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 of the Fake Hero RAW novel - Chapter (227)
가짜 용사 이야기-227화(227/310)
시즌 3 : 35화
처음에는 단지, 눈이 부시다고 생각했다.
다만,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용사(勇士)의 이야기를, 동화책으로 접하던 유년의 시절에는…….
용사의 동화는 다루지 않으니까.
용사의 전설은 말하지 않으니까.
용사의 길이란, 누군가 죽고, 누구를 죽이고, 죽고, 죽이고, 죽고, 죽이는…… 끝없는 살(殺)의 나선 위에서 성립한다는 사실을.
당신의 향기, 첫 출병 (1)
“요한, 저거 봐! 새들이 보이기 시작했어!”
황색 도시, <라프타스>는 공화국 칠대도시 중 문명 세계 최남단에 위치하고 있었다.
“드디어 도착인가.”
요한의 눈에서 안광이 서슬처럼 푸르게 번뜩였다. 물론 아주 잠시뿐, 요한 특유의 소심한 성정이 나타났다.
“30일 항로라니…… 책을 읽자니 뱃멀미가 일어나고 바다만 보고 있자니 시간이 아깝고…….”
푸른 도시, <테르베노플>에서 이곳 <라프타스>까지는 뱃길로 30일이 걸린다.
이것조차도 증기선의 출현으로 어마어마하게 단축된 것이라는 말에는 솔직히 놀라 자빠질 뻔했다.
<라프타스>는 남서부 극단의 해안 도시로, 예로부터 병력이 집중되어 온 군사 거점이었다.
“여기는 병력 수송함 ‘닐스-26’호. 입항을 요청한다.”
그것을 증명하듯, <라프타스>가 위치한 반도 주변에 크고 작게 흩뿌려진 일가군도(一家群島)의 섬 전체가 결계 기지였다.
저 섬들이 바로 3군 6진이다.
지금, 반투명하게 해수면 위에서 반짝이던 역장을 통제하는 기지가 모두 저 섬들에 위치했다.
“예전에는 이런 복잡한 과정이 필요하지 않았대.”
“그럼 나가나 우루크가 상륙하는 걸 어떻게 막아?”
“‘파이라스의 등대’ 덕분에 지금보다 훨씬 상황이 나았다고 하더라고.”
옛 붉은 진룡 중 하나, 파이라스가 죽으면서 세운 등대는 빛이 아닌 불로 바다를 비추었다고 한다.
그 불길은, 심연의 수족이 나타나면 단숨에 바다 위에서 불태워 버렸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파이라스의 등대는 15세기 흑마법사 제르닉스의 손에 파괴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다.
“흐음, 여하튼 여기가 말로만 듣던 문명의 끝단이구나. 우와, 무진장 덥다.”
카밀라는 저 너머, 머리카락을 흔드는 바닷바람에 유황의 악취가 은은하게 섞여드는 남쪽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물론 여기에서 육로로 30일쯤 내려가면, <화염만리(火焰萬里)>라는 이름의 남방한계선이 출현하기는 한다.
그러나 그 땅에는 인적이 없다.
<화염만리> 이남, 마계(魔界)로부터 흘러드는 화산재가 모든 생명을 좀먹어, 사람이 살 환경부터가 되지 못한다.
그렇다 보니 사람들에게는 이 <라프타스>가 실질적인 세상의 끝처럼 여겨져 온 것이다.
“어휴, 저 천덕꾸러기들이 우리 마음도 모르고 결국 여기까지 따라와 버렸네.”
재잘거리는 소년과 소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델프레드가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든 떨어뜨려 놓으려 별 개짓거리를 다 했는데도, 준사관 임관까지 하고 왔으니 이제는 꼬투리도 못 잡게 생겼고. 뭐, 저 정도면 큰 문제는 없겠지.”
“아직 안심하기에는 일러.”
라미네아가 쓴웃음을 지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쌓은 경력은 축하해줘야 마땅하지만…… 카미나 요한이나 한 번도 실전을 접해본 적이 없잖아.”
