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 of the Fake Hero RAW novel - Chapter (239)
가짜 용사 이야기-239화(239/310)
시즌 3 : 47화
“이렇게 어두컴컴한 데 있으니 마음까지 어두워지는 거야.”
아이딘이 떠나고, 잠시 생각에 잠기려는데 에쉬르에게 야전 병원의 간이 천막 밖으로 끌려 나왔다.
눈(雪)이…….
흑설(黑雪)이 내린다…….
남서쪽 수평선은 화산재의 장막에 시커멓게 뒤덮여서 무엇 하나 보이지 않았다. 꼭 세상이 변한 것처럼 보였다.
“내가 뭐라고 했어? 마음이 답답할 때는 칼춤만 한 게 없다고 했지? 자, 카밀라의 거.”
수평선을 바라보는데 에쉬르가 무언가를 던져주었다.
통상 범주의 비정상적으로 칼날이 긴 태도…… 검순이였다.
잠시 낯설게 느껴졌지만, 칼자루를 쥐어보자 추억의 빛이 마음속을 환히 비추는 걸 느꼈다.
– 카미, 생일 선물이란다.
– 자, 카미! 시작해볼까!
칼자루의 목재에 땀의 냄새가 깊숙이 배어 있었다.
이건, 그냥 땀 냄새가 아니었다.
스승님과 함께하던 나날의 증거였다. 기억이 마음속 깊이 퍼지며 울적했던 심정이 가라앉았다.
“고마워, 언니. 이거, 나한테 엄청 소중한 물건이거든.”
그 기억 속에서 피어나는 빛의 물결은…… 다른 그 무엇으로도 얻을 수 없는 안도감이리라.
“고맙기는. 이제부터 흠씬 얻어맞을 텐데.”
에쉬르가 등허리에서 태도를 발도, 십일자도 제1식, 평(平)을 기수식 자세로 잡았다.
“우리 카밀라, 얼마나 컸는지 한번 볼까?”
아니,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거절하려는데 일순간 날아든 검극에 몸이 저절로 움직여졌다.
“반 박자 늦었어, 마력을 꺼내는 게!”
그렇기에 분명 저 공세를 버티지 못하고 제1식 원(圓)이 깨어질 거라 생각했건만, 자세는 조금 흐트러질 뿐 무너지지 않았다.
‘뭐지? 어떻게?’
불현듯, 아이딘의 말이 떠올랐다. 원시화(原始化) 과정에서 골밀도가 비정상적으로 높아지고 단단해졌다고 했었다.
‘그 반향인가?’
유년기의 신체에서 당연하게 비롯되던 근력의 결함이, 지금 이 시점에서는 전혀 느껴지질 않아.
“죽고 싶은 표정을 하고 있지만, 카밀라의 몸은 누구보다도 열렬히 살고 싶다고, 춤추고 싶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러나 몸이 삐걱거리고 있었다.
너무 급속도로 성장한 몸에 아직 핏줄이나 힘줄이 제대로 붙지 않은 것일까.
마음대로 움직이기에는 긴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보였다.
“아니, 이건…….”
“자, 다음!”
십일자도 제2식, 궤(軌).
에쉬르가 전신에 극심한 회전을 일으켰는데, 그 원심력에 어떠한 제동도 걸지 않았다.
이건 역수로 쥔 칼과 칼집이 몸과 함께 팽이처럼 회전하면서 대상을 찢어발기는 기술.
‘원(圓)만으로는 늦겠어……!’
조금이라도 힘을 약화시킬 것이 필요했다.
십문자도 제3식, 둔(鈍).
지면을 내리찍어 마력의 파문을 일으킨다. 상대방 체내의 마력을 약화시켜 힘의 흐름과 세기를 둔화시키는 기술. 그런데.
“아주 좋은 움직임이야!”
십일자도 제3식, 둔(鈍).
에쉬르가 군홧발로 바닥을 힘껏 내리찍자 똑같은 파장이 일어나 둔의 파장을 상쇄ㆍ소멸시켰다.
“근데 이건 몰랐지? 십문자도와 십일자도는 겹치는 초식이 많단 거!”
이건, 절대, 막을 수 있는 공세가 아니야.
몸의 모든 신경과 힘이 회피 동작으로 집중된다. 머리를, 엉덩이를 무게 중심 뒤로 최대한 끄집어낸다.
