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 of the Fake Hero RAW novel - Chapter (230)
가짜 용사 이야기-230화(230/310)
시즌 3 : 38화
“멜레느, 너 이 귀찮음 대마왕 녀석아, 어제 내 제자한테 인사 제대로 안 했다며?”
멜레느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화제나 상대가 있으면, 의자의 고도를 높인다.
그러면 상대는 아래에서 무력하게 꽥꽥댄다. 멜레느는 늘 그렇게 위기를 넘겨왔다.
그러나 그건 일반인한테나 통하는 이야기지, 상대가 술사일 경우에는 얄짤 없었다.
“허허, 어딜 도망가시나. 누구는 염동력 못 쓰는지 알아?”
“……으으.”
멜레느는 자신의 머릿속 ‘나태 사전’에 모든 인물상을 등록해 두었다.
이 두꺼비 녀석(델프레드)은 최악의 인물상으로 원하는 대답을 안 해주면 끝까지 물고 늘어진다.
그렇기에 최대한 빠르게 화제의 대답을 해주는 게 좋다.
“……어차피 금방 사라질 것 같던데, 쓸데없는 일에 힘 빼는 건 질색.”
“금방 사라져? 누가? 요한이?”
“둘 다…… 굳이 따지자면 라미네아의 제자 쪽이 가능성이 더 높고.”
원거리에서 적을 격파하는 술사들과, 근거리에서 적을 도륙하는 검사의 전후 스트레스 차이는 하늘과 땅의 차이라 할 만했다.
거기에서 페이쿼리어는…….
어떤 검사보다도 가장 많이 혈투 속으로 등이 떠밀리는 그 족속들은, 그 꼬맹이처럼 감수성이 풍부한 인물상이 할 게 못 된다.
“둘이 성격이 똑같이 여리니……. 라미네아만 봐도 전투 한 번 끝날 때마다 자괴감과 무력감을 느끼는데……. 제자 쪽은 성정이 더 약해 보이는데 뭐……. 첫 출병 이후 꿈을 접는 제자들이 많진 않아도 적지도 않고…….”
당신의 향기, 첫 출정 (4)
오늘이라도, 눈을 감고 떠올리고자 한다면 그날 스승님이 펼치신 검무는 신기하게도 처음부터 끝까지 기억해낼 수 있었다.
그랬을 정도이니…….
그 이튿날에는 꿈에서조차 스승님의 검무를 보았다고 해도 하등 이상할 게 없다.
“너, 괜찮냐? 눈이 흐려졌어.”
가볍게 아침 세안을 마치는데, 먼저 막사 세면대에서 머리를 감고 있던 요한이 말을 걸었다.
“눈이 흐려지다니?”
“책에서 봤는데, 처음 전투를 경험해본 사람은 모두 똑같은 눈을 가지게 된대. 살인자의 눈이지.”
요한은 가끔씩 이렇게, 얼음보다도 창백하고 날카롭게 어떠한 현상을 소름 끼치게 설명하곤 했다.
살인자의 눈이라니…….
물론 상대가 그걸 심각하게 받아들일 새도 없이, 특유의 소심 모드가 발동되어 분위기를 다 깨버리지만…….
“근데 살인자라니, 음, 눈이 흐려진 건 인정하지만…… 나는 아직 마법으로 무엇 하나 제대로 해칠 수 있을 것 같지 않은데…….”
수건으로 얼굴의 물기를 가볍게 두드리면서 물어보았다.
“야, 너 어제 전투 끝나고 델프레드 아저씨 만나봤어?”
“어. 너는?”
“나는 못 만나봤어. 어제, 다 끝나고, 스승님 옆으로 가려고 했는데, 뭔가, 엄청, 되게 슬프다고 해야 하나, 지쳐 보이시더라고.”
“생명이 그렇게 죽고, 또 죽어가는 전장에서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어?”
요한이 긴 머리를 뒤로 꽁지 묶어 내리면서 대답했다. 겨울날의 호수처럼 맑고, 깊은 눈동자로.
