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 of the Fake Hero RAW novel - Chapter (20)
가짜 용사 이야기-20화(20/310)
제20화
기원(起源),
카이센 알터 아라다만텔 (3)
“이미 우루크의 공포에 대해서 아는 생도들이 이 자리에 많을 거라고 믿는다.”
시력은 잃어버렸으나 청각은 말짱했으므로 카이센은 이론 훈련에 참가했다. 안경을 쓰면 세상이 흐릿하게나마 열리긴 했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우루크는 남(南) 아드리온 대륙의 중부 지방에 기거하던 마족이다. 화산재가 범람함에 따라 세계가 무더워지면서 활동 반경이 북쪽으로 넓어지고 있지.”
페이쿼리어의 교육에는 공중 정원에서의 검술과 격투술이 전부가 아니었다.
심연(深淵).
그 누구도 가까이하지 않으려는 그 종복들, 곧 마족에 대하여 교실에 앉아 심층적으로 배우는 수업도 있었다.
“이외에도 6대 마족에 속하는 다른 마족들도 하나둘씩 대륙에 발을 들이는 중이다. 혈귀, 나가, 트롤, 네크론, 데몬.”
“……!”
“하지만 오늘 제군들이 알아야 할 건 이런 6대 마족이 아닌, 그보다 더 큰 적들이다.”
라헬 듄 제라예가 나눠준 유인물에는, 광인의 상상 속에서 튀어나왔을 다섯 종류의 악몽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 외형들이 참이나 낯설었다.
일단 처음으로 보이는 놈은, 몸체는 인간과 유사했으나 소름 끼치는 상판과 꼬리는 도마뱀의 그것과 유사했다.
“고대어로 홀쉬베즈, 현대어로 렙틸리언이다. 도마뱀 인간이란 뜻이지. 심연의 시대부터 살아온 고대의 종족으로 ‘울부짖는 파멸’의 하수인들인데, 극지 사막에서 생식한다.”
“……!”
“놈들은 한여름이 되면 세상을 황무지로 바꾸면서 나타난다. 우루크의 잔혹성도 이 개자식들에 비하면 귀여울 정도다.”
라헬이 고개를 끄덕이자, 제국 마법맹에서 파견 나온 마법사가 앞으로 나서며 환영 마법을 사용했다.
렙틸리언의 환영이었다.
반투명한 형상으로 강단 위를 걷던 놈의 모습이 점차 흐릿해지더니, 잠시 후에는 이동의 궤적을 따라 아지랑이가 흐물흐물 흔들리는 것만이 보였다.
“홀쉬베즈의 전사 계급은 이러한 카모플라쥬, 즉 위장 기술을 사용한다. 너희들이 전장에서 특히 주의해야 할 기술이다.”
카이센의 눈이 가늘어졌다.
우루크가 압도적 힘에 의존한 전투 방식이라면, 이것들은 교활한 방식을 사용한단 건가.
“홀쉬베즈의 옆에 있는 놈들은 루틀웨라는 놈들이다. 어인(魚人)으로 이해하면 편하겠지. ‘옛 바다의 지배자’의 하수인들로 해군들에게 가장 큰 골칫거리가 되는 놈들이다. 나가와는 비교조차 안 된다.”
루틀웨라는 악몽을 보면서 원초적인 구역질이 치솟았다.
사람이다.
그래, 언뜻 보면 사람인데.
물고기의 눈알을 끔뻑거리고 귓가에는 커다랗게 생긴 아가미를 뻐끔거리며, 손발에는 물갈퀴가 달려 있다니.
“이놈들의 두려운 점은 바로 물속에서 자유자재로 움직인다는 점이다. 한여름이 되고 바다가 따뜻해지면 해군의 보급로가 차단되는 건 다 이놈들 때문이라고 보면 된다.”
“……!”
“습도가 높은 곳을 좋아하기에, 장마전선이 몰려올 때 같이 나타난다. 이게 홀쉬베즈와의 차이다.”
라헬의 수업은 늘 이 세 종족의 전술적 특이성과 전투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나머지 두 놈에 대한 설명은 좀처럼 하지 않았다.