중심과 함께 자세가 무너지고, 중력이 등을 지면으로 끌어당긴다. 그때 칼과 칼집 쥔 주먹으로 지면을 쳐서, 그 추락의 힘을 회피 동작으로 귀결시킨다.
“!”
이 모든 동작을 한 줄로 요약하면, ‘공중제비를 한 바퀴 돌아 간격을 크게 벌렸다’고 할 수 있다.
‘많이 쫓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에쉬르는 벌써 저만치 앞으로 나아가 있었다.
실력의 간극은, 똑같아 보였다.
처음 만난 그 순간과 마찬가지처럼 느껴진 것이다.
‘그런데, 이상해, 너무 이상해’
이 뒤처짐이 조금도 슬프거나 절망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자신도 저만큼 더 성장할 수 있다는 지표처럼 보였으므로.
앞만 보라는 스승님의 말씀이 삶에 녹아든 덕분일까?
“우, 우와아아!”
“봤어? 방금? 미쳤어! 완전 곡예잖아!”
“뭐야, 왜 이렇게 시끄러워?”
“페이쿼리어의 제자들이 검무를 펼친대!”
“나도 볼래.”
“나도!”
신경도 안 쓰고 있었는데, 어느새 주위를 커다랗게 둘러싼 병사들이 탄성을 쏟아내고 있었다.
병사들의 군복은 제각각이었다.
소속이 다르고, 지휘관이 다르고, 또 몸 상태도 달라서 환자복을 입거나 붕대를 감은 이들도 있었다.
“저걸 봐, 카미.”
한눈팔 틈은 주지 않겠단 듯, 벌려진 간격을 순식간에 좁힌 에쉬르가 달려들었다.
“모두가 우릴 보고 있어.”
“그야, 언니가 갑자기 이─!”
“─전장에서뿐만 아니라, 이런 평상시에도, 사람들은 용사를 보고 있다고.”
십문자도와 십일자도가 충돌하는 쇳소리에 가려져, 에쉬르와 카밀라의 목소리는 병사들에게 닿지 않는다.
무슨 말인지, 가늠할 수 없다.
칼과 칼이 맞닿는 순간에만 에쉬르가 목소리를 냈으므로, 그 쇳소리 사이의 간격은 혼자만의 생각의 시간이었다.
“<라프타스>에서 일어난 참극이 두렵지 않은 사람은 없어. 다시 그곳으로 가는 게 무섭지 않은 사람도. 왜 안 무섭겠어?”
“언니는, 안 무서워, 보이는데.”
“무슨 소리! 나도 무서워! 내색을 안 할 뿐! 그러면 안 되니까!”
“왜?!”
“스승님께서 해주신 말인데, 용사는 무서워하면 안 된대. 정확히는, 무서워하는 걸 보이면! 어디서든! 용사는 선봉에 서거든!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용사의 등을 보게 되잖아!”
“!”
“용사가 겁을 먹고 머뭇거리면 똑같이 겁을 먹게 돼. 용사가 한숨을 쉬면, 모두 한숨을 쉬게 되고, 침울한 표정을 지어도 마찬가지야!”
“아…….”
“그런 건 용사가 아니야! 그러니까 난 무서우면 더 밝게 웃으려 노력해. 이렇게. 야하하하하하!”
에쉬르의 웃음소리 속에서, 스승님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전장에서, 한 송이 용기의 꽃으로 피어나 그 향기로 모두를 이끌던 스승님의 등이 떠올랐다.
그 등에는 망설임 따위는 없었다. 두려움도 없고 공포도 없고, 오직 뒤따르는 이를 선도하는 용기뿐이었다.
“공포는 순식간에 전염되거든? 용기도 똑같아. 내 생각이지만 용기는 공포의 뒷면 같아.”
“동전처럼?”
“응! 역시 카밀라는 똑똑하다니까! 그 공포를 용기로 바꿀 수 있는 건 오직 용사뿐이야. 누구보다 무섭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무섭지 않아, 무서워할 필요 없어!’라고 등으로, 행동으로 말하는 거지! 그래야 용감한 사람이란 뜻인 용사라 불리는 거야!”
이제 겨우 세 살 차이인데, 에쉬르와 만날 때는 항상 그 꿈과 말과 생각에 놀라고는 했다.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해답은 그 환경 속에 있는 것 같았다. 필두 페이쿼리어 병단, 최고의 인재들만이 모인 그곳에서 성장하며 많은 걸 배운 것이다.
카아아아앙─────!
