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 of the Fake Hero RAW novel - Chapter (25)
가짜 용사 이야기-25화(25/310)
제25화
기원(起源),
카이센 알터 아라다만텔 (8)
“이슬라 생도, 앞으로.”
먼저 라헬의 호명을 받은 것은 997기의 3석 생도인 이슬라였다. 지켜보던 교관이나 야장들이 수군거렸다.
“류넬 경의 직계 제자인가.”
“그렇다면 당연히 노리는 성검은 하나뿐.”
“대망치형 성검, 가우므리스겠군.”
과연 그랬다. 이슬라가 들뜬 걸음걸이로 향한 곳은 맨 왼쪽이었다.
시렁에 걸린 성검은 은빛으로 창백했다. 도끼와 창과 망치가 어우러진 무기였다. 자루의 우측은 망치였으나 좌측은 도끼날이었으며 상단에는 창극이 달렸다.
가우므리스란 면(面)과 점(點)과 선(線)을 모두 제압하는 성검이었다.
「아이야, 네 염원을 담아라. 그리고 칼에 기원하라. 성검이 응답할 것이다.」
카이센은 이슬라가 가슴 앞으로 왼손 주먹을 움켜쥔 채로 심호흡을 하는 것을 보았다.
저게 검의 기원인가.
페이쿼리어는 성검에게 원(願)을 기원하고, 성검의 염(念)이 그에 공명하여 반응한다. 타르시요의 설명을 기억했다.
– 기원은 일평생 페이쿼리어와 함께해. 기원을 읊는 것으로 성검을 해방시킬 수 있게 되니까.
페이쿼리어 후보생의 원이 변덕스러운 성검이 품고 있는 염과 일치하는가, 일치하지 않는가가 승부의 갈림길이었다.
– 너희들을 죽여 버리겠다.
그나저나 카밀라가 그렇게 말하던 게 검의 기원이었다니…… 아주 살벌하기 그지없군. 어울린다면 어울리고.
“이슬라는 네게 기원한다, 가우므리스.”
이슬라가 스승의 성검을 움켜잡자, 웅장한 소리의 파장이 장내에 퍼져 나갔다. 적합자의 마력에 공명한 성검이 삐걱거리며 울었다.
“기류가 휘몰아친다…….”
“아니, 빛도 뿜어내고 있어…….”
가우므리스가 뿜어내는 힘의 파장은 무겁고 길었다. 토해내는 빛은 둔중하되 고고했다. 올리에르 듄 제라예가 말했다.
“켈리, 적합성 수치는?”
“87%입니다. 엄청나게 높아요. 다른 성검을 확인할 필요도 없겠습니다.”
70% 이상부터 성검의 계승이 인정되며, 80% 이상의 적합도는 확정이라 하여 다른 성검을 확인할 필요조차 없어진다.
「이슬라, 그만 되었다. 가우므리스는 네 것이다.」
극위성검 가우므리스를 다시 시렁 위에 올리는 이슬라의 손길이 후들거렸다.
모두의 이목이 쏟아지고 있건만.
체통이고 뭐고 이슬라는 양손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며 깡충깡충 사랑스럽게 뛰었다.
스승의 성검을 계승했다는 기쁨이 전율로 온몸을 휩쓴 것인데, 용들조차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축하해, 이슬라.”
후보생 대열로 돌아온 이슬라의 머리를, 절친 세이라가 쓰다듬어 주자. 이슬라가 해맑게 웃었다.
“세이라도 꼭 성공하는 것이다.”
이어서 997기의 수석이었던 세이라가 장검형 성검이자 스승의 칼인 솔랑을 계승했다.
적합성 수치는 89%.
당연한 일이지만 경쟁자로서 카이센의 가슴을 철렁 내려앉게 만들었던 건 그녀가 아니라 차석인 오필리아였다.
“오오, 저게 류넬 경의 제자를 제치고 차석을 차지한 생도인가.”
“크로웰 맹작가의 따님이잖나.”
“하지만 실력이나 혈통이 좋다고 해서 성검의 선택을 잘 받는 건 아니지.”
평가는 반반으로 갈렸으나…….
그녀가 성검의 시렁을 돌면서 칼의 적합성을 내보일 때마다 점점 평가가 치우치기 시작했다.