“그 옆에 있는 건 탄-툴락. 현대어로는 네크라크네라고 불리는 거미 인간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그려진 건 안달로스. 시간의 군주를 섬기는 사냥개들이다.”
“이놈들은 위험하지 않단 겁니까?”
“아니, 위험하다. 하지만 거미 군주와 시간의 군주가 각각 용현 레인 루드윅과 공허의 사도 아르젠에게 토벌되었기에 놈들은 ‘검은 여름’ 때도 출몰하지 않았다.”
킨웨라고 불리는 구더기 인간에 대해서는, 놈들이 요정의 땅 이데아 반도에서만 출몰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벌레 군주가 거기 봉인돼 있으므로.
“내가 말한 정보 말고도 특이 행동을 보이는 기행종들은 얼마든지 있다. 그리고 인류가 여태껏 알지 못했던 마족들이 출몰하는 경우도 상당히 잦은 편이다.”
“……?”
“자, 이게 핵심이다. 이 수업에서 너희가 배워가야 하는 건 마족들의 정보가 아니다.”
“그럼 무엇입니까?”
“바로 사고의 확장이다. 지식이란 수학 공식과 같아서, 알면 알수록 여러 변수 상황에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라헬의 수업은 때로는 학구적으로 변할 때가 있었다. 라헬의 목표는 생도들에게 페이쿼리어로서의 마음가짐을 심어주는 일이었던 것이다.
“페이쿼리어는 완벽해야 한다. 페이쿼리어는 절대 죽지 않아, 다만 실종될 뿐. 가짜일지언정 용사란 그런 존재여야 한다. 너희의 존재가 곧 인류의 사기임을 잊지 마라.”
“……!”
“무투술을 배우기에도 아까운 시간에 반복적으로 마족에 대해 설명하는 건 이런 이유에서이다. 용사 된 자가 정보 부족이란 한심한 이유로 죽는 일이 없어야 하니까.”
이론 수업이 끝나면 숙사로 돌아갔다. 검술 수업이 없었으므로 공중 정원에 갈 수 없었고 있을 곳이라고는 이곳뿐이었다.
혼자 남겨지면 가슴속에 깊숙이 뚫린 구멍의 존재가 더 크게 느껴졌다.
가족이 죽은 날 뚫렸던 구멍은, 백골 병단이 몰살된 날 더 커지고 넓어졌다.
두통이 없는 날이 없었지만 이제는 두통을 달고 사는 게 적응되어 대충 적응할 만했다.
하지만 마음속에 뚫린 이 구멍은, 그날, 사방에 깔린 사체와 비명과 정적과 침묵과…….
<아리스타포> 공방전을 떠올릴 때마다 폐가 터질 듯한 호흡 곤란이 밀려왔다.
이 모든 걸 다 잊을 수 있도록.
한순간이나마 생각이 나지 않도록.
검을 마음껏 휘두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 녀석’이 찾아온 건, 숨을 쉴 수조차 없는 고통 속에서 헐떡거릴 때였다.
“뭐가 그렇게나 고통스러워?”
목소리에조차 신비한 향기가 서려 있어서, 커튼이 나풀거리는 창가에 녀석이 서 있다는 걸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넌…….”
“타르시요. 날 벌써 잊어버린 거야?”
“교관이 널 잊으라고 하던데. 누구한테 말도 하지 말래.”
“응? 아, 그래야 해. 나는 법황청의 비밀 무기거든. 그러니까 오늘 내가 온 것도 잊어버려.”
그 말에 가슴 한편이 욱신거렸다.
법황청의 최종 병기, 그때 그 알은 제대로 전달됐을지.
“여긴 왜 왔어?”
“저번에 못 한 말이 자꾸만 생각나서. 카이센이라는 이름 말인데, 혹시 용언으로 이렇게 쓰는 거 맞아?”
“용언 읽는 법 몰라. 눈도 안 보이고.”
“인연이라는 뜻이지?”
“맞아…… 어떻게 알았어?”
카이센은 망연해졌다.