“그 현장의 일선에 서야 하는데, 남들과는 다른 고통을 느끼는 건 당연하겠지.”
“…….”
“그럼에도 늘 남들보다 더 한 발 앞에 나가서 싸우러 가니까 용사는 빛나 보이는 게 아닐까? 그래서 사람들은, 용사라는 존재를 동경하게 되는 걸지도 모르지.”
나도 책을 많이 읽으면, 이렇게 멋있는 말을 할 수 있게 되려나.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넌 가끔 머리가 엄청 좋은 것 같은 사람처럼 말해.”
“아냐. 나 따위가 무슨, 항상 스승님한테 혼나기만 하는데.”
“스승님 말이야, 그때 싸움이 끝났을 때, 슬퍼 보이기도 했지만, 어딘가 고독해 보이셨어. 용사라는 게 네 말마따나 항상 남들보다 몇 발은 더 앞서 나가서 싸워서 그런 건가?”
요한은 그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다가 이렇게 대답해 주었다.
“용사의 옆에서 나란히 싸울 수 있는 사람은 같은 용사밖에 없으니까 그런 게 당연한 걸지도.”
“내가 도와드릴 방법은 없으려나.”
요한.
첫 만남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항상 내 고민을 단숨에 통찰하고 해결해주는 녀석.
그때도 이렇게 말해줬지.
“그런 문제라면 네가 라미네아 님 옆에서 걸으면 되겠네. 너 말고 누가 있겠어?”
* * *
어젯밤 이후로, 한시도 쉬지 않고 마음이 술렁거려. 두 눈을 감으면, 떠오른다. 떠오르며 엎치락뒤치락 섞인다.
계속.
계속.
계속.
존재할 수 없는 향기로 전장을 물들이던 그 빛과, 싸움이 끝나고 스승님의 눈동자 위로 드리워지던 고독의 빛이.
– 나는 라미네아 알터 아라다만텔이다.
그때마다 망연해지고 만다.
– 오늘도 나를 통해, 당신의 향기를 전하소서.
엄마가 죽던 그날과 너무나도 똑같은 냄새를 풍기는 그곳에서 떠나고 싶은 건지, 아니면 그곳에 서고 싶은 건지.
“카미, 잘 잤니? 열은 없고? 물기에 젖은 카미는 꼭 강아지 같아서 더 귀엽다니깐.”
그리고 또 너무나도 신기해…….
그 모든 꿈, 고민, 의문, 충동들이…… 스승님을 다시 본 순간 순식간에 녹아내리는 게.
그건 꼭 빛과도 같아서, 어둡고 캄캄해서 보이지 않던 내 마음속 진심을 정확하게 알게 돼.
‘전장에는 있고 싶지 않아.’
하지만 이분 곁에 있고 싶어.
돌이킬 수 없이 지나간 것 속에서 신음하고 고통스러워하시지 않게…….
어제 보았던 그 고독에 다시는 잠기시지 않게.
“네, 스승님. 스승님은요?”
이런 나는, 공상가이려나.
이런 나는, 욕심쟁이인 거려나.
“으음~ 나는 열이 좀 있었는데, 카미를 보니 싹 나았네.”
뭐라고 부르든 좋아.
그걸 뭐라고 하든 상관없어.
암흑 속에서 죽어가던 나를 먼저 찾아와서 비춰주신, 이 세상의 그 어느 누구보다도 존경하는 나의 스승님.
“흐흠~ 어제 요한이랑 한방에서 같이 잤던데, 아무 일도 없었어? 둘 다 사춘기인데?”
“만약 아무 일이 있게 됐으면 지금 요한을 반쯤 죽여놨겠죠.”
“푸핫! 왜 그래, 요한이 들으면 슬퍼하겠다.”
그러니까요.
이제는 내가 곁에 있을게요.
스승님이 암흑 속에 빠지시지 않도록.
“스승님.”
“응?”
“어제 그, 아라다만텔을 뽑으시면서 한 거 있잖아요?”
“아, 검의 기원?”
“네, 그거 예전에 지검제에서 샤론도 하더라고요. 페이쿼리어라면 누구나 다 하는 건가요?”
