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 of the Fake Hero RAW novel - Chapter (216)
가짜 용사 이야기-216화(216/310)
시즌 3 : 24화
벨체스터 가문에서의 삶은 언제 생각해도 처참하기만 하지만, 처음부터 끔찍했던 건 아니었다.
분명한 분기점이 있었다.
그 분기점은 선대 당주(카밀라에게는 할아버지가 된다)의 죽음이었다. 과묵하고 엄격한 늙은이였긴 해도 밉지는 않았는데…….
그때는 저택에서의 일상이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물론 좋았단 소리는 절대 아니지만 말이다.
아버지란 놈이나 그 마누라는 항상 싸늘하기 그지없었지만, 그래도 이복형제들과의 사이도 적당히 괜찮았던 걸로 기억한다.
부모들이 거리를 두라고 핀잔을 줘도 이복형제 발칸은 카밀라를 알게 모르게 챙겨줬다. 목검 대련으로 검술도 가르쳐주고.
이복 자매인 칸니야도 부모가 보지 않을 때는 카밀라를 언니라고 부르며 따랐다.
지금도 확실하게 떠오르는 몇 가지 사건 중 하나는, 편지를 가지고 저택으로 간 당일의 일이다.
당주는 죽도 한 자루를 던져주고는 갑작스레 검술 사범과 대결을 하게 만들었다.
얻어맞기만 했던 것 같은데, 이상하게 이튿날부터는 새벽마다 당주가 직접 카밀라의 검술을 지도해 주었다.
그 늙은이에게 자상함이라고는 일절 없었다. 하루에 말을 한 마디 하면 많이 한 거였다.
늘 죽도로만 말을 하는지라, 항상 피멍이 든 채 잠드는 나날이 이어졌다. 지금 생각해도 고통스럽기 짝이 없었다.
아버지에게 비교적 자상하게 교육을 받는 발칸과 칸니야를 부러운 시선으로 보기도 했다.
그래도 좋은 일도 없진 않았다.
당주가 가끔씩 머리에 손을 얹는 걸로 칭찬을 할 때였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그때까지 쌓여온 고통이나 설움을 모조리 없애버렸던 것 같다.
그렇게 계절이 네 번 돌아 다시 여름이 되었다.
슬슬 몸에 피멍이 드는 일이 없이 대련을 마치게 되었을 무렵, 당주는 문득 이렇게 말했다. 머리에 손을 얹으면서 말이다.
– 내년부터는 뇌벽검(雷霹劍)의 기초를 시작해도 되겠군.
어린 날에는 그게 벨체스터 맹작가의 비전 검술인지도 모르고 발칸과 칸니야에게 대단한 건지 물어봤던 것 같다.
발칸은 엄청난 것이라 했다.
칸니야는 부럽다고 말했다.
그러나 뇌벽검 기초를 선대 당주에게 배우는 일은 없었다. 이튿날, 당주가 침상에서 죽은 채로 발견되면서 저 말은 마지막 유언이 되었으므로.
바로 그 죽음을 기점으로, 카밀라의 유년기에 진정한 지옥이 시작되었다.
지검제(地劍祭), 천릿길도 한 걸음부터 (8)
제2경기 발칸 벨체스터의 시합에 대하여, 제3경기 올리에르의 시합에 대하여 소상히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발칸은 강력하게 이겼고.
올리에르는 화려하게 이겼고.
제4경기인 샤론은…… 그래, 샤론의 시합에 대해서는 설명할 필요성이 있었다. 설명할 수가 없는데, 설명할 필요는 있었다.
“이런 자리에서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플라네스타 저하.”
상대는 바로 그 에디넨 베르첸.
“서로 최선을 다해, 저 아랫것들은 만들 수 없는 품격 있는 승부로 8강의 마지막을 장식해보죠.”
심사위원들이 이 시합에 대해서 한마디씩 의견을 냈다.
“베르첸…… 벨체스터 맹작가의 방계군요.”
“방계라고는 해도 어려서부터 벨체스터 가문의 비전 검술인 뇌령검을 수련하는 건 똑같지. 비급은 가문의 차기 당주만이 배우게 되지만, 그래도 대부분의 초식은 배운단 말이야.”