“솔랑의 적합성이 68%.”
“가우므리스의 적합성도 69%.”
켈리가 계측용 마정석에 나타난 수치를 읽었다.
이슬라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게 보였다.
어린 소녀처럼, 표정이 솔직하게 드러나는 녀석이었다.
“베룸페이라의 적합성…… 허, 77%입니다.”
곧 장내에서 계승의 과정을 지켜보던 이들 가운데서 탄성이 흘렀다. 직계 제자가 아니건만 상당히 높은 수치의 적합성이다.
극위성검 베룸페이라.
고유 형태는 사복검.
사복검이란 수십 개의 칼날을 철편으로 엮여서 뱀처럼 움직이게 만든 칼이다.
고유 색채는 자색.
보랏빛으로 번뜩이는 칼날에 새겨진 용이 압도적인 힘의 물결에 춤을 추었다.
전대 대리자가 제자와 함께 전사했으므로, 직계 제자의 적합도가 평가될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아라다만텔의 적합성 평가도 보겠나?”
“물론입니다.”
오필리아의 대답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베룸페이라도 좋은 칼이었으나 아라다만텔에는 비할 바가 못 되었다.
아라다만텔은 상징이었다.
라미네아 알터 아라다만텔이 이룩한 평화의 상징.
그 칼을 계승한다는 건 곧 평화의 상징이 된다는 것과도 같았다.
“…….”
극위성검 아라다만텔의 앞에 선 오필리아가 카이센을 흘끗 돌아보았다.
그리고 회심의 미소를 지어 보이며 그 칼자루를 움켜잡았다.
그다음 순간.
“아니……!”
“영롱한 빛이다……!”
숨죽인 탄성들이 터져 나왔다.
계측용 마정석을 살피던 켈리의 입에서 새어 나온 탄성은 그 충격을 가중시켰다.
“적합성 82%입니다.”
라미네아가 98%, 카밀라가 91%였던 건 비상식적으로 높았던 것뿐이었다.
82%면 엄청나게 높은 수치였다.
심지어 직계 제자가 아닌데도.
‘82%라고?’
카이센은 심장이 멎을 듯한 아픔을 느꼈다.
아라다만텔.
너는 내가 아니라 그 녀석을 선택하겠다는 거냐.
“카이센이 직계 제자만 아니었더라면 여기서 승부가 끝났겠는데.”
올리에르 듄 제라예의 말에 켈리 듄 제라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요. 오필리아의 적합성은 82%. 계승 우선권이 주어지지 않았더라면…… 흠.”
“카이센은 직계 제자이기에 80%만 넘으면 상대가 얼마나 높든 무조건 계승이야.”
“하지만 80% 이상이 쉬운 것도 아니고…… 아라다만텔이 남자에게 그렇게까지 해줄지 궁금하군요.”
이제 카이센의 차례였다.
카이센이 오른쪽 사선으로 걸었다. 페이쿼리어의 제자답게, 다른 성검들에게는 눈빛 한번 주지 않은 채로.
“…….”
그 발길이 멈춘 곳 앞에는, 당연히 극위성검 아라다만텔이 시렁에 걸려 있었다.
검의 형상은 태도.
칼집과 칼자루는 초겨울 설원의 순백색으로 고고하고, 칼이 뿌옇게 뿜어내는 고유 기운은 붉다.
「라미네아 알터 아라다만텔의 아들인가.」
「카밀라 알터 아라다만텔이 택한 제자이기도 하지.」
「과연, 어떨까……?」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먼 법좌에서 추기경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 카이센은 한참 동안 말없이 아라다만텔을 올려다보기만 했다.
요슈하르가 말했다.
「네 염원을 기원하라, 아이야.」
나의 염원은 무엇이었던가.
카이센은 다시 한참 동안 칼을 쳐다보기만 했다.
염원은 머릿속에서 쉽사리 맺혀지지 않았다.
‘그저 죽이는 게 아니라, 그 너머를 봐야 하는 건가?’
샤론 알터 타스알포의 제자 리아는 성검을 계승하기 전부터 검의 기원을 알고 연습하고 있었다. 그걸 제대로 묻지 않고 비웃었던 것이 후회되었다.
