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 of the Fake Hero RAW novel - Chapter (246)
가짜 용사 이야기-246화(246/310)
시즌 3 : 54화
“찔러!”
홀트란크스 진영, 고대 천사들이 사용했다는 전설적인 보병 방진.
1열은 대방패를 지면에 고정.
2ㆍ3ㆍ4열은 비정상적인 길이의 창을, 대방패에 정교하게 뚫린 구멍을 통해 내찔렀다 회수하기를 반복한다.
“당겨!”
그 반복이 마(魔)를 격멸한다.
홀트란크스 진영은 요정병들만이 현시대에 재현해낼 수 있었는데, 그렇기에 이건 그들의 긍지였다.
인간은 홀트란크스를 못 썼다.
홀트란크스에 맞는 창과 방패를 주조할 제조 기술이 없었고, 그 무식하게 견고하고 육중한 창과 방패를 휘두를 근력도 없었다.
합일(合一)을 이루는 군기도.
홀트란크스 진영을 갖추기 위해서는 모두가 개성을 버려야 한다. 자기 자신을 버려야 한다.
마치, 하나의 지체(肢體)처럼.
실력을 갖추게 되면 스스로를 높이고 드러내길 원하는 인류는 저런 합일을 이루지 못했다.
“에베스란, 방패 대열을 3보 전진시켜라.”
그래서 인류 병종에는 기사도가 꽃핀 것이라 한다.
기사를 필두로 중기병들이 충격 전술을 사용하던 인류와, 홀트란크스 진영을 계승한 요정의 차이는 여기에서 발생하고 있었다.
개성과 경외의 분기점인 것이다. 역사는 기록하지 않지만, 홀트란크스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복제 인간들처럼 일심동체가 되어야 했으니까.
“방패 고정, 다시 찔러! 첫 번째 자손에게 영광 있으리!”
요정병은 인간 장창병 다섯 명을 합한 것과 같다고 평가된다.
근데 만약 홀트란크스 진영을 갖추었을 때는…… 정확한 추측은 불가능하지만 최소 열다섯 배였다.
애초에 홀트란크스 방진에 소속되는 요정병은 그야말로 최정예로, 인간 장창병이 아니라 기사와 비교해야 하는 병종이었다.
발브레이 휘하 병력은 3천 명에 불과했으나, 모두 최강의 요정병이라 그런 건지 그 전력은 10만 명보다도 강대하게 느껴졌다.
“방패 중심부를 열어라! 사미글(Samigle; 요정어로, 선택받지 못한 백성)들을 방진 안쪽으로, 안전지대로 유도해라.”
발브레이와 요정병들의 도움 속에서 네크론의 공세를 무찌를 수 있었다.
비네사 휘하 혈마 병단 용기병대의 생존자는 절반이 조금 넘는 천오백 명 정도였지만 말이다.
마침내 소요 사태가 가라앉자, 황은의 사사가 과장스럽게 양팔을 벌리며 말했다.
“어서 와라, 페이쿼리어. 실로 오랜만이라 해야겠군.”
두 번째 발돋움, 필두 페이쿼리어와의 동행 (9)
사사는 달빛이 흐르듯 우아하게 물결치는 터번을 머리에 두르고 있었다.
마흔을 넘긴 장년이었으나, 노화가 느린 요정답게 미청년과 미중년의 중간에 속한 느낌을 주었다.
비네사가 옆으로 모래와 피거품이 섞인 침을 뱉으며 대꾸했다.
“정보가 필요하다, 발브레이.”
“그래서 시체들로 길을 만들어서 여기까지 왔나? 여전히 독선적인 데다 앙칼지군. 물론 그게 자네의 매력이지만 말이야.”
요정들은 ‘첫 번째 자손’이란 말에서 볼 수 있듯 선민사상에 찌든 놈들이었다.
그러나 페이쿼리어는 대등한 존재로 취급해 주었는데, <온 것들>의 심복인 어센시쿼리어의 후계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인류 최강의 병사인 페이쿼리어와 요정 최강의 전사인 팔라딘은 암묵적인 경쟁 관계이다 보니, 둘 사이에는 기묘한 기류가 흐르곤 했다.
“아니, 이게 누구야. 나와 똑같이 테르벨 성하의 기적을 다룰 줄 아는 사미글도 왔군.”
발브레이가 상당히 반가운 기색으로 아이딘을 바라보았다.
무려 열흘 동안 기적을 유지해온 아이딘은 쓰러질 듯 비틀거렸다.
물론 발브레이가 요정어로 성언을 읊으며, 그 머리에 손을 얹자 순식간에 화색이 돌아왔지만.
“열흘 동안 기적을 펼쳐서 저 화산재의 폭풍을 뚫고 여기까지 오다니, 자네는 날 항상 놀라게 한단 말이야.”
정신을 차린 아이딘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발브레이 사사님, 정보를 접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라프타스>에서 원시의 저주가 발생했습니다. 우루크, 혈족, 네크론의 공동전선으로 추측되는데, 아는 바가 없으신지요?”
아이딘이 공손하게 물었다.
