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 of the Fake Hero RAW novel - Chapter (194)
가짜 용사 이야기-194화(194/310)
시즌 3 : 2화
기원력 1668년 6월 13일.
여름이 사근거리기 시작하는 6월도 중순에 들어섰다.
한 달 동안 이어진 라미네아와의 동행은 기행의 연속이었다. 동화에 나오던 용사님과 똑같은 게 무엇 하나 없었다.
“카미, 이쪽이야! 이쪽으로!”
걸어서, 여러 마을에 들르며 숙식을 대가로 온갖 도움을 주었다.
지금, 카밀라가 상자를 나르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이 마을의 보리 파종 준비를 돕는단 이유라나 뭐라나.
“아이고, 정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요. 덕분에 나흘치 일을 반나절 만에 끝내버렸네.”
“여기 카미가 열심히 도와준 덕분이랍니다~.”
“아, 그 꼬마 아가씨도 정말 손재주가 좋더군요. 정말 고마웠다, 애야.”
“네? 아, 뭐…… 네.”
“그나저나 보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도시락이나 좀 싸주세요. 이틀 정도 먹을 수 있으면 좋겠네요.”
이름도 될 대로 되란 식으로 가명을 쓰고, 머리는 그날그날 내키는 색으로 염색하고 다녀서인지 아무도 그 정체를 몰랐다.
궁금했다.
누구에게나 환하게 웃고, 또 상냥하게 미소 짓는 이 사람의 눈에는 세상이 얼마나 화사하게 비치는 걸까.
‘나의 세계는…….’
나의 눈에 비치는 세계는…….
그저 어둡고 칙칙하기만 한데. 아무런 색도 없고, 아무런 향기도 없는…….
무음(無音)과 무취(無臭).
“늘 이런 식이에요?”
“이런 식이 무슨 식?”
“벌써 들른 마을만 다섯 곳…… 지난번에 옥수수밭에서 메뚜기 마물 토벌한 것만 빼면 수수한 것들뿐이잖아요.”
옆으로 시냇물이 푸르게 흐르는 오솔길, 그 새순이 싱그럽게 돋아난 길을 앞서 걷던 라미네아가 싱긋 웃었다.
“수수한 게 좋지. 용사가 아무짝에도 쓸 데가 없는 시대가 제일 좋은 거야. 왜, 마음에 안 드니?”
카밀라는 라미네아의 시선을 슬쩍 돌려, 상쾌한 솔향을 내뿜는 소나무를 올려다보았다.
“마음에 안 든다기보다는…… 그냥 듣던 거랑 달라서 물어봤죠.”
“음~ 그렇게 다르지 않은 것 같은데.”
“칼을 들고 마족과 싸우러 가는 용사와 마을 축제를 돕는 용사는 많이 다른 것 같아요.”
“카미, 용사란 어떤 존재라 생각하니?”
순간적으로 숨이 막혔다.
너무나도 분명한 질문인데, 너무나도 모호한 질문처럼 들렸다.
그 정의(定義)를 분명 알고 있었던 것 같은데, 문득, 그 앎이 더없이 모호하게 느껴진 것이다.
“어…… 글쎄요? 용감하고 강해서 마족이랑 싸우는 그런 사람이죠 뭐.”
“용사란 건 말이지, 그렇게 거창한 게 아니야. 웃으면서 남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은 다 용사야. 그러니까 처음 만났을 때의 카미도 용사였던 거지.”
“그, 그건, 그냥 그 뚱보 기사 녀석이 싫어서 그랬던 것뿐이에요! 용사는 무슨.”
그렇게 약한 용사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런 놈이 용사로 불릴 정도면 세계는 진작 멸망했을 것이다.
“내 말은, 마족과 싸우는 용사나 마을 축제를 거드는 용사나 똑같단 거지.”
“뭔가 그럴듯한 게 오히려 더 헛소리 같은데…….”
카밀라가 눈을 가늘게 뜨자, 라미네아가 맑게 웃었다.
“왜 웃어요?”
그 질문을 받은 라미네아는 이곳이 아닌 어딘가, 먼 과거의 어느 풍경을 더듬는 듯한 슬픈 미소를 지었다.
“나도 이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비슷하게 대답했었거든. 자, 가자. 해가 지기 전에 다음 마을로 가야 편하게 잘 수 있어.”
제자로 받아들이겠다고 해놓고, 검술이라고는 무엇 하나 가르쳐주지 않던 1668년의 여름…….
바로 그 여름이었다…….
먼 미래에 돌이켜보면, 기억의 중심부에서 항상 화사한 빛을 발하는 게 바로 그 여름이었다…….
안녕(安寧), 그 슬픈 인연의 아름다운 시작 (2)
기원력 1668년 6월 27일.
엘레아노르 대하(大河).
엘레아노르 대하는 제국 중부와 북부를 가르는 경계선으로, 동부 영원산맥에서 발원한 수백의 지류가 합쳐지며 이룬 거대한 강이다.
