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 of the Fake Hero RAW novel - Chapter (203)
가짜 용사 이야기-203화(203/310)
시즌 3 : 11화
대륙에는 온갖 이름의 검술 시합이 있지만, 법황청에서 공인하고 또 주재하는 시합은 단 네 개뿐이었다.
유소년, 지검제(地劍祭).
청소년, 공검제(空劍祭).
청년, 용검제(龍劍祭).
청장년, 천검제(天劍祭).
각 대회별로 출전 가능한 연령대가 정해져 있었으므로, 각 시합에서 우승을 차지하기 위해 당대 최고의 검호들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었다.
“와, 무슨 사람이 이렇게나…….”
이 모든 대회는 법황청 영웅 광장에서 순차적으로 주최되었다. ‘검의 축제’라고 명명된 나흘 동안의 기간에!
그렇기에 그날, 법황청이 소재한 황금의 도시 <하랄도니키>의 인파는 헤아릴 수가 없었다.
이색적이고도 개성적인 도복 차림의 검사들이 수두룩했다. 대륙 각지에서 활동하는 검파의 제자들이었다.
아, 황금의 도시…….
정말, 크고도 낯설었던…….
도시 중심부에서 법황청 건물이 높이 솟아올랐는데 꼭대기는 구름에 가려 보이지도 않았다.
귀족과 귀부인들이 시종들의 도움을 받고 마차에서 내리는 것이 보였다.
상인들이 소시지나 오징어구이 등 관람 도중 먹을 군것질거리를 들고 돌아다녔다.
“아직 이것도 덜 온 거야. 내일, 그러니까 용검제 때에는 훨씬 몰려올걸.”
델프레드의 말에 카밀라는 마른침을 조용히 삼키며, 스승과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 에쉬르 언니는 어디에 출전하는 거라고 했죠?
– 공검제.
– 공검제는…… 출전 가능 나이가 17세에서 19세라면서요?
– 지검제의 우승자는 나이에 상관없이 나갈 수 있어. 용검제나 천검제도 같은 조건이 적용되고.
– 그런 대회에서 15세에 우승 유력 후보라니…….
표를 구하기가 상당히 어려웠겠건만, 스승님이 <테르베노플>에서 황룡 요슈하르에게 “어르신, 표 좀 주세요” 했더니 표가 생겼다…….
원래는 특별석 표였다는데, 라미네아가 부담스럽다고 말했기에 그날 일반석에 앉게 되었다 했다.
주위를 신기하게 두리번거리던 요한이 말했다.
“공검제쯤 되니 대륙 각지에서 온갖 유명 인사들은 죄다 행차했네요. 온갖 검술 명가와 유파들의 장문인이 보여요. 소왕국의 왕족들도 수두룩하고.”
델프레드가 눈을 가늘게 떴다.
“뭐지, 자기과시?”
“아, 아뇨, 제가 왜 과시를…….”
“너를 스승으로 뒀을 정도면 과시할 만하지. 벌써 리미테스(2성) 등위인데. 요한한테 왜 그래?”
“헹! 이놈은 아직 멀었어!”
“스승님, 사진기를 설치 중인 기자들도 보여요.”
“젠장, 어려서부터 관심이란 관심은 죄다 받다 보니 사람 많은 곳은 질색인데. 꼭 여기 왔어야 했냐?”
델프레드가 행인들에게 받는 시선은 확실히 선망과 경외에서 우러나는 것뿐이었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그는 현재 제국에서 4성(成) 마법의 경지에 오른 글라도스 등위의 마법사, 요컨대 대마법사까지 한 단계 남은 존재인데.
“카미가 꼭 오고 싶다는데 어떡해. 그러게 누가 따라오래?”
“요한이 저 꼬맹이랑 떨어지기 싶다는데 어떡하냐?”
“네?”
“네?”
요한과 카밀라는 반쯤 동시에 그렇게 반문하고는, 서로를 어색하게 쳐다보았다. 델프레드가 두꺼비 같은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이런 미친, 장난 좀 쳤더니 뭔데, 이 개 같은 분위기는. 이래서 사춘기 꼬맹이들은.”
“스, 스승님!”
“그래서 라미네아, 저 꼬맹이가 누굴 보고 싶단 건데?”
“누구겠어?”
그때, 거대한 회장에 점점이 흩어져서 제각기의 소리로 수런거리던 소리들이 일시에 변한다.
탄식, 탄성, 열광.
