내가 아니라──!”
“──닥쳐라! 알론드는 내 휘하 기사다! 모든 영지는 다 내 지배 아래 있고 난 감세를 해주든 해서 그걸 다 지불할 능력이 있어! 근데 네가 뭔데 주제넘게 그딴 짓을 해서!”
목검이 허벅지 위를 때렸다.
뇌리에 번개가 내리꽂히는, 다리가 부러지는 듯한 격통에 카밀라가 고꾸라졌다.
아팠다.
몸도 아프지만, 그보다 마음이 더욱 아팠다.
벨체스터의 당주가 목검을 신경질적으로 내던졌다. 허벅지가 피멍으로 물들어갈 때 당주가 하녀들을 불렀다.
“저년을 깨끗이 씻겨라. 내일 용사님께서 오신다는데 괜히 더 오해를 사선 안 돼.”
“피멍은 어찌할까요?”
“치맛자락으로 대충 가리든가, 아니면 사제를 보내줄 테니 치료시키게 하든가.”
저택에서 카밀라는 혐오와 경멸의 대상이었다.
소녀를 씻기는 동안에도, 저 멀리서 향료와 타월을 가져오는 하녀들이 손으로 입가를 가린 채 서로 무어라 귀엣말을 했다.
“진짜 이런 애가 어떻게 당주님의 딸이지?”
“냄새 나는 것 좀 봐.”
“그래도 꼴에 귀족의 피를 받았다고 이렇게 사람답게 사는 거 아니겠어. 좋으시겠다 정말.”
비틀거리면서 3층까지 올라와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침대 밑에 고이 숨겨둔, 가죽 장정의 책을 펼쳤다. 낡고 곰팡이가 슬어서 버려졌던 책이었다.
거기에는 수많은 동작, 이 창문에서 연무장을 훔쳐보며 아버지와 이복형제들의 동작들이 서투른 솜씨로 그려져 있었다.
‘나는 그냥…….’
인정받고 싶었을 뿐인데.
한 번이라도 좋으니, 아버지에게서 딸로 인정받고 싶었을 뿐인데.
눈물이 주르륵 종잇장에 떨어지며 잉크가 번졌다. 카밀라는 황급히 눈물을 닦아내야 했다.
“읏, 으읏, 으흑…….”
그러는 동안에도 눈물은 계속, 쉴 새 없이 떨어져서, 낙서들을 계속 뿌옇게 흐려지게 만들었다.
눈물은 그치지 않았다.
* * *
“어서 와라. 라미네아, 아니, 이제는 페이쿼리어가 되었으니 ‘어서 오십시오.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라고 말해야 하나?”
이튿날, 라미네아 알터 아라다만텔은 예고한 대로 벨체스터 가문의 저택으로 들어섰다.
모든 하인들이 극진히 예의를 갖추었으며, 위병들과 기사들도 정장을 갖춘 채 경례를 올렸다.
벨체스터의 당주 일가의 복장이 가장 화려했다.
당주는 열세 살 친아들과 아홉 살짜리 친딸에게 허우대에 맞는 외날검까지 맞춰주어 라미네아에게 선보였다.
물론 열한 살짜리 서녀인 카밀라에게는 그런 검은 주어지지 않았다. 밤새 운 소녀의 눈가가 붉게 부풀어 있었다.
“저번에는 오해가 있었던 것 같은데…….”
라미네아는 벨체스터 가문의 당주 오펠의 변명을 듣지 않았다.
다른 그 누구에게는 관심 한번 주지 않고 바로 카밀라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처음 만났다는 듯, 신기하단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 아이의 이름이 뭔가요?”
“음? 저건 볼 필요 없는데. 저것보다는…….”
“이름이 저것인가요? 그건 아버지로서 좀 너무한 것 아닌가요?”
라미네아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지자, 그 순간 밀려든 압박감에 오펠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라미네아.”
그러거나 말거나, 라미네아는 구석에서 잔뜩 움츠리고 있던 카밀라에게 다가와 한 무릎을 꿇었다.
“안녕, 내 이름은 라미네아라고 한단다. 네 이름은 뭐니?”
그렇게 말할 때의 미소가.
너무나도 눈부셔서, 따스하고 뭉클해서…….
한 번도 그런 미소를 받아본 적이 없었던 카밀라는 저도 모르게 대답하고 말았다.
“카밀라…….”
“카밀라? 어머나! 이름이 정말 귀엽네. 얼굴 보단 아니지만.”
