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 of the Fake Hero RAW novel - Chapter (226)
가짜 용사 이야기-226화(226/310)
시즌 3 : 34화
인연의 분기점, 대륙을 넘어서
기원력 1671년의 2월이 아스라이 밝았다.
허옇게 피어났다 스러지는 입김이 늦겨울을 맞은 시아스튤리카 위에 거듭 퍼졌다.
이제는 새벽마다 이곳을 달리며 약식 사관 훈련 때 얻은 체력을 단련하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후우, 후우, 후우…….”
물론 체력은 기본.
진짜 훈련은 따로 있다.
몸을 씻고 연무장에서 마력 명상을 하며 기다리고 있노라면…….
‘으음, 슬슬 오실 때가 됐는데.’
그런 생각이 들 때쯤, 기척을 탐지하고 몸을 벌떡 일으킨다. 동시에 발치의 죽도를 쥐고 휘두르면.
따악!
이렇게, 여느 때처럼 정수리를 노리던 스승님의 목검을 죽도로 가로막을 수 있다. 그 너머로 보이는 건, 당신의 미소.
“좋아, 오늘도 컨디션이 좋아 보이네?”
“훗, 천재에게 이 정도는 이제 당연하달까요?”
“아하하, 그렇지. 시작하자!”
그해 겨울에는 아직 완성되지 못한 제6식 섬무참을 완벽하게 갈고닦는 일에 집중했다.
– 섬무참은 본래 검무 연계의 마무리 동작으로 들어가는 경우가 많아. 아니, 다 그렇게 쓰여.
검무를 연계하면서 칼날에 거듭 축적된 위력.
관절에 일던 충격과 반동.
혈관의 혈류와 마력의 흐름…… 그것들 모두를 하나로 엮어 발산시키는 것으로 자신의 자세는 안정화시키고 상대방의 자세는 무너뜨리는 사용법이었다.
– 하지만 카미가 지검제에서 샤론이나 발칸을 상대할 때 선보인 ‘발(發) – 섬무참’도 괜찮았어. 아니, 십문자도의 다른 가능성이 보였다고 할까?
물론 발(發)을 사용하는 방식도 더 연구할 가치가 있어 보였지만, 일단은 정도(正道)를 완벽하게 익히는 게 중요해 보였다. 각색은 나중에도 충분히 할 수 있다.
– 그러니까 일반적인 섬무참은 마무리 동작이란 거군요.
검무를 펼치다 보면, 검의 움직임에 취해 무게중심을 잃는 경우가 잦았다.
그걸 교정해주는 초식인가?
심화 초식 하나하나가 정말, 검무를 완벽하게 만들기 위해 엄청난 고뇌와 숙고 끝에 만들어졌다는 게 절실히 느껴졌다.
– 그리고 십문자도에서 몇 안 되는 광역 초식이기도 해. 일대다 승부를 펼칠 때 아주 유용하지.
그렇기에 섬무참 훈련은 일렬횡대로 늘어선 허수아비 다섯 개를 동시에 베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훈련 방식은 이하의 방식으로 변해갔다.
“자, 초식을 10개 연계하다가 11번째 초식을 섬무참으로 삼으면서 자세를 정돈하는 거야!”
한 주.
“자, 내가 섬(閃)! 이라고 외치면 하던 초식을 멈추고 섬무참을 쓰는 거야!”
한 주.
또 한 주.
“언제, 어느 순간에나, 원할 때 섬무참을 쓸 수 있게 되어야 해!”
물론 쉽지는 않았다.
애초에 십문자도는 한 초식당 제대로 쓰게 되기까지 3년을 잡는다고 했다.
저택을 떠나게 되기까지 벨 수 있는 허수아비는 다섯 개는커녕 세 개가 최대였지만…… 그 훈련의 나날은 즐거웠다.
그렇게 4주가 흐르고…….
겨울이 저물고 봄이 싹트는 3월, 카밀라는 추억을 일기장에 정돈하기를 마친 뒤 여행 가방에 짐을 싸기 시작했다.
“…….”
옷장에는 많은, 정말로 많은 옷들이 있었다.
벨르윈 저택에 오고 나서 당주 마님이나 스승님이나 라디스 언니께서 주셨던 선물들이다.
그 옷들이 대부분이 이제는 작아서 입을 수 없다는 게 놀라웠다. 자신의 몸의 성장이 새삼 신기하고 또 아련했던 것이다.
‘3년이라, 정말 시간이 순식간에 갔네. 벌써 한 달 뒤면 또 생일이고, 열네 살이 되잖아.’