그러나 중무장을 갖춘 요정병들은 수런거리기 시작했다.
발브레이가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원시의 저주라고? 확실한가?”
“예.”
“믿기 힘든 일이군……. 전례가 없는 일도 아니긴 하지만, 고대 개체가 출현한 걸 봐서 그런지 납득이 불가능하지는 않아.”
“청성 각하가 부재중이시고 뇌향 각하와는 연락이 닿지 않는 지금, 당신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원시의 저주는 네이갈라스의 필두 권속, 골공왕 하이르칸의 힘이다.”
“본디 노예였던…… 그러니까 동족을 핍박하는 노예 관리관이었던 네크론 놈들이 어떻게 그런 힘을 쓸 수 있는지요?”
“전부 노예 관리관이었던 건 아니야. 팔크-샤, 최고 신관이라는 뜻을 가진 최고위 세 놈은 하이르칸의 가신단이었다. 팔크-샤와 그 휘하의 여섯 신관들은 진짜배기들로 원시의 저주를 부릴 수 있다.”
“놈들이 어떻게, 아니 어째서 갑자기 전선에 온 걸까요?”
“그건 직접 물어보는 편이 좋겠군, 사미글 사제.”
발브레이가 손가락을 튕기자, 황은의 사슬에 제압된 초대형 고대 개체 하나가 고통스레 삐걱거리며 끌려왔다.
“자네들이 여기까지 오면서 만난 일은 참극이었지만, 그 희생은 헛되지 않았어. 나 발브레이가 그렇게 되게 해주지.”
문득, 발브레이의 동공이 기괴한 형태로 변했다.
만(卍)자였다.
어딘가, 뇌향의 세츠넨의 십자 눈동자와 비슷하게 경건하거나 거룩한 느낌을 주었다. 굳이 비교하라면 세츠넨 쪽이 압승이지만 말이다.
저 눈의 이름은 엘 타론.
세계의 모든 것을 창세 섭리에 기초하여 읽어내는데, 그 섭리 밖에 있는 걸 확실하게 잡아낼 수 있다고 한다.
그렇기에 독심술도 가능했다.
마음을 제대로 읽는 건 아니라지만, 그 속의 적의라거나 불의는 알아챌 수 있는 것이다.
“여기 있군그래.”
발브레이가 수백 명의 원시인이 실타래처럼 뒤엉켜 만들어낸 악몽의 형체, 그 핵(核) 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한참 그 속을 뒤적거리나 싶더니, 무언가를 움켜잡았다 싶은 다음 순간 그 손을 끄집어냈다.
사특하게 반들거리는 암청색 광선이 그 손아귀에 붙들려 있었다. 그 어둠의 실은 저 먼 화산재 속으로 뻗어나갔다.
“네크론의 강령술은 시체를 이용하는 인형극이나 다름없지. 이 실은 이 고대 개체를 조종하던 놈으로 연결되는 단서가 될 거다. 서두르는 게 좋겠군. 놈이 눈치채고 달아나기 전에.”
비네사가 숨을 돌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보면 충분해. 하루만 지켜주겠나? 대열을 수습하고 이동하게.”
비네사가 그 실을 넘겨받으려 했으나, 발브레이가 장난치듯 손을 이리저리 빼며 기괴한 공방(?)이 펼쳐졌다.
“지금 뭐 하잔 거냐?”
비네사의 이마에 힘줄이 돋았다. 발브레이가 씩 웃으며 시선을 돌렸다.
“에베스란, 이 사미글들의 여정을 위해 부하들 중에 가장 무능한 백 명을 추려내라.”
에베스란은 곧 제일 자질이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부하 열 명을 호명해 앞으로 불러냈다.
백 명 다 어린 축에 속했다.
모두 치기 어린 무력감과, 인간과 동행해야 한단 점이 고통스럽단 표정이었다. 발브레이가 이 말을 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럼 이 무능한 놈들은 홍염의 불꽃을 지키도록 하고, 나머지 2,884명의 요정병들을 데리고 날 따라와라.”
“사, 사사님……?!”
“지금 무슨 말씀을……!”
“못난 동생이 도와달라고 애원하고 있지 않느냐. 첫 번째 자손으로서 도와줘야 할 때다.”
고위 성창 아둠의 밑동으로 바닥을 내리쳐 부하들을 조용하게 만든 에베스란이 공손히 허리를 숙여 읍했다.
“사사의 뜻대로 따르겠나이다.”
비네사가 발브레이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물었다.
“왜죠?”
카밀라였다. 너무 지쳐 있어서 생각이 말로 나와버린 것이지만, 이게 얼마나 미친 짓인지는 잘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추측해볼 순 있었다…….
그 질문을 밖으로 꺼낸 순간, 모두의 눈에 깃들던 감정이란…….
혈마 병단은 당혹스러워했다.
요정병들은 격노를 금치 못했다.
곧바로 양손으로 입을 막긴 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사사는 요정들 중에서도 가장 고귀한 존재로, 대제사장과 제사장들을 제외하면 아무나 감히 말을 붙이는 게 허락되지 않는다.
