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 of the Fake Hero RAW novel - Chapter (202)
가짜 용사 이야기-202화(202/310)
시즌 3 : 10화
그날의 약속, 너와 함께 그린 미래(未來)
반짝.
황룡들만이 만들어낼 수 있다는 광금(光金)으로 지어진 머리핀이 태양빛을 눈부시게 튕겨냈다.
카밀라는 그 머리핀에서 밤새도록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아직까지도 생생해.’
가슴이 떠나갈 듯한 박수 소리.
머리를 온화하게 쓰다듬던 황룡의 온기.
그 직후 달려와 카밀라를 번쩍 안아 들던 라미네아의 환한 웃음소리까지도.
‘앞으로 계속 이런 일만 있으면 좋겠어.’
<테르베노플> 항만은 이 심야에조차 수많은 인파로 바글거렸다.
여행객들부터 상인과 노역꾼에 이르기까지, 인종도 복식도 다양하기 그지없었다.
그 바글거림과 다양함은, 용현 레인 루드윅이 일구어내고 공허의 사도 아르젠이 이어낸 평화의 시대를 여실히 증명하고 있었다.
지금 시대는 청동의 시대라 불리고 있었다. 고요한 풍취를 품고 있으나, 한 번의 충격으로도 손쉽게 깨지거나 꺾일…….
그때 카밀라는 그런 걸 생각할 나이도 아니었고 여유도 없었다.
이 머리핀의 냄새가.
이 머리핀의 색채가.
이 머리핀의 온기가.
꼭 새로운 삶의 모험을 축복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으므로. 자신의 삶에는 황금시대(黃金時代)가 시작된 것처럼 느껴졌으므로.
그래서 밤의 바다로 나왔다.
파도가 철썩이는 소리가 듣기 좋았으니까. 바다를 건너오는 향기가 맡기 좋았으니까.
“그거, 보고만 있어도 기분 좋지?”
그때 들려온 목소리가 있었다.
새가 지저귀듯 높고 맑은 음성이었다. 머리 위쪽에서 들려온 음성이었다.
정박 중인 군선의 난간에 누군가가 기대서 있었다.
“나도 처음 받았을 때는 하루 종일 그것만 쳐다봤어.”
누구지? 그렇게 생각한 순간 대충 정체를 유추해낼 수 있었다.
목에서 반짝이는 금붙이, 그건 카밀라의 머리에 매달린 것과 똑같은 광금이었으니까.
상대도 페이쿼리어의 제자란 소리다. 그 눈빛을 보고는 여성이 웃었다.
“안녕! 나는 에쉬르 에이진이야.”
햇살을 엮어 짠 듯 눈부신 금발.
그리고 신록의 아름다움을 품은 눈동자.
“비네사 알터 르노드의 제자지.”
회백색 누비 갑옷과 가죽 승마복을 입고 있었는데도 그 위상은 심히 고귀해 보였다.
이것이 귀족이다, 라고 모든 외모가 호소하고 있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가죽 튜닉을 입은 카밀라에게서 순박한 느낌이 나는 것과는 심히 대조적이었다.
“올해 열다섯 살! 너보다 세 살 위니까 편하게 언니라고 불러!”
하지만 같은 것도 있었다.
그건 바로 등허리의 검대에 매달린 태도였다.
“쌍둥이 성검의 제자끼리 친하게 지내자. 후후후.”
긴 금발을 나부끼며 카밀라의 앞에 부드럽게 착지한 에쉬르가 방끗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극위성검 르노드.
극위성검 아라다만텔.
쌍둥이 성검이 사용하는 검법은 대개 서로 지극히 달랐으나, 쌍둥이 성검의 주인들은 서로에게 한층 깊은 감정을 품었다.
애틋한 동료애.
또는 격렬한 경쟁심.
놀랍게도 에쉬르가 내보인 건 전자였다. 그 무서운 스승의 제자라는 게 믿기질 않았다.