옷 하나하나에 깃든 추억을 떠올리며 남몰래 울거나 웃었다.
가져갈 만한 옷들만 여행 가방에 넣다 보니 곧 지검제 때 입었던 루드윅 가문의 문장이 찍힌 사냥복이 나왔다.
그 옷을 오랫동안 말없이 보고 있었다. 그때, 그날, 쏟아지던 환성과 갈채가 아직도 생생하게 떠올라 심장이 두근거렸다.
‘가져갈까?’
아니…….
이렇게 귀한 걸 왜 가져가…….
먼 타향 땅에서 이 보물을 잃어버리는 것이 두려웠다.
‘두고 가는 게 좋겠어. 다른 이유로도 말이야.’
지금 자신처럼, 당주 마님이나 라디스 언니도 이걸 보면서 그날의 추억을 떠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짧게 편지를 썼다.
짧게 쓰려 했는데, 길게 써졌다.
원래는 언문(諺文)이라 불리는 웨른어도 버거웠건만, 지금은 제국 학술어도 제법 쓸 수 있게 되었다. 라디스 언니의 교육 덕분이었다.
– 카밀라가 두 분께.
첫날, 이곳에 왔을 때 두 분을 만났을 때의 감동을 부족한 필력으로 옮겼다.
그 마음을 옮길 수 있을까…….
그게 가능한 단어가 있을까…….
두 분이 지금까지 베풀어주신 친절과 사랑과 애정에 더없이 감사하다고 적었다. 두 분은 친어머니와 친언니처럼 생각하게 되었다고도 적었다.
– 이 은혜, 평생 잊지 않을게요.
겨우 1년 동안의 출병이었으나, 어린 날에는 한 달의 여행을 떠나는 것조차도 생이별처럼 느껴지는 법이다.
눈물로 편지를 밀봉했다.
그리고 사냥복의 안주머니에 살며시 넣어두었다. 책상에 올려놓았다가는 저택을 떠나기도 전에 걸릴까 봐 두려웠다.
‘햇빛…….’
그 모든 일을 마쳤을 때는, 아침의 햇살이 방 안으로 비스듬히 스며들고 있었다.
이제는, 일상이 된 장소.
평생을, 꿈꾸게 된 장소.
이 방에 처음 왔을 때는 전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는데, 지금은 당연히 두고 가야 할 현실로 느껴지는 게 참 기쁘고도 오묘했다.
뚜벅, 뚜벅, 뚜벅…….
이제는 삶처럼 익숙해진 방의 질감을 손끝으로 느끼고 있는데 발소리가 들려왔다. 스승님이다.
“카미, 다 됐니?”
“네, 스승님.”
기원력 1671년 3월 4일.
법황청의 명령으로 라미네아 알터 아라다만텔의 홍련 병단이 아드리온 대륙 전선으로 출병.
사서에 한 줄로 짤막하게 기록되는 그 역사가, 카밀라에게는 바로 이날의 기억이었다.
“절대, 절대 앞에 나가면 안 돼. 알겠어? 위험하겠다 싶으면 그냥 뒤로 빠져. 아니, 그냥 뒤에만 있어! 절대 나서지 말고!”
라디스 언니는 눈물을 펑펑 쏟으며 그렇게 몇 번이고 당부했다.
“까미까미가 다치면 언니 절대 용서 안 할 거야. 알겠어?”
한나 루드윅이 손가락을 튕기자, 집사장이 한 발 앞으로 나서며 고귀한 가죽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 겨울이 있었다.
그렇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순백색의 사슬들이 갑옷의 형태로 엮여 햇빛을 깊숙이 빨아들였다가 겨울의 광채로 튕겨냈다.
“한철(寒鐵)로 만들어낸 경번갑이란다. 북부의 최고 야장과 마도구 장인들에게 협업을 의뢰했던 것인데, 늦지 않게 도착했구나.”
경번갑이란 사슬 갑옷의 주요 부위에 철판을 결합시킨 것이었다.
사슬 갑옷은 판금 갑옷에 비교하여 유연하고 가벼워서 기동성에는 좋으나, 그만큼 방어력이 떨어지는 것이 단점이었다.
경번갑은 그런 단점을 보완한 것으로, 흉부와 옆구리 등에 사슬 대신 철판을 엮어 동작에 불편을 주지 않으면서도 주요 내장을 지킬 수 있게 설계되었다.
“이건…….”
그야말로 황홀한 자태…….
눈 결정을 예술적으로 본뜬 사슬 하나하나가 마력을 품고 있었는데, 카밀라의 손이 닿자 마력과 공명하며 반짝였다.