실전…….
무언가를 끝없이 죽여야 하고, 곁에서 누군가가 수없이 죽어나가는 그 살육의 세계…….
“둘 다 지금까지 목숨을 위협받는 세계에서 살아오지 않았어. 어제까지 함께 웃고 떠들던 누군가가 너무나도 쉽게 죽게 되는 세계에서도.”
“…….”
“전장에서 의지력을 잃지 않는 게 페이쿼리어의 기본 소양이기도 하니까…… 카미의 소질이 시험받는 건 지금부터야. 요한도 마찬가지고.”
라미네아는 처연하게 시선을 내리깔았다. 페이쿼리어의 사제 관계는 부모와 자식과 비슷하다고 말한다.
과연 그게 맞는 말일까……?
사랑하는 자식을, 전쟁터로 끌고 나오는 부모가 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식별 신호를 확인했다. 입항을 허가한다.]일가군도 중 가장 규모가 커서 ‘아버지 섬’이라 불리는 섬의 등대에서 누군가가 응답했다.
카밀라는 입을 크게 벌렸다.
역장이 양쪽으로 걷힌다. 그게 꼭, 꿈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처럼 보였던 것일까.
“아, 아니, 안 돼,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카밀라는 갑판 아래 선실로, 계단을 몇 개나 뛰어넘으면서 후다닥 달려갔다.
먼저 맥주 통을 열었다.
자갈이 가득 든 통에서 경번갑이 희끄무레한 설광으로 반짝였다. 한나 루드윅이 선물해준 이 갑옷은 보기만 해도 흐뭇해졌다.
“음, 읏, 엇.”
연습할 기회가 적어서인지, 갑옷을 혼자 입는 일은 사실 아주 많이 버거웠다.
“카미, 오늘은 그냥 사령부에 출두하는 게 끝이라 군장을 다 갖출 필요는 없단다.”
그 버거운 손놀림 속으로, 상냥한 온기가 스며든다.
온기는 갑옷의 소매에 팔을 넣게 도와주고, 사슬의 이음새를 대신 여며준 다음 매무새를 정돈해 주었다. 그 온기의 명칭은 바로, 스승님이었다.
어린 날에, 조금의 신음이라도 흘린 순간에는, 반드시 당신이 그 곁에 있었다.
“안 돼요! 오늘은 페이쿼리어 사회에 처음으로 데뷔하는 날이라고요. 기합 팍 넣고 가야죠.”
말할 수가 없었다. 아직도 본심을 말하는 게 쑥스러워서.
자랑스럽게 보이고 싶다고.
내가 당신의 제자라는 사실이, 당신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게 아니라 조금이라도 좋으니 더 빛났으면 좋겠다고.
“카미는 언제나 힘이 넘치네. 보고 있으면 나도 막 웃음이 나와.”
“그쵸?”
이 시기에 보병들은 사슬 갑옷 위에 품이 넓은 반소매 제복을 입고 검대로 묶어 고정한다.
홍련 병단의 제복은 순백색.
앞뒤로 붉게 수놓인 홍련 문장이 ‘부대 마크’이자 상징이었다.
나중에야 불편해서 소매를 죄다 찢어버리고 활동했지만, 그때는 새로이 갖춘 군장 하나하나를 몸보다도 더 소중히 여겼다.
“어머, 소녀 용사님 같아.”
등잔에 불을 환히 밝히신 스승님이, 어깨에 양손을 얹고 카밀라를 거울 앞으로 데려갔다.
그 순간을, 잊지 못한다…….
평생, 그날을 잊지 못했어요…….
스승님과 함께 들여다보았던 내 모습, 제복에 흐드러지면서 피어난 홍련(紅蓮)은 마치…… 당신의 제자라고 이 세상에 당당히 공표하는 것만 같아서.
“스타일 망가지니까 오늘은 투구까지는 쓰지 말자.”
당장이라도 하늘을 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설레는 기분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카밀라는 선창에 증기선이 닿았을 때 일착으로 뛰어내렸다. 새로 만난 도시, 새로 맡는 냄새, 새로 보는 풍경…….
