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 of the Fake Hero RAW novel - Chapter (232)
가짜 용사 이야기-232화(232/310)
시즌 3 : 40화
– 아, 어떡해…… 우리 카밀라, 이렇게 혼자 남겨두고 가서…….
어머니가 죽던 날에는 비가 많이 내렸다. 몸뿐만 아니라 대지를 적시고 영혼까지 적시는, 그런 비였다.
그날의 비린내를 잊지 못한다.
물비린내는 흙 깊숙이 스몄는데, 물과 흙이 만나자 비린내는 숨이 막힐 정도로 진해졌다.
“적선(敵船) 접근 중, 최초 유효사거리 접근까지 30초…….”
물비린내와 흙 비린내의 틈새로 불탄 유골의 황(黃) 냄새가 스며들었다.
헛구역질이 치미는 악취…….
다시는 떠올리기 싫은 냄새…….
근데 그런 냄새가, 최남단의 전장에서는 일상처럼 맴돌고 있었다. 어디로도 피할 곳은 없었다.
“제14포병대대, 포격 준비.”
결코 잊을 수 없는 기억이, 몸의 움직임을 속박하고 뇌를 과거 속에 예속시킨다.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는…….
첫 전투의 날에, 결의를 그토록 다지고 또 다졌는데도, 떨림이 멈추지 않던 까닭은 바로 이 기억 때문이 아닐까.
“카미.”
하지만…… 비슷한 악취가 나는 상황이었으나, 달랐다.
눈앞에서 투구를 씌워주시는 스승님께서는 살아 계셨다. 살아서 목소리를 내고 계셨다.
경번갑의 사슬을 투구와 연결해서 눈을 제외한 얼굴 전체를 가려주시는 손길에는 생기가 있었다.
“정말 무책임한 발언이지만 말이지? 만약 카미가 용사의 길을 계속 걷고자 한다면…… 이런 순간에 앞만 봐서는 안 돼.”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옆을, 뒤를 보렴. 지켜야만 하는 친구들, 동료들을 보는 거야.”
스승님께서는 오랜 시간 동안 용기에 대해 이것저것 가르치셨으나, 용사의 마음가짐을 확실하게 짚어주신 건 그게 처음이었다.
등불처럼 남는 말이 있다…….
성장의 과정 속에서 마음속 깊숙이 등불처럼 남는 말들이 있다. 그때 들었던 그 말이 바로 그중 하나였다.
“그럼 알 수 있어. 검이란, 죽이기 위한 도구이기도 하지만 지키기 위한 도구가 될 수 있단 걸. 그걸 알 때 비로소, 사람은 용기를 낼 수 있게 되는 거야.”
당신의 향기, 첫 출정 (6)
“적이 성벽을 기어오릅니다!”
홍련 병단의 전투가 개시되면, 나태의 마녀 멜레느는 염동력 의자 위에서 사령탑이 된다.
멜레느는 상공에 주재한다.
적들의 표적이 될 위험성이 높아지긴 하나, 그녀 자신에게 강력한 결계를 펼쳐두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제2돌격대, 투입…….”
멜레느는 일차적 판단으로 군사의 진퇴를 맡았다(최중요 판단은 라미네아의 승인을 받긴 한다). 약해지거나 돌파되는 진영의 허점을 찾아 간부진에게 전했다.
활약상은 그게 전부가 아니다.
위험 현상에서 단원들에게 결계를 펼쳐주는 것도 그녀였고, 대(對)열기 결계를 둘러주는 것도 그녀였다.
“멜레느로부터 신호가 왔다. 용맹하게 돌격하자, 형제들이여!”
그녀는 또한 통신 축선이었다.
전장 여기저기에서 솟는 정보와 요청들이 멜레느에게로 집중되었다가 다시 적재적소로 흩어졌다.
전장의 혼란을 병단의 그 누구보다 신속하고 확실하게 파악할 수 있는 건 그녀란 소리다.
‘전황이 심상치 않은데, 적의 숫자가 너무 많아…….’
피비비비빙…… 얼음송곳들이 무수히 휘몰아쳐, 우루크 다섯의 사지를 꿰뚫는 것이 보인다.
‘요한이라는 꼬맹이는 쓸 만하네……. 두 번째 싸움인데 벌써부터 두꺼비를 잘 보좌하잖아……. 전투 마법 센스도 좋고…….’