반응은 다르되 그 반응을 이끌어낸 감정의 근원은 동일했다. 역사를 이끌 것으로 기대되는 유망주에 대한 외경심.
“에쉬르다.”
“에쉬르야.”
“저게 에쉬르구나.”
공검제는 본래 17세부터 19세까지 참가하는 대회다.
참가가 가능한 나이가 한정돼 있었으므로, 해당 연령대에 맞는 대회 입상은 검사의 삶에서 최고의 영예이자 영원한 명예로서 꿈의 지표로 여겨졌다.
다만 참가 자격에 예외가 하나 있었으니, 바로 지검제에서 우승한 참가자였다. 에쉬르가 지검제에서 우승한 나이는 13세였다.
“지검제도 최연소로 우승해 놓고서는 이제 15세의 나이에는 공검제 도전인가…… 인생이 그냥 용사 동화 그 자체군.”
《제국일보》의 수석 기자, 아시드 팽이 말했다. 후임 기자가 말했다.
“이 페이스면 리스타 알터 쉬르팽과 똑같은 수준 아닌가요?”
“이런 멍청이가! 리스타는 열네 살에 천검제에서 우승했는데 무슨 헛소리야. 너 인마, 기자 자격증 어떻게 땄어?”
“안 땄는데요.”
“근데 어떻게 취직했냐?”
“편집장님 조카라서요. 헤헷.”
“…….”
“근데 천검제? 열네 살에? 천검제라고요?”
“리스타는 그냥 인간이 아니라 괴물이었어. 법황청에서 선전용으로 조작한 인물이란 소리가 괜히 나오는 게 아니지. 여하튼 에쉬르의 성장 속도는 리스타까지 갈 것도 없이 라미네아보다도 느려. 내 수첩 좀 줘봐.”
“네. 잠시만요. 어…… 저기도 페이쿼리어가 한 명 있는데요? 누구더라? 아, 사진 보니 알겠네. 방금 말씀하신 라미네아 알터 아라다만텔이다! 리스타를 제외하면 최연소 임관 페이쿼리어, 맞죠?!”
후임의 시선을 좇아간 아시드가 휘파람을 불었다.
“마침 나타났네. 저 여자면 리스타의 기록을 조금이나마 따라잡을 수 있었을지도 몰랐는데. 열네 살에 공검제에서 우승했으니, 열다섯 살에 용검제에 나갈 수도 있었거든.”
“그래요? 근데 왜 안 했죠?”
“난들 알겠냐. 용검제 우승보다 리스타의 최연소 페이쿼리어 타이틀을 따라가고 싶던 것 아냐? 열다섯 살이 되고 나서 바로 <위용검전> 입교 수속을 밟았거든.”
“근데 <위용검전> 생도는 대회 참가를 못 하게 되잖아요. 임관한 뒤에도 보통 검사랑 급 차이가 너무 나니 마찬가지고. 그러면 앞으로 영영 용검제에 참가 못 하는 건가요?”
“그러니까 이해가 안 간다는 거지. 왜 그렇게 서두른 건지.”
페이쿼리어는 법황청 산하 용사 양성 기관 <위용검전>에 통상 16세에서 17세 사이에 입교, 3년을 수학하여 19세에서 20세의 나이에 임관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라미네아 알터 아라다만텔은 15세에 수석 입학 이후 27개월 만에 수석으로 졸업, 스승의 성검을 계승하여 17세의 나이에 페이쿼리어가 되는 기염을 토한다.
그 스승 미자리 알터 아라다만텔은 라미네아의 졸업 한 달 전에 최전방 전선에서 <시라프> 대공세를 막아내고 죽었다.
제자를, 만나러 가려 했는데.
한 달 뒤에 법황청으로 출발하는 증기선의 배편까지 사 두었었는데.
“…….”
욱신…… 심장에 고통으로 이는 고동에 라미네아는 늘 소중히 지니고 다니는 종잇장을 꼭 움켜잡았다.
스승이 사용하지 못한 배표였다.
이제 와서 몇 번이고 생각한다. <위용검전>이 아니라 용검제에 나가야 했을까.
‘그러면 스승님과 조금이라도 더 함께 있을 수 있었을 텐데, 더 기쁘게 해드릴 수 있었을 텐데…….’
졸업의 때에, 스승의 미소가 아니라 주검을 대면했을 때에 결심했던 것이다.
제자를 받는다면, 자신은 가능한 제자 곁을 지키고 있겠노라고.
