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 of the Fake Hero RAW novel - Chapter (21)
가짜 용사 이야기-21화(21/310)
제21화
기원(起源),
카이센 알터 아라다만텔 (4)
다 알고 있었다.
이게 폐도령(廢刀令), 규율을 어기게 하려는 수작이라는 걸. 그걸 어기는 순간 퇴출 조치가 된다는 것도.
알고 있음에도 참을 수 없었다. 참아서는 안 되는 순간이었다.
“뽑아, 네 칼을!”
삼끈이 찢어발겨지며 허공에 늘어질 때, 카이센의 눈동자 속에서 타오르는 불꽃은 고요했다.
“멍청하기는.”
아린 페리의 눈꼬리가 휘어졌다.
허리춤에서 칼이 뽑혀 나와, 카이센의 소검을 맞받아치는 것으로 결투의 승낙을 알렸다.
“흥, 나는 정당방위야. 목숨의 위협을 느꼈으니까.”
그 결투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입회인도 없었고 승패의 규칙도 없었으며 오직 살의만이 존재했다.
카이센의 칼이 허공에서 일순간 꺾이며 아린의 급소를 노렸다.
소름 끼치는 쇠의 비명이 터졌다.
불꽃이 튀길 정도로 사나운 일격이 연달아 쏟아부어졌다. 압도적 공세 앞에서 아린의 칼은 화급했다.
“뭐야, 칼을 뽑은 거야?”
이론 수업을 듣기 위해 복도를 이동하던 997기 생도들이 그 혈극을 보고는 도리질을 했다.
“이래서 남자들은 어쩔 수가 없다니까. 혈기만 왕성해 가지고.”
“아니, 저건 나라도 저렇게 했을 거야.”
카이센을 폄하하던 동기들의 언행에 제동을 건 것은, 제6석 아레시아 알터 솔랑의 제자 세이라였다.
페이쿼리어의 직계 제자.
카이센은 남자라 경우가 달랐으나, 대부분의 경우 직계 제자들은 다른 생도들에 비해 절대적 우위를 차지했다.
실력에서나, 인망에서나.
아린의 계산보다도 일찍 교실에 도착한 세이라는 상황의 내막을 알아보았다.
“상대가 스승을 모독했거든.”
“설마……!”
“설마가 사람 잡는다지? 나라면 칼을 뽑을 여유조차 주지 않고 죽였을걸.”
힘의 우열은 명백했다.
그 명백함 속에서, 아린이 카이센의 공격을 어렵사리 막아내며 견딜 수 있는 이유는 세 가지나 되었다.
하나.
카이센이 반맹인이라는 것.
둘.
카이센은 태도가 아닌 소검이지만, 아린은 주 무기인 바스타드 소드를 쓰고 있다는 것.
셋.
아린은 공세로 전환할 필요가 없다는 것. 이 승부에서 승리를 차지할 필요가 없으니까. 왜냐하면.
“지금 뭣들 하는 거야!”
우레 같은 포효가 터져 나왔다.
카이센이 그 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한 순간, 시야 한구석이 번뜩이더니 칼 휘두르던 손이 납덩이처럼 굳어버려 허공에서 멈췄다.
“!”
카이센은 시선을 들었다.
느닷없이 어디선가 나타난 수석 교관 올리에르 듄 제라예가 카이센과 아린의 팔을 붙잡고 있었다.
극한까지 단련된 보법은 인지가 닿지 않는 장소에서 나타나 상대의 허점을 찌른다. 그때 나타난 올리에르의 보법이 그러하였다.
“너희들은 생도의 제1규율을 어겼어! 원칙대로라면 둘 다 퇴출이다.”
“…….”
“칼을 뽑지 말라는 건 생도의 기초적인 의지력을 시험하는 일이야! 그 자질이 없다고 고백한 거나 다름없으니까.”
그러자 아린 페리가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지만 예외가 존재하죠. 교관님, 전 생명의 위협을 느꼈기에 칼을 뽑았습니다.”
“카이센이 먼저 칼을 뽑았단 소리냐?”
“네, 다른 생도들에게 물어보시죠.”
올리에르는 다른 생도들을 보지 않았다. 대신 카이센을 바라보았다.
카이센이 고개를 들었다.
카밀라를 닮아서, 고요하되 싸늘한 눈동자가 빛났다. 카이센은 올리에르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왜 뽑았지?”