이제 훈계는 끝났단 것일까.
에쉬르의 진심이 담긴 참격을 받아내지 못한 검순이가 저 멀리 날아갔다.
구경하던 병사들 몇몇이 우왓, 소리를 내며 그 칼의 낙하지점에서 우왕좌왕 피했다.
“나도 스승님한테 방금 언니가 한 말을 비슷하게라도 해드릴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진 후, 검순이를 바라보며 중얼거리는데 에쉬르가 손을 내밀며 말했다.
“내가 그렇게 좌절할 때 스승님이 해주신 말을 그대로 돌려줄게. 어른이란 ‘처음’이 쌓이고 쌓이며 만들어지는 거다.”
“……?”
“처음이니 잘 못하는 게 당연해. 잘 알지 못하는 것도. 그럼 어때? 지금부터 배워나가면 되는데. 주위를 둘러봐, 배울 게 얼마나 많겠어? 여기는 무려 필두 페이쿼리어 병단이라고!”
두 번째 발돋움, 필두 페이쿼리어와의 동행 (2)
<라프타스> 대참극 이후 필두 페이쿼리어 비네사 알터 르노드는 동부전선 병력 규합의 중심에 서 있었다.
동부전선은 내륙의 관문이었다.
동부전선마저 마족에게 돌파된다면 붉은 성지, <슈리가나큐스>로 가는 길이 열릴 것이고, <슈리가나큐스>가 몰락하면 아드리온 대륙의 패망은 확실시되었다.
비네사는 방어 거점을 대륙 남부 철도 환승역인 <베돔>으로 설정, 이곳을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참호와 요새를 연결하여 방어선을 구축한다.
방어선의 목적은 대전이 현상에 휩쓸린 사상자들을 수습하고, 마족의 진군을 저지하는 데 있었다.
“뜻을 정했다면, 네 입으로 직접 말씀드리는 게 좋아. 스승님은 남들 입을 통해서 말하는 사람을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거든.”
에쉬르가 안내해준 곳은 <베돔>의 시청 청사였다. 이 시대에 시청 청사는 대부분 사령부 건물로 징발되었다.
“응, 언니.”
<베돔>은 환승역과 함께 세워진 현대식 도시였기에, 긴 역사를 자랑하는 <라프타스>와 달리 장구한 위엄은 없어도 실용적인 아름다움으로 가득했다.
“그리고…… 내가 옆에서 도와줄 수도 없어. 그랬다간 오히려 안 좋은 인상만 심어줄 거야. 타인의 후광을 받는 걸 아주 싫어하거든. 스승님도 그렇지만 병단 모두가.”
지휘통제실, 즉 시장실로 향하는 긴 복도를 지날 때도 나무가 삐걱거리는 소리 하나 없었다.
에쉬르가 문간에 이르자, 병사들이 받들어총 자세를 취한 후 문을 열어주었다.
시장실은 채광이 산뜻하게 비치는 곳이었다. 덧문에는 새들이 내려앉아 있었다. 자연의 분위기는 그토록 편했건만, 사람들의 분위기는 엄숙하기 그지없었다.
‘무거워…….’
바위를 어깨 위에 올려놓은 것처럼, 숨이 떨리는 긴장감…… 최고의 인재들이 모여 있어서 그런가?
통상 페이쿼리어 병단의 간부진은 4인에서 5인이다.
홀로 사단급 병력을 운용하는 혈마 병단의 간부진은 무려 9인에 달했다.
“에쉬르, 그 아이는 왜 데려왔니?”
마녀모를 쓴 중년의 여성이 부드럽게 물었다.
넓은 챙으로도 그 현숙한 인상이 숨겨지질 않았다. 대기가 우아하게 물결치는 법력.
이 위인이 바로 나태의 마녀 멜레느의 스승이자 현 남(南)공화국 마녀 협회의 수장, 자애의 무녀 실라미네였다.
“우리 카밀라가 혈마 병단에 입단하고 싶다고 해서요. 홍련 병단에 돌아갈 때까지만.”
에쉬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방 안에 불온한 공기가 떠다녔다.
간부진 전체가 눈을 실처럼 가늘게 뜨고 카밀라를 노려보았는데, 곧 누군가가 실소를 터뜨렸다.
“지금 장난을 칠 여유가 없단 건 젖먹이도 알 것 같은데. 장난친 거라면 웃어주마. 그리고 여기 앉아 있는 어른들은 놀고 있는 게 아니라 일하고 있는 거니 그만 꺼지고.”