“보다시피 여름이 다가올 때마다 강이 범람해서 피해가 크다네.”
수염이 새하얗게 늘어진 촌장이 지팡이를 짚은 채로 말했다.
“저 둑은 옛날에 용현께서 만들어주셨던 건데, 이제는 아무런 도움이 안 돼. 마법사들은 콧대가 높아서 도와주러 오지도 않고, 모험가 노릇을 하는 마법사들은 고용해봤자 실력이 없으니 말해 뭐하겠는가.”
용현(龍賢).
황금시대의 뒤를 잇는 ‘은(銀)의 시대’를 열었던 용의 현자. 삼영룡의 아버지이기에 저런 별호가 붙었다고 한다.
지금으로부터 무려 200년 이전의 인물이다.
‘도대체 어떤 힘으로 한 거야?’
카밀라는 멍하니 그 둑이란 놈을 올려다보고 있어야 했다.
둑이라기보다는, 지축 전체가 뒤틀리며 절벽처럼 솟아올라 있었으니, 이건 인공 절벽이라 해야 하지 않나……?
처음에는 아주 견고했겠으나 200년의 흐름 속에서 지대가 침식되면서, 이제는 붕괴하기 직전처럼 보였다.
“음.”
턱에 검지를 붙인 채 생각에 잠겨 있던 라미네아가 말했다.
“나무를 쐐기처럼 박는 방식으로 지지대를 만드는 방식으로 1년 정도는 잡아야겠는데요.”
“1년? 10년은 걸릴 일 같네만. 젊은것들은 죄다 도시의 공장으로 가버려서 말이야…….”
“그냥 맡겨주세요. 밥만 잘 챙겨주시면 되고요.”
그 6월부터, 카밀라는 라미네아로부터 검술을 지도받게 되었다.
“나무 베기는 좋아. 근력을 기르는 동시에 칼날에 마력을 담는 기초를 훈련할 수 있거든. 자, 받아.”
라미네아는 마을에서 도끼 대신 싸구려 철검을 얻어왔다.
검(劍)…….
라미네아가 내민 그 쇠붙이를 붙잡을 수 없던 건 어째서일까. 아마도, 칼이라는 개념 위에 서린 악몽의 기억들 때문이었으리라.
“검을 별로 안 좋아하니?”
“잘 모르겠어요.”
“음~ 이상하네. 그때 그 책을 보니 카미가 엄청 열심히 공부하고 훈련했던 걸 바로 알겠던데.”
카밀라는 눈빛이 음울하게 잠드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것 말고는 방법이 없는 것 같아서…….”
검은 싫다.
검이 좋았던 적이 있었나?
‘좋아질 뻔한 적이 있긴 했지만, 아주 잠깐뿐.’
벨체스터 가문에서는 매일매일 맞았다. 출신이 천하고 또 재능이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근데 왜, 열심히 했을까.
왜, 그렇게나 열심히 했던가.
어째서, 손에서 검을 못 놓았을까.
– 그럼 나는 커서 엄마의 용사가 될게!
어머니가 죽기 이전에, 그러니까 아직 삶의 여름이 시작되기 전에, 그렇게 말했던 적이 있었다.
용사가 뭔지도 모르면서.
그냥, 어머니가 잠자리에서 읽어주는 동화책에서는 용사가 제일 대단한 사람처럼 여겨져서 그랬을 것이다.
대단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아버지 없이 홀몸으로 자신을 길러주시던 어머니를 호강시켜드리고 싶었던 것이다.
“어떤 방법? 혹시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릴 방법을 말하는 거니?”
“……!”
“카미가 왜 처음 본 순간부터 마음에 쏙 들었나 했더니, 나랑 닮은 점이 정말 많구나.”
“없어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일까.
“닮은, 점이라곤, 없다고요.”
나는 이토록 비루한 반면 당신은 출생부터 대귀족의 자제고, 용사고, 빛나고, 눈부신데.
한번 물어보고 싶었다.
언니의 눈에는 세상이 어떻게 보이나요. 모두 아름답게 보이죠? 제 눈에는 그저 어둠만이 보여요…….
“하나도 없다고요.”
카밀라의 자조적이고도 신경질적인 중얼거림에, 라미네아가 서글픈 미소를 짓더니 불현듯 칼집에서 철검을 뽑았다.
남루한 칼날이었다.
이가 몇 개나 뽑히고, 날에는 녹이 퍼져 있었다. 무엇 하나 벨 수 없이, 무능력해 보였다.
“내 아버지는 말이야. 내가 일곱 살이 되던 해에 돌아가셨거든.”
그 칼날 위로 푸르게, 마치, 꽃이 피어나는 듯한 형상으로 휘감기는 기류는…… 마력(魔力).
그 마력으로부터…….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이 세상의 향기가 아닌 쾌청한 꽃향기가 퍼져 나오는 게 아닌가. 카밀라는 멍하니 눈을 떴다.