“네. 그렇기에 베르첸의 성씨를 가진 자들 중에서 벨체스터보다 더 큰 재능을 발휘한 자들도 역사에 적잖게 등장해왔죠.”
샤론이 어른스러운 미소로 눈매에 호선을 그렸다.
“후훗, 품격 있는 승부? 어떻게 될지 모르겠네.”
“예, 당신과는 완전 선천적인 격부터 다른데 똑같은 ‘페이쿼리어의 제자’라고 불리는 녀석이 있죠.”
베르첸은 방계 구성원 각자의 방식대로 검술 스타일을 발전시켰는데, 에디넨 쪽은 본가보다 기동성을 더 중시했다.
벨체스터의 뇌령검은 건틀렛을 쓰는 게 특징. 근데 에디넨 베르첸은 이마저도 무게를 줄이기 위해 철제 장갑을 사용했다.
요한이 카밀라에게 물었다.
“어떻게 될 것 같아?”
“모르겠어. 샤론은 엄청 빠르게 상대방을 제압하는 쪽인 거 같은데, 에디넨 저 녀석도 빠르다면 빠르니까…….”
껄렁거리기는 해도 실력 하나는 확실한 녀석이다. 아니, 실력이 있으니 저렇게 나대는 것이다.
샤론, 조심해…….
카밀라가 그렇게 생각할 때, 시합장에선 에디넨이 기수식의 자세를 취하며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감히 주제도 모르고 말입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런 천하기 짝이 없는 계집년은 발칸 형이─”
샤론의 입가에서 웃음기가 가신 것은 한순간이었다.
에디넨의 전신에 소름이 돋은 것 또한 한순간이었다.
이 시합을 지켜보던 고수들만이, 그 순간 소녀 검사가 발산한 살기(殺氣)를 분명하게 느끼고 입을 다물었다.
“─넌 안 되겠어.”
“……?!”
“스승님께서는 상대방이 관중들에게 실력을 보여줄 수 있게 조금씩은 봐주라 했는데, 넌 안 돼. 내 친구를 모독한 죄, 백 번 죽어 마땅해.”
샤론이 에디넨을 상대로 기수식의 자세를 취하려나 싶던 순간…… 끝났다.
카밀라의 눈이 멍하니 열렸다.
그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식은땀이 등판을 적셨다. 저번에 자신에게 보여주었던 실력은 장난에 불과했단 생각마저도 들었다.
‘뭐야……?’
시합의 경과를, 몇 개의 파편으로 기억할 수밖에 없었다.
샤론이 찌르기 자세로 에디넨을 통과했고, 에디넨이 방어 자세를 취하지도 못한 채 무릎을 꿇고 쓰러졌다.
샤론이 찌르기 자세에서 기수식 자세로 되돌아올 때, 오직 그 실력을 정확히 아는 흑장미 병단의 병사들만이 함성을 내지를 뿐이었다.
‘뭐냐, 저 괴물 같은 실력은.’
‘저게 타스알포의 후계자인가?’
‘그야말로 극주검법의 교과서와도 같은…… 완벽한 초살(初殺)이었다.’
각 검파의 고수들만이 그런 상념 속에서 샤론을 주목하고 있었다. 심판조차도 멍한 기색이었다.
“제, 제4시합, 제4시합 승자, 샤론 플라네스타! 4강 진출! 이걸로 8강 경기를 마무리하겠습니다!”
그러나 정작 스승 플로렛 알터 타스알포는 대기실로 돌아온 제자를 진지하고도 싸늘한 기색으로 맞았다.
“왜 그랬어?”
“…….”
“네 재능은 폭력적이야. 결승전까지는 상대방을 존중해 주라고 했을 텐데. 남을 무시하고 짓밟는 식으로 검술을 사용하면 언제든 내쫓을 거라고 말했었지?”
샤론도 웃지 않았다.
“카밀라를 모독했어요. 참을 수 없었어요. 고통을 안겨주지 않고 바로 끝낸 것도 자비였다고 생각해요.”
그 대답을 듣자, 훗, 하고 플로렛의 입가에 미소가 돌아왔다. 제자의 머리에 만족스럽게 팔을 얹었다.