– 어렵게 생각할 것 없어.
카이센은 타르시요가 예전에 들려준 조언을 되새겨 보았다.
– 그 성검과 함께 무엇을 이루고 싶은가…… 그걸 그저 간절히 바라면 돼.
목에 건 스승의 유골.
허리춤에 찬 어머니의 유품.
어째서인지 이 두 가지 물건이 납덩이처럼 무겁게 늘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 카이, 너는 이 칼을 어떻게 쓰고 싶니?
무엇을.
나는 무엇을 하고 싶었던가.
성검을 시렁에서 집어 드는데, 불현듯 어머니가 죽던 날 밤하늘에서 깔깔거리던 별들의 웃음소리와 스승이 죽던 날 비웃듯 쏟아져 내리던 장마의 물비린내가 생각났다.
– 그래? 다행이다…….
웃음소리가 맑고 투명해서, 늘 아들을 품에 끌어안으며 웃던 어머니의 미소가 떠올랐다.
그리고 죽던 날 새벽에, 그 미소를 그리워하며 웃던 스승의 눈물이 떠올랐다.
– 엄마, 다녀올게요…….
어머니를 땅에 묻던 밤에 흘리던 눈물의 짠맛과, 스승을 불에 태우던 아침에 흘리던 눈물의 짠맛이 뒤섞이며 기억났다.
– 데려가 주자…… 단장님 곁으로…….
사랑하는 여인을 잃은 울프의 눈에서 뜨겁게 맺혀 나와 끌어안은 소년의 어깨를 적시던 눈물의 비참함을 기억했다.
알고 있다.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이 비참한 세상에 죽음이란 쓰레기처럼 널려 있으며, 아무리 베고 또 벤다 한들 하나의 죽음으로 다른 하나의 죽음을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을.
죽음에, 등가교환이란 없단 걸.
하오나.
그러하오나.
불타 무너진 고향이 있는 저 남쪽 땅을 핏물로 물들이고 시체로 산을 쌓아서라도.
이 울분.
이 눈물.
이 원수를.
똑같은 피로 갚길 원하노라고, 나는.
“너에게 기원(祈願)한다, 아라다만텔.”
소년이 성검을 발도했다.
우우우…… 천천히 뽑혀 나오는 도신이 짐승처럼 울었다.
칼날이 폭발적으로 토해낸 신적인 광휘에 군중들은 눈이 타들어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이럴 수가……?”
그 경이로운 빛의 폭발 속에서, 모두가 망연히 눈을 크게 뜬 채 넋을 잃었다.
‘신전 구석의 그림자까지 환하게 밝힐 정도라니……?’
‘소년이 아라다만텔을 원하는 게 아니야.’
‘아라다만텔이 저 소년을 원하고 있단 말인가……?’
칼날은 순결하도록 붉었다.
칼날은 요동치며 빛의 파장을 전방위로 쏘아냈고, 그 힘의 숨결이 몸에 닿은 자들은 등줄기를 훑고 지나가는 칼의 울분을 소름 끼치게 느꼈다.
“켈리, 마정석의 수치는?”
올리에르가 망연히 물었다.
적합도 측정용 마정석 위로 떠오른 환영을 실눈으로 지켜보던 켈리가 눈을 의심했다.
“수석 교관, 측정 불가입니다.”
“뭐라고?”
“보시죠, 방금 측정 도중 마정석에 금이 갔습니다…… 위용검전 설립 이래 처음 있는 일이죠.”
그때, 카이센은 아라다만텔의 칼날을 일자로 눈앞에 세웠다.
성검이 고요하게 울었다.
자신의 칼끝이 소실점으로 향하는 곳에 있는 모든 원수를 베고 또 베어내라고, 칼날이 속삭이는 듯싶었다.
「라미네아가 아라다만텔을 쥐었을 때도 이러하였지 않은가.」
추기경 파렘이 말했다.
그러자 추기경 요슈하르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것과도 견줄 수 없는 수준이네. 성검이 누군가를 이토록 갈구했던 적은 없었지.」
요슈하르는 생각했다.
영웅의 피는 속일 수 없단 게냐, 라미네아.
