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 of the Fake Hero RAW novel - Chapter (213)
가짜 용사 이야기-213화(213/310)
시즌 3 : 21화
“렛!”
“람!”
라미네아와 플로렛이 서로를 애칭으로 부르며 주먹을 맞대나 싶더니 정겹게 얼싸안았다.
이것도, 처음 본 모습 같았다.
스승님이 어느 누군가와 저토록 친밀하게 웃는 모습은…… 페이쿼리어에게 서약 동기란 저렇게나 소중한 존재인 걸까?
“론 왕녀 저하도 오셨군요. 어떡해, 볼 때마다 더 귀여워지는 것 같아. 비결이 뭐니?”
라미네아가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자 샤론의 입가에도 미소가 피어났다.
“후훗, 안녕하셨어요?”
“응, 론을 보니 아~주 안녕해. 이쪽은 카미야. 내 제자란다. 론이랑 똑같은 열세 살! 제자가 된 건 열한 살! 늦깎이긴 해도 동갑이니 친하게 지내주렴.”
그러자 샤론이 고개를 갸우뚱 젓더니 카밀라를 바라보았다. 의구심이라 해야 하나, 어떻게 설명할 수 없는 의문이 깃든 눈이었다.
“람, 정보 접근 권한 1급짜리 전달 사항도 있고 하니 잠깐 단둘이 이야기할 수 있음 좋겠는데.”
“응, 렛과의 데이트는 언제나 환영이지. 카미, 잠깐 쉬면서 론과 이야기하고 있을래?”
“뭐, 잠깐 쉬면 되니까요.”
라미네아가 싱긋 웃더니 카밀라의 귓가에 이렇게 속삭였다.
“좋은 친구를 얻고 싶으면, 먼저 좋은 친구가 되어야 해.”
스승님이 플로렛과 함께 떠난 뒤에야, 아까 샤론이 지었던 표정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열한 살에 제자가 됐다고? 후훗, 너 정말 아슬아슬했던 거 알아?”
“아슬아슬하다니, 뭐가?”
“제자로 받을 수 있는 나이. 명확히 명문화된 건 아닌데, 대부분 열두 살이 마지막이라고 암묵적으로 통해.”
“왜?”
“페이쿼리어가 되려면 <위용검전>에 입교해야 하는데, 거기 훈련 과정이 3년이거든. 제자들은 금방 끝난다고 하긴 하는데, 열여섯 살에서 열일곱 살이 입교 권장 나이야. 그래서 대부분 늦어도 열 살 전에 제자가 되지.”
몸이 절로 떨리는 느낌이었다.
만약 그때, 스승님이 찾아오지 못했더라면, 만나지 못했더라면…….
자신은 평생 그 저택에서 가축처럼 살다가 죽지 않았을까.
“근데 플로렛 님은 십문자도에 대해서도 배운 거야?”
“아니, 어떻게 배우겠어? 페이쿼리어의 검술은 정통 계승자가 아니면 <위용검전>의 검술 비본(秘本)에서밖에 못 배워. 주로 스승과 제자가 모두 죽고 성검만 돌아왔을 때 성검의 선택을 받은 생도한테 이런 식으로 가르친대.”
“되게 잘 안다.”
“내 스승님이 그런 식으로 타스알포의 대리자가 되셨거든.”
“근데 이해가 안 되는데. 아까 내 동작, 어떻게 바로 알아보신 거야?”
바로 그 순간이었다.
샤론이 불현듯 손을 내뻗어 카밀라의 두 눈을 찔렀다.
물론 그렇게 되기 전에, 얼굴 앞에서 손목을 낚아챘지만…… 카밀라가 벌떡 일어섰다.
“뭐야, 너!”
“자, 화내지 말아봐. 설명할 게 있어서 그래.”
설명……?
당혹감에서 비롯된 긴장과 분노가 가라앉은 게 아니었으나, 손목을 놓아주고 숨을 내뱉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샤론의 검지와 중지가 각각 왼쪽 눈과 오른쪽 눈의 망막 앞에서 멈춘 것은.
“방금 전의 공격과 지금 공격, 그 차이점이 뭐였을까?”
“네가…… 진심을 낸 거겠지.”
카밀라가 섬뜩 뒤로 물러서는데 의자가 쓰러지며 흙바람이 날렸다.
“반만 정답이야.”
탁자 위로 상반신을 기울였던 샤론이 물러서며 피식 웃었다.
“내 동작의 속도는 아까와 달라진 게 아무것도 없어. 이번에는 네 호흡을, 그러니까 네가 눈을 깜빡이는 순간을 훔쳤다는 게 차이점이지.”