“뭐야, 그런 거였어?”
“네.”
“훌륭해. 만약 상대가 친구를 모독했는데 네가 약속을 지킨답시고 상대를 응징하지 않았으면 그거야말로 제자 실격이라 했을 거다.”
* * *
“이번 지검제, 누가 우승할 것 같냐?”
“벨체스터도 엄청나고, 아라다만텔의 후계자도 느낌 괜찮던데.”
“아니, 아니야. 다른 세 명도 엄청나지만 흑장미의 제자는 아예 격부터가 다른걸?”
지검제 4강.
한 번 갈라져서 평행선을 달리던 연(緣)의 선로가 다음 교차로에 다다르고 있었다.
‘역시…… 벨체스터 맹작가의 차기 당주라면 당주네.’
라미네아가 주목한 건 발칸 벨체스터였다.
‘카미랑 올리에르는 샤론과 붙으면 승부가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발칸이라면 호각을 이루고도 남아. 어쩌면 그 이상.’
벨체스터는 삼대 맹작가 중 하나로, 오직 검 하나로 백작에 준하는 작위를 얻은 자들이다.
검가는 검파와 다르다.
여럿 중에서 적성이 높은 자를 선발하면 되는 검파와 달리, 검가는 인적자원이 한정되어 있었다.
‘완벽한 우승을 위해서 딱 열다섯 살이 되는 해에 출전한 건가.’
그렇기에 검가들은 차기 당주가 둔재라면 범재로, 범재라면 천재로, 천재라면 천재 이상의 천재로 만들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다.
하나의 인적자원에 쏟는 지원의 질과 양이 검파와는 비교도 안 되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실력의 격차 같은 외면이 아니라, 더 깊은 내면에 있었다.
‘벨체스터 가문은 카미에게 있어서는 유년기의 악몽의 상징과도 같아서…….’
심리적 압박감으로 몸이 굳어버릴지도 모른다. 유년기에 영혼에 채워진 족쇄 때문에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설사 이기더라도…….
그 승리의 과정 속에서 어린 날의 악몽을 몇 번이고 되짚어가야 하니, 고통이 상당할 텐데.
“내가 만약 너라면 안 내보낼 거다.”
그때 델프레드가 말했다.
턱짓으로 대기석을 슬쩍 가리켰다.
카밀라가 외날검을 품에 끌어안은 채 멍하니 땅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라미네아, 네가 저 녀석을 내년 임기에 전장으로 데려가고 싶다는 욕심만 버린다면 되는 문제야.”
카미의 지검제 우승은…… 그저 자신의 욕심이었을까? 정말 그런 소망이 있었을까?
없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하지만 그 이면으로, 제자의 꿈을 응원하고 싶은 마음도 컸다. 저 아이가 꿈에 다다르는 과정까지 함께하고 싶었다.
시간이, 없으니까.
그들에게 허락된 동행의 시간이, 너무나도, 너무나도 너무나도, 짧으니까.
“아니, 카미는 나가야 돼.”
“왜?”
“유년기의 아픔을 매듭지어야 하거든. 마음에 생긴 구멍은 그 구멍을 낸 사람만이 메워줄 수 있는 거라서.”
델프레드가 발칸과 칸니야와 카밀라의 관계를 알 리가 없었다. 그렇기에 한때 비슷한 처지였던 제자를 바라보았다.
“네 생각은 어떠냐, 요한.”
카밀라와 비슷한 유년기를 겪었던 요한은 스승의 질문에 조용히 시선을 비꼈다.
“스스로의 의지가 중요하겠지만…… 3년으로 마음의 상처가 완전히 아물진 않았을 거예요.”
아마, 그 상처가 완전히 아무는 일은 없겠지.
평생…….
델프레드가 한숨과 함께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카밀라 앞으로 다가가 한쪽 무릎을 꿇어 눈높이를 맞췄다.
“무리하지 마라. 기권하는 방법도 있어. 첫 시합 때 너무 무리했다고 하면 돼. 네 시합이 훌륭하기도 했고, 제자가 된 지 3년도 안 됐으니 모두 납득할 거다.”
“…….”