“에이진이면…… 에이진 공왕가? 그럼 고, 공녀님이잖아!”
“에이, 공녀는 무슨! 페이쿼리어가 되면 다 내려놓게 될 것들인데.”
“그럼 반말을 쓰라고?”
“편한 대로. 아까 시험 치르는 거 봤어. 실력이 대단하더라!”
어떤 칼잡이 무리가 나타난 건 그때였다.
저마다의 자세로 하품을 내쉬며, 어딘가에 정박 중인 자신들의 증기선으로 향하고 있었다.
연배가 어리거나 젊었다.
“야, 페이쿼리어 라미네아가 제자를 받았다는데?”
“벨체스터의 딸이라며.”
“딸이긴 하지. 사생아지만. 왜 그런 애를 받았을까? 엘스윈, 너에 비교하면 하찮기 그지없는데.”
그것은 단순한 속삭임이 아니다.
어린 시절부터 찔리고 또 찔려서 넝마가 된 마음을 찌르고 들어오는 칼날이었다.
“그러네. 엘스윈은 제자로 안 받아줬잖아요. 그러면 사형, 그 녀석 실력이 엄청 좋은 걸까요?”
“글쎄다. 예상보다 좋은 정도지. 일성칠검 일등 제자들에 비하면 한심한 수준이라던데.”
“흐음, 엘스윈은 무시하시고는 받은 게 그런 거라니. 시간이 없어서 대충 받은 거 아냐?”
카밀라는 예전 성격대로 발끈해서 소리치려다가 한순간 동작에 제동을 걸었다.
– 아무렇게나 행동하게 되면 도의적으로 문제가 생겨. 그러면 라미네아 님한테 피해가 가고.
그래, 신경 쓸 필요 없어.
어차피 이런 상황은 익숙하잖아.
저런 쓰레기들의 비아냥을 빠르게 넘기는 최선의 방식은 대응하지 않는 거다. 그러면 흥미가 사그라져 금방 그만두게 되니까.
‘멋대로들 떠들라지.’
그걸 당혹스럽게 지켜보던 에쉬르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눈동자에서 불이 타올랐다.
“카밀라, 고개 들어!”
“……?”
“넌 페이쿼리어의 제자야! 앞으로도 엄청나게 많은 시기와 질시의 시선을 받을 거야. 그야 당연해! 모두가 선망해 마지않는 자리인걸! 하지만 그딴 말, 조금도 듣지 마! 귀도 기울이지 말고! 콧방귀를 뀌면서 무시해버려!”
그 쩌렁쩌렁한 외침에 칼잡이들이 흠칫 놀라 이쪽을 바라보았다. 에쉬르가 그 시선을 받았다.
“에쉬르……?”
이 연배 검사들 중에 저 세기의 천재를 알아보지 못하는 이는 없었다.
이 먼 거리에서조차도 말이다.
어린 칼잡이들은 혼비백산하여 어딘가로 사라졌다.
“너 스스로가 언제나 네 편이어야 해. 그리고 기억해. 네 스승님께서도 항상 네 편이란 사실을. 그분이 널 직접 지명하여 뽑은 거니까!”
그렇게 외치던 에쉬르가 불현듯 카밀라의 등 뒤로 이동했다.
엉덩이를 살짝 밀어 자신의 허리춤에 매달린 태도와 카밀라의 태도를 딱 맞부딪쳤다.
카밀라가 멍하니 돌아보자, 시야를 가득 채우는 눈부심으로 에쉬르의 미소가 보였다.
“그리고 나도 항상 네 편이 되어줄게. 그러니 앞으로 똑같은 일이 생겨도 침묵하지 않기다? 그냥 그래, 나 잘났다 하면서 비웃어버려!”
무엇일까.
이 마음의 떨림은, 이 아픔은.
고개를 끄덕이려는데, 불현듯 시선이 2층 갑판 위로 솟구쳤다.
‘뭐……?’
