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 of the Fake Hero RAW novel - Chapter (238)
가짜 용사 이야기-238화(238/310)
시즌 3 : 46화
“기원력 1671년 6월 7일, <라프타스>에서 원시의 저주가 터지면서 인류 통합군은 3할에 가까운 병력을 잃는다.”
뇌향 세츠넨이 수명을 내던져 가면서까지 무리해서 생존 병력 전체를 전이시키려 했기에 피해는 3할에서 그쳤다.
그러나 안심할 대목은 아니다.
주력부대의 3할이다.
여기저기서 있는 대로 긁어모은 허수들이 아니라, 페이쿼리어 병단들을 위시해 실전 경력이 풍부한 베테랑 중 3할이었다.
“<라프타스> 대공세 도중의 사상자까지 합하면 상실 병력은 4할에 달한다. 10만에 가까운 수치다. 또한 너무나도 다급히 이루어진 차원 전이였기에, 병사들은 계통도 없고 체계도 없이 대륙 곳곳으로 흩어지게 된다.”
황색 도시, <라프타스>는 그걸 끝으로 몰락하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3군 6진 방어선 또한 붕괴.
방어 시설들에 비축해왔던 군수 물자와 병참을 회수할 길은 없었으므로 방어전의 이점 또한 상실되었다.
“가장 큰 문제는 차원진을 넘은 페이쿼리어들조차 휘하 병단과 떨어지게 되었단 점이다. 세력과 체계가 그나마 온전한 것은 뇌향이 사령부로 향하자마자 밖으로 전이시킨 혈마 병단뿐이었다.”
이제는 혈족과 네크론까지 침략 전쟁에 가담했음이 분명해졌다.
이대로 남서부 해안이 방치된다면, <라프타스>가 침략의 교두보가 되어 전쟁의 참화는 대륙 전체를 삼키고도 남을 터였다.
“바로, 그런 상황이었다. 혈마 병단의 활약 여하에 따라서 전쟁의 귀추가 결정되게 되는, 그런 전황이었다.”
그래, 그 혈마 병단이었다.
‘검은 여름’의 대미를 장식한 게 홍련 병단이라면, 그 서두를 지켜낸 전설의 병단.
카밀라 알터 아라다만텔은 대전이 현상에 휘말려 혈마 병단에 임시 배속되게 된다.
“오늘부터 배울 역사는 바로 여기, ‘검은 여름’에 인류 반격의 기반을 마련한 혈마 병단의 활약사로 시작하겠다.”
두 번째 발돋움, 필두 페이쿼리어와의 동행 (1)
“카, 카밀라!”
의식이 돌아오자마자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딘 오빠! 카밀라가, 카밀라가 깨어났어요!”
그때, 다시 의식을 되찾았을 때 엄습해온 것은 형언 불가능한 아픔이었다.
몸이…….
몸이, 내 몸이 아닌 것 같아…….
온몸이 찢어져 있었다. 찢어진 걸 다시 기워 붙이기라도 한 듯, 온몸에 꿰맨 흔적이 가득했다.
그리고 뭔가…….
팔다리가 길었다, 기억보다도. 시야에 맺히는 시상조차도 더 또렷한 느낌이 들었다, 이 흐리멍덩한 상태에서도.
“혼란에 빠지면 달랜다고 이것저것 곤란해지니 지금 당신의 상태에 대해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홍의 사제, 아이딘…….
“당신은 원시의 저주에 당했습니다. 저주가 완성되기 전에 뇌향 각하께서 당신을 전이시켰기에 목숨은 붙어 있었고요.”
“제 목숨이…….”
“예, 언제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였지만 말이죠.”
에쉬르가 안도의 숨을 내쉬며 병상 옆에 주저앉았다.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만약 그때 널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그대로 죽었을 거래.”
“원시의 저주는 근골 전체를 뒤틀어 버려서 살려내도 살려냈다고 보기 힘들지만, 다행히도 근골이 비정상적으로 성장하는 구간에서 저주가 끝났습니다. 다만 근막과 피막들이 그 성장을 따라잡지 못하는 문제가 남았었죠.”
아이딘이 팔다리 곳곳에 꿰맨 흔적을 가리켰다.
“뼈가 살가죽을 다 뚫고 나와서…… 치유의 기적으로도 어떻게 할 방도가 없던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용혈 혈청을 주입하기로 했습니다. 성공 확률 극악의 도박이었지만 죽게 놔두는 것보다는 낫다고 판단했습니다.”
“용혈…… 스승님이 쓰시던…….”
“초고속 재생 능력을 갖게 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임시방편으로서 피막과 근막의 회복을 촉진시켰고…… 보다시피 지금 상태가 이렇게 된 겁니다. 과도한 신체의 성장이 꿰맨 흔적으로 남았죠. 보이지는 않겠지만 머리카락도 정수리 쪽은 새하얗게 셌습니다. 보고 싶다면 거울을 가져다 드리죠.”