타르시요가 놀랍고도 들뜬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
“내 이름도 그래! 어머니께서 지어 주셨다는데, 창세의 언어로 인연이라는 뜻이지. 네 이름은 뜻은 같지만 용언인 거고.”
“나도 어머니가 지어주셨어.”
“신기하다! 이름의 뜻도 같고, 어머니가 지어주셨단 것도 같네. 그런 너와 내가 이렇게 만난 게 바로 인연이란 거 아닐까?”
타르시요가 맑게 웃었다.
타르시요는 입을 가리지 않고 웃었다. 눈을 지그시 감고 맑게 웃었다.
이유는 모른다.
그때는 그 까닭조차 몰랐다.
그냥 그 웃음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마음속에 응어리진 암흑이 깨끗하게 씻겨 나가는 이유를.
그 이후로 타르시요는 교관이 없는 시간을 골라 이따금씩 놀러 왔다. 어느 순간부터는 작은 책 한 권을 끼고 나타났다.
“『용과 마법사의 여행일지』. 레인 루드윅이 세계를 여행하던 시대, 사람들은 그 시대를 은(銀)의 시대라고 불렀대. 황금시대 다음의 평화란 뜻이지.”
“남이 여행한 걸 구질구질하게 적어놓은 게 뭐가 재밌나?”
“난 세상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어. 세상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모르지. 그러니까 재미있는 걸지도.”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단 한 번도. 그러니까 나도 여행을 떠날 거야.”
“여행이라니. 어디로?”
세상은 이미 백골로 뒤덮였다.
자식은 죽은 부모를 땅에 묻고 부모는 죽은 자식을 가슴에 묻고 우는 세상이었다.
강은 메마르고 땅은 허물어지는 이 세상에서, 도대체 어디로 여행을 떠난단 말인가.
“어디기는?”
그런 세상이었거늘.
너는, 그때 소중하게 감춰둔 무언가를 자랑하는 소녀처럼 배시시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다시 회복시킬 세상이지.”
“뭐?”
“카이센, 페이쿼리어가 왜 페이쿼리어라고 불린다고 생각해?”
“……?”
“능력 때문이 아니라, 결국 이 악몽을 끝내지 못해서야. 그리고 스스로 비극의 주인공이 되기 때문이지.”
눈이 부시다, 그렇게 생각했다.
층구름 속으로 숨었던 태양이 얼굴을 드러내면서 창가로 햇빛이 쏟아져서일까, 아니면 그 미소가 자체적인 빛을 내는 것일까.
시각이 상실되어 선명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손으로 눈가를 가려야 할 정도로 눈부신 빛이 있는 건 분명했다.
“난 그렇게 될 생각이 없어. 나는 어센시쿼리어가 될 거야. 꿈과 희망의 주인공이지.”
어센시쿼리어라니.
카이센은 타르시요의 꿈을 따라가지 못했다. 아침 바다의 안개처럼 허황된 꿈 아닌가.
어센시쿼리어(AuthenticWarrior), 말 그대로 진짜 용사라는 뜻이다.
진짜 용사가 꿈이라니, 진짜 용사는 신화시대 이후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았는데.
‘이 녀석, 진심인가?’
저런 말을 저렇게 당연하게 할 수 있는 건가? 나랑 그렇게 나이 차이도 나는 것 같지 않은데.
“표정이 왜 그래? 나 혼자 갈까 봐? 그러면 같이 갈래?”
순간, 조용히 불어온 여름 바람 속에서 뇌리를 아프게 스치고 지나간 무언가가 있었다.
– 칼 같은 건 버려보고 여행을 떠나봐.
그것은 스승의 유언이었을까. 아니면 스승이 남긴 마지막 명령이었을까.
어쩌면 지금, 말하고 있는 걸까.
저 부름에 답하라고? 이제 열 번도 채 못 본 소녀를 따라가라고?
“응? 응?”
타르시요는 카이센의 심리를 읽을 수 없었던지, 얼굴 가까이 다가와 고개를 갸웃거렸다.