“호흡을 훔쳐?”
“극위성검 타스알포로 사용하는 검법은 극주검법이라 해. 사람의 동작을 읽고, 동작의 허점이나 호흡의 전환에서 비롯되는 긴장 완화의 순간을 훔치는 검술이지.”
다시, 날숨의 끝자락에서 들숨이 시작되려던 그때였다.
‘뭐─?’
샤론의 윤곽이 눈앞에서 사라지더니…… 등 뒤에서 심장이 꿰뚫리는 것 같은 살기(殺氣)가 느껴지는 게 아닌가.
‘─어떻게?’
등줄기에 소름이 섬뜩 내달렸다.
전신의 솜털이 곤두섰다.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는데, 그 검지가 장난스럽게 볼을 콕 찔렀다.
“바로 이렇게.”
카밀라가 경계적인 자세를 취하며 뒤로 물러섰다.
샤론이 못 미더운 게 아니었다.
이 일순간에 드러난 명료한 실력 차이가 부끄러웠다. 만약 이게 실전이었다면, 이대로 패배했을 것이다.
“그게 아까 내 질문과 무슨 연관이 있는데?”
“이렇게 약점을 완벽하게 취하기 위해서는 상대의 동작을 읽을 줄 알아야 한단 소리를 하련 거야.”
“……?”
“인체를 아무리 개성적으로 이용한다고 해도, 인체는 구조적으로 사용 가능한 자세가 한정돼 있어. 스승님이 네 동작을 지적해줄 수 있던 것도 평소에 라미네아 님을 잘 지켜봐서 그런 거란 소리지.”
관찰…….
약점의 파악…….
“고수의 동작을 눈에 넣다 보면 그 아래 실력자들의 동작은 더 알기 쉬워지거든. 고수들은 보법으로 자세를 감추기도 하고 속이기도 하니까.”
샤론이 장난쳐서 미안하단 듯한 미소로 설명을 끝냈다.
그러자 스스로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경계심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대신 엄습해온 건 일종의 존경심, 그리고 더없이 뒤처진 자신에게 가해지는 압박감이었다.
‘지금 나는 십문자도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할 수 있을까?’
반면 이 녀석은 자신이 배우는 검술에 대해 이론적으로도 꿰고 있어.
그리고 방금 이 행동들을 보면 이미 실전적으로도 몸에 체화시켜서 갖고 있을 거야.
이제 겨우 나와 동갑인데…….
‘에쉬르는 세 살이나 연상이어서 열등감이 그렇게 심하지 않았지만, 이 녀석은…….’
카밀라가 주먹을 부르르 떨자, 샤론의 얼굴에 처음으로 진지한 표정이 깃들었다.
“아직 많이 부족하긴 해. 하지만 금방 따라올 수 있을 거야.”
“……?”
“우리 스승님, 엄청 무례하시고 막 나가시지만 그래도 극주검법의 계승자셔. 볼 가치가 없는 동작은 보지도 않아. 근데 아까 널 계속 지켜보셨거든.”
가치가 없으면 보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보았다?
그 말이 시사하는 바를, 샤론이 넌지시 보낸 응원의 의미를 깨닫고 고개를 들었다. 샤론의 진실된 미소가 보였다.
“놀래켜서 미안해. 나 말이야, 동갑 친구가, 그것도 같은 페이쿼리어 제자 중의 동갑 친구가 생긴 게 처음이라 방금 너무 흥분했던 것 같아. 살면서 이렇게 설렜던 적은 처음일지도 모르겠어.”
지검제(地劍祭), 천릿길도 한 걸음부터 (5)
“어째, 전보다 훨씬 마른 것 같은데?”
플로렛이 말했다.
고용인들이 준비한 최고급 다과를 입에 마구잡이로 집어넣으며.
“제자 기르는 게 여간한 일이 아니긴 해. 그치? 기가 그냥 다 빨려. 내가 오죽하면 요즘 옛날 고향 친구들 육아 이야기에도 낄 수 있게 됐겠냐고.”
플로렛의 농담에 라미네아가 서글픈 미소를 지었다.
“렛, 나는 카미를 제자로 받지 말았어야 했던 걸까?”
“왜? 귀엽던데.”
“이 길이 얼마나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길인지 알잖아…….”
기원력 1671년부터 모든 페이쿼리어 병단은 1년 임기로 아크라드 대륙 최전방에 파견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마족, 그중에서도 우루크와 나가에 의한 해안 침탈이 격심해져 가는 시대였던 것이다.
놈들의 살육은 점점 과감해졌다.