“무사한가요…… 스승님은…….”
“라미네아 경에 대한 거라면 무사하다고 확답할 수 있습니다. 르노드와 아라다만텔은 자매검(姉妹劍), 자매검끼리는 파장을 공유해서 대리자의 상태를 알 수 있죠. 살았는지, 죽었는지.”
그때, 그 마지막 순간에.
끝내 손을 잡지 못했던 스승님의 얼굴이 지금까지도 어른거렸다.
무사하다니, 무사하셨구나.
“다행이다…… 그러면요…… 홍련 병단은요……?”
아이딘과 에쉬르가 조심스레 시선을 주고받았다.
“많은 이들이 죽었습니다. 아직 혈마 병단 전체와도 연결이 되지 않고 있고요. 그러니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은 지금으로서는 해줄 수가 없습니다. 일단 쉬십시오. 당신 말고도 봐야 할 환자가 수천 명이 넘습니다.”
그러면 샤론은요, 그렇게 물으려는데 의식이 정신없이 가물거리더니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 나락의 밑바닥에는…… 델프레드의 투덜거림이 있었고 요한의 소심한 중얼거림과 멜레느의 귀찮은 하품, 그리고 그리프베런의 위엄찬 목소리가 있었다.
이제부터 네 가족이야…… 가족과도 같던 단원들의 웃음소리 속에서 활짝 웃는 스승님의 미소가 아득한 광휘에 휩싸여 있었다.
눈물이 뿌옇게 시상을 적셨다.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다시…… 저곳으로…… 저 일상으로…… 저 웃음 속으로…… 돌아가서…… 다시…… 모두와…… 만날 수 있을까…….
* * *
“귀여운 꼬마 용사님, 잠은 편히 잘 주무셨나요?”
에쉬르와 만난 건 그로부터 닷새 뒤의 일이었다.
아이딘의 치유 기적 덕분에 비정상적인 속도로 몸이 회복되어, 벌써 상반신을 일으켜 병상 등받이에 기대앉아 있을 수 있었다.
아이딘이 맥을 짚어보거나 팔다리의 상태를 보고 있을 때 에쉬르가 들어온 것이다.
“에쉬르 언니.”
“어떡해, 어떡해. 카밀라는 귀여울 때가 좋았는데, 하루 만에 8등신을 넘보는 초특급 미녀가 되어버렸어. 사람들이 갑자기 예뻐진 비결을 물으면 뭐라 대답할지 생각해두는 게 좋을걸.”
경추 위쪽으로 원시화가 진행되기 전에, 술식 범위 밖으로 빠져나온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다만 그 특이점 때문에 머리 크기만 열네 살 시절 그대로이고 상ㆍ하반신은 열여섯, 또는 열일곱 살의 신체로 성장했다.
웃을 기력이 없었지만, 에쉬르의 말장난을 들으니 기뻐서 입꼬리만으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원시 왕국 방식 성형술을 받았다고 하면 되겠지. 언니가 소개해준 곳에서 시술받았다고 할게.”
“아하하, 그래, 그러렴!”
“내가 여기 온 지 얼마나 됐어?”
“한 달이 좀 넘었으려나? 미안, 너무 바빠서 날을 정확하게 셀 수가 없어. 생존자들을 규합하느라고 눈코 뜰 새 없이 바빠.”
“홍련 병단 소식은 좀 있어? 흑장미 병단도.”
“아직 아무것도. 통신 축선을 잇고 있긴 하지만, 차원 전이가 너무 광범위하게 이루어졌고 뇌향 각하와도 연락이 되질 않아. 원시의 저주 소용돌이의 한복판에 계셨으니…….”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함정이었어. 지금은 그렇게밖에 생각할 방법이 없어. 그때 스승님과 함께 ‘창백한 준남작’을 처치했는데, 그 죽음을 기점으로 갑자기 원진에서 빛이 발생하더라고…… 뇌향 각하가 아니었더라면 나도 거기에서 죽었을 거야. 아니, 전멸했겠지.”
샤론의 얼굴이 떠올랐다.
어른스럽게 과장된 웃음소리도.
“그렇구나. 그러면 그때 벌어진 게 전부, 꿈이 아니라 현실이었단 거네…….”
구역질이 치밀었다.
그걸 겨우 억누르니까 호흡이 터질 듯이 뛰기 시작했는데, 아이딘이 에쉬르에게 눈치를 주었다.
“안정화를 위해 기적의 성구(聖句)를 읊어야 하니, 이제 그만 나가 주십시오.”
“필요 없어요…….”
“카밀라?”
성서(聖書)에 동정심과 혐오감이 동시에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정말이지 놀라웠다.
본인 스스로가 그토록 섬뜩한 냉소를 지을 수 있었단 것이.