꽃향기가 코끝을 찌르는 가운데, 가슴 깊숙한 곳에서 치받치는 슬픔을 억눌렀다.
그리고 타르시요의 어깨를 붙잡고 멀찍이 밀어내며, 조그마한 목소리로 그 부름에 답했다.
“그런 기회가 오기나 한다면야.”
비꼬듯 냉소적으로 내뱉은 말이었건만, 그때 타르시요는 새끼손가락을 들며 환하게 웃었다.
“그래? 그럼 약속한 거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보물을 선물받기라도 한 사람처럼.
그 선물이 거기에 깃들기라도 한 것처럼, 새끼손가락을 반대쪽 손으로 소중하게 끌어안으면서.
그러고 나서야 왔을 때처럼 바람결에 스며드는 듯이 소리 없이 사라졌다.
타르시요가 떠난 뒤, 그 빈자리를 흐릿한 시야로 오랫동안 쳐다보고만 있었다.
‘여행은 개뿔.’
이런 시대를 회복시켜?
진짜 용사가 된다고?
그런 꿈같은 날이 올 리가 없어.
분명 뇌 한복판의 차가운 이성으로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어쩌면.
정말 그런 날이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이 들게 만드는 미소를, 너는 갖고 있었다.
그 미소는 어머니를 떠올리게 하는 봄의 미소가 아니던가.
스승 카밀라가 마지막에 지었던 미소가 아니던가.
가슴에 사무치게 그리운 만큼 눈물겨운 미소가 아니던가.
‘모두 잃고 난 후에야 그 가치를 알게 되어 버린 미소…….’
어째서 그 세 사람이 닮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걸까.
세 사람 모두 성격부터 목소리며 얼굴까지 다 다른데.
인연의 시작부터 짙게 깔려 있었던 비극의 냄새를 맡기 시작한 건 어쩌면 그때부터였을지도 모른다.
* * *
그 후로도 타르시요는 찾아왔다.
가져와서 소리 내어 읽는 책이 자주 바뀌었는데, 카이센이 가장 좋아했던 책은 『홍련의 라미네아』라는 영웅서기였다.
좋았다.
어머니의 무용담을 듣고 있노라면, 마치 꿈속에서 어머니와 함께 거닐고 있는 것만 같아서…….
타르시요가 두고 간 그 책을 끌어안고 잠을 청하고 있노라면 옛 어머니의 품에 안겨 잠들던 때가 떠올라서…….
혼자 있을 때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는 했다.
그 눈물은 백일몽과도 같은 그리움이었기에, 잠에서 깨어날 때면 마법에서 풀려난 듯 깊은 슬픔에 사로잡혀야만 했다.
“라미네아가 벨체스터 가문의 서녀를 제자로 거두니 그 이름이 카밀라였다.”
제일 좋아한 부분은 어머니가 가문에서 멸시를 받던 카밀라를 제자로 거둔 부분부터였다.
그 부분을 재차 다시 읽어달라고 요청했고 타르시요는 흔쾌히 읽어주었다.
그 시간은 정말 행복한 시간이었고, 어린 시절 어머니가 동화책을 읽어줄 때처럼 마음의 평온을 찾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타르시요가 오는 날은 정말 ‘이따금씩’이었다. 오랜만에 나타날 때마다 타르시요의 몸을 두른 붕대의 숫자는 더 많아졌다.
그 까닭을 타르시요는 말하기 원치 않은 것 같았기에 굳이 캐묻지 않았다.
여하튼 일상의 대부분의 시간 속에서 용령석 주입 과정과 이론 수업이 계속되었으나, 거기에는 늘 실패밖에 없었다.
이제는 청각까지 사라져가고 있었으나, 용령석 주입은 정신적으로는 그렇게까지 힘들지 않았다.
정신적으로 괴롭혔던 건 다른 녀석이었다.
“흥…… 이럴 줄 알았어. 남자 따위가 페이쿼리어가 될 수 있을 리가 없지.”
아린, 아린 페리였다.
페리 가문의 영애이자 무령검파의 후기지수인 페이쿼리어 생도.
