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 of the Fake Hero RAW novel - Chapter (258)
가짜 용사 이야기-258화(258/310)
시즌 3 : 66화
주색(朱色) 도시, <랑바르드>는 아드리온 대륙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였다.
정확히는, 두 도시 중 하나.
아직 이 대륙에 마(魔)가 팽배했을 무렵, 그러니까 도마뱀 군주 네이갈라스가 대륙을 지배하고 있던 기원전 시대에 그 토대가 세워져 있었으니까.
“<랑바르드>는 옛 용사의 도시라는 별명으로도 불린다.”
어센시쿼리어 알카이오스와 카듀엘이 폭식공 베헤─리크를 쓰러뜨리고 이 도시를 해방시킨 역사가 잠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 희생을 추모하고 또 기념하기 위해 도시 심장부에는 ‘용사의 전당’이 세워져 있었다.
전당 경내에는 베헤─리크를 토벌하던 엘디아 알마(01) 알카이오스와 베테(02) 카듀엘의 모습이 동상으로 세워져 위엄을 발한다.
“이 전당은 본래 종교적 성소로도 이용돼, 마녀들이 이곳에 주재하며 빛의 가르침을 전해왔다고 한다.”
어디까지나, <랑바르드>가 함락되기 전까지 말이다.
<랑바르드>는 모라 강 이남 내륙 지방의 중심지였다. 이곳에서 선로들이 모였고 만났고 다시 대륙 곳곳으로 흩어졌다.
그렇기에 모라 강역 수복 이후 3개월 뒤인 기원력 1675년 3월, 인류 대반격 당시 청성은 이곳을 남벌의 병참 본부로 설정했다.
“이곳을 수복해야만, 필연적으로 보급선이 길어지는 장거리 원정에서 원활하게 병참을 공급할 수 있다고 판단하신 거다.”
그 판단은 전략적으로 적확했다.
그 적확한 판단을 이루기 위해, 공군과 기갑 주력부대를 집중시킨 전격전(電擊戰)으로 쾌속 진격이 명해진 제2ㆍ3방면군과 달리.
제1방면군에게는 각종 요충지를 점령하며 병참선을 연결시키는 작전이 하달되었다.
그 핵심 목표 중 하나가 바로 <랑바르드>였다.
“기원력 1675년 3월 29일부터 시작된 제1방면군의 <랑바르드> 공략은 보름 뒤인 4월 13일에 마침내 성문을 돌파하는 것으로 종반전에 다다른다. 하지만 카밀라의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암운(暗雲), 흑막과의 조우 (1)
<랑바르드> 공략은 성문 돌파를 기점으로 절호조를 달리고 있던 걸로 기억한다.
모든 전술이 완벽했다.
도원수 크라우잔이 명령한 2주 동안의 지상 포격과 공중 폭격으로 <랑바르드>의 석축은 파멸 직전까지 내몰린 상황이었다.
“포탄을 무한정 사용할 수 있는 건 후방 부대의 이점 중 하나지. 전방으로 가는 포탄을 빼돌릴 수 있으니 말이야.”
크라우잔이 이렇게 껄껄거리며 도시 공략에 사용한 포탄의 개수는 12만 발이 넘었다…….
그래도 포탄이 소비된 만큼 인명 피해는 극도로 적었다. 모든 것이 준비되었다고 판단한 크라우잔은 마침내 도시 점령을 명령했다.
그렇게 용추 병단이 도시 중심지의 산성을 돌파하고, 홍련과 태산이 각각 좌ㆍ우익을 제압할 무렵 문제가 생겼다.
“각하, 용추 병단으로부터 통신이 두절됐습니다.”
“음?”
“이유는 모르겠습니다만, 30분 전 ‘용사의 전당’ 돌파를 수행하겠다고 한 통신을 마지막으로 어떤 통신도 닿지 않고 있습니다.”
뇌향 세츠넨이 곁에 있었더라면, 용추 병단이 뇌향심공명진을 이탈하자마자 즉각 반응할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뇌향은 멀리 있었다.
현재 뇌향심공명진의 은혜를 입고 있는 건, 남서부 해안에서 나가 일족과 격전을 시작한 제2ㆍ3방면군이었다.
“심각한 문제가 생겼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강력한 적이 있지는 않을 테니까요.”
연락 장교의 말에, 부관 멜빈(‘붉은 여름’에 도원수로 승격)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자와 함께 진용사의 동상을 감상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그분들과 똑같이 도시 해방을 이룬 셈이니, 감회가 새롭지 않겠나.”
크라우잔은 팔짱을 끼고는 하늘을 응시했다.
황급히 결정을 내려야 하지만, 성급한 결정을 내려서는 안 될 때 그는 이렇게 하늘을 살피는 버릇이 있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구름의 운행을 살피던 크라우잔이 말했다.
“암운(暗雲)이야. 구름이 어둡군그래.”
“예?”
“멜빈, 예비대를…… 그러니까 혈마 병단을 지금 즉각 ‘용사의 전당’으로 파견하게. 병단 전체를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라면 간부진만이라도 이동하라고 해. 최대한 서두르라고 명령해야 하네.”
그 연락을 받은 순간부터, 아니, 사실 이 도시에 돌입한 시점부터 무언가 께름칙했다…….
그 감각을 어떻게 설명할까.
수천 개의 바늘에 경락계 혈관 전체가 꿰뚫려, 그 어떤 행동조차 할 수 없는 듯한 섬뜩한 중압감.
[에쉬르 : 가자, 카밀라. 긴급 호출이야! 지금 당장 용사의 전당으로 