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 of the Fake Hero RAW novel - Chapter (235)
가짜 용사 이야기-235화(235/310)
시즌 3 : 43화
<라프타스> 대공세 이전까지는 이제 어엿한 용사(勇士)의 제자가 되었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그 전투는 그토록 참혹했다…….
그때에는 역사가들이 재주 좋게 명명한 ‘검은 여름’ 같은 말 따위는 없었다. 그때의 악몽을 수식할 만한 언어가 이 세상에는 없었다.
“모두 주목. 황룡 군단과 비격 병단이 암술 결계를 잠시 무력화시킨 틈에 넨 고모님께서 페이쿼리어 병단을 <라프타스> 내부로 전이시켜줄 거야.”
그래도 어렴풋이, 지금까지와는 결이 전혀 다른 전쟁이 시작되었다는 건 느낄 수 있었다.
떨리는 호흡으로.
떨리는 손끝으로.
이착륙장에서 황룡들을 따라 끝도 없이 날아오르는 그리핀들을 보며, 온몸의 떨림을 주체할 수 없던 건 오늘날까지도 선명히 기억난다.
“우리는 흑장미 병단과 연합해서 남문을 맡기로 했어. 혈계술을 무력화시키고, 주력부대가 도시 내부로 들어오게 하는 게 우리 목표야. 알았지?”
전장에는 빛과 어둠이 교차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날의 전투도 마찬가지였다.
「심상 구축, 뇌향심공명진(雷響心共鳴陣).」
눈부신 빛의 파장이 전장 전역을 물들이며 퍼졌다. 세상 전체로 퍼지는 그 빛의 파문은 그야말로 빛의 기적이었다.
햇살이 산뜻 내리비치는 들판.
그 들판 위에 기분 좋게 누워 있는 착각마저 일었다. 모든 공포, 떨림, 두려움들이 그 빛 속에서 가라앉고 용기라는 이름으로 결집된다.
[혈마 병단, 비네사 알터 르노드 연결됐습니다.]……
……
[제2보병여단, 연결됐습니다.] [흑장미 병단, 플로렛 알터 타스 알포 임무 수행 대기 중.]……
……
[제6경기병대, 언제든 말씀만 하십시오.]……
……
[비격 병단, 메이트 알터 볼비에르. 현재 혈계 무력화 작전 진행 중. 연결됐습니다.]……
[제5포병연대, 연결됐습니다.]……
……
[맹진 병단, 자카드린 알터 토오엘 연결됐다 이겁니다!] [제3독립기갑대대, 명령만 내리십시오.]……
……
[철성 중장 병단의 모즈나 알터 솔랑, 연결됨. 점호 끝.]빛 안에서 하나 되라는 성서의 가르침대로, 아니, 그 가르침을 이 땅에 체현시키는 게 가능하다면 분명 이런 느낌일 것이다.
이 통합이, 뇌향의 힘이었다.
용현과의 동행 속에서 그 삶을 보고 배웠던 뇌향은 이렇게 약속했다고 한다. 이 세상 모든 이들의 마음을 하나로 엮고 돌보며 사랑으로 어루만지겠다고, 당신께서 평생 동안 그러셨던 것처럼.
[여기는 홍련 병단의 라미네아 알터 아라다만텔, 준비됐어요.]뇌향심공명진은 분명 비현실적인 힘이었으나, 그걸 유지하는 데 전념을 쏟아야 해서 전투 수행이 거의 불가능하단 단점이 있었다.
[비네사 : 뇌향 각하께 최고 사령 권한을 인계받은 나 비네사가 그 권한을 다시 아이딘에게 인계한다. 현장 보고는 아이딘에게 하도록.] [플로렛 : 확인했습니다.] [비네사 : 혈노를 다시 인간으로 돌이킬 수 있는 방법은 어디에도 없다. 망설이지 말고 베어라. 그게 사자(死者)의 명예를 지켜주는 길이다.] [자카드린 : 그렇다면 제 마음속에서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꽃으로 장례식을 치러 주겠습니다!] [비네사 : 마음의 불꽃이 아니라 검의 불꽃으로 해라.] [자카드린 : 물론 둘 다 하지 않겠습니까! 하하하하핫!] [메이트 : 선배님, 결계에 균열을 만들어 냈습니다.] [뇌향 : 균열이 육안으로도 확인되는구나. 이제 황룡들의 벼락이 저 틈새를 넓히리라.]다만, 역사에 기록된 대로 뇌향 세츠넨이 제일선에서 싸우는 않았는데,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 힘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수십만 명의 의식을 하나로 엮는 것은 필멸의 지각으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힘과 집중력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둘, 항룡(抗龍) 결계 때문이다.
마족 대군세의 거점에는 용의 접근을 차단하는 옛 왕의 축복이 내려지고는 했는데, ‘왕의 축복’이므로 그걸 돌파하려면 뇌향심공명진을 풀고 전력을 쏟아야 했다.
사실, 이런 이유가 없어도…….
뇌향에게 일선에서 싸우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건 정말 양심이 없는 일이다. 뇌향심공명진만으로도 전투의 승패에 기여하는 비중이 어마어마했으니까.