<라프타스>는 군사 도시였다. 상인들의 들뜸보다는 장병들의 엄격함이 항구를 지배하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철도 수송대가 항구에서 홍련 병단을 기다리고 있었다.
신속한 병력ㆍ병참의 이송을 위해 <라프타스>의 항구에서 수많은 철도가 겹치고 있었다.
바닷길로 들어온 병사들은 저 철도를 따라 주요 거점으로 향했고, 그 반대도 그러했다.
“근무 교대 및 병력 배치 전달을 위한 소집령입니다. 바로 간부진을 이끌고 사령부로 향하시지요. 모노레일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수송대의 경례를 절도 있게 받은 라미네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크라드 대륙에서는 페이쿼리어를 보면 죄다 신기해하고 놀라워하는데, 이곳의 병사들은 무덤덤하게 스승님을 맞았다.
그리고 이 도시의 병사들에게는, 무어라고 해야 하나, 생기가 없다고 해야 하나, 감정이 없는 것 같다고 해야 하나…….
‘뭐 어때.’
고작 그런 눈빛이나 반응으로 억눌러질 수가 없었다, 그날, 흥분된 마음은.
스승님 옆에서 경례를 붙였다.
파티슈 듄 제라예한테 혼쭐이 나면서 배운, 경례의 정석.
“준위 카밀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수송부 대위의 피로에 찌든 눈빛은 카밀라의 경례를 받자 얼떨떨하게 흔들렸다. 병사들의 웃음 속에서 대위 또한 허탈한 웃음과 함께 경례로 대답했다.
“<라프타스>에 온 걸 환영한다, 준위. 다만 네 직속상관이 먼저 내 경례를 받았으므로, 이렇게 따로 경례를 할 필요는 없어. 상관에게 실례되는 행동이다.”
“네, 알겠습니다!”
“훌륭하군. 쉬어. 실례했습니다, 페이쿼리어.”
“아니야, 카미의 장난을 잘 받아준 덕분에 크게 웃었어.”
병단 병사들의 하선 및 하역 작업을 지도하던 델프레드는 고개를 갸우뚱 저었다.
“저 녀석은 뭐 저리 신났어, 갑자기. 어디 놀러 온 것도 아니고.”
군장을 짊어지고 현문을 빠져나가던 병단 고참들이 델프레드의 옆을 스쳐 지나가며 말했다.
“그걸 모르니 가문도 재력도 다 가지고도 여자한테 인기가 없는 겁니다.”
“뭐, 인마?”
“저 옷을 좀 잘 보쇼. 우리 불쌍한 전(前) 막내의 부러워하는 눈빛도 좀 보시고.”
“야, 이 미친 것들아! 남자끼리 뭐 선물 주고받고 그러는 게 얼마나 징그러운지는 아냐?”
“에휴. 말을 맙시다, 나리.”
카밀라는 방방 뛰어다니다가 철도역에도 일착으로 도착했다.
준위 계급장을 본 병사들의 경례를 일일이 있는 힘껏 받아줬는데 그런 일조차 즐거웠다.
스승님은 손을 가볍게 드는 걸로 경례를 받았는데, 저건 아마도 짬이 찬 다음에야 가능하리라.
<라프타스>…….
모노레일이 설치된 도시는 이곳이 처음이었다. 철도의 흔들림 속에서 시가지를 내다보는 경험 또한 처음이었다.
‘세상에 이런 곳도 있었구나.’
<라프타스>의 사람들은 터번으로 눈을 제외한 얼굴 전체를 가리는 풍속을 가지고 있었다.
살인적인 열기와 공존해야 하니 당연한 조치 같았다.
아, 진실로, 이처럼 크고 또 낯선 도시가 있을까 싶었다.
‘왜 낯선 걸까?’
최전선 군사 거점이기에, 청성 미른가디아와 법황청의 폭발적인 재정 지원 속에서 아인(兒人; Dwarf)들의 기술력이 집중되었기 때문이었다.