강을 따라 내륙으로 올라 도시를 겨누는 일까지 빈번히 일어나고 있었다.
그곳으로, 카밀라를 데려가야 한다. 데려가게 된다.
“왜 잊고 있었을까? 이번에 미르 백부님이 준전시 체계를 말씀하니까 갑자기 혼란스러워지더라고. 내가 대체 무슨 짓을 한 건지.”
양손으로 얼굴을 가린 라미네아가 슬픈 한숨을 흘렸다.
곁에 두고 싶지만.
곁에 둬선 안 될 것 같아.
성장을 지켜보고 싶지만, 성장을 지켜보아서는 안 될 것 같아.
“네가 아무리 마음고생해 봐야 정답은 안 나올걸. 체력 낭비, 시간 낭비지. 그 문제는 말이야, 나중에 네 제자가 가르쳐줄 거야.”
“뭐……?”
“제자가 된 걸 기뻐하는지, 아니면 후회하는지. 그때까지는 뭐, 별것 있어? 최대한 많이 가르쳐주고 칭찬해주고 웃어줘야지.”
플로렛이 과자 부스러기가 잔뜩 묻은 입꼬리를 양쪽 검지로 장난스레 치켜 올렸다.
“한숨 쉬는 모습만 보여줬던 걸 후회하고 싶지 않으면 말이야.”
라미네아는 흠칫 놀라야 했다.
기억 속을 더듬어볼 때, 스승님이 한숨 쉬던 기억이라고는…… 어디에도 없었던 것이다.
“그나저나 한숨 쉬고 싶은 건 나야, 이 기지배야. 세 달 뒤면 청성 각하의 직통 명령으로 대륙을 건너가야 한다고. 에휴, 홍염 각하만 계셨어도 난 대륙에서 계속 꿀 빨고 있었을 텐데.”
“그래, 그랬을 거야.”
“아, 미안. 너한테 이 말을 하면 안 되는 거였는데.”
“아니, 괜찮아. 맞는 말인걸.”
라미네아는 홍염의 아키레아를 떠올리며 슬픈 미소를 지었다.
홍염의 아키레아.
용현 레인 루드윅이 이 땅에 남긴 첫 번째 기적. 마지막 붉은 진룡이자 아드리온 대륙의 수호자.
“아키 고모님이 붉은 비룡들과 붉은 순례자들을 거느리고 아드리온 대륙의 평화를 지켜주실 때는 좋았지.”
물론 그 역사는, ‘청동의 시대’의 시작과 함께 끝났다.
아키레아는 시간의 군주 안리달을 봉인하는 업적을 세우면서, 그 드높은 업적에 걸맞은 대가를 치러야만 했던 것이다.
홍염은 여왕의 심연에 범해졌다.
영육(靈肉)이 완전히 소멸할 때까지, 집요하고 게걸스럽게 모든 걸 착취하는 죽음의 힘에.
홍염이 일선에서 물러나면서 생겨난 공백으로 마(魔)는 기다렸단 듯이 치고 들어왔다.
광룡정교회는 뇌향의 세츠넨을 필두로 총원의 9할에 이르는 누런 비룡을 남방한계선으로 급파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때, 이데아 반도를 책임지던 하얀 진룡 청성의 미른가디아 또한 자원하여 일선으로 나가게 된 것이다.
“그나저나 불길한걸. 너까지 가게 되면 아크라드 대륙은 거의 텅 비는 것과 마찬가지인데…….”
흑장미 병단은 본래 아크라드 대륙에 체재하며 심연의 움직임을 포착하고 차단하는 역할을 맡아왔다.
“별일 있겠어? 임기 마치고 와서 쉬는 페이쿼리어들도 있겠고 뭐. 광룡 성하나 추기경 각하들도 계시고.”
“나도 아는데, 그냥 뭔가…… 좀 불안하네.”
“야, 아크라드 대륙은 그냥 존나 평화로워. 내가 괜히 꿀 빤다고 했겠어? 뇌향 각하랑 청성 각하가 그냥 심연이고 흑교회고 뿌리까지 조져놨다고. 내 꼬봉들 뱃살 볼록하게 나온 것 좀 봐.”
라미네아는 웃었다.
언제 봐도, 언제 들어도, 플로렛의 입담은 그녀를 진실로 즐겁게 만들어 주었다.
플로렛이 나이가 두 살이나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플로렛은 장유의 예도를 내세우지 않았고 허물없고도 동등하게 라미네아를 대해주었던 것이다.
다과를 세 그릇이나 해치운 플로렛이 기지개를 켜면서 일어섰다.
“이제 가봐야겠다. 지검제 때문에 칼날 반도로 가야…….”