그에 비하면…….
라미네아의 제자 쪽은 역시 얼마 못 버티겠네…….
그때 카밀라는, 적이 두려워서 후방에 빠져 있던 게 아니었다. 아니,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정말 두려웠던 것은…….
“적 제3파가 상륙합니다! 동북쪽, 젠장, 어떻게 저기로 올라왔지? 절벽을 기어올랐나?”
“철새진, 14장! 종7ㆍ횡7!”
“성문을 사수하라! 기다려, 기다려, 기다려, 발포 허가! 발사!”
총탄 세례에 우루크들이 고꾸라지고 찢어지는 광경으로부터 스승님에게로 눈을 돌리면서, 문득 생각했다.
“제3파, 무력화됨…….”
“사격 유지! 1, 2열 장전, 3, 4열 발사 준비. 멜레느, 공세가 둔화될 때까지 결계 유지해! 적의 눈을 교란해야 해.”
“귀찮지만, 뭐…… 알았어. 남문 돌파 직전.”
“내가 갈게. 그리프베런 아저씨는 총지휘를 맡아주세요.”
“주의하시오, 단장. 마(魔)의 추악한 악취가 오늘따라 더욱 극심하니. 이건 죽음의 냄새인데…….”
“전사장님, 오물에서 구르는 저것들이 언제 향수 뿌리고 다닌 적이 있기나 했습니까?”
“그런 말이지만, 또 그런 말이 아니다. 무언가 불길하다.”
“네, 주의할게요. 예비대, 준비됐어?”
“명령만 내리십시오, 단장.”
“좋아. 내가 앞장설 테니 다들 따라와!”
처음에 전장 속의 스승님은 평소와 달라진다고 생각했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는 걸.
여태껏 해주신 모든 가르침.
여태껏 함께해주신 동행의 나날.
스승님께서는 한결같이 단 하나의 마음가짐을 가르치셨고 또 몸소 보였다는 걸 깨닫게 된 것이다.
‘용기(勇氣).’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는 용기.
힘없고 약한 사람들을 위해 싸울 수 있는 용기.
‘용기를 내야 하는데, 낼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 대신 용기를 내주는 용기.’
그 전율 어린 깨달음이, 발을 저 앞으로 내딛게 만든다.
전장의 바로 저편…….
칠흑같이 밀려드는 절망 가운데, 용기가 필요한, 요컨대 용사가 필요한 장소로.
“부, 북문 공성추에 돌파됩니다!”
“철새진을 꾸려! 못 들어오게 막아라!”
“멜레느 님께 구조 요청을……!”
“해봤자야! 이미 전방위에서 교전 중이야! 투입할 예비대가 없단 말이다!”
“이, 이것들이 끝도 없이……!”
“저건, 저건 뭐야!”
“뭐 저렇게 거대한 놈이……!”
공성추 균열을 일으켜둔 성문을 박살 내며 돌파해낸 우루크의 체격은 가히 압도적이었다.
– 우루크는 <잊혀진 왕들>의 숫자인 5를 숭배하는데, 이 5를 두 번 더한 숫자 10을 신성시한다. 그렇기에 전사들의 계위도 10을 단위로 이루어지지.
십장(什長).
백장(百長).
– 천장(天長)부터는 천 명의 전사를 부릴 수 있는 존재로, 중소 클랜에서는 족장을 맡을 정도며 하이 타르크에 속하는 대규모 클랜에서는 ‘전투 대장’ 자리에 오른다.
준사관 교육 때 이론 교관 비랑이 이 교육을 어떻게 끝맺었더라?
– 천장부터는 자네들이 상대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하겠지만, 그건 사실 백장부터다. 우루크 전사 백을 복속시킬 수 있는 힘을 가졌단 소리니까.
절대 정면으로 맞설 생각은 하지 마라.
– 그게 바로 개죽음이다.
놈의 흉악한 팔에는 우루크 숫자로 백(百)을 뜻하는 ‘Bahug’라는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백장……!’
성문을 몸으로 막아서 지켜내던 창병이, 핏덩이가 되며 허공을 날았다.
‘움직여.’
악몽(惡夢)이 밀고 들어온다.
‘움직여, 움직여, 움직여, 제발.’