그리고 오래오래 살아서, 제자가 페이쿼리어로 임관하는 모습까지 지켜보겠노라고. 본래 후회란 뒤늦게 뉘우친다 하여 후회인 것 아니겠는가…….
“여기 나가셨었어요?”
그때 그녀의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제자가 물었다.
“이 녀석이 지금 누구한테 여기 나가봤냐고 물어보는 거냐? 자식아, 네 스승은…… 끄악!”
델프레드가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흘렸지만 라미네아가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응.”
“페이쿼리어의 제자들은 대부분 공검제에 출전하는 거예요?”
“아니, 대부분 지검제까지 출전해. 무리해야 공검제이려나. 일부러 출전하지 않는 사람도 있어.”
일례로 필두 페이쿼리어 비네사 알터 르노드는 이딴 허울뿐인 대회는 필요가 없다고, 제자 시절부터 늘 전장에 있었다.
라미네아는 쓴웃음을 삼켰다. 나도 그랬어야 했는데…….
“나간 대회는 다 우승하셨어요?”
“응. 정말 열심히 했거든. 시간이 없어서.”
“시간?”
“페이쿼리어들은 수명이 짧아. 내 스승님은 늦은 나이에 날 받아들였기에 다른 페이쿼리어들보다도 남은 수명이 더 짧았어. 그러니까…… 스승님을 기쁘게 해드릴 시간이 얼마 없었단 소리야.”
이미 마음 밑바닥에 쌓고 또 묻었던 슬픔, 그 기척이 스승의 눈동자를 통해 전해졌다.
그때는 알기 어려웠다.
이 세상에서 페이쿼리어들의 사제지간이란 본래 대부분 비극으로 끝난다는 사실을…… 그렇기에 스승의 말을 그저 믿었다.
“아, 카미는 걱정할 필요 없어. 내 나이는 이제 파릇파릇한 스물다섯이거든! 시간이 차고 넘쳐!”
그러나 알 수 있는 것도 있었다. 어쩌면, 어렴풋이 느낄 수 있던 걸지도 모른다.
이미, 그런 비극을 겪어봤기에.
그렇기에 궁금해졌다. 뭐가 궁금한지는 스스로도 몰랐다. 그 비극적인 끝을 물어보려 했던 것인가?
“스승님이 어떤 분이셨는지 말해줄 수 있어요?”
본선 출전자들이 입장하기 시작하면서 관중석의 열기가 잠시 정적에 휩싸일 때 그렇게 물었다.
“내 스승님?”
“엄청 강했죠?”
“강하다? 음, 그 질문에는 복합적인 대답을 해줄 수밖에 없겠네.”
카밀라가 고개를 갸웃하자, 라미네아가 피식 웃었다.
“우선 카미가 물어본 ‘강하다’의 기준에서 보면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거야. 스승님은 페이쿼리어 무력 순위가 높으셨던 적이 한 번도 없었거든. 항상 최하위권에 계셨지.”
“설마요.”
“정말이야. 거기에다 그 비네사 선배님이 쌍둥이 성검의 대리자인 데다 서임 동기이기까지 하다 보니 원치 않게 많은 비교를 받으셔야만 했거든.”
비네사 알터 르노드.
12세기의 동란기를 평정한 영웅, 리스타 알터 쉬르팽의 뒤를 잇는 실력자로 평가받는 여걸.
비네사는 제자 시절부터 항상 최전방에서 마족과 쇠붙이를 맞대며 종군했다. 1년 임기가 끝나도 전장에 남아 마(魔)를 도륙했다.
“하지만 내 기준에서는 누구보다 강한 페이쿼리어셨단다.”
“뭐지, 말의 앞뒤가 안 맞는 것 같은데요.”
“내 스승님은 말이야. 종이비행기를 엄청 높고 빠르게 날리는 법을 알고 계셨어. 연으로 매나 독수리를 골리는 방법도. 그뿐이야? 우는 아이를 10초 만에 웃게 만드는 재담도 수십 개씩 갖고 계셨지. 닭과 약초를 조합해서 맛있는 죽을 만드는 법도 알고 계셨고 말이야.”
“페이쿼리어인데도요?”
카밀라의 상식 속에서, 용사란 마족을 토벌하는 존재였다. 종이비행기를 접거나 연으로 매를 놀리거나 아이들을 웃기는 존재가 아니라.
“그래, 페이쿼리어셨는데. 그분이 계신 곳에는 언제나 웃음이 가득했단다. 난 그분의 그런 점이 게 너무 멋있었어.”