탁자에 기대 세워두었던 성검 타스알포의 칼자루를 쥐던 플로렛이 훗, 하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나도 사실 샤론이 지검제에서 우승하지 않기를 바라기도 해. 그러면 전장으로 데리고 가지 않아도 되니까.”
전장…….
그 잔혹한 세계로 제자를 언젠가 데려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다시 가슴이 욱신거리고 쑤셨다.
“네 제자도 그것 때문에 지검제에 출전하는 거지? 열여섯 살 아래는 전장에 못 데려가는 법률 때문에. 지검제 우승자는 예외고.”
“아니, 카미는 그냥 에쉬르처럼 되고 싶대.”
플로렛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진심?”
“진심.”
에쉬르가 누구인가.
그 또래들은 물론이고 연하의 검사들은 경쟁심을 품기보다는 동경심을 갖게 되는 대상인데.
압도적 실력으로 필두 페이쿼리어가 된 스승의 뒤를 이어서 필두 페이쿼리어가 될 것이라고, 세간의 항담들은 벌써부터 그렇게 입을 모으고 있었다.
“그 녀석 참 마음에 드는데? 우리 샤론은 그런 패기를 보여준 적은 없거든.”
“그래서 말인데…… 카미의 동작을 한번 봐줄 수 없을까?”
“네가 나보다 십문자도에 대해 더 잘 알잖아.”
“내가 알려주면 계속 내게 기대게 될 거야. 나는 카미가 스스로 답을 찾아가는 습관이 생기길 원해. 하지만 스쳐 지나가는 식으로 네가 짚어주면 괜찮을 거야.”
플로렛이 피식 웃었다.
“부탁할 게 뭐 있어? 우리 사이에. 그리고 걱정하지 마. 이미 짚어 줬으니까.”
* * *
“근데 수석 교관님한테 공격을 어떻게 적중시킨 거야? 나는 스치는 데에도 실패했었는데.”
들뜬 목소리로 말한다. 카밀라는 샤론과 단숨에 친해졌다.
두노스 왕조의 왕녀가 먼저 어떤 허물도 없이 마음의 문을 열어주었단 사실은 지금도 믿기지 않았으나…….
샤론이 난감하다는 듯이 검지로 턱을 짚었다.
“뭐, 그분께서 엄청 봐주셨으니 가능했던 거지. 내가 대단했던 건 아니야.”
“난 그마저도 안 됐는데 잘난 체하기는.”
“음…… 카밀라, 사실 나는 확실히 말해둬야 할 게 있어. 지검제에서 만나게 되면 난 진심을 다할 거야. 일말의 손속도 두지 않고.”
“흥, 그러면 내가 쫄 줄 알고? 나도 마찬가지야.”
“하긴, 스승님을 따라가고 싶은 건 너도 마찬가지겠구나.”
“응?”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하자 샤론이 도리어 고개를 갸웃했다.
그때 샤론의 설명을 듣고 나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왜 스승님의 얼굴에 그토록 수심이 점점 깊어갔는지.
“내년부터 페이쿼리어들은 1년 임기로 전장에 파견되는 걸로 바뀌었대. 내 스승님도, 라미네아 님도 내년에 다시 전선으로 복귀해야 해.”
“전선? 전쟁터?”
“응. 근데 법황청에서 열여섯 살 이하는 신분을 막론하고 전장 파견을 엄격히 금하거든.”
말뜻을 이해하자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느낌이었다.
스승님과 헤어지게 된다고?
다시, 이 잔혹하고 어두운 세상에 홀로 남겨지게 된다고?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고?
요즘 한숨을 쉬시던 게…….
내가 부족해서, 같이 갈 수 없게 될까 봐 그러셨던 거구나…….
“자, 진정해. 스승님은 페이쿼리어는 그렇게 표정에 모든 게 다 드러나면 안 된다고 했어. 어떤 상황에서든 모두에게 웃어 보일 수 있어야 한다고. 이 이야기에 예외가 있어.”
“예외?”
“지검제야. 지검제에서 입상한 검사는 전장에 나갈 실력을 입증하는 거나 마찬가지라서 합법적으로 전장에 갈 자격을 얻게 돼.”
그 말을 듣자 순식간에 카밀라의 얼굴이 맑고 또 환해졌다.
감정이 솔직하고도 순수하게 드러나는 아이…… 그래서 샤론은 카밀라가 좋았다.
늘 가식적인 아부와 가면적인 태도만이 존재하는 곳, 소리도 없고 형태도 없는 암투가 매일 진행되는 왕궁에 살 때 이런 친구를 얼마나 간절히 원했던가.