핏덩이 중 누군가는 살아 있었다.
‘훈련해 왔잖아.’
그 누군가는 피를 토하며 일어나지도 못하고 있었는데, 거침없이 밀려드는 악몽의 물결에 휩쓸리기 직전이었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카밀라는 미친 듯이 떨리는 다리를 양팔로 비틀어 어깨너비로 벌려 자세를 취했다.
‘다 이런 상황을 위해서였잖아.’
화산재 나부끼는 허공을 난폭하게 휘돌던 철퇴가, 누군가의 삶을 끝장내기 전에.
– 그 검으로 무엇을 이루고 싶은가, 그걸 진솔하게 검과 소통해야 해.
그 추억.
저 너머의 꿈.
먼 날의 행복.
– 그러면 검이 응답해줄 거야.
그 모든 것이, 죽음이라는 와류 속으로 빨려 들어가 더 이상 돌이킬 수 없게 되려던 그 순간에.
십문자도, 제7식.
진뇌룡.
세계를 새까맣게 물들이던 화산재들을 불사르는 한 줄기의 섬광(閃光).
칼에 의지가 담겨.
칼날에 용기가 실려.
한 사람으로부터 일상이라는 이름으로 꿈꾸는 평화와 사랑과 꿈을 빼앗으려는 존재를 멸살한다.
‘우루크 백장의……!’
‘공격을……?’
철퇴가 튕겨나가고, 백장이 주춤 물러설 때 병사들의 눈이 커다랗게 열렸다.
빛이다.
그 빛은 아직 가녀리고 희미하고 작아서, 눈부신 수준은 아니었으나, 그건 분명 빛이었다.
용기의 빛이다.
용기는 곧 불꽃, 타인의 마음으로 순식간에 전해지고 또 타오른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자가 곧 용사.
– 살려, 살려주세요, 엄마가, 엄마가 죽어요, 엄마가요!
어머니가 죽던 날에 무력하게 울며 사방팔방을 뛰어다녔으나 도와줄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때 생각했던 걸지도 몰라.
그때부터 동경한 걸지도 몰라.
어느 누군가의 절망 속에 선뜻 손을 내밀어줄 수 있는 스승님 같은 사람을. 그래서 스승님의 동작에서 향기가 나는 것인가?
‘진뇌룡을 완벽하게 불러내는 건 불가능했지만, 그래도 공격을 막아내고 반격하는 데까진 성공.’
제5식 돌발격으로 진입했더라면 더 깔끔했을 수도 있지만, 철퇴를 막아내지 못해서 이 사람이 죽었을지도 모른다.
“괜찮으세요?!”
창병과 백장 사이에 위치하며 숨을 한껏 들이켜는데, 얼굴에 튄 피의 질감이 기이했다.
액체가 아니라 고체……?
검게 썩다 못해 굳어버린 핏덩이들이 마력의 칼날에 흩어지는 게 여간 이상한 게 아니었으나, 그걸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철새진, 제 10보 뒤로 집결! 13ㆍ12, 창병들은 양옆으로 날개를 펼쳐주세요!”
“너는!”
“제가 이 녀석을 맡고 있을 테니, 어서!”
그때, 우루크 백장은 섬뜩할 정도로 조용하게 카밀라를 노려보기만 하였다.
들리는 소리는 장대비 소리뿐.
눈을 뜨고 있기 버겁도록 장마가 쏟아지는 가운데, 철퇴와 태도가 다시 한번 격돌하며 불티를 요란하게 흩뿌렸다.
‘무거워……!’
온몸의 뼈가 으스러지는 것만 같은 그 육중한 충격.
숨이, 숨이……!
통상 규격을 아득히 뛰어넘는 철퇴는 원(圓)의 힘으로도 완전히 막아내지 못했다.
“카밀라!”
그 힘에 떠밀려 진창 위를 격렬하게 구르던 카밀라를 부드럽고도 견고하게 잡아주는 무형(無形)의 힘이 있었다.
염동력……!
고개를 드니, 멜레느가 이쪽으로 손을 내뻗고 있는 것이 보였다. 동시에 전서를 다급히 작성하고 있는 모습도.
‘스승님한테? 아니, 안 돼. 여기로 오시게 해서는 안 돼. 스승님은 이거 말고도 바쁘셔.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
한 번의 호흡으로 모든 자세를 바로잡는, 극한의 집중력.