“생명의 위협보다 더 높은 위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아린 페리가 먼저 칼을 뽑았다는 거냐?”
“헛소리예요!”
“아닙니다. 아린 페리가 제게 칼을 겨누었다고 해도 저는 칼을 뽑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 왜?”
“저 녀석이 제 스승을 욕보였기에 칼을 뽑았습니다. 베게 해주십시오.”
그 말에 올리에르의 표정이 서늘하게 굳었다. 아린을 돌아보는 눈동자에서 차가운 불꽃이 너울거렸다.
“정말이냐?”
“……?”
“지금 내가 묻고 있잖아. 네가 그 입으로 카밀라를 모독했냐고.”
아린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침을 삼키고 나서, 능청을 떨듯이 말했다.
“제가 그랬을 리가 없잖아요, 교관님.”
올리에르가 주위를 훑었다.
침묵은 깊었다. 다른 생도들은 무령검파의 위세가 무서워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아린 페리가 지금의 일을 벌일 수 있던 것도 현 필두 검파를 뒤에 업고 있었기에 문제가 없을 거라 확신했기 때문이다.
주의해야 할 존재는 오직 두 명, 997기에서 수학 중인 페이쿼리어의 제자들과 맹작가의 딸.
‘제자 중 한 명은 바보니까 딱 두 명만 주의하면 돼.’
카이센의 눈이 가늘어지면서 심장이 격렬히 뛰기 시작하던 그때 손을 들면서 증언한 목소리가 있었다.
“아레시아 알터 솔랑의 제자, 세이라입니다. 제가 들었습니다, 수석 교관님.”
세이라 팬튼.
새하얀 피부에 눈부신 미색.
팬튼 변경백의 장녀의 눈동자는 싱글거리는 장난기로 아름다웠고, 어깨로 흘러내린 댕기머리는 고상해 보였다.
외모는 중요하지 않다.
아린 페리가 주의해야 할 위험인물 중 하나라는 게 중요하지.
“그래? 뭐라고 했지?”
“카밀라 알터 아라다만텔께서 요한 울프 프로스트와 동침하여 낳은 것이 카이센이라는 망언을 내뱉었지요.”
순간 올리에르의 표정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세이라가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만약 제 돌아가신 스승님께 저딴 말을 내뱉었다면, 저는 결투고 뭐고 바로 그 입을 찢었겠지요.”
“!”
“저 녀석은 답답할 정도로 명예로웠습니다. 저와 제 스승님의 명예를 걸고 증언하는 바입니다, 이상 끝.”
세이라가 생글거리며 말을 맺자, 아린의 안색이 눈에 띄게 새하얘지면서 입술이 흔들렸다.
언제?
아니, 대체 어떻게 벌써 와서?
그것도 하필, 다른 누구도 아닌 세이라가?
순간.
아주 짧은 한순간.
아린의 얼굴이 홱 돌아가더니, 부서진 이빨 조각과 핏물이 허공에 흩날렸다.
“카밀라는 페이쿼리어가 되기 전부터, 그리고 된 순간부터 죽는 그날까지 전장에서만 살았어.”
“교, 교관님…….”
“네가 평화롭게 어미의 젖을 빨고 따뜻한 물로 몸을 씻으며 자라는 동안 카밀라는 핏물을 마시고 땀으로 몸을 씻으며 살아왔다고. 네가, 너 같은 인간 말종도 그렇게 평화롭게 살 수 있도록! 그런, 그런 녀석을…… 감히 네 입으로 모독했다고?”
아마 죽여버렸을 것이다.
올리에르가 수석 교관의 입장이고 아린이 생도가 아니었었더라면.
마른침을 삼켜 몸속에서 날뛰는 격분을 집어삼켰다.
“아린 페리, 당장 여기서 꺼져. 널 <위용검전>에서 퇴학시키겠다.”
“부, 부당합니다……!”
“부당해? 어떤 교관한테 물어도 너는 퇴학이라 할 거다. 무령검파의 장문인에게 전해, 내가 수석 교관으로 있는 한, 너희 검파에서 페이쿼리어가 배출되는 일은 없을 거라고.”
* * *
“눈은 좀 어때.”
“안경을 쓰면 그럭저럭 살 만합니다. 어디까지나 그럭저럭이요.”
“자식아, 그렇게 강조 안 해도 알아.”
올리에르의 발걸음은 빨랐다.
법황청의 상승회랑을 걷는 내내 푸르른 북녘 하늘에서 구름이 춤을 추었다.