삿갓을 석장 끝으로 슬쩍 들어 올려서 덥수룩한 수염을 드러낸 저 남자의 이름은 샤펠.
현존하는 10인의 글라도스(4성) 마법사 중 한 명이다. 요컨대 델프레드 울프 블라도와 동급으로 혈마 병단의 주축이었다.
동란기에 대마법사 린을 배출함으로써 최고의 배틀메이지 학파로 손꼽히게 된 오사리우스 학파의 제자답게, 삿갓과 푸른 법복과 석장이 특징적이었다.
“하이고, 이제 열다섯 살도 안 된 애한테 뭔 말을 그렇게 심하게 하고 그러신대? 그러니 그 나이 먹고 여자들한테 인기가 없지.”
호쾌한 인상의 여성, 레오라가 붕대 감은 주먹으로 손바닥을 탁 치며 말했다.
붉은 단발머리 아래로 가득한 상흔으로 짐작할 수 있듯, 현재 열 명 남짓 남은 ‘붉은 순례자’ 중 한 명이었다.
붉은 순례자는 삼영룡 중 장녀인 홍염의 아키레아의 제자들이다. 그 아키레아로부터 권법을 사사받은 격투술의 달인들이란 소리다.
“에쉬르가 없으면 심심하지? 미안해. 금방 마치고 보내줄 테니 걱정하지 말고 그만 가보렴.”
카밀라는 숨을 들이마셨다.
지금부터가 중요한 거구나.
“아뇨, 저는 혈마 병단에 입단하러 왔습니다. 장난이 아니고요! 저는, 저는요! 도움이 될 수 있을 거예요! 우루크 백장도 상대해봤고, 혈족 유아 개체도 상대해 봤어요! 설사 도움이 못 되어도 발목을 잡진 않을 거예요!”
카밀라는 시장실에 저마다의 자세로 앉아 있던 간부진들의 반응을 조심스레 살폈다. 누군가가 주먹으로 탁상을 치며 일어섰다.
“장난이 아니라고?”
혈마 병단 정찰대장, 맥케넌.
9인의 간부 중 존재감이 가장 옅은 존재였다. 가장 약해서가 아니다.
암살자의 복면부터 두건까지, 마력의 실로 짠 의복이 이 방의 색상과 똑같은 보호색으로서 전신을 은폐시키고 있었기 때문이지.
“그러면 더 용납할 수가 없겠는데. 아주 곤죽을 내줘야겠군.”
“맥케넌, 가만히 있어.”
“어떻게 가만히 있습니까, 무녀님! 야 이 새끼야, 여기가 어딘 줄 모르냐? 혈마 병단이다! 필두 페이쿼리어 직할 부대지. 자신이 최고라는 걸 입증하지 못한 놈은 발도 들이밀지 못하는 곳이라고! 어중이떠중이들만 모인 홍련 병단과는 천지 차이란 말이다.”
“지금 뭐라고요?”
“오~ 발끈할 줄도 아는군. 무섭기도 하지. 근데 말이지, 내가 너한테 받은 모욕은 이거에 비하면 새 발의 피거든? 아, 단순히 장난이었나? 네 스승이 그딴 것도 재미난 농담이랍시고 가르쳐준 모양이지?”
겨우 입단하고 싶다는 의견을 밝힌 것만으로 왜 이런 모욕을 당해야 하는지 당시의 카밀라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식견이 좁아서…….
생각이 없어서…….
최고의 병단은 최고의 구성원만을 받아들인다. 그 이유는 서로가 서로의 목숨을 지킬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날 모욕하는 건 백 번 천 번 다 참아도, 스승님을, 병단 가족들을, 모욕하는 건 그게 누구라도 절대 안 참아요!”
카밀라가 주먹을 꽉 쥐며 소리치자, 맥케넌이 클클 웃었다. 레오나가 말했다.
“맥케넌, 너 진짜. 왜 그래?”
“가만히 있어. 이 꼬맹이 교육은 내가 맡는다.”
맥케넌은 그 흑각검파의 일등제자로 차기 장문인이 유력한 존재.
고고한 일성칠검(一聖七劍) 중 하나, 흑각검파(黑角劍派)는 비수와 각종 암기를 사용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마력의 속성은 사소원소 중 하나인 독(毒)을 사용한다.