페이쿼리어나 팔라딘은 예외였다. 이 둘은 대제사장과 제사장에 버금가는 지위를 갖고 있으니까.
그런데 꼬마가…….
그것도 인간 꼬마가…….
감히 사사에게 말을 붙였다……?
에쉬르와 샤펠, 혈마 병단이 카밀라를 지키려고 그 주위를 둘러싸고, 요정병들이 적의를 드러내려던 그때, 발브레이가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흐, 흐, 흐하하하하하하! 당돌한 녀석이로다. 그 검을 보니 페이쿼리어의 제자렷다? 그래, 왜죠, 라는 게 도대체 무슨 질문이냐?”
“아뇨, 정말 죄송합니다.”
“아니, 물어라. 대답하겠다.”
“아니, 그러니까요, 작전 회의 때요, 요정들은, 그, 사명을 엄청 중요하게 생각해서, 불을 지키는 사명에서 벗어나지 않을 거라고 했었는데…….”
이 어린 것에게 기원의 시대부터 이어져 온 순교(殉敎)의 역사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발브레이가 입을 열었다.
“그들이 다치심으로 우리가 나음을 누리고 그들이 죽으심으로 우리가 생명을 얻었도다…… 이 말씀을 아느냐? 이 성언에서 그들은 <온 것들>을 뜻한다.”
“……?”
“그분들께서는 다칠 필요도 없고 죽을 이유도 없었건만, 이 땅에 찾아와 그 삶으로 빛을 비춰주셨다. 내 조상들께서는 그분들의 뒤를 따라 싸웠지. 그렇기에 할례(割禮)라는 축복을 이 귀에 받은 거고.”
발브레이가 요정 특유의 길쭉한 귀를 보란 듯이 흔들어 보였다.
“내 부하들은 아직 젊고 또 혈기만 가득해서 중요한 걸 착각하고 있다. 선민은 선택받았다는 사실로 위대해지는 게 아니다. 선택받은 존재답게 행동할 때 비로소 위대해지는 거지.”
“선택받은…… 존재요……?”
“선택받은 존재답게 행동하는 것, 그러니까 선조들의 발자취에 내 발자국을 얹는 거다. 그걸 ‘닮아간다’라고 표현한다.”
발브레이는 선민사상 속에서 거만하고 배타적으로 되어가는 동족들의 마음을 위태롭게 여겼다.
선민이란…….
선민답게 행동할 때 비로소 선민이 되는 것이거늘…… 그러므로 이건 카밀라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자신을 따르는 요정병들에게 하는 설교였다.
“닮아가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선조들과 똑같은 믿음의 싸움을 해나가야 한다. 이 할례의 징표가 우리를 그분들의 후손으로 만드는 게 아니라, 똑같은 행동이 똑같은 선민으로 만드는 것이니.”
“……!”
“너도 마찬가지다, 페이쿼리어의 제자. 너를 네 스승의 제자로 만드는 건, 선택받았다는 사실이 아니라 너의 행동임을 잊지 마라.”
“제 행동……?”
“그래, 행동이다! 네 스승과 똑같이 행동할 때, 네 스승의 마음까지 닮아가고자 할 때! 네 입으로 구차하게 말하지 않아도 세상이 알 것이다. 네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네가, 널 고르고 키운 스승의 제자라는 사실을.”
그 말 속에서 카밀라는 가슴이, 뜨겁고, 또 뭉클거리며 끓어오르던 게 기억난다.
전신의 피가 심장으로 몰린다.
그날의 경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들었던 사사의 설교, 그건, 용사라는 푯대를 향해 내딛던 발걸음 중 하나.
“이제 알겠나? 내가 너희들을 돕는 이유를.”
발브레이가 빙그레 웃었다.
“너희들이 나의 행동을 보고, 내 위대한 선조들이 남기신 믿음의 발자취를 의심치 않게 위해서다.”
페이쿼리어로서의 신념을 구축할 때 도움을 준 몇 가지 경험이 있는데, 이날 발브레이에게 들은 말은 확실하게 삶의 반석이 되었다. 그 반석 위에 카밀라는 용기의 구조물을 쌓아 올렸다.
‘정말, 그런 제자가 되자…….’
힘들여 말하지 않아도.
구차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내가 스승님의 제자라는 걸 알 수 있는, 그런 용사(勇士)가 되자…….
“혓바닥에 기름이라도 발랐나?”
비네사가 침을 퉤 뱉었다.
“도와야 하니까 돕는 거겠지. <라프타스>가 계속 빼앗긴 상태면 이 대륙이 멸망하고 머지않아 너희 고향인 이데아 반도까지도 마수가 닿을 테니까.”
“저런, 경건한 예배에 세상의 가치관으로 침을 뱉는 건 페이쿼리어들의 전유물인 건가?”
“사이비 전도를 하지 못하게 막은 것뿐이다. 어서 내 부하들을 치료하고 식량을 내놓기나 하시지. 2시간 안으로 행군을 재개하고 싶으니까.”
“그러지. 그런데 자넨 지금 어디로 가는 거지?”
비네사는 돌아보지도 않고 이렇게 답했다.
“죽은 부하들을 묻어주러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