바위에서 칼을 뽑지 못할 때부터 쉬지 않고 까불거리던 녀석이었다.
예전에 카밀라에게 내쫓겼었단 데에서 오는 열등감이 카이센에게로 표출되는 듯했다.
본심은 영웅 라미네아의 성검인 아라다만텔을 차지하는 데에 가장 큰 걸림돌인 카이센을 빨리 제거하고 싶은 것이었다.
“신체 강화에 실패하고 장애를 얻었으면 이제 그만 꺼져줬으면 좋겠는데. 여기서 대체 뭘 하고 있는 거니?”
카이센은 아린을 늘 무시해 왔지만 그날은 한 가지가 달랐다.
아린이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고 말았던 것이다.
물론 그게 소녀의 얄팍한 노림수였지만.
“그거 알아? 요즘 네가 진짜 카밀라 님의 제자가 맞는지 의혹이 나돌더라고.”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
“아니, 이상하지 않니? 페이쿼리어는 남자를 제자로 받아들이는 게 불가능한데, 다른 여검사들은 다 외면하고 남자인 널 받아들여서 키웠다는 게.”
온몸의 혈관이 딱딱하게 굳는 느낌이었다. 평소처럼 무시하려 했으나 무얼 말하고자 하는 건지 감조차 오지 않았다.
“그래서 나도는 말이…… 혹시 카밀라 님께서 규율을 파기한 건 아닐까, 하는 소문이야.”
순간 전신을 맴돌던 혈관의 피가 차갑게 얼어붙어서 멈춰 서고 말았다.
언젠가 느껴봤던 감정이었다.
카밀라와의 첫 만남에서, 카밀라가 어머니가 어떻게 됐냐고 물었을 때 분명 이랬을 것이었다.
“솔직히 얼마나 외로우셨겠어? 음, 그래, 전장에서만 사셨는데…… 잘생긴 남자들도 있을 거고 매력적인 남자들도 있었을 것 아니야.”
그런 카이센의 반응이 마음에 든다는 듯이, 아린은 계속 냉소를 이어 나갔다.
“요한 울프 프로스트였나? 듀렌 대공가의 사생아인 남자도 있었으니, 전장의 천막이 딱 두 사람이 사랑을 나누기에 알맞은 무대 아니었겠어?”
카밀라는 전장에서 피어났다가 전장에서 스러진 꽃이었다. 그 꽃잎에 얼룩이라고는 없었다.
스승의 아들인 카이센을 거두어 주었던 것만 제외하면.
요한 또한 카이센의 은인이었다.
사명을 알기에, 요한은 카밀라를 사랑했으나 감정을 제삼자에게 내비치진 않았다.
또 사명을 알기에, 카밀라는 울프의 감정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둘의 사랑은 고고하되 애달팠다.
“나도 같은 여자로서 이해해. 사랑만 주지 않으면 어떤 남자를 품어도 괜찮지 않겠어? 그렇게 생각하셨던 거겠지.”
그 누가.
이 신룡의 도시에서 평화를 누비며 살아가는 그 어떤 인간이.
그 삶들을 모욕할 수 있단 말인가.
없다.
그 누구도 없다.
차가운 분노가 머릿속에서 휘몰아치는 순간, 카이센의 마음속에서 북처럼 울리는 메아리는 단 하나뿐이었다.
“그러다가 실수로 너 같은 걸 낳아버린 거지. 지울 틈도 없이─”
일순간이었다.
폐도령에 의해 삼끈으로 단단히 고정돼 있던 라미네아의 칼이 푸르른 쇳빛을 토하며 뽑혀 나왔다.
후드득, 삼끈이 힘없이 끊어질 때 발검의 속도는 신기에 가까웠다.
“나는 카밀라 알터 아라다만텔의 제자 카이센이다.”
그 칼끝이 이마 바로 앞에 겨누어진 뒤에야, 아린 페리가 비로소 자신에게 칼이 겨누어졌단 걸 깨달았을 정도로.
“아린 페리, 널 죽여 버리겠어. 무방비 상태에서 죽기 싫으면 그 칼을 뽑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