마나체인에 있어 여자보다 뒤떨어지는 남자들은 이토록 다른 활로를 찾아냈는데, 창을 주 무기로 쓰는 천창검파(天槍劍派)와 둔기와 거병을 주 무기로 채택한 남륜검파(嵐輪劍派)와 이 흑각검파가 대표적이라 할 수 있겠다.
“눈물 빠질 때까지만 혼내줘서 다시는 저딴 망언을 못 내뱉게 하지.”
맥케넌이 품에서 비수를 꺼냈다.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우루크 백장이랑 혈족 유아 개체가 뭐 어쨌단 거냐.”
눈을 깜빡인 순간, 문득 그 손가락 사이에 세 개의 철침이 들려 있을 정도로 절정의 속도.
“그 정도 잡졸들은 혈마 병단에서 밥 먹는 것보다 더 많이 해치운단 말이다, 얼간아!”
또 눈을 깜빡인 순간, 맥케넌이 손을 채찍처럼 휘둘러 그 비수를 카밀라에게로 내던졌다.
노리는 혈은 3개.
의식을 통제하는 두혈과 몸의 움직임을 통제하는 흉혈, 그리고 전신의 긴장감의 통로인 중혈이다.
‘잠깐 자고 깨어나면 피로 회복도 되고 피부에 윤기도 돌 거다.’
맥케넌의 동작이 진심이 아니며, 또한 살기도 없기에, 에쉬르뿐만 아니라 간부진 중 누구 하나 나서서 말리지 않은 것이다.
낭패라는 듯.
못 말린다는 듯.
또 시작이라는 듯.
저마다의 방식으로 한숨을 내쉬거나 이마를 짚었을 뿐. 그러나 그 모두의 눈이 커다래지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피했다고?’
십문자도 제6식, 섬무참을 배우면서 익히고 또 익힌 회전 보법, 신체를 제어하는 모든 힘을, 몸을 옆으로 반 바퀴 돌리는 데 집중시킨다.
‘아무리 진심이 아니었다지만, 저 맥케넌의 비수 투척을?’
십문자도는 연계의 검술.
보법 또한 모든 것이 연계된다.
그 회전이 끝나기도 전에, 아니, 그 회전력을 오롯이 각력으로 치환시킨다. 발치의 나무 바닥을 부수며 몸을 돌진.
‘때려? 발차기? 어떻게 해?’
분노에, 치기에, 혈기에 몸을 맡기기는 했으나 막상 대상의 눈앞까지 달려들자 무엇을 해야 할지 의식에 혼란이 일었다.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살기(殺氣)를 발하지 않았고, 공격을 방어하려 했던 맥케넌도 이렇다 할 반응을 취하지 못하고 당황했다.
“?”
“?”
“?”
그래서…… 카밀라가 맥케넌의 상반신에 꼬옥 매달린 결과가 나타나게 된 것일까. 삼촌에게 매달린 조카처럼.
“푸, 푸핫!”
에쉬르가 먼저 웃음을 터뜨리자 실라미네도 정숙하게 웃었고, 다른 간부들도 앞으로 동료를 1년 동안 놀릴 거리가 생긴 게 기쁜지 킬킬대기 시작했다.
“야, 누가 사진기 좀 가져와라.”
“이걸 우리만 보는 게 너무 미안한데.”
“귀여운 조카가 저렇게까지 애교를 부리는데 용돈 좀 주시죠, 삼촌.”
그제야 상황을 이해한 맥케넌이 발끈하며 카밀라를 떼어놓았다.
“너 이 자식, 날 어디까지 모욕하려─!”
모든 소란이 끝난 것은 단 한마디의 말, 어떤 칼날보다도 더 날카롭게 호흡의 틈새를 가르는 말.
“─모이라고 했지, 떠들라고는 안 했을 텐데?”
친우인 무녀 실라미네와, 제자인 에쉬르를 제외한 간부진 모두가 순간 직립 자세를 취하더니 경례를 올렸다.
이유를 물을 필요도 없었다.
그 목소리, 그 존재감을 목도한 순간, 이미 소녀의 전신이 그 앞에 압도되고 또 굴복하고 있었으므로.
“총원, 비네사 단장님께 경례.”
비네사 알터 르노드.
그 직급은 필두 페이쿼리어.
즉, 현존하는 12인의 페이쿼리어 중 최강(最强).
“시답잖은 경례는 필요 없고, 내가 올 때까지 떠들고 있던 이유를 말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