“나는 잘 모르겠는데요.”
“나중에 알게 될 거야. 그래서 비네사 님의 제안을 거절하고 스승님에게 제자로 받아달라고 떼를 썼단다. 제자로 받아주면, 최고의 페이쿼리어가 되어서 기쁘게 해드리겠다고 하면서. 스승님은 그럴 필요 없으니 당근이나 썰어보라고 하셨지. 균일하게 5등분을 내면 제자로 받아 주겠다나?”
카밀라는 멍하니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말씀하실 때의 미소가, 이제는 돌아갈 수 없고 돌이킬 수 없는 날을 그리는 미소가…… 너무 아련하고 슬퍼서.
저토록 신나게 말하고 나서, 그 모든 이야기를 끝맺는 미소가…… 너무나도 아파 보여서.
“그렇게 말씀드렸는데, 결국 나는 최고의 페이쿼리어가 되기는커녕 페이쿼리어로 임관하는 모습조차 보여드리지 못했구나.”
교차로, 인연의 선로 (1)
‘검의 축제’에 출전하는 참가자들은 광장 중앙, 리스타 파티의 동상 앞에서 경례를 올린다.
그것은 경의의 표출.
당신들 같은 영웅이 되겠다는, 스스로와 세상을 향한 맹세.
‘멋있다.’
그 리스타 앞에서 저런 경례를 올릴 수 있다니, 카밀라는 가슴 앞에서 주먹을 쥐었다.
‘최고에 다다르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저럴 수가 있구나.’
곧 대진표가 공개되고 1회전 선수를 제외한 출전자들이 진행자의 안내에 따라 퇴장했다.
“카밀라!”
그러던 에쉬르가 카밀라를 알아보고 정답게 손을 흔들었다. 당연히 에쉬르에게 쏠려 있던 모든 관심이 이쪽으로 쏠렸다.
“누구야?”
“라미네아다. 델프레드도 있어.”
“요한이다!”
“열두 살에 벌써 리미테스(2성) 등위라는 그 천재 소년?”
“라미네아의 제자도 있어.”
“라미네아한테 제자가 어딨냐?”
“있어! 이번에 <테르베노플> 가서 자격도 땄다더만!”
“귀엽게 생겼네.”
일행의 성격에 따라 관중들에게 보이는 모습이 제각각이었다.
라미네아는 정다운 미소와 손짓으로 화답했고, 요한은 묵묵히 책에 시선을 꽂은 채 들은 체도 안 했다.
카밀라만이 시선을 어디다 두어야 할지 모른 채, 시뻘겋게 달아오른 볼을 숨기고 있었다. 델프레드가 클클 웃었다.
“너도 몇 년 안에 유명인이 될 예정이니 이 정도 관심에는 익숙해지는 게 좋아. 유명해지고 싶다고 까부는 것들, 다 겪어보질 못하니 하는 개소리야. 이만큼 피곤한 것도 없어.”
유명인이라…….
그 말이 부담스럽기도 하나 기분이 좋지 않았다고 한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하지만 그 기쁨이 얼마나 낯부끄러운 오만이었는지는…… 에쉬르의 첫 합을 본 순간 바로 알게 되었다.
“……?!”
“……?!”
“……?!”
십문자도가 정숙하고 견고한 검술이라 한다면, 십일자도는 들뜨고 변화무쌍한 검술.
극위성검 르노드는 칼자루와 칼집에 손가락 고리가 달려 있었다. 검사는 이 고리에 손가락을 넣는 것으로 검과 칼집을 쥐는 방식을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었다.
에쉬르가 사용하는 태도는 르노드를 본뜬 것이었으니 당연히 이 고리가 부착되어 있었고…….
‘대체 저게 무슨……?’
카밀라는 숨을 쉬는 방식조차 잊었다. 숨을 쉴 때 늑골의 움직임 때문에 에쉬르의 동작을 놓칠 정도였으니까.
‘그때 나랑 했던 검무는…… 준비운동 수준도 안 됐어.’
상대는 일성칠검 중 북부에 소재지를 둔 설산검파(雪山劍派)의 고수였다.
그래, 세상에 그 이름이 알려진 고수가 아니면 이 공검제에는 참가조차 못 하는데…….
끝없이, 마치 소용돌이치듯이 사방에서 몰아치는 참격에 제대로 된 초식조차 펼치지 못한 채 압도당할 뿐이었다.
칼싸움에서 중요한 건 간격.