복분자 향기로 몽롱한 것처럼, 태양의 노을이 지는 하늘은 향기로웠다.
“아린 페리의 퇴출 수속은 다 끝났다.”
“빠르군요.”
“진룡들께서 생도들의 교육 전반을 교관들에게 일임했거든. 뭐…… 그러니 이제 화를 좀 풀어라.”
카이센은 교관의 의중을 알 수 없었다. 카이센이 어이없는 어조로 말했다.
“저보다 더 화가 난 것 같으십니다만.”
“그러냐? 흥, 그럴 수밖에. 카밀라가 말했을 리가 없지만 그년과 난 <위용검전> 동기였거든.”
“스승님과……?”
“영 맘에 안 드는 년이었어. 맨날 수석 자리를 차지해 대고서는 좋아하는 기색 하나 없었으니까.”
카밀라의 동기?
그건 참 놀라운 일이었다.
알지 못하던 카밀라의 모습을 알려주는 올리에르의 어투에 카이센은 고취되었다.
“그리고 이것 봐. 마지막에 녀석은 영웅의 성검인 아라다만텔의 선택을 받았고, 나는 보다시피 교관 노릇이나 하고 있지.”
카밀라를 욕하는 그 어조에는 비난이라고는 없었다. 올리에르의 목소리는 그리움에 젖어 있었다.
“그래도 나쁜 년은 아니었어.”
“그랬죠.”
“너한테 어지간히도 잘해줬나 보다? 그렇지 않고서야 칼을 뽑았을 리가 없잖아. 내막만 몰랐더라면 바로 퇴학인데.”
카이센은 다시 창밖으로 먼 여름하늘을 노려보았다. 눈동자가 일순간 흔들렸다.
그날.
모두가 죽던 그날.
첫 장마가 쏟아지던 새벽의 일들과 끝없이 울려 퍼지던 동료들의 비명들이 떠올랐다.
– 여행을 떠나봐.
키슌과의 혈투와 피를 머금고 웃던 카밀라의 미소와 카이센의 머리에 와 닿던 스승의 마지막 온기를 떠올렸다.
“…….”
카이센은 가슴 깊이 스미는 슬픔에 입을 열 수 없었다. 그 표정을 이해한 올리에르가 카이센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나더러 자기는 절대 제자를 받지 않겠다고 큰소리를 치던 년인데, 네가 눈앞에 나타나니 아주 어이가 없더구나. 솔직히 말하자면 기뻤어.”
“…….”
“그래서 기억이 나더라. 만약 자기 제자가 오게 되면 한 가지 팁을 전해주라고 했었거든. 난 당연히 그년 성격에 제자 같은 건 절대 안 올 줄 알고 잊고 있었는데.”
“팁이요?”
“카이센, 왜 남자 중에 페이쿼리어가 나오지 못한다고 생각해?”
“……?”
“이유는 여럿 있겠지만, 카밀라는 그게 마음가짐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어.”
“어떤 마음가짐이죠?”
“남자는 신체 능력이 여자보다 강해. 분하지만 이건 인정해야 하는 사실이지.”
“그래서 여자는 마나체인을 더 잘 다루죠.”
“마력은 사용법을 배우는 거고, 신체 능력은 타고나는 거지. 그러다 보니 스스로의 힘을 과신하는 경향이 강해.”
카이센은 고개를 갸웃했다.
올리에르 듄 제라예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감이 오지 않았다.
올리에르가 승강기 안으로 들어섰고, 카이센이 뒤따르자 [98]의 단추를 눌렀다.
“여자는 아닙니까?”
“당연히 아니지. 여자는 신체 능력에 의지하기가 비교적 힘드니까 다른 것에 의지하게 되거든.”
“다른 것?”
“도구다, 카이센. 검사가 주력을 쓰는 방식, 즉 쇄(鎖; Manachain)를 여자가 더 잘 다루는 이유도, 페이쿼리어로 선발되는 이유도 아마 여기 있을 거야.”
“……!”
“자신을 낮추고 자신의 한계를 알며 성검에게 간절히 모든 걸 기원(祈願)하는 거지. 그게 바로 성검을 사용하는 방법이다.”
올리에르는 거기까지 말하고서는 핫, 자조적으로 웃으며 유리벽에 몸을 깊숙이 기댔다.
“성검의 선택을 받지 못한 내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냐마는…… 여하튼 카밀라가 나한테 해준 말은 이거야.”