세계의 모든 소란을 하나의 점(點)으로 집약시켜 의식 저 멀리로 밀어낸다.
어쩔까?
놈의 체고가 너무 높아.
노릴 수 있는 급소들의 위치는 목이나 머리를 제외해도 너무 높아.
– 상대가 고수인 경우에는 급소를 한 번에 노리는 건 불가능해.
그 집중력의 세계로, 파문처럼 흘러드는 것은 친구의 목소리.
– 그래서 그때는 조금씩, 볼 수 있고 노릴 수 있는 허점을 공략해서 상대를 깎아내는 게 중요하다고 하셨어.
선공을 취해온 건 백장이었다.
두 자루의 철퇴를 맹렬히 회전, 빗줄기를 가로지르며 내달려들 때 카밀라 또한 의식을 끄집어냈다.
집중력의 세계에서, 전투의 세계로.
‘정면으로 맞서는 건 불가능, 그건 힘의 차이로 인해 밀릴 거야.’
그야말로 한순간이었다.
카밀라가 태도를 칼집에 납도한 것도 한순간, 몸을 별안간 수직으로 튕겨 올린 것도 한순간.
지금까지 서 있던 지대에 내리꽂힌 철퇴에 폭음이 터지며 흙먼지가 휘몰아친 것도 한순간.
‘아, 멍청하기는……!’
멜레느는 탄식을 흘렸다.
백장의 목을 겨누기 위해 공중으로 올랐겠지만, 사람이란 날짐승이 아니므로 중력 상태에서는 선택지의 폭이 급격히 좁아진다.
‘저 백장은 철퇴 두 자루를 가지고 있잖아. 그것도 생각 못 한 거야?’
백장이 왼손의 철퇴를 어깨 뒤로 끌어당기는 게 보였다.
‘사용 가능한 법력이 많지 않아.’
횡렬 공간을 확실하게 제압하여, 목을 겨누는 카밀라의 몸을 통째로 으스러뜨릴 것이다.
‘나한테 두른 결계를 할애하는 수밖에 없는데…….’
지금 여기로도 우루크의 노포(弩砲)들이 거듭 날아오는 상황…… 으음?
‘뭐야, 왜 칼을 안 들고 있지?’
그 고민의 한순간, 카밀라가 상공에서 거꾸로 쭈그려 앉아 칼집을 밟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마치, 빗자루를 탄 마녀처럼.
아래로 뻗은 팔은 칼자루와 칼집을 확실하게 붙들고 있었는데, 칼집에서 요동치는 힘은 틀림없는 마력의 집속.
‘대체 왜?’
한순간, 우루크의 철퇴가 허공을 잡아 부수던 그 한순간, 카밀라는 칼날을 빼내는 동시에 칼집을 박차 몸을 비스듬히 급강하.
‘대체 뭘 하려고……?’
마력으로 울부짖는 칼날이 남긴 잔광의 궤적은 낙뢰(落雷)를 연상시켰다.
카밀라가 우루크 백장의 가랑이를 얇게 베며 그 사이로 빠져나온 것도 한순간.
발끝에 마력을 일으켜 몸에 제동을 걸지만, 그 관성의 힘을 짓누르는 게 아니라 즉시 뒤돌아서면서 오롯이 칼날 위로 엮는다.
– 자, 내가 섬(閃)이라 외치면 바로 사용하는 거야.
선명히 뇌리를 울리는, 스승의 목소리와 함께.
– 다섯, 넷, 셋…… 섬(閃)!
도약과 착지, 급가속이나 급제동, 어떠한 힘의 이동에 따라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반동…… 그 모두를 하나의 선(線)에 강제로 집중시켜 행하는 참격.
“십문자도 제6식───!”
하나의 벼락으로서 천지를 가르고 화산을 불살랐다는 진성검 갈라디엘과 똑같은 무위를 선보일 수는 없겠으나, 이 또한 경지에 달하면 수평선 전체를 베어내는 비상식적인 힘 중 하나.
그것이, 선명히 베어낸다.
그 힘이, 확실히 갈라냈다.
우루크 백장의 무릎 뒤…… 이족보행 생명체로서 마땅히 갖게 되는 허점, 즉 양쪽 오금을.
“───섬무참(閃舞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