아하하, 해맑게 웃던 라미네아가 문득 카밀라에게로 손을 내밀었다.
“카밀라, 이 언니랑 같이 갈래?”
순간 홀 전체가 정적에 잠겼다.
저 발언은 아무나 들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냥 ‘같이 간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페이쿼리어가 소녀에게 저런 말을 한다는 건, 제자로 택하겠다는 소리였으니까.
“무슨…… 지금 뭐라고? 내가 잘못 들은 건가?”
당주만이 기가 막힌다는 듯한 날숨을 몇 번 뱉을 뿐이었다. 그리고는 카밀라는 노려보았다.
카밀라는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자신의 방으로, 자신의 격리실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저 시선을 받아낼 용기가 없었다. 평생, 복종할 수밖에 없게 훈련받아온 눈빛이었다.
그렇지만 아버지의 명령대로 라미네아의 면전에다가 싫다고 말할 용기도 없었다.
숨을 헐떡이며.
그 현장으로부터.
어쩌면 이 어둠뿐인 삶에 운명처럼 찾아온 빛으로부터.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기회를 놓쳐버린 건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방에 도착해 문을 열자마자, 옆에 라미네아가 와 있는 게 아닌가.
마치 정오의 햇빛으로부터 피할 곳이 없고 또 피할 수가 없듯이.
“여기가 카미의 방이야?”
“……?”
“흐음, 매일 뛰어오르기 힘들겠네. 그래도 체력 단련 하나는 제대로 되겠다, 그치? 검사한테 체력은 아주 중요해.”
카밀라는 황망히 우물쭈물하며 뒷걸음질 치다가 이내 제 발에 걸려 넘어졌다.
아니, 또 넘어질 뻔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라미네아가 카밀라의 양 옆구리를 붙잡고 하늘 높이 들어 올리더니 빙그레 웃어 보였다.
“소중한 몸인데 그렇게 막 다루면 안 돼.”
뭐지?
이 따스한 느낌은.
이런 걸 뭐라고 할까, 행복이라는 게 이런 거였던가.
“다리를 다친 거야? 어제 보니 균형 감각이 엄청 좋던데, 뒷걸음치다 넘어진 건 좀 이상하다.”
라미네아가 카밀라를 침대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으며 빙긋 웃었다.
“내 몸에 손대지 마!”
그 미소를 끊어내듯, 카밀라가 사납게 소리쳤다.
“당신은 또 뭐가 목적이야? 어른들은 다 똑같아! 나한테 뭐 이용할 거리가 보여? 안 믿어, 그렇게 친절하게 굴어봤자.”
허벅지를 검푸르게 물들인 피멍이 곧 세계의 진면(眞面)이었다.
이 세상은 쓰레기다.
그리고 어른들도 쓰레기다.
라미네아는 카밀라를 처연한 미소로 바라보다가 문득, 침대 머리맡에 놓인 책을 발견했다.
“아, 안 돼!”
그리고 카밀라가 말릴 틈도 없이 그 책을 펼쳤고…… 두 눈이 흔들렸다.
“뭐야 이거.”
이 책에 깃든 것은 열정이…….
종이 하나하나, 그림 하나하나에 스며든 필사적인 집념이…….
어린아이가 마땅히 누려야 할 사랑을 향한 갈구가 체현된 것만 같아서…….
“내 아버지는 페이쿼리어가 될 만한 핏줄을 만들려고 날 만들었대!”
카밀라는 그 책의 내용을 항변하기라도 하듯, 떨리는 입술을 겨우 움직여 목소리를 냈다.
“내 엄마를 강제로 범해서!”
목소리를 내기가 힘든지, 가슴속에서 쥐어 짜내듯, 오른손으로 가슴팍을 꽉 움켜잡으며.
“근데 실패작이라고 이 모양 이 꼴이야. 당신도 나한테 실망하고 나면 똑같이 행동할 거잖아.”
숨을 헐떡거리는 두 눈에서 눈물이 방울져 흘러내렸다.
“아버지가 그랬어! 나는 쓸모가 없다고! 실력도 없고 방해만 된다고! 그러니까, 당신이 날 데려가 봐야, 나중에는 똑같이 굴겠지. 그러니까──!”
그 말을 잇지 못한 게 만든 건 단 하나의 동작이었다. 그리고 평생 받아보지 못한 동작이었다.
포옹(抱擁).