상대의 간격에 익숙해지고 나면 반격의 허점을 찾을 가능성이 생겨난다.
하지만 에쉬르는…….
역수(逆手)와 순수(純手)를 오가는 칼부림 속에서 간격이 다채롭게 변한다. 또한 연속되는 초식 사이에 빈틈이라곤 일절 존재하지 않았다.
여기에서 혼동이 일어난다.
이 혼동을 빠르게 계산하고 바로잡지 못하는 순간 동안 차이는 거듭 벌어진다.
‘십문자도가 방어에 중점을 둔 수비적인 검술이라면 십일자도는 공격 일변도인 검술……. 십문자도가 받아내서 쳐낸다면, 십일자도는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한다는 목적으로 검을 휘둘러.’
라미네아의 눈동자도 놀라움의 빛으로 빛났다.
‘근데 저 아이는 벌써…… 심화 초식을 대부분 사용할 수 있게 된 건가?’
십문자도와 십일자도는 동일하게 연계의 검술이다.
사용할 수 있는 심화 초식의 숫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조합식의 숫자가 늘어나며 그 위력 또한 증대된다.
그때 그다음 생각을, 꿰뚫어 보기라도 했다는 듯이 누군가가 대신 소리를 내어 말했다.
“두 검술에서 중요한 건 초식의 완성도 너머의 연계의 완성도.”
라미네아가 흠칫 놀라며 머리 위를 올려다보았다.
“초식을 그냥 쓸 수 있는 정도로는 안 돼. 모든 초식의 전후 동작을 연결시킬 수 있어야 하지. 어떤 상황이든, 원할 때 꺼낼 수 있도록.”
피비린내와 가죽의 냄새를 향수처럼 거느리고 다니는 여걸, 비네사 알터 르노드가 서 있었다.
그 이루 형언할 길이 없는, 칼끝이 눈앞에 겨눠진 듯한 위압감에 카밀라는 전신의 솜털이 오소소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라미네아가 카밀라를 곁으로 부드러이 끌어당기며 말했다.
“와 계셨나요?”
“내 휘하 중에서 두 번째로 쓸모 있는 녀석이다. 내가 와주길 그토록 원하니 잠시 올 수밖에. 그래, ‘이거’냐?”
순식간에, 정말 순식간이라는 말로도 그 속도를 설명할 수 없다. 비네사가 카밀라 앞에 서 있었다.
“지금까지 뭘 죽여봤지?”
턱을 잡고, 매대 위에 진열된 상품을 훑듯이 카밀라의 얼굴을 이리저리 돌리며 유심히 살펴본다.
움직일 수가 없다.
심장의 고동조차 멎게 만드는 살기(殺氣)가 전신을 사슬로 묶어서, 아무런 반항도 할 수 없었다.
“사람? 짐승? 짐승이라면 대형이냐 소형이냐. 초식이냐 육식이냐. 네 손에서는 피비린내 하나 나지 않아. 도시에서 자란 것들은 벌레만 봐도 기겁을 하지. 하지만 어려서부터 벌레를 자주 보고 잡아보고 죽여본 시골 것들은 벌레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어. 살육도 마찬가지다. 이런 손, 이런 눈으로는 용사가 될 수 없는데.”
“선배님, 우리 카미는 상품이 아닌데요.”
그날, 처음 들었다.
저렇게 날이 시퍼렇게 선 스승님의 목소리는. 그리고 누군가에게 살기를 표출하는 모습도.
카밀라의 턱을 움켜잡고 있던 비네사의 손목을 라미네아가 붙잡았다. 비네사가 같잖다는 듯이 그 손을 쳐냈다.
“페이쿼리어는 제 스승을 닮은 제자를 받는다는 말이 있지. 그래서 똑같이 글러먹은 걸 제자로 받은 거냐?”
“지금 뭐라 하셨죠?”
“패기도 없고 투기도 없고 살기도 없어. 이딴 것이 정말 인류를 대표하는 칼잡이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냐?”
“용사에게 중요한 재능은 칼부림 솜씨가 아니라 마음이에요. 이 아이는 후세에 가장 위대한 페이쿼리어로 기록될 거예요.”
“꿈나라의 용사라면 그렇겠지. 우리는 현실을 살아간다. 칼부림을 못하는 칼잡이의 한심한 말로는 네가 누구보다 잘 알 텐데?”
“한심?”
“제 몫을 다하지 못하는 존재를 한심하다는 말 말고 뭐로 표현할 수 있지?”