“아버지가 떠나고 나니까, 문득 생각나는 거야. 내가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해드렸다거나 기쁘게 해드렸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단 걸. 나는 어릴 적에 엄청난 장난꾸러기라서 부모님 속만 썩였거든. 아, 카미, 잠깐 고개 숙여 보렴.”
그 꽃의 기류와 꽃의 향기를 두른 칼날이 부드러이 나아가, 세상을 반절(半切)로 나누었다.
참격의 절단면이 경계선이 됐다.
그 경계선에 있던 존재들, 그러니까 수십 그루의 수목들이 연결점을 잃어버린 채 단숨에 벌목되어버렸다.
‘뭐야…….’
검술 하나로 이토록 고양되어본 적이 있었나 싶었다. 이토록 가슴이 뛰어본 적이 있었나 싶었다.
이런 감정을 뭐라 하더라……?
계속해서 가슴을 뜨겁게 만들고, 계속해서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러한 감정…… 이게 동경(憧憬)이란 감정인가?
“그때 세츠넨 고모님께서 천국 이야기를 해주셨어. 천국 복음에 대해 알고 있니?”
“대충 알고는 있는데…….”
그런 이야기를 확실하게 믿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끝내주지 않니? 삶의 경주를 마치면, 저 아름다운 하늘나라에서 아버지를 다시 만날 수 있다니! 난 말이야, 그래서 용사가 됐어. 용사가 된 세 가지 이유 중 하나가 이거야.”
“다른 두 개는 뭔데요?”
“하나는 나한테 마법의 재능은 없지만 검의 재능이 있었단 거고, 다른 하나는…… 이건 나중에 말해줄게. 아무튼 본론을 말하자면.”
그렇게 말하는 라미네아의 눈동자는 여덟 살 소녀처럼 순수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마치, 저 하늘의 별들처럼.
어두운 밤에 길 잃은 이들의 방향을 빛으로 안내하는 별자리처럼.
“천국에서 말이지? 내가 도움을 줬던 사람들이 아버지한테 이렇게 말하는 걸 상상해보곤 해. ‘따님한테 정말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라거나 ‘따님은 정말 대단한 분이셨습니다’ 이렇게!”
눈앞에 구름 위의 세계, 어떤 고통도 슬픔도 눈물도 없는 세계가 펼쳐지는 이야기였다.
헛소리다.
궤변이다.
그런데 대체 왜, 어떻게, 저 이야기의 흐름이, 하나의 선율처럼, 의식을 저 먼 하늘의 낙원으로 데려다주는 것만 같은지…….
“우리 아버지는 감정 표현이 서투르신 분이셨거든. 아버지가 믿지 못하겠단 시선으로 날 보시겠지? 그러면 나는 당당하게 승리의 V자를 펼칠 거야. ‘어때요, 아빠 딸 대단하죠?’ 이렇게 말하면서.”
그 이야기 속에서, 카밀라는 문득 하늘의 낙원에 가 있었다.
카밀라는 새하얀 백발에 용의 눈동자를 가진 용사였고, 다시 만난 어머니는 헤어졌을 때와 달리 건강해져 계셨다.
카밀라는 쑥스러워서 어머니와 시선을 맞물리지 못하면서 입을 열었다.
– 엄마, 저 용사가 됐어요. 그때 약속한 것처럼요.
어머니는 웃었다…….
그 고요한 웃음에 웃음이 아니라 울음으로 화답하고 있는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러더니 그 꿈의 환상은 벚꽃처럼 부서져 흩날렸다. 그 빛의 흩날림 속에서, 세상의 어둠이 희미하게 걷혔다.
그 빛의 포화로부터, 소녀의 세상에 색(色)이 돌아왔다.
세상에, 향기가 돌아왔다.
세상이, 다시 화사하게 물들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살아 계시고 어머니와 함께하던 날들처럼.
“그렇게 다시 만날 날을 생각하면…… 힘들 때도 힘이 나더라고. 웃을 수 없는 순간에도 웃게 돼.”
라미네아는 철검의 낡은 검신을 바라보며 슬픈 미소를 거두었다.
카밀라는 급히 눈물을 훔쳤다.
그리고 머뭇거리던 발걸음을 앞으로 놀려, 양손을 라미네아에게로 내밀었다.
“……주세요.”
“응?”
“칼 주세요. 나무 베기, 그냥 갑자기 한번 해보고 싶어져서요. 절대 방금 해주신 이야기 때문은 아니고요.”
분명, 1668년의 그 여름이었을 것이다. 멈춰 있던 삶의 시계가 다시 춤추기 시작하는 소리가 들렸던 것은.
딱, 딱, 딱…….
그때, 그 소리는 라미네아의 지도와 웃음 속에서 나무에 연신 부딪치는 칼의 소리였다.
그리고…….
그때…….
그 소리는…….
죽어가던, 죽어서 썩어가려던 육신에서 심장이 다시 맥동하는 소리처럼 들렸다.
하나, 둘, 셋, 하고.
하나, 둘, 셋, 하면서.
뜨겁게, 힘차게, 그리고…… 즐겁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