“응.”
“저도 그걸 배울 수 있을까요?”
어제는 그렇게나 용감무쌍했다가 슬픔에 잠기시던 스승님께서는, 또 평소와 같은 스승님으로 돌아와 웃고 계셨다.
“검의 기원은 말이야, 검에 마음을 담는 거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틀려. 검과 이야기하는 거야.”
“검이랑 무슨 이야기를 해요?”
“음, 이를테면 연애 상담?”
“진지한 질문이에요!”
“장난이 아니란다. 카미의 검을 보렴. 카미가 늘 사랑과 정성으로 아껴주고 있잖아? 칼이 행복해하는 게 느껴져.”
“그야, 이건, 흥, 뭐, 선물로 받은 건데, 대충 쓸 수는 없잖아요.”
“바로 그게 시작이야. 식물도 말이야, 따뜻한 정성 속에서 기른 식물과 건성으로 기른 식물 사이에 엄청난 차이가 있단다.”
왤까요?
스승님 곁에 있으면.
일상의 한순간 한순간이 향기를 갖게 되는 것 같아요.
“자, 그럼 카미, 아라다만텔의 자루를 잡아보겠니?”
“이, 이걸 어떻게 들어요. 성인 남자 네다섯이 겨우 든다는데.”
“자, 무서워할 필요 없어. 내가 뒤에서 아라다만텔의 무게를 지탱해줄게. 잘 잡았어?”
“네, 뭐…… 일단은요.”
“그러면 이제 카미가 아라다만텔한테 하고 싶은 말을 해봐. 아직 말하는 게 부끄러우면 마음만 품어도 돼.”
“마음만?”
“용사는 말이지? 삶의 고백이 있어야 해. 나는 어떤 존재가 되고 싶은지, 이 검을 통해 무엇을 이루고 싶은지. 그걸 솔직히 말하기 위한 훈련이야.”
나는 서투르고 쑥스러움 많고 솔직하지 못한 공상가.
마음을 마음껏 표현하질 못해.
그래서 그날, 스승님의 품 안에서 처음으로 잡아본 스승님의 극위성검에게 ‘마음속으로’ 조용히 물어보았다.
‘안녕, 아라다만텔.’
너는 알고 있니?
스승님의 옆에 있으면.
일상의 사소한 한순간 한순간조차도 향기를 머금게 되는 이유를.
‘나도 언젠가는 스승님의 일상을 그렇게 만들어줄 수 있을까?’
그런 수줍은 마음의 떨림에, 너는 그때 고요한 울림으로 대답해 주었었지.
붉고…….
따스하고…….
생기 넘치는…….
검광이 맥동하며 호흡 같기도 한 안개가 뿜어져 나오자, 스승님께서 호들갑을 피우시던 것도 선명하게 기억나.
“이야, 이것 봐! 아라다만텔이 카미를 어찌나 좋아하는지 모르겠다니까.”
“이게 좋아하는 거예요?”
“그럼! 원래 페이쿼리어의 제자들은 디알레라는 양산형 성검을 통해 검과의 소통을 연습해. 근데 카미는 처음부터 아라다만텔과 소통하는 데 성공한 거야!”
스승님, 스승님의 칭찬은 어떻게 늘 그렇게 후하고 상냥할 수 있으신 건가요.
너무 후하고…….
또 너무 상냥해서…….
먼 미래에 천 번을 떠올리면 천 번이고 눈물이 나와요.
“……어제 그런 참상을 보고도 여전히 용사가 되려고 하니?”
한 전투가 끝날 때마다 울면서 기도하시던 나의 스승님. 그것과 똑같은 울음기 섞인 목소리로 그렇게 묻던 스승님.
“사실 말이야, 나는 카미가 이런 곳에 오지 않기를 바랐어. 데려오고 싶지 않았어.”
“네?”
“그래도, 그래도, 카미가 노력하면서, 점점 성장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계속 옆에 두고 있고 싶어져서…….”
왜 그날.
우는 것보다도 더 슬프게 보이는 미소를 지으시던 건가요.