[뇌향 : 차원 전이 10초 전.]전이 초읽기가 시작됐을 때, 모든 페이쿼리어 병단과 마찬가지로 홍련 병단은 차원문 마방진 위에 전투 대열로 집결해 있었다.
[메이트 : 각하, 틈새로 보이는 적의 숫자가 상당합니다.] [뇌향 : 확인했다. 차원 전이 이후 지상에 있는 적들을 주의하여라. 5초.]핏빛으로 걸쭉하게 너울거리는 선혈의 신기루(蜃氣樓)…… 그걸 올려다보면서 호흡을 다시금 정돈했다.
[황룡 사라크타 : 목표를 완수했다.] [뇌향 : 3초, 전이 준비.]차원진 위로 차원 왜곡 현상, 즉 대기의 뒤틀림이 일어서며 빛의 폭주가 눈앞을 새하얗게 물들이기 시작한다.
[뇌향 : 나의 아이들아, 창세의 빛이 너희들을 지키시고 길을 인도하기를 절실히 기도하마. 전이 개시.]그렇게, 전 세계의 인간이 마침내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단 걸 깨닫게 되는, ‘검은 여름’의 첫 전투가 시작된 것이다.
‘검은 여름’의 서막, <라프타스> 공방 (2)
[플로렛 : 남서쪽 끄트머리 시계탑에 혈계진이 있다고 하니, 우선 저 일대를 확보한다. 자, 흑장미, 길을 열어보자고!]당시의 참전자들은 그 작전을 대공세로 생각하나, 역사가들은 대참극으로 기록한다.
하지만 당시에는 그 누구도, 그 전투가 전쟁의 국면 자체를 뒤바꾸는 분수령이 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애초에 상상할 시간도 여유도 없었다. 혈족과의 싸움은 그 어떤 마족과의 싸움과는 달랐다.
마족과의 싸움이 버겁다면.
혈족과의 싸움은 역겨웠다.
놈들을 상대할 땐, 사람을 죽여야 하는 것이다…….
이미 죽었다고는 하지만.
의식도 의지도 없다곤 하지만.
칼로 베어내면 사람의 피가 뜨겁게 튀고 사람의 뼈가 부서지고 사람의 뇌수가 흩뿌려진다…….
[멜레느 : 목표 지점의 현황 확보…… 좌측 문의 방어가 약해.]혈족과 혈노의 관계는 반항도 항명도 없는 완전무결한 독재 체제로, 혈노들은 인해전술의 제물로 바쳐진다.
혈노들은 항복 따윈 모른다.
혈노들은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무지렁이라는 건 아니다. 광인들이 인간의 신체적 한계를 깨고 규격 이외의 힘을 사용하듯, 혈노들 또한 괴력을 사용하는 것이다.
[라미네아 : 델프레드, 동쪽 전체를 빙벽으로 막아버려! 엄청난 숫자야!]그뿐인가.
혈폭탄(血爆彈)이라 하여, 체내에 주입된 저주받은 피가 폭탄처럼 폭발하기도 했다.
그 부식성 혈액의 살상력은 무시무시했다.
[델프레드 : 이건…… 시가지 도로 규격이 커도 너무 커. 요한, 너도 좀 도와야겠다.] [플로렛 : 꿈쩍도 안 하는걸. 이건 안 되겠다. 바로브, 네 광창으로 문을 그냥 날려버려!]또 혈노는 포기를 모른다.
[바로브 : 예, 단장님.]그 전쟁광 우루크 놈들조차도 팔다리가 잘리면 고통 속에서 무력화가 되는데, 혈노들은 신체 어느 부위가 박살 났든 목숨만 붙어 있다면 계속해서 달려든다.
계속, 계속, 계속해서…….
예전에 스쳐 지나가며 봤던 사람의 얼굴을 하고, 또는 예전에 함께 웃거나 울던 친구의 목소리를 내며…….
[플로렛 : 람! 뒤는 너와 내 부하들에게 맡겨두고 이리로 와! 단둘이서 지하를 뚫고 혈계진을 없애자!]그 15시간 동안의 작전은, 1분이 10년처럼 느껴질 정도였으나, 실상은 숨 돌릴 새도 없이 가쁘게 진행되었다.
마치, 악몽에서 허우적대듯…….
그러나 악몽 속에서 단지 울면서 흐느끼고 싶진 않았다. 그 전투 이후, 몇 날 며칠을 전후 스트레스로 고통받게 됐지만 말이다.
<라프타스>는 지옥이었다.
만약 지옥이란 게 실재한다면, 분명 이런 풍경이었을 것이다.
도시의 모든 수로와 철로는 시체로 뒤덮였고 파리 떼가 초록빛으로 들끓었다.
도시 전역이 피바다였다.
바닥은 미끈거리고 비린내가 진동했다. 피의 세계였다.
“하핫, 천한 것들이 주제에 맞는 악취를 풍기며 기어들어 왔군.”
그 악몽이 처음으로 분명한 형체를 입고 나타난 건, 스승님께서 지하로 향하신 시점이었다.
검푸른 소녀(小女)…….