평범한 인류의 도시는 꿈도 꾸지 못하는(아인들이 공유해주길 꺼리기에) 아인 기술력이 도시 곳곳에 꽃피워져 있던 것이다.
인류의 문화와 아인의 문화가 만나서, 조화를 이루며 합쳐져서, 도시는 더욱 이국적으로 도드라졌다.
‘무겁고 딱딱한 이면에 신비한 미색을 품고 있어.’
군사 도시라고 하지만, 군사들의 가족도 살고 또 군사들에게 유흥이나 식량을 제공하는 이들과 그 가족들로 도시는 붐볐다.
웃통을 벗은 병사들이 사관의 호각에 구령을 맞추며 시가지 산책로를 뛰는 것이 자주 보였다.
종종 술집 앞마당에서 주사위 노름을 하면서 선술 하며 낄낄대는 병사들도 보였다.
광역 주술 결계 속에서 <라프타스>에는 마계의 화산재나 모래바람 하나 들지 못했고, 도시는 견고해 보였다.
그리핀 편대가 쉴 새 없이 이ㆍ착륙하고, 반대쪽 모노레일에서는 수많은 보병들이 항구로 향했으나 도시는 왜인지 평화로워 보였다.
[다음 역은 옛 시청 청사, 통합군 사령부 건물입니다.]모노레일이 멈추었고, 카밀라는 라미네아를 따라 사령부 앞으로 내렸다.
옛 칠대도시의 시대에 세워진 시청을 사령부로 개조한 건물은 실용적이라기보다는 과시적인 위엄을 자랑했다.
옛 건축 방식인 회랑이 길게 이어졌는데, 그 회랑의 중앙에 이 평화의 주역이 세워져 있었다.
용현, 레인 루드윅.
법황청 마당에 세워진 동상과는 달리 혼자가 아니었다. 15세기 <라프타스> 참사를 함께 저지한 유명한 동료들과 함께였다.
데몬 소드 미리아.
용창 바트.
궁성 렘.
이 장소는 여성들에게 특히 인기가 많다고 한다. 애석하게도 동료들 때문은 아니다.
바로, 새끼 용의 존재 때문이지.
용현이 머리에 손을 얹고 있는 소녀는 ‘홍염의 아키레아’의 유년 모습이고, 품에 안겨 있는 건 ‘뇌향의 세츠넨’의 유년 모습이리라.
“인류의 수호자들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귀여운 모습이지?”
스승님이 동상과 똑같이, 카밀라의 머리에 손을 얹으며 말하셨다.
“저 당시에 누가 알았겠어. 두 분이 이런 존재가 되리라고. 그냥 귀여워서 어떻게 내버려둘 수가 없는 존재였겠지.”
“그런가요?”
“내 눈에는 카미가 그렇거든. 지금은 그저 귀엽기만 하지만…… 창세의 섭리는 아시겠지. 카미가 미래에 어떤 모습의 용사가 되어 있을지.”
미래의 내 모습……?
상상하려고 해도 상상이 되질 않는다. 스승님의 발끝만이라도 닮은 모습이라면 좋을 텐데.
미래의 모습을 유심히 생각하려던 그때,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와 심장이 팔딱 뛰었다.
“카밀라? 카밀라잖아!”
다시 만난…… ‘유년기의 목표’는 2년 전보다 더 아름다운 위세를 품고 있었다.
“어, 에쉬르…… 언니?”
한달음에 달려와, 옆구리에 양손을 끼우고 하늘 높이 번쩍 들어올린 존재는 분명 낯익어야 하는데 더없이 낯설게 느껴졌다.
너무나도, 멀게 느껴진 것이다.
까닭은 금방 알 수 있었는데, 그 찬란했던 금발이 새하얗게 새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언니 맞아?”
다시 만난 에쉬르는 한순간이나마 스승님으로 착각했을지도 모를…… 용(龍)의 존재감을 영혼에 품고 있었다.