카이센은 턱을 매만졌다.
자신의 몸이 아니라 성검에 의지한다. 그리고 성검에게 모든 걸 기원한다?
스승이 친우에게 남겼다는 가르침을, 그날 카이센은 주의 깊게 듣지 못하고 한 귀로 듣고 흘렸다. 그도 그럴 것이.
“수석 교관님, 하지만…….”
“뭐지?”
“용령석을 다섯 번이나 투입하고 죄다 실패한 제게 그 말이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제 퇴출 수속만 남은 것 같은데요.”
“의미가 있을지 없을지는 아마 오늘 결정될 거야.”
“네?”
철컹, 육중한 쇳소리가 승강기가 목적지에 도착했음을 일러주었다.
철망을 옆으로 열었다.
올리에르가 카이센을 데리고 빠져나온 곳은 98층, 용신전(龍宸殿)이라 하여 추기경들이 광룡의 계시를 내릴 때만 열리는 신성한 장소로 사방이 금빛으로 번쩍였다.
「이곳은 성스러운 곳이니라, 신발을 벗어라, 카밀라 알터 아라다만텔의 제자 카이센.」
그 둥그런 황금세계에서 근엄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대기가 낮게 전율하는 음성은 지고했다. 그리고 낯익었다.
이 목소리는……?
들어본 적이 있는 위세였고 겪어본 적이 있는 존재감이었다. 꿇어앉아 신을 벗은 카이센은 감히 고개를 들었다가 눈동자가 떨렸다.
「아이야, 그간 평안했느냐.」
요슈하르 추기경이었다.
자신을 <위용검전>에 받아주었던 황룡…….
저 황금색 비단옷과 근엄한 용 대가리를 잊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보시다시피 평안치 못했습니다. 용령석의 1차 주입 과정에서 눈이 멀었거든요.”
“야, 카이센! 너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죄송합니다, 각하.”
올리에르가 다급히 제지했으나 요슈하르가 괜찮다는 의미로 손을 들어 보였다.
「아니, 아이야. 네 눈을 멀게 한 건 자만심이니라.」
“……?”
「고작 한 번 넘어졌다고 좌절하느냐. 세상만사를 무엇이든 단번에 이룰 수 있으리라 자신했느냐? 자만심이란 가장 교활하고 인내심이 깊은 암살자이거늘.」
“그 한 번 넘어진 걸로 불구가 되어버린 제가 뭘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무심코 목소리에 날이 섰다.
먼 법좌 위에 앉아 있던 요슈하르가 깊은 숨을 내쉬며 일어섰다.
「통상의 일로 이루어지지 못한다면, 통상의 일이 아닌 걸로 이루어보면 될 터.」
요슈하르가 계단을 내려오자, 법복을 걸친 비룡 신관들이 푸른 비단에 휘감긴 신기를 내밀었다.
영석(靈石)이었다.
이 영석에 용언을 불어 넣는 것으로, 영석은 페이쿼리어의 신체에 깃들이는 용령석이 된다.
「일반적으로 생명을 깎아서 용령석을 만드는 자들은 여기에 있는 비룡 신관들이니라.」
요슈하르가 쥐고 있는 돌덩이 위로, 진정 힘 있는 언어를 읊조렸다.
용언(龍言).
용들의 언어란 인간의 것과 달라서, 그 위계에 따라서 말 하나로 천기를 바꾸고 바다를 가르며 땅을 일으켰다.
「Pa bei ro ni Gen jetsu ro shi…….」
읊조려지는 언어가 펼쳐내는 힘의 결들이 출렁거렸는데, 그 힘은 가히 절대의 권위였다.
휘몰아치는 광풍에 섬광.
바닥에 주저앉았을 것이다. 막 신전을 빠져나가려던 올리에르가 지탱해주지 않았더라면…… 그 정도의 힘이었다.
“말도 안 돼…….”
“왜 그러십니까?”
“이건 대박, 대박이야, 카이센. 진룡께서 직접 네가 사용할 영석에 힘을 불어넣어 주시는 거라고!”
소년의 눈이 커다랗게 열렸다.
진룡의 힘?
진룡의 힘이 깃든 돌이라고?
“통상적인 영석은 비룡 신관들의 혼으로 만들어져! 비룡과 진룡 추기경의 힘의 차이는 비교 자체가 안 된다고! 그런데 대체 왜지? 수백 년에 가까운 수명을 포기하시면서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