자신뿐만 아니라 카밀라의 몸까지도 이렇게나 부드럽게 허공으로 쏘아 올리는 엄청난 보법.
“이런 스트레스를 확 날리는 비결을 알려줄게. 바로 칼춤이야!”
에쉬르는 카밀라를 갑판 위에 고이 내려준 다음, 뒤로 춤추듯 물러서며 태도를 뽑아냈다.
“아라다만텔의 특수 능력은 벼락, 그건 르노드도 마찬가지야. 검술 토대를 번개처럼 빠른 연계에 두고 있거든.”
십일자도(十一字刀) 제1식, 평(平).
양팔을 교차시켜, 역수로 쥔 태도와 칼집을 수평으로 세워서 만드는 십일자로 검술의 기수식 자세를 이룬다.
정형 속에서 견고함을 이루는 십문자도와는 대조적으로, 십일자도는 변화무쌍하게 연계를 펼치는 것에 강점을 둔 쌍둥이 검술이다.
십일자도는 자유다.
칼을 역수로 쥐어도 되고 올바르게 쥐어도 된다.
검술 도중에 검사의 마음에 따라 패검 방식을 바꾼다. 그 자유분방함이 검술을 더 강하게 만든다.
역(逆)과 정(正)이 손에서 튕기듯이 춤추며 우아하고 유려한 검무를 빚어내는 것이다.
“춤을 추듯이, 물이 흘러가듯이, 절대 딱딱해서는 안 돼. 자, 이리로 와! 나랑 같이 춤추자.”
다르면서도 닮았고.
비슷한 듯하면서도 틀리다.
그렇기에 저 검법이 가진 아름다움은, 라미네아가 카밀라에게 선보이던 십문자도와는 달리 공격적인 미색을 품고 있었다.
“오, 에쉬르 아가씨. 어디 갔다 오신 겁니까?”
“사흘 뒤면 법황청으로 출발해야 하는데, 도시에서 좀 놀다 오셔도 될 텐데.”
“그냥 대충 봐. 크, 저건 언제 봐도 검술이 아니라 예술이라니까.”
출항 준비로 북적거리던 증기선 위에는 병사들이 무수히 있었다.
일률적인 붉은 제복 위로, 시산혈해를 새하얗게 내달리는 군마의 문장이 위엄을 떨친다.
필두 페이쿼리어, 비네사 알터 르노드가 이끄는 백전불패의 혈마(血馬) 병단이었다.
에쉬르를 오랫동안 봐온 역전의 병사들이 하나둘 탄성을 흘릴 정도였으니, 카밀라의 반응이 어떨지는 설명할 필요조차 없었다.
‘저렇게 되기까지 얼마나 연습을 갈고닦았을까? 그에 비해 난…….’
스승님께서는 나를 천재라고 하지만, 과연 천재가 맞을까?
아니, 아니야.
이제 주눅 들지 않기로 했잖아. 에쉬르와 요한의 말대로, 나도 어엿한 페이쿼리어의 제자니까. 그 생각에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카아아앙!
다음 순간, 십일자도 2식 궤(軌)를 막아내는 칼날과 칼집이 있었다. 십문자도 1식 원(圓)이었다.
“앞으로 비슷한 일이 있을 때 침묵하지 말라고 했잖아. 지금 같은 상황 말한 거 맞지?”
에쉬르가 눈을 크게 떴다가,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씩 웃으며 눈을 신나게 빛냈다.
그리고 1식, 2식, 3식, 4식…… 십일자와 십문자의 춤이 허공에서 뒤엉키며 불꽃의 노래를 이루었다.
십일자가 앞서 나가고, 십문자가 겨우 보조를 맞추는 식이었으나 그래도 그것은 어느새 아름다운 화음이 되어가고 있었다.
“아하, 저게 이번에 라미네아 님이 새로 받았단 제자인가?”
“꽤 치는데? 우리 에쉬르 아가씨와 춤을 출 수 있다니.”