그 예술 작품을, 한나 루드윅이 다시 상자에 넣어 봉한 뒤 카밀라에게 내어주었다.
“내가 너에게 줄 수 있는 게 이것뿐이라 미안하구나. 남방의 햇살이 거칠다고 하더구나. 한철은 냉기를 머금어 발하는 특징이 있고 또 그런 마법을 깃들게 했으니, 이 물건이 남방의 열기로부터 널 지켜주길 바란다.”
“왜 이런…….”
“곧 생일이지 않느냐. 널 내 손녀처럼 생각한다는 말에 한 점의 거짓도 없으니, 이런 건 당연히 주어야 하는 것이다.”
고개를…….
고개를 들 수도 없었다…….
받은 것이 하나 없는데, 늘 이렇게 받기만 하는…….
“카미, 고맙다고 말씀드려야지.”
“감사합……니다…….”
그날은…… 항상 웃음이 가득하던 저택이 눈물로 얼룩질 수 있는 것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꼭 다시 돌아와.”
“나중에 또다시 장작 패자.”
장작 담당 친구들도 걱정 어린 어조로 그렇게 말해주었다.
달랐다…….
이렇게나 다를 수 있구나…….
도망치듯 떠났던 벨체스터 저택, 그날의 기억과. 똑같이 저택을 떠나는 것인데, 어떻게 이렇게나 다를 수 있는지…….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 * *
아크라드 대륙에서 아드리온 대륙으로 넘어가는 페이쿼리어 병단은 대부분 푸른 도시, <테르베노플>을 경유한다.
남색 도시 <아리스타포>를 경유하는 자들도 있지만, <온 것들> 테르벨이 세웠다는 도시, <테르베노플> 쪽의 비율이 더 높다. 인류 도시 중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항구니 말이다.
그곳은 또한 법황청의 전진 사령부이기도 했으므로, 최종 승인 및 결재를 받고 대해(大海)를 넘어갈 수 있었다.
“그런 거로 알고 있는데, 왜 여기 와 있냐?”
자발 루드윅이 물었다.
마법대학 <델라이텐>은 졸업 축제로 한창 떠들썩했다.
졸업장과 학사모를 받은 자발은 후배들의 눈물(99%가 여학생)과 환희(99%가 남학생) 속에서 학교를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도중에 잠시 <골든로즈> 역에서 내려서 왔어요. 빨리 다시 가봐야 해요.”
“바쁘신 몸이다 이거냐?”
“그쵸. 이제 백수가 된 누구랑은 달리. 이 천재님은 지검제 우승자에 페이쿼리어의 제자니까.”
“퉤. 저기 밖에 나가서 아무 여학생이나 붙잡고 나랑 일대일 면담을 할 기회를 주겠다고 해봐라. 전 재산을 다 팔아서라도 올걸.”
“이 답도 없는 난봉꾼 같으니.”
정확히는 난봉꾼이 아니다.
그냥 자신이 엄청나게 잘생겼단 걸 잘 알고 이용하는 남자일 뿐.
“뭐, 그래도, 자발 오빠 같은 인간이라도 인사는 하고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나 같은 인간은 뭐냐?”
자발이 피식 웃으며, 의자를 뒤로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이곳 학생회 부실, 회장석 뒤에 난 창으로는 <델라이텐>의 부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벚꽃이 무성하고도 무상하게 흩날리는 학교 교정을, 자발이 눈을 감은 붕대를 풀고 내려다보았다.
“여기에 앉아서 학교를 내려다보는 일상이 참 좋았단 말이지. 왕처럼 군림하는 느낌도 나고 말이야. 크크크.”
장난을 치는 것 같지만, 루드윅 가문 특유의 붉은 눈동자에는 기쁨, 슬픔, 그리움, 사색 따위의 만감이 교차하는 것처럼 보였다.
“힘에는 책임이 따른다고, 여기 앉아서 교정을 보고 있으면 확실히 책임감을 일깨워 주기도 했어.”
“…….”
“잡설이 길었네. 3년 동안 있던 여길 떠나는 것도 이렇게나 가슴이 아픈데, 그 저택을 떠나는 네 마음은 오죽하겠냐.”
역시, 장난기가 많을 뿐 용현의 후손은 용현의 후손답다 싶었다.
자발은 언제나 이랬다.
장난을 치는 것 같다가도 어느 순간 진솔해져서, 마음에 아스라이 와닿는 명언을 남기곤 했다.
“뭐, 저야 스승님 임기가 끝난 뒤 돌아가면 되죠. 아, 오빠도 여기 다시 돌아오면 되잖아요.”