거기에다 중갑 차림이었다.
기동력을 중시하는 십문자도와 십일자도는 고수의 영역에 이르지 못하면 중갑을 입지 않는다.
“라미네아 선배님도 안녕하셨어요?”
다만 카밀라는 십문자도의 달인이 된 미래에도, 한나가 선물해줬던 경번갑을 계속 입었다.
끊어지고 부서진 사슬을 한계까지 개보수하고, 누비 갑옷을 내피로 덧대면서…….
사명을 마치고 죽게 되는 그날까지, 평생.
“그래, 에쉬르도 건강해 보이니 좋구나.”
라미네아가 방그레 웃자, 카밀라가 소리쳤다.
“키, 키가 왜 이렇게 컸어?!”
카밀라를 다시 바닥에 내려놓은 에쉬르가 코밑을 검지로 훑었다.
“아 글쎄, 내가 스승님이 계실 때는 <위용검전>에 입교를 안 하겠다고 했더니, 그러면 반년마다 주기적으로 가서 용령석 주입을 하라지 뭐야. 그걸 하다 보니 키가 이렇게 크더라.”
키가 진짜, 엄청나게 컸다.
스승님보다는 작지만, 나름 키가 많이 컸다고 자부한 카밀라였으나 이제는 올려다봐야 할 처지였다.
“어머, 그러면 에쉬르는 야전 임관으로 가게 되는 거니? 전례가 없는 일인데.”
“그건 아직 모르겠어요. 뭐, 뭐든 잘되겠죠.”
“으음, <위용검전>에서 군사 이론 교육도 많이 받아야 하는데, 오주들께서 그런 걸 다 생략하시겠다는 거려나?”
“아이딘 오빠가 있잖아요. 그 오빠가 <위용검전>에 있는 모든 자료보다도 마족을 더 잘 알고 있는데요, 뭘. 전술이나 전략은 실전에서 보고 배우면 되고.”
말을 하는 걸 보니, 에쉬르는 더 이상 제자가 아니라 페이쿼리어라고 해도 손색이 없어 보였다.
“이제 좀 따라왔다고 생각했더니, 또 이렇게나 멀어지다니…….”
“카미, 음, 그러니까 이건.”
“너무 끝내주잖아! 언니 지금 진짜 엄청 멋있어! 나도 얼른 그렇게 되고 싶다.”
카밀라의 당혹스러운 반응에 에쉬르가 눈을 끔뻑이다 다시 맑은 웃음을 터뜨렸다.
“아, 카밀라. 널 다시 만나는 날을 얼마나 고대했는지 몰라. 항상 신문으로 네 정보를 접하면서 얼마나 큰 기쁨을 얻었는지.”
“후후! 하긴 뭐, 발도 천재의 성장담은 보는 맛이 있을 거야, 그렇지?”
“그래! 그리고 뭐야뭐야, 이렇게 귀여워져서 오면 어떡해? 마족들도 카밀라가 너무 귀여워서 공격하다 말고 도망칠 것 같은데.”
그 말장난에 반박한 목소리는…… 칼날이었다. 진짜 칼날이 아니라, 칼끝으로 심장을 겨누는 듯 매서운 살기가 담긴 음성.
“마족들이 골 빈 것처럼 보이지만 골 빈 게 아니다. 그딴 짓을 왜 하겠냐. 오히려 더 쉽게 보고 달려들겠지.”
필두 페이쿼리어, 비네사 알터 르노드.
정말…… 볼 때마다 압도된다.
만약 눈빛 하나, 동작 하나로 적을 죽일 수 있는 인간이 있다면 바로 이 여걸뿐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만이구나, 라미네아. 휴가는 잘 보냈나?”
비네사가 스승님과 마주 섰다. 아라다만텔과 르노드가 붉은 숨결을 토해내며 쌍둥이 성검을 반겼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조차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여자가 지금 세상에서 제일 강력한 사람이라는 걸.
스승님이 빙그레 웃었다.
“네, 선배님 덕분에요.”