“멍청이들아, 딱 봐도 모르겠냐. 아가씨가 완전 봐주고 있잖아.”
그 쇠의 노랫소리가 수많은 이들의 이목을 잡아끌고…… 그리고 그 순간 안에 고정시켰다.
이 화음에 희열을 느꼈을까.
이 조화에 에쉬르 스스로도 넋을 잃었을까. 1식과 4식을 점점 빠르게 반복하던 십일자의 춤이 어느 순간, 카밀라는 닿지 못한 5식 너머로 나아갔다.
요컨대.
미숙한 십문자가 감히 닿지 못하는 속도와 위력으로 휘둘러진 십일자가 카밀라의 목을 베어버릴 뻔했다.
“!”
에쉬르가 한순간 이성을 되찾아 칼질에 제동을 걸지 못했더라면 그대로 목이 잘려 나갔을 것이다.
“어, 카, 카밀라, 이건, 그…….”
칼을 겨우 붙잡은 에쉬르의 당혹감은 깊었다.
왜 이렇게 흥분했을까?
쌍둥이 성검의 제자를 만났다는 게 이성의 끈을 놓을 정도로 기뻤던 걸까? 꼭 처음으로 생긴 동생을 안아봤을 때처럼…….
그 당혹감 속으로 웃음소리가 스며들었다. 카밀라가 뒤로 발라당 넘어지면서 허탈하게 흘린 웃음이었다.
“아이 씨, 졌다, 완패야. 자신 좀 붙으려 했더니 다 무너져버렸네. 엄청나네.”
뱃전에서 펄럭이던 깃발을 찢어내 카밀라의 목에 감아주던 에쉬르가 고함을 질렀다.
“엄청나긴 뭐가 엄청나! 얼마나 미숙한, 한심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는데! 방금 널 죽일 뻔했어!”
한쪽 팔로 이마를 가린 채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카밀라의 눈동자에는 이제 웃음기가 없었다.
그래…….
아직 멀었구나…….
제자 시험은 정말 첫발을 내디딘 거에 불과했단 건가. 이 광금 머리핀 하나로 만족할 뻔했네.
“나도 언젠가는 이 정도 수준이 될 수 있을까?”
“뭐?”
“언니는 페이쿼리어의 제자라며. 그 정도는 되어야 어디 가서 어깨 펴고 천재인 척할 수 있을 거 아니야.”
부끄럽고 또 쑥스러워서, 입 밖으로 내기 힘겨웠던 말들은 이러했다.
그리고 언제든 어디에서든…….
스승님의 자랑거리로서 기쁘시게 할 수 있을 텐데.
“나처럼 된다니, 나에 대해 정말 모르고 있었어?”
“에쉬르라며. 그게 뭐? 지금 알았으면 됐지.”
“그게 아니라…….”
에쉬르는 잠시 멍하니, 카밀라의 눈에서 빛나는 순박함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 아이, 진심이구나…….
진심으로 묻고 있는 거야…….
나처럼 되고 싶다고…….
그 깨달음이 뇌리를 강타하자 어처구니없다기보다는 사랑스럽다는 생각이 들어 맑은 웃음이 터졌다.
“카밀라, 왠지 알게 된 것 같아. 라미네아 님이 왜 널 선택했는지.”
“뭐어? 이 천재도 모르는 걸 어떻게 알아?”
에쉬르는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손을 내밀어 카밀라를 일으켜 세워주었다.
“그래! 천재지. 그러니 왜 못 되겠어? 나처럼 되고도 남지. 카밀라는 천재니까.”
“!”
“그러면 그때는 정말 서로 봐주는 것 없이 제대로 춤을 추자.”
에쉬르가 자신의 칼을 납도하고는 칼집을 앞으로 내밀었다.
“지금 여기서 약속하자.”
“……뭘?”