“몇몇 놈들은 도망갔다고 놀리겠지만, 놈들은 네가 천검제에서 우승해도 비난할 쓰레기들이니 무시하고. 다른 실적으로 그걸 부정해주면 그만이야. 보자, 지금 시간이…… 지금이면 기권할 수─”
그때 카밀라가 시선을 들었다. 델프레드는 흠칫 놀라야 했다.
뭐지……?
겁에 질린 눈이 아닌데……?
이 시선은, 그래,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자신 같은 마법사들이 수학 풀이에 열중할 때의, 그런 눈빛이었다.
“괜찮아요. 실망시키지 않을게요.”
“긴장해서, 뭐, 머릿속이 새하얘졌다든가, 그런 상태였던 거 아니었냐?”
“긴장되긴 하지만 딱히 무섭지는 않아요.”
요한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왜 고개를 숙이고 있었어?”
“발칸의 동작을 떠올려보고 있었지. 상대법을 생각해보게.”
“뭐?”
“예전보다 훨씬 강해진 것 같지만, 그래도 어린 시절 버릇이나 습관 같은 게 조금씩은 남아 있더라고.”
델프레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어린 시절에 몇 번 본 것으로 상대법을 생각해 낸다고? 아니면 단지 몇 번 본 게 아닌 건가?
“나요, 최선을 다할 거예요.”
그래서 언젠가…….
스승님께서 나를 제자로 받아서 정말 다행이었다고 당당히 말하실 수 있도록.
“그러니 걱정 안 해도 돼요.”
헤헷, 하고 카밀라가 긴장을 억누르는 미소를 지었다.
델프레드의 눈이 크게 열렸다.
용현께서 말씀하시길 아이들의 잠재력은 실수(實數)가 아니라 변수(變數)라 했는데…… 이놈도 고양이인 줄 알았더니 사실 호랑이의 새끼였던 건가.
“이거 참…… 어떡하냐. 네가 점점 좋아지려 하네.”
라미네아와 요한이 질색하는 표정으로 델프레드로부터 한 발짝씩 물러섰다. 델프레드가 항변했다.
“아니, 이 미친, 그런 뜻이 아니잖아, 이것들아!”
그 재담을 지켜보던 카밀라가 덧없이 웃었다. 긴장이 풀리나 싶었으나 손에는 여전히 경련이 일고 있었다.
“그래도…… 흐, 긴장되긴 하네. 봐요, 칼자루 잡은 손의 떨림이 멈추질 않아요.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아니, 아닌가…….
그 저택에서 아버지가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들릴 때면 이렇게 떨었던 것 같기도 하고…….
유년기의 암흑이 떠오를 때, 그 떨리는 손 위로, 따스하고 또 따스한 온기가 포개어졌다.
“카미, 언젠가라느니, 다음에는 그렇게 될 거라느니, 만약 그런 미래를 생각하고 있다면 그럴 필요 전혀 없어.”
“네?”
“카미를 받은 이후의 모든 순간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또 빛에게 감사하고 있으니까. 이 아이가 나의 제자라서 너무 기쁩니다, 라고.”
마음속의 말을 아껴 둔다든가 하지 않아. 순간을 살아가는 페이쿼리어에게는 한순간 한순간이 더없이 소중하니까. 기약 없이 이어지는 일상이란 것이, 없으니까.
“카미는 그저 두려워하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 혼자 가는 게 아니야. 앞에서 내가 손을 잡아줄게. 뒤에서 밀어줄게. 그러니 겁먹지 말고 천천히, 그리고 차분히 나아가기만 하면 돼. 알겠지?”
그 눈부신 온기와 향기가 몸속으로, 마음속으로 스민다.
서서히, 손의 떨림이 멎는다.
천천히, 심장의 진동이 멎는다.
스승의 두 눈을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이는 카밀라의 동작은 차분할 정도로 단호했다.
[4강 제1경기를 시작합니다.]반대로 점수가 높을 경우 시합 순서가 앞에 배정된다. 최고 점수를 가진 두 참가자는 제1시합에서 맞붙게 된다.
[대기실의 대진자들은 광장 중심부로.]바로 지금, 카밀라의 이름이 호명되는 것이 바로 그 이유에서 기인한다.