아라다만텔조차도 너와 네 제자의 복수를 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구나…….
“…….”
심연을 불태우는 불꽃의 형상이 칼날 속에서 이글거리며 춤을 추었다.
그 형상을 보자니 목이 메었다.
소년을 세상의 어떤 보물보다도 사랑했던 어머니의 칼이었다. 애정 표현이 서투르고 과격했던 스승의 칼이었다.
‘너도 날 선택해 줬구나…….’
이 성검을 받을 때 어머니와 스승이 어떤 심정이었을지 생각하였으나 생각은 맺어지지 않았다.
오랫동안 들여다보던 칼날을 다시 순백의 칼집에 집어넣자, 잠시 세계가 어두워진 듯한 착각마저 일었다.
성검의 울음에 압도되었을까, 감히 입을 여는 자가 없었다.
법좌에 앉은 다섯 기둥 중에서 추기경 인라히트가 큰 용인의 몸을 일으켜 세우기 전까지.
「이것으로 성검의 선택을 알았으니, 용사로 택함을 입은 자들은 차례로 앞으로 나오라.」
먼저 앞으로 나온 것은, 극위성검 가우므리스의 선택을 받은 이슬라였다.
「류넬 알터 가우므리스의 제자, 이슬라 데리스.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모두 버리고, 가우므리스가 이끄는 대로 용사의 길을 걷겠느냐.」
“이슬라는 걷는다!”
「아레시아 알터 솔랑의 제자, 세이라 슬라테온. 과거와 연을 끊고 솔랑을 손에 쥐고 용사의 길을 걷겠느냐.」
“예, 각하.”
「케반 크로웰의 딸, 오필리아 크로웰. 과거도 재력도 혈통도 모두 버리고, 베룸페이라를 쥐고 용사의 길을 걷겠느냐.」
오필리아의 대답은 늦었다.
극위성검 베룸페이라와 극위성검 아라다만텔을 번갈아 보던 시선에 카이센이 걸렸다.
‘아라다만텔이 남자에게…….’
승패는 명백했기에 재심의 여지조차 없었다. 하아, 삼키는 한숨 속에서 추기경 앞에 서원하는 어조가 아쉬움으로 젖어 있었다.
“예, 각하.”
마침내 인라히트의 시선이 카이센에게 닿았다.
지난날, 인라히트는 탈영자 라미네아의 가족을 참(斬)해서 군율을 바로 세워야 한다고 광룡에게 간언했었다.
그러나 요슈하르가 이마를 땅에 찧으며 탄원해 이를 막았다.
– 목숨을 바쳐 이 땅에 봄의 꽃을 피워낸 라미네아의 공을 부디 잊지 마소서.
그리고 그때.
요슈하르는 라미네아의 혈육이라면 분명, 이 눈물의 세계에 어떠한 변화를 일으킬지도 모른다고 호소했다.
‘과연…… 네 얼마 남지 않은 목숨까지도 내어준 저 아이가 어떤 사명을 이룰 것인지, 내가 끝까지 지켜보겠다. 요슈하르.’
인라히트가 기억에 잠겨 입을 열지 않자, 법좌에 과묵히 앉아 전율을 억누르던 요슈하르가 대신 입을 열었다.
그리고 물었다.
그 스승이, 그리고 그 어머니가 성검을 쥐고 용사가 되던 때와 똑같은 물음을.
「카밀라 알터 아라다만텔의 제자, 카이센.」
그 광경을 지켜보던 올리에르는 심장에 뭉클거리며 맺히는 비애를 느끼고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 제자? 그딴 쓰레기를 왜 받아. 혼자가 편해.
<위용검전>의 나날 속에서 늘 그렇게 말하던 카밀라와, 헤어지게 되던 서임식의 날을 떠올리며.
– 그래도 뭐, 만약 그딴 게 생기면 너한테 보낼게.
– 뭐?
– 너도 잘 알잖아. 내 성격이 이리 개차반이니 뭔 교육인들 잘 시켜놓겠어?
– 후훗, 잘 알고 있네.
– 샤론 넌 아가리 닫고 있어. 근데 올리에르 넌 짜증 나는 성격이긴 해도 착실하니까 교육을 잘 시켜줄 거 아냐.