“그딴, 그딴 걸 왜 읽는 거죠? 이제, 이제…… 창세의 섭리가 정말 존재하는지도 의심스러운데.”
어릴 적에, 어머니가 죽고, 그 벨체스터 저택에서 사육되던 날에는 늘 그렇게 생각해왔다.
신은 어디에 있는가.
신의 공의는, 정의는, 대체.
신은 정말 살아 있는 건가. 창세의 섭리는 정말 우리를 주재하는 건가. 창세의 어머니는 정말 우리를 굽어살피고 계신 건가.
이…….
이 의심들은…….
스승님을 만난 뒤에야 조금씩 사그라지고 있었는데…….
“<라프타스> 사변을 못 봤어요? 죽었는데 죽지 못하고, 피의 사슬에 얽매인 혈노들. 그 신음이 아직도 떠올라요. 그 혈노를 베었을 때, 온몸에 와 닿던 붉고 생생한 피의 열기도요.”
원시의 저주 속에서, 찢어지는 비명 속에서 전신이 뒤틀리던 사람들의 울음이 생각났다.
“창세의, 창세의 섭리가 있다는데, 왜, 도대체 왜 그런 참극들이 용인되는 건데요…….”
그건 질문이라기보다는 분명…… 신음 같은 혼잣말이 아니었을까.
그런 혼잣말이었는데.
어딘가, 마음 저변이 희미하게 밝아오는 것 같은, 그런 대답이 돌아왔다.
“그 무고한 이들의 죽음에 가슴 아파하고 슬퍼하는 당신의 마음이 바로 창세의 존재증명입니다.”
아이딘이었다.
아이딘의 눈웃음은 어딘가, 전투가 끝난 뒤의 스승님과 닮은 느낌을 주었다.
“저에게도 당신과 같은 의심을 품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모든 걸 놓으려던 때에 뇌향 각하께서 해주신 말씀입니다.”
세상이 감히 넘을 수 없는 벽이 둘러쳐지는 그런 눈동자였다. 미소라기보다는 슬픔이 배출되는 표정으로도 보였다.
“창세의 어머니께서는 창조의 순간 그분의 성정을 우리의 혼에 불어넣으셨다죠. 그러니, 그 참극에 눈물 흘리고 애통해하는 당신의 심령이 바로 그 창세기 성언의 증명이 됩니다.”
“……?”
“창세의 말씀이 모두 허구이며, 마족들이 주장하는 대로 심연이 모든 것의 창조주라면 피조물들의 마음에 그런 생각은 생겨나지 않습니다. 존재할 수가 없죠.”
“……!”
“그 증거로 심연에 속한 마족은 약한 것들을 멸시합니다. 네크론이나 혈족이나 약자는 힘을 불리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죠. 우루크는 씨족 사회라서 씨족을 중요시하기는 하나, 씨족에 불명예를 안기게 한 존재는 가차 없이 죽이지요. 그것이 약육강식을 숭배하는 심연이고, 외우주의 질서니까요. 짓밟고 죽이고 빼앗아도 누구도 반발하지 않습니다.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니까. 하지만 당신은 어떻죠? 선(善)을 향한 갈망이 있지 않습니까.”
그건 분명 말(言)이었다.
근데 과연, 말이었을까? 말이라기보다는 저 멀리서 다가오는 빛처럼 느껴진 건 어째서였을까.
그 빛 속에서, 기억의 시가지를 뒤덮고 있던 시체들이 화장(火葬)되어 빛의 품으로 돌아갔다. 마음의 여명이었다.
“하나 더 물어봐도 돼요?”
문득 활기를 되찾은 카밀라의 질문에 에쉬르가 피식 웃었다.
“애인 있냐는 질문은 하지 마. 이미 수만 번은 들으셨거든. 정답은 비밀.”
에쉬르의 장난을 외면하며 아이딘이 고개를 끄덕여 질문을 받겠다는 의향을 밝혔다.
“왜 그 사제복에 묻은 피를 안 씻고 그냥 다니는 거예요?”
그때, 아이딘의 눈동자를 스쳤던 비참한 눈웃음에…… 여태껏 그 눈으로 봐왔던 죽음이 포개진 것만 같았다.
맞아서 죽고.
굶어서 죽고.
고문당해 죽고.
죽고, 죽고, 죽고 또 죽어간 모든 이들의 슬픔과 비통과 원망의 메아리가, 그 눈동자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옷에 묻은 피는 씻을 수 있어도 영혼에 묻은 피는 씻을 수 없으니…… 옷의 피를 씻는다고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고 어떤 속죄함이 있겠습니까.”
아이딘은 그때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이렇게 에둘렀으므로 그 주검들의 정체를 알게 된 건 시간이 약간 흐른 뒤의 일이었다.
“상태를 보니 안정화는 필요 없을 것 같군요. 다음 검진 주기에 다시 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