“샤론은 그래서 지검제에 나가는 거야?”
“그것도 있지만…… 스승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있는 몇 안 되는 기회라서.”
“몇 안 되는 기회?”
샤론이 쓰라린 미소를 지으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어지러운 기시감이 카밀라의 뇌리를 흔든다. 이 미소를 언젠가 본 적이 있던 것 같다.
그래, 저번에 스승님께서…….
“페이쿼리어는 말이야. 실종된다고 하지만 사실은 몇 년 살지 못하고 죽는 거야. 수명을 힘으로 전환해서 쓰는 사람들이라서.”
“……!”
“페이쿼리어의 제자가 스승과 함께 있을 수 있는 시간은 정말 너무나도 짧아. 그래서 모두 필사적이 되어가는 거고.”
지금, 샤론이 하는 말의 의미가.
그리고 그 의미가 머금고 있는, 운명(運命)이란 이름으로 예정되어 피할 수도 없고 거스를 수도 없는 이별에 대한 슬픔이.
머릿속에서 선명한 상을 이루며 맺히려던 그때.
“가자, 샤론! 다른 곳에도 바로 가봐야 해. 여긴 멋진 남자 하나 없으니 더 있을 가치가 없어. 퉤퉤퉤, 음식도 맛없고.”
벨르윈 저택을 라미네아와 함께 걸어 나오던 플로렛이 샤론을 손짓해 불렀다.
“네, 스승님.”
샤론은 곧바로 플로렛 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라미네아가 카밀라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카밀라는 스승을 올려다보았다.
함께 있을 시간이 짧다니, 그러니까, 언젠가는 반드시 끝난다는 건가? 부정하고 싶으나 부정되지 않았다. 시한부의 삶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어머니가, 그렇게 죽었으니까.
죽어서 묻힌 묘 앞에서 뒤늦게 울며 흐느껴도 아무 의미가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마음속 깊은 곳에서 다짐한다.
그 다짐을, 스스로를 향한 맹세로 쌓기 위해, 생명을 불어넣듯 소리를 주어 입 밖으로 낸다.
“샤론!”
다짐에서 약속으로.
약속에서 맹세로.
“지검제에선 오늘 같은 장난 안 당해줄 거니까, 그렇게 알아!”
등자를 딛고 조랑말에 오르려던 샤론의 눈매가 살짝 커다래졌다.
그 말뜻을 이해했을까.
아마 그랬을 것이다.
곧 그 눈매가 싱긋 호선을 그리며 특유의 어른스러운 미소로 피어났으니까.
“후훗, 기대하고 있을게.”
제자가 어찌나 대견한지, 라미네아가 맑게 웃으며 카밀라의 머리를 두들겼다.
“패기가 넘치는걸! 그래, 론과 많이 친해진 것 같구나. 어때, 좋은 애지?”
스승의 질문에는 단지 미소만으로 대답했다. 지금 자신이 입으로 소리 내어서 해야 할 대답은 다른 것이었으니까.
“저 어제보다 섬무참을 훨씬 잘 쓸 수 있게 된 것 같은데, 한번 봐줄래요? 열차 타러 가기 전에 시간 나면요.”
* * *
“이것으로 이번 지검제(地劍祭) 토너먼트의 대진표 작성을 인가하겠습니다. 최종 날인을 부탁드립니다.”
검의 원탁(圓卓).
원탁이란 현재 명망을 떨치는 검사들로 구성된 법황청 산하 기관이다.
원탁은 전통적으로 검파와 검가들의 분쟁을 중재하고 검술 대회들의 심사를 담당해왔다.
“이번 지검제는 인재 풀부터 화려하군요. 기대가 커요.”
“페이쿼리어 세대교체 기간이니 당연하지. 10년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시기야.”
“페이쿼리어의 제자들뿐만 아니라, 각 검파나 검가에서도 후계자를 이렇게나 많이 내보낸 시기가 있었나 싶네요.”
“한 가문에서 지검제에 두 명의 인재를 본선 토너먼트에 내보낸 것도 정말 오랜만이군.”
한 고령의 심사위원이 원탁 위의 서류에 눈길을 주었다.
가장 먼저 눈이 머무른 곳에는 [카밀라 플라워]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이어서 그 시선이 흘러간 곳에는 이런 이름이 칼날처럼 도드라져 있었다. [발칸 벨체스터].
“벨체스터 가문에서만 두 명의 인재를 동시에 내보내다니. 4강에서 이 둘의 승부가 성사되면 더 재밌어지겠어.”
최강을 겨누는 검호들이 유년기에 반드시 거쳐가는, 검의 축제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