머리색도, 눈동자 색도, 기이할 정도로 창백한 피부색을 제외하면 모두 검푸른 존재.
“피가 맛있어 보이는 것들이 꽤 있네?”
전장에 어울리지 않는, 아니, 어울리지 않기에 오히려 더욱 우아해 보이는 예복 차림이었다.
그리고…….
그 예복의 우아한 장식조차도 빛이 바래게 만들 정도로, 손끝의 움직임조차 우아한 행동거지.
‘아무도 못 본 건가? 거의 진영 중앙까지 침투해 왔는데? 아니, 이미 예비대조차도 전부 전투 중이라 여유가 없는 거야.’
그러나 우아한 동작과는 대조적으로…… 모든 것이 잔혹했다. 사고방식 자체가 달랐다.
“거치적거리잖니, 이 쓸모없는 잡것들아.”
그 손끝에서 빚어진 피의 채찍으로 혈노들의 목을 모조리 자르고, 총탄을 맞고 바닥을 기던 혈노의 머리통을 짓밟아 터뜨렸다.
“뭐야, 너…… 너,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어린 개체이긴 했으나, 당시에는 마찬가지로 어렸던 데다 혈족은 하나하나가 강대한 힘을 타고나 버거운 상대였다.
“아주 웃긴 질문이 다 있네.”
“뭐?”
“너희 인간들은 길을 가다 실수건 홧김이건 쓰레기를 짓밟았을 때도 그런 표정을 짓나 보지? 아니잖아. 이게 그런 거야. 똑같은 거라고. 아하하하하하하하하!”
온몸에 섬뜩하게 이는 소름이 전율로 속삭이는 것만 같았다. 이놈은, 이놈들은, 살게 놔두어서는 안 될 생물이다…….
내가…….
바로 내가 저놈을 여기에서 쓰러뜨려야 한다고.
“샤론.”
똑같은 생각을 했는지, 말하기도 전에 샤론이 이미 옆에 와서 서 있었다.
“카밀라, 딱 두 합만 버텨줘. 그러면 내가 끝내버릴게.”
샤론이 검을 발검해 극주검 0식인 백조를 취할 때, 십문자도 제4식 발(發)의 자세를 잡았다.
“세 합은 필요할 것 같은데.”
“할 수 있겠어?”
“지금 누구한테 묻는 거야?”
혈귀의 사술(邪術)은 피를 기반으로 이루어진다.
공격의 낌새를 감지한 혈귀가 피의 채찍을 몸 주변에 둥글게 펼쳐 방어 자세를 취해냈다.
괜찮아, 아무 문제 없다. 모든 것은 상정 범위 이내.
[멜레느 : 아니…… 혈족이 언제 여기까지?]십문자도 제7식.
진뇌룡.
[멜레느 : 안 돼…… 혈족은 너희들 수준에서 상대할 만한 적이 아니야! 물러나! 그리프베런, 여기로 와줘!]마나하트로 구축시킨 마력의 결계가 전방을 휘감을 때, 체내에서 응축시키던 마력은 각력에 집중, 지면을 박차며, 또 연계의 동작, 십문자도 제1식 원(圓).
“!”
마력의 결계가 사술과 충돌하며, 마력의 불씨와 사술의 선혈이 어지러이 뒤엉키며 흩날린다.
혈귀가 웃는다.
진뇌룡의 결계가 사라진 틈새로, 여느 쇠붙이보다 예리하기로 소문난 손끝을 경동맥으로 내지르며.
‘앞서 말했듯 상정 범위 이내.’
연계의 동작으로는 갖추어놓은 십문자도 제1식 원(圓)이, 그 살육의 손길을 거칠게 쳐낸다.
혈족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사냥감을 놓치지 않기 위해, 두 번째로 내지르는 손은 이제 노예화를 위해 혈관을 노리지 않고 분명하고도 확실한 죽음을 노린다.
“이 잡──!”
다시 연계의 동작.
십문자도 제3식, 둔(鈍).
공세를 튕겨내는 반동으로 흔들리는 무게중심, 그 중심을 회복하기 위해 지면을 내리찍는 발에 마력을 집중ㆍ폭발시킨다.
“──벌레가!”
한 끗 차이.
정말, 심장이 요란하게 뛸 정도의 한 끗 차이로, 눈동자 앞을 스치고 지나가는 손톱이 있었다.
둔(鈍)으로 동작을 둔화시키지 못했더라면 지금 이 순간 죽었을 것이다.
“감히──!”
극주검법, 제3식.
독아(毒牙).
그 오만함과 방심의 조화 속에서 벌어진 경계심의 틈새로, 한 마리의 뱀이 소리 없이 접근해 그 너머의 심장을 삼킨다.
“!”
“!”
“!”
분명 방금 전까지 단둘뿐이었던 시상에 한 명의 그림자가 더 생겨나 있었다.
샤론 플라네스타.
아직 찌르기 자세를 수습하지 않은 그 녀석의 뒷모습이, 혈족의 가슴팍에 어느새 커다랗게 뚫린 자상(刺傷) 너머로 엿보였다.
“후훗, 혈족도 왕족 앞에선 별것 아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