그러던 카밀라는 겸연쩍단 듯 주저하다 손을 내밀었고, 올리에르가 그 손을 맞잡은 것이 옛 친우와의 마지막 인사였다.
‘카밀라, 보고 있어……?’
무슨 일이 있어도 제자를 받진 않을 거라고 말하던 게 누군지는 모르겠는데…….
‘오늘, 바로 오늘…… 네 제자가 네 칼을 계승해서 용사가 됐어.’
올리에르 듄 제라예가 과거의 메아리 가운데 눈동자에 맺히는 눈물을 훔칠 때, 요슈하르는 계속 말하고 있었다.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모두 버리고, 아라다만텔이 이끄는 대로 용사의 길을 걷겠노라고 서약하겠느냐?」
카이센의 대답은 빨랐다.
그 대답이란 5년 전, 어머니의 사체를 땅에 묻고 울면서 도토리를 심던 그때 이미 정해졌으므로.
베고, 또 베어서…….
적의 시체로 길을 만들길 원한다고…….
어머니가 죽던 그날부터, 나는 아라다만텔 네게 빌고 있던 걸지도 모른다.
“반드시, 그 길의 끝을 보겠습니다.”
그렇게 다시, 소년의 삶에 전쟁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 * *
“카이센.”
서임식이 끝난 뒤, 전선 발령을 받고 법황청을 떠날 때 올리에르 듄 제라예가 배웅을 나왔다.
이야기는 길지 않았다.
올리에르는 감회가 새롭다는 듯한 시선으로 카이센을 위아래로 훑다가 어깨에 손을 얹었다.
“특이한 용령 사용법 때문에, 넌 독자적인 병단을 갖기보단 다른 페이쿼리어 병단에 소속되는 방향으로 운용될 거야.”
“전달받았습니다. 일단 흑장미 병단에 배속되어 동부 전선으로 가게 된다는군요.”
“그래, 나도 확인했어. 카밀라 밑에 있다가 이제 샤론 밑으로 간다니, 네 복도 참 지지리 없구나.”
카이센의 달라진 허우대와 복장은 올리에르로 하여금 새삼 전율을 불러일으켰다.
기동력을 중시한 누비 갑주.
검대의 띠돈에 패용한 아라다만텔이 세워주는 위용.
그 모든 모습이, 이곳을 떠나던 카밀라와 너무나도 닮았으므로.
“카밀라가 지금 네 모습을 봤으면 엄청 자랑스러워했을 텐데. 솔직하지 못한 녀석답게 표현법이 난폭하기 짝이 없었겠지만.”
카밀라라는 이름은 올리에르와 카이센을 이어주는 불가침의 신성한 끈이었다.
그 하나의 끈으로, 그 짧은 언어로 기쁨과 슬픔 따위를 넘어 추억 자체를 공유할 수 있었다.
물살처럼 밀려든 비애감에 표정이 무너지고 고개가 꺾이는 걸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카밀라의 제자를 직접 지도할 수 있어서 기뻤어. 여태껏 많은 아이들을 허황되기 짝이 없는 미사여구로 여기에서 사지로 내몰아 왔지만…… 오늘처럼 힘들었던 날은 없던 것 같네.”
“교관님.”
“그런 표정 말고 미소. 페이쿼리어는 웃을 줄 알아야 해. 모두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표정으로 말하는 거지. 자, 이렇게 웃어 봐.”
“…….”
“아직은 어렵나? 차차 연습해가면 될 거야. 카밀라처럼 평생 인상 찡그리고 살 게 아니라면. 근데 그러면 주름 생긴다?”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 저 먼 항구 쪽에서 증기선의 기적 소리가 높게 솟구쳤다.
“자, 이제 갈 시간이구나. 여유가 된다면 샤론 그 음흉한 계집애에게도 안부 전해주렴.”
카이센은, 어느새 수석 교관보다 신장이 더 커진 청년은, 절도 있게 경례를 붙였다.
“반년 동안 성심을 다해 지도해주신 은혜,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부디 강녕하시기를.”
그리고 아라다만텔의 칼자루에 손을 얹으며 돌아섰다. 스스로에게 이렇게 속삭이며.
자, 가자.
다시 여름 속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