라미네아가 카밀라를 꼭 끌어안았는데, 그 손이 연민과 분노로 부르르 떨렸다.
“카미, 너는 조금도 쓸모없지 않아. 실력이 없는 것도 아니야. 그냥 나쁜 사람들 밑에 있다 보니 그렇게 생각하게 된 거야. 그러니 자기에 대해 그렇게 말하지 마.”
“이거 놔! 놓으란 말이야! 다, 당신 눈에는 나한테 소질이 있어 보이나 보지? 그걸 이용할 생각인 거 아니야? 아니냐고……!”
“검을 잘 쓰는 놈은 이 세상에 널렸어. 정말 널린 수준이야. 하지만 말이지? 다른 사람을 위해 검을 들 줄 아는 사람은 지극히 드물어. 이건 내 스승님께서 해주셨던 말이니 믿어도 좋아.”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걸까.
제멋대로 말하면, 굴면 안 된다고 배웠는데. 자신은 저런 칭찬을 받을 자격이 없는 존재라고 들었는데.
“그, 그건 그냥 알론드 그 자식이 평소부터 마음에 안 들어서……!”
누군가는 주위로부터 당연하게 받는 상냥함을 평생 받지 못할 거라 생각했는데.
“요점은, 너는 충분히, 아니, 너무나도 대단하단 거야! 처음 본 순간부터 반해버렸는걸! 그래서 어제 처음으로 생각해버리고 만 거야. 누군가를 진심으로 가르쳐보고 싶다고. 후후.”
나에게는.
나에게는 이제 아무것도 없었는데. 없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이 길로 누구도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어. 그 누구와도 맺어지지도 못하고, 늘 전장에서 살다가 죽어야 하는 삶, 너무 고되고 힘든 길이니까…….”
욕심을 내봐도 되는 걸까.
한 발 앞으로 내딛어, 저 눈부신 공간으로 들어서도 걸까.
그런 게 절대로 가능할 리 없어.
“하지만 만약 내가 누군가와 반드시 사제의 연을 맺어야 한다면 카미와 함께하고 싶어. 물론 카미도 원한다면 말이지만.”
그렇게 평생 생각해왔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또 평생 바라오지 않았던가?
“제자가 되기 싫다면 우리 가문에 양녀로 오면 어떨까?”
언젠가.
메아리 한번 없던, 자신의 삶의 필사적 동경(憧憬)이 하늘에 닿는 날이 오기를.
“근데 그걸 네 아버지가 허락할지…… 제자가 아니고선 널 여기서 합법적으로 빼낼 방법이──”
그래서였던 걸까?
머릿속으로 고민이 끝나기도 전에 입이 제멋대로 열리고 있던 건.
“───나 같은 게 정말로.”
늘 암흑 속에 있었기에 아는 것이 있다. 늘 암흑 속에서 발버둥 쳤기에 보이는 것이 있다.
그래, 알 수 있는 것이 있다.
바로 이것이, 자신의 삶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비쳐든 빛이라는 걸.
“나 같은 게, 정말로, 당신을 따라가도 돼……?”
그러면 당신처럼 될 수 있을까.
처음 본 사람한테.
“그러면…….”
세상에서 제일 보잘것없는 사람한테.
“그러면 나를…….”
이렇게나 멋진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데려가 줘요…… 저 밖으로…….”
그 눈물 어린 숨 가쁜 대답이.
놀랍다는 듯이, 기쁘다는 듯이, 그리고 무엇보다 슬프다는 듯이.
복합적인 감정이 얼룩진 미소로 시선을 내리깐 라미네아가 카밀라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이제부터는 스승님이라고 부르렴, 당신이 아니라.”
그때, 라미네아의 입가를 동시에 스치고 지나갔던 감정의 정체는 어떤 것이었을까.
이건, 분명 슬픔이었을 것이다.
이 참혹한 칼의 세계로 데려오지 않고서는, 결코 엮어질 수 없는 두 사람의 인연에 대한 슬픔.
저 먼 어린 날.
지금도 찬란히 빛나는 어린 날.
스승님에게 비슷한 말을 들었던 자신의 모습이 저 얼굴 위로 포개어지는 데에서 오는 슬픔.
그렇기에 슬픔이었던 것일까.
이 인연이 끝내, 어떤 귀결을 이룰지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아는 데에서 오는 슬픔이었던 것인가.
“약속할게. 내가 스승님한테 받았던 것 모두를, 하나도 빠짐없이 카미에게 주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