웅…… 아라다만텔에서 분노의 격류가 붉게 휘몰아쳐 나왔다.
웅…… 르노드에서도 같은 와류가 용솟음친다.
쌍둥이 성검 각각의 힘이 허공에서 뒤엉킨다. 힘의 파도가 대기를 무겁게 가라앉히며 폐를 움켜잡는다.
“용사에게 중요한 건, 누군가를 보듬어 품을 줄 아는 힘이자 누군가를 웃게 해줄 수 있는 힘. 제 스승님은 한심하지 않았어요. 어떤 페이쿼리어보다 위대했죠.”
“네가 위대하단 언어의 뜻을 잘 모르─”
“─카미는 그렇게 될 거예요. 제가 그렇게 되도록 가르칠 거니까. 비네사 선배님께서 스승님과 똑같다고 말씀하셨을 정도니, 그렇게 위대한 페이쿼리어가 될 수 있단 거겠네요.”
그 힘의 격돌에 근처에 있는 관중들이 급작스럽고 까닭 모를 호흡 곤란마저 겪게 되려던 그때.
“사람의 가치관은 다른 법, 타인이 강요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목소리가.
밤하늘의 흑암을 눈부시게 밝히는 벼락과도 같이, 선명하고 고고한 목소리가 있었다.
“필두 페이쿼리어로서의 체통에 어긋나는 행동은 삼가 주십시오. 경사스러운 날인데, 에쉬르가 기뻐하지 않을 겁니다.”
세상 어디에, 저렇게나 아름다운 남자가 또 있을까 싶었다.
‘요한이 제대로만 성장한다면 저렇게 될까?’
그윽한 눈빛에는 위엄 비슷한 무언가가 있었다. 다만 복식과 분위기가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느낌이었다.
사제인데, 피비린내가 난다.
붉은색 일통의 사제복 아래로 쇠사슬 갑주가 바스락거리는 것이 특이점이었다. 허리춤의 검대에는 성서를 사슬로 패용했다.
옷 곳곳에 먼 날과 가까운 날들의 싸움으로 인한 핏자국이 찍혀 지저분했는데, 딱히 신경 쓰는 기색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아이딘.”
그때 라미네아가 꿈결에 잠긴 사람의 목소리로 그 이름을 불렀다.
처음 보는, 스승의 모습.
처음 듣는, 스승의 목소리.
늘 어딘가 어른스럽기만 했던 스승님께서 저런 목소리를 낼 수 있단 걸 그때 처음 알았다.
“라미네아 경.”
아이딘이라 불린 사제가 라미네아에게 고개를 정중하게 숙여 예를 표했다.
“흥.”
비네사가 콧방귀를 뀌었다.
“네가 내게 명령을 하는 날이 오다니, 역시 세월이란 놈을 우습게 볼 게 못 되는군.”
“제가 어찌 감히 당신께 명령하겠습니까. 부탁드린 겁니다.”
“좋아, 이번에는 특별히 네 무례를 눈감아주지. 네 말대로 에쉬르 저것이 또 심술을 부리면 참 귀찮아지니까.”
비네사가 순순히 물러나는 걸 보고는 델프레드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언제 봐도 무섭군…….
언제 봐도 불편해…….
그렇게 다 끝나나 싶었는데, 관중석 계단을 오르는 비네사를 라미네아가 불러 세웠다.
“선배님, 공검제가 끝나면 다시 전장으로 가시나요?”
“그래, 그곳이 용사가 있어야 할 곳이니까.”
“네, 부디 몸조심하셔서 오래오래 만수무강하셔야 해요.”
“아서라. 송곳니를 드러낼 때는 언제고 이제는 아부냐?”
“진심으로 드리는 말씀이에요. 그래야 보실 수 있을 테니까.”
“뭘?”
비네사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 시선에 정면으로 맞서는 라미네아의 눈동자에는 웃음기 하나 없었다.
“뭐겠어요? 당연히 우리 카미가 에쉬르보다, 저보다, 그리고 비네사 선배님보다 더 위대한 페이쿼리어가 되는 모습이죠.”
오직, 그 자리에 있던 이들 중 요한 프로스트만이 라미네아가 말한 말이 성취되는 미래를 보게 되었다.
카밀라 알터 아라다만텔.
역사가 그때 그 소녀를 이렇게 기록하는 미래를.
붉은 여름의 초년을 선도한 영웅이자 대영웅 샤릴리온을 길러낸 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