“나는 스승 실격이구나.”
그때, 저는 사실 이렇게 대답해 드리고 싶었어요. 아니에요, 날 찾아와 주셨잖아요.
내 가치를 찾아 주셨잖아요.
하지만 그때 저는 어렸고, 그렇게 말할 말솜씨도 없고 용기도 없었어요. 그 대신 물었죠.
“스승님은 어떠셨나요?”
“응?”
“예전에 용사가 된 이유 세 가지 중 하나를 말씀해 주시지 않았잖아요. 그걸 알려주실 수 있나요?”
“아하하, 제자한테 솔직히 말하려니 부끄럽네…….”
“싫으시면 말고요.”
“넨 고모님이나 미르 백부님은 말이야. 항상 과로에 시달리셔. 내가 어린 시절부터 말이야. 그런데 아무런 불평불만도 안 하셔.”
그런 사소한 이야기만 들어도.
당신의 행동 하나하나에서.
칼을 휘두르시던 순간에조차 향기가 나던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해요.
“내 아버지께서는 그런 두 분을 위해 항상 여기, 전장에서 활약하셨단다. 어린 시절에 그걸 보고 생각했지. 내가 더 열심히 하면, 세 분의 일을 조금은 덜어드릴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 조금이나마 쉴 여유가 생기시지 않을까.”
어느 누군가의 기쁨에 세상 환하게 웃고, 어느 누군가의 슬픔에는 누구보다도 슬피 울어주시는.
나의 존경하는 스승님.
한없이 눈부시게 빛나고, 한없이 향기로운 향기가 나시는, 나의 사랑하는 스승님.
“그렇게 되려고 노력하다 보니, 어느새 머리가 다 하얗게 세어버렸네. 할머니가 되어 버렸으니, 시집은 다 갔지 뭐.”
그때 그 말장난에 웃음을 터뜨리면서 결심했어요.
저는요…….
스승님처럼 될래요…….
‘전장에서 싸워야만 하는 용사’는 무서워서 되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누군가의 삶에 빛을 비춰줄 수 있는, ‘당신 같은 용사’라면 되고 싶어요.
“그거 좋네요! 저도 결혼하기 싫으니까, 스승님처럼 곱게 할머니가 되는 법 가르쳐 주세요! 우선은 검의 기원부터요!”
* * *
청성(淸聲)의 빛이 마침내 몽환 속으로 접속했다.
‘순백의 꿈’은 호수와도 같다.
더없이 투명한 호수가 수평선을 새하얗게 차지하고, 그 정중앙에서 세계수가 솟아오른 풍경.
‘기이하군.’
끝이 없는 호면(湖面)은 세계를 비추는 창이 된다.
수백, 수천 개의 미래가 수면 위로 나타나 미래를 가리켰다.
어떤 창은 미래로 가는 과정이 희미하되 결과가 선명하고, 어떤 미래는 반대였다.
‘어떻게 된 거지?’
이것들은 모두 세계선(世界線).
이 세계선들이 교차하는 지점을 세계점(世界點)이라 한다.
세계선이 많이 교차할수록 성립 가능성이 높았고 적게 교차할수록 낮아졌다.
‘어떤 세계선에도 과정이 선명하게 보이지 않는다니. 전례가 없던 일이다.’
세계점들은 다만 분명하고도 두려운 미래를 전부 똑같이 예언하고 있었다.
대륙의 몰락.
인류의 쇠락.
문명의 종단(終端).
어떤, 인과율 자체에 접속하는 게 가능한 절대적 존재가 세계선을 전부 감추고 있다는 추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었다.
‘미래를 감춘다면…… 그 순간에 대비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니 분명 거대한 흉계가 있을 터.’
끔찍한, 직감 같기도 하고 예감 같기도 한 무언가가 마음의 저변에서 꿈틀거렸다.
저 흉계를 알아내야 한다.
그런데 사고(思考)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식은땀? 이 순백의 꿈 내부에서, 육신이 식은땀으로 젖을 수 있단 말인가?
‘대체 지금 세계에 무슨 일이 벌어지려 하고 있는 것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