“그럼 다녀올게요.”
이 사람을 스승이라고 부르는 건, 내가 이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된 뒤에 그렇게 하도록 하자.
지금은…….
지금은 오직…….
카밀라는 검을 쥐고 나아갔다. 잠시, 스승의 품으로부터 벗어나 앞으로 나아갔다.
‘가는 거야. 당당하게.’
낯선 빛이 쏟아지고.
낯선 이들의 관심이 쏟아지며.
낯익은 상대방으로부터 살기(殺氣)가 쏟아지는, 더없이 ‘낯익은’ 세상 저편으로.
“시합 개시까지 1분, 양측 대진자는 시합장 중심부로.”
카밀라는 중심부로 다가가며 상대를 살폈다.
‘발칸…….’
새삼 키가 3년 전보다 훨씬 커졌단 걸 느꼈다.
자신도, 발칸도.
스승님 말대로 10대 초반에는 여자가 남자보다 성장이 더 빠르다. 하지만 10대 중반부터는 남자의 성장이 말도 안 되게 빨라진다.
‘엄청 어른스러워졌네…….’
저 얼굴이, 날카로운 눈동자가 어느 순간부터 무서워졌다. 아버지의 얼굴을 빼닮아서 그런 것 같았다.
발칸은…….
그 영감탱이가 죽기 전까지는 그래도 카밀라와 친하게 지냈던 인물이었다.
‘항상, 묻고 싶었어.’
그 이후로는 카밀라를 완벽하게 무시하긴 했으나 험하게 대한 적은 없었다.
‘대체 왜 무시했는지.’
그렇게나 힘들 때, 왜 그 전까지는 그렇게 잘해주다가, 갑자기 무시하기 시작했는지.
– 그러니까, 다시 만나야 해. 다시 만나서, 마음속에 쌓인 오해의 응어리를 정리해야 해. 그게 영혼 속에서 썩어서 문드러지기 전에.
스승님께서는 그렇게 말했다.
칼에는 마음이 담기는 법이라고, 자신을 향한 상대방의 마음이 말이다.
그래서 내심 이 승부가 성사되길 바라고 있었다.
– 언젠가 시합에서 만나게 된다면…… 그때 검으로 물어보는 거야.
서로가 먼저 탈락하는 일 없이, 이렇게 만나게 되기를.
“이야, 드디어 성사됐네. 벨체스터 가문의 지검제 내전이다.”
“어라? 그러고 보니 왜 서녀 쪽은 루드윅 가문의 문장을 달고 있지?”
시합장 중심부에서 마주 서게 된 이복형제에게 카밀라가 말했다.
“3년 동안 잘 지낸 모양이네. 얼굴에서 때깔이 다 흐르고.”
발칸이 답했다.
“배웠을 리 없는 귀족식 결투 예절을 가르쳐주마.”
대진자들이 심판의 주선 아래 마주 서는 것까지는 지난 시합들과 똑같았다.
그러나 칼집에 든 칼이 맞부딪치는 일은 없었다.
대신 발칸이 허리춤에 두르고 있던 검대를 벗어 카밀라의 발치로 던졌을 뿐.
카밀라는 그 검대를 발끝으로 집어 허리 위로 들어올렸다.
“이건 갑자기 뭔데?”
“그 동작은 옳지 않다. 예절을 배운 귀족들은 그걸 잡지 않지. 피차 검대를 상대의 발치에 내던져 교환하는 행위로 결투가 성사─”
“─아아, 이러쿵저러쿵 시끄럽네, 진짜.”
검대가 발칸의 발치를 나뒹굴었다.
귀족식 예절과는 완전히 달랐다.
돌아온 건 카밀라의 검대가 아니라, 발칸의 검대였으니까.
“…….”
그렇게 떨어진 검대를, 가죽의 결마다 벨체스터의 문장이 호화스럽게 새겨진 그 검대를…… 카밀라가 턱짓으로 가리켰다.
“그런 싸구려는 오빠나 많이 차. 내 건 소중해서 절대 그렇게 안 던져. 괜히 핑곗거리 만들 생각 말고 평소대로 해. 쳐부숴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