그런 비네사에게 에쉬르가 애교마저 서린 말투로 말했다.
“아이, 스승님, 말이 그렇단 거죠. 그래도 이 정도면 진짜 그렇게 될지도 모르잖아요.”
그 모습, 그 미소를 보고…… 카밀라는 아, 하고 생각했다.
에쉬르도 나와 똑같구나.
나와 똑같이, 스승님을 존경하고 따르는 페이쿼리어의 제자구나, 하고.
“그렇지 않아요, 아이딘 오빠?”
한 번 본 이후로 미남의 기준을 완전히 바꾸어버린, 절세의 미남 사제 아이딘도 함께였다.
“마족들은 숫자도 유형도 많으니, 없다고 딱 잘라 단언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공식 석상에 나가는 일이 없어서 그렇지, 만약 이 사람이 자발처럼 나대는 인간형이었다면 자발과 좋은 대결이 되었을 것이다.
아크라드 대륙 최고의 미남과 아드리온 대륙 최고의 미남이라는 승부로 말이다.
물론 둘 다 카밀라의 취향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아이딘 오빠 말을 들었지? 자신감 가져도 돼, 카밀라.”
그러자 비네사가 얼굴을 가까이 들이대며 말했다.
“전장에서 저런 헛소리는 잊어라. 널 봐주는 적이라곤 없어. 오직 먼저 죽이지 않으면 너를 죽일 놈들뿐이다. 저런 장난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얼간이들은 꼭 첫날에 죽지. 짐 덩어리만도 못해.”
그런 사소한 동작 자체가 본능적인 공포를 자극한다.
사냥감이 사냥꾼을, 즉 압도적 존재가 눈앞에 서면 느끼게 되는 공포라고 할까.
양손의 주먹을 불끈 쥔 채, 침을 겨우 삼키던 카밀라는 이내 정신을 차렸다.
– 상관에게 조언을 들었을 경우에는 반드시 경례를 올려라.
준사관 교육에서 파티슈에게 받은 가르침에 몸이 저절로 움직여, 경례를 똑 부러지게 붙였다.
발성은 확실하게.
동작은 절도 있게.
그러면 한 대 맞을 것도 안 맞고, 두 대 맞을 일은 한 대 맞게 된다고 배웠다.
“넷! 준위 카밀라! 해주신! 조언! 꼭! 명심! 하겠습니다!”
잠시, 회랑 저 멀리까지 짙은 침묵이 깔렸다.
문제가 발생한 것 같았다.
필두 페이쿼리어와 시선을 마주치는 건 본능이 불가능에 호소하는 영역이었는지라,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아버린 것이다.
“…….”
“…….”
“…….”
카밀라의 예상은 반만 맞았다.
문제가 발생한 건 맞았지만, 다른 방향으로 발생했으니까.
‘뭐냐, 이 꼬맹이의 반응은…….’
평생 처음 본 생물을 보듯, 비네사의 고개가 미세하게, 정말 미세하게, 갸웃 흔들렸다.
라미네아와 에쉬르가 웃음을 터뜨린 것은 반쯤 동시였다.
비네사의 살기 어린 눈빛을 받고는 웃기를 그쳤으나, 숨죽인 틈새로 계속 웃음이 새어나왔다.
‘어떻게 안 웃겠어?’
‘스승님의 저런 반응은 난생처음 보는데.’
그 정체불명의 사제, 아이딘조차도 흥미롭다는 눈빛으로 카밀라를 잠시 주시할 정도였다.
“안 들어오고 뭐 하냐?”
먼저 사령부 건물 안으로 들어갔었던 델프레드가 물었다.
“잠깐 카미 재롱 잔치를 구경 중이었지. 지금 갈게. 앞장서시죠, 비네사 선배님.”
기원력 1671년 4월 14일.
라미네아 알터 아라다만텔 막하 홍련 병단, 최전선 기지 <라프타스> 도착.
그날 소집된 페이쿼리어 병단은 상시 주둔하는 혈마 병단을 위시해 무려 7개에 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