“내가 르노드를 계승하고, 네가 아라다만텔을 계승한 뒤에, 오늘 못 끝낸 춤을 마저 끝내자고. 그 춤은 정말 아름다울 거야. 역사책에 기록될 정도로!”
머뭇거리던 카밀라는 에쉬르의 재촉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겸연쩍게 헛기침을 했다.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나, 진짜 천재거든.”
그리고 칼집을 앞으로 내밀었다. 두 태도의 칼집이 경쾌하게 맞부딪쳤다.
딱, 하고…….
그것이 첫 번째 약속. 소녀가 이 세상에 태어나고 처음으로 사귄 친구와, 똑같은 미래를 꿈꾸며 나눈 첫 번째 약속.
그리고.
이 잔혹한 세상에서 약속이란, 눈부시면 눈부실수록 암흑에 쉽게 잡아먹혀 이루어질 수 없게 되어 버린다는 진실을 알려준…… 슬픈 약속(約束).
* * *
에쉬르와 검무를 펼치고 온 이튿날 아침 내내 멍했다.
사실, 밤새 잠도 못 이뤘다.
여관 급사가 내온 쟁반에서 수프가 김을 모락모락 피워 올리고 있었으나, 스푼만 쥐었을 뿐 입에 대지도 않고 있었다.
‘정말, 엄청난 실력이었어.’
만약 그게 시합이었고, 에쉬르가 진심이었더라면 일 합에 승부가 갈렸을 것이다.
세 살 연상이라지만…… 페이쿼리어의 제자들은 다 그런 괴물들뿐인 걸까?
어젯밤 그 한량 놈들도 나한테는 욕이란 욕은 다 박아놓고 에쉬르는 그 얼굴을 보자마자 꽁무니를 빼질 않나…….
“카미!”
그때, 라미네아가 정말 난데없이 나타났다.
수프를 먹고 있었더라면 죄다 뱉어냈을 정도로 화들짝 놀랐다.
근데 어찌나 급하게 달려왔는지, 볼이 붉게 들뜬 라미네아의 손에 웬 서류가 들려 있었다.
“이게 뭔지 알아?”
“뭐, 뭔데요?”
“카미가 정식으로 내 제자가 되었다는 서류야! 벨체스터 쪽에서 법황청으로 보낸 문서가 검토되지도 않았을걸. 이제 그건 아무 의미도 없는 종이가 되어버렸단 소리지.”
내가 이제 정식적인 페이쿼리어의 제자…….
기쁘지만…….
기쁜 것과는 별개로…….
카밀라는 머리에 매달린 광금 머리핀을 숨기고 싶은 심정이었다. 원래는 그 저택을 떠날 수 있다면 뭐든 좋았지만…….
“표정이 왜 그래. 그 수프가 지독하게 맛이 없어? 아니면 혹시 페이쿼리어의 제자가 된 기념으로 공화국 미소년을 몰래 꼬시다가 차이기라도 한 거야?”
“그런 거 아녜요.”
“그럼 왜 그래? 속이 안 좋니? 오늘 중부행 열차를 타야 하는데 어떡해.”
생각했다. 겨우 제자 시험에 합격한 것만으로도 스승님께선 이렇게나 기뻐하시는데, 에쉬르 같은 실력자가 될 수 있다면…….
“……음, 뭐, 웃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못 말할 것도 없지만요.”
카밀라가 짐짓 쀼루퉁한 표정으로 시선을 돌리자, 라미네아가 두 손으로 자신의 눈과 입 근육을 붙잡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절대 웃지 않겠다는 약속…….
오히려 놀리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아무렴 어떤가. 그럼에도 진심을 꺼내는 건 쉽지가 않았다.
“그 뭐냐, 그러니까, 음, 딱히 큰 관심이 있는 건 아닌데요? 진짜 관심 있는 건 아닌데…… 그러니까 이건 그냥 장난인데요.”
그냥 강해지고 싶다고 말하면 이유를 묻지 않을까.