“멋진 남자는 졸업한 학교에 돌아오지 않는 법. 그랬다가는 내 뒤를 잇는 차세대 대학 간판 미소년이 나 때문에 인기를 상실하고 자신감을 잃어버리고 눈물을 흘리지 않겠냐?”
“헛소리만 할 거면 그만 갈게요.”
“뭐, 돌아오고 싶어도 그럴 시간이 없을 거야. 특무과에 들어가게 됐거든.”
“특무과라면…… 최고의 배틀메이지들만 선발한다는 곳 아니에요?! 요한이 그랬는데.”
마법맹(魔法盟) 최고의 무력 단체가 어디냐 하면 누구나 특무과를 꼽았다.
특무과 소속, 또는 출신이라는 것만으로도 제국에서 제일가는 전투 마법사라는 게 증명될 정도라 하니 그 위상에 대해서 이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으리라.
“왜. 놀랍냐?”
“오빠는 그런 성실한 유형의 사람이 아닌 줄 알았는데, 의외란 게 놀라워요.”
“훗.”
자발이 창가로부터 시선을 돌려 카밀라를 바라보았다. 길고도 고혹적인 속눈썹 아래 붉은 눈이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세상이 심상치 않아. 페이쿼리어 병단이 상시 여섯 부대씩이나 운용되고, 미르 백부님이나 넨 고모님이 전장에 상주하시는 지금, 그 빈틈을 타고 여기 아크라드 대륙에서 흑교회 같은 나쁜 놈들이 크고 작은 사고를 터뜨릴 확률이 높지 않겠냐?”
“……?”
“그 사고로부터 내가 이 대륙을 안전하게 지켜야겠단 생각이 들더라. 너나 누님이 안심하고 돌아올 수 있게 말이야.”
그래…….
당신은 이런 사람이었지…….
“여긴 이 오빠에게 맡겨두고, 남방 여행 잘 다녀와라. 라미네아 누님이랑 델프레드 형님에게도 안부 전해주고. 요한 그 코흘리개 애송이한테도 마법 공부 열심히 하라 해.”
자발이 씩 웃었고, 카밀라도 그 미소를 마주 보며 빙그레 웃었다.
잠시, 돌아간 기분이었다…….
발칸과 함께 축제를 준비하며 웃을 수 있던 그 아름다운 때로…….
“네, 스승님도 오빠한테 안부 전해주라고 했어요. 그럼, 나도 오빠가 안심하고 농땡이 피울 수 있게 최선을 다하고 올게요.”
그 이후, 소집령에 응한 홍련 병단과 함께 대륙을 종단해 <테르베노플>에 도착했다.
오랜만에 다시 찾은 이 바다 위 도시는, 갈매기들이 낮게 나는 모습이 평화로워 보였다.
감회가 새롭다면 참으로 새로웠다. 그래, 여기에서, 처음으로 제자로 인정을 받았었는데…….
「이리 오너라.」
추기경 요슈하르는 재회의 순간 카밀라의 성장을 장성한 혈육을 보듯이 기뻐하였다.
몸 둘 바를 모를 정도로.
라미네아는 부친에게 손녀를 자랑하는 딸처럼 카밀라의 성장에 대해 신나게 이야기했고 요슈하르는 웃으며 경청했다.
「빛이 너희들의 앞길을 비추시기를 내 눈물로 기도하겠다. 이제 가라, 용기의 등불로 이 세상의 가장 낮고 어두운 곳을 비추라.」
그렇게 지극한 배웅 속에서, 홍련 병단과 함께 군용 수송함에 탑승하여 바다를 건너갔다.
그날, 그 모든 것이 신비해서 기억에 선명하게 새겨졌다.
대해를 가로지르는 증기선이 매연을 토해내는 기적 소리도. 황금함대의 기함, 테리토스가 눈부신 빛으로 밤바다를 밝혀주는 빛도.
“옛날에, <온 것들>이 해방사 때에는 저 배가 하늘을 날았대.”
그리고 들뜬 얼굴로 테리토스를 가리키며 그 역사를 설명해주던 요한의 얼굴도.
“뭐? 거짓말. 저렇게 큰 배가 어떻게 하늘을 날아? 바다를 항해하는 것도 힘들어 보인다.”
“진짜야! <온 것들>의 배는 전부 하늘을 날 수 있었대.”
그날, 왜, 그렇게나 모험을 떠나는 기분이 들었던 것인가.
왜 그렇게나 설렜던 것인가.
알 수 없었으니 당연한 거려나.
지금 가게 되는 곳은, 가고 있는 곳은, 후일 사서에 ‘검은 여름’이라고 기록되는 악몽 속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