그 이유를 솔직히 대답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카밀라는 아직 어른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시선조차 스승에게 주지 못한 채, 저 먼 창밖을 바라보며 볼멘소리로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던 것일까.
“제가 정말 용사가 될 수 있을까요?”
이렇게 말하면, 그냥 어린애의 치기 어린 꿈 자랑처럼 보일 것 같았으니까.
이유를 깊게 묻지 않을 테니까.
어제처럼, 나와 당신이 함께 기뻐할 수 있는 날이 더 있으면 좋겠다고 말할 수는 없었으니까.
“뭐어? 이 스승님처럼 되고 싶다고? 그렇게 정열적으로 존경심을 표출해버리면 참을 수가 없게 되어버리는걸.”
“아니, 그렇게 말한 적 없거든요? 능글거리는 어른이 되는 건 백번 죽어도 사양이에요!”
“에휴, 여전히 우리 카미는 여러모로 솔직하지 못하구나.”
카밀라는 짐짓 새침하게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돌려서 새빨개진 얼굴을 감췄다.
“아 씨, 오해하는 것 같으니 그냥 솔직히 말할게요. 난 그냥 에쉬르랑 똑같이 될 수 있는지 알고 싶을 뿐이에요!”
“에쉬르?”
“나중에 같은 실력을 갖추고 만나기로 약속했거든요. 그런데, 솔직히 그렇게 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아요. 에쉬르의 검은 그 뭐냐, 되게 예뻤거든요. 저기 그 누구처럼.”
“그래~ 내가 예쁘긴 하지. 역시 카미는 보는 눈이 있다니까.”
때마침 울프를 데리고 여관으로 들어온 델프레드가 가늘어진 눈으로 라미네아를 노려보았다.
“맥락상 네가 아름답단 게 아니라 검술이 그렇단 말 아니냐? 저걸 어떻게 해석해야 그런 소리가 되냐?”
“여자들끼리 진지한 이야기할 때 남자는 조용히!”
“끄악!”
“요한, 넌 이렇게 감성이라곤 없는 이과생이 되면 안 된단다!”
거기까지 말하고 라미네아의 입가에 진지한 미소가 맺혔다.
에쉬르라…….
좋은 아이다. 모든 페이쿼리어들이 탐낼 만큼. 비네사 선배가 일찌감치 채 가지만 않았어도…….
“카미가 지금 한 질문에 대한 대답은 첫 만남 때 이미 해줬던 것 같아.”
“?”
“될 수 있어. 카미는 말이야. 용사로서 가장 중요한 자질을 누구보다 완벽하게 타고났으니까.”
“용사의 자질? 그게 뭔데요?”
“다른 누군가를 위해, 힘이 없고 약하고 슬픈 사람을 위해 대신 칼을 뽑을 수 있는 자질. 걱정하지 마. 성급해질 필요도 없어. 카미는 분명, 누구보다 멋진 용사님으로 역사책에 기록될 테니까.”
따스하다…….
그렇기에 너무나도 신기해.
어떻게 먼 미소가 가까운 손보다도 따스할 수 있을까. 어떻게 늘 저렇게 따스하고 따뜻할까.
“물론 그렇게 되려면 십문자도부터 완벽하게 배워야 하겠지만. 아직 심화 초식은 하나도 못 하잖아?”
“윽……!”
“걱정하지 마. 이 스승님이 하나하나 확실히 가르쳐줄 테니.”
라미네아가 수프에 반쯤 담겨 있던 스푼을 꺼내 카밀라의 입 쪽으로 가져가다가 문득 멈칫했다.
“그나저나 에쉬르라? 그러면 기왕 여기까지 온 거, 에쉬르의 실력을 제대로 한번 보고 갈래?”
“네?”
“비네사 선배님이랑 에쉬르가 바다를 건너온 거, 검술 시합 때문이거든. 법황청에서 한 달 뒤에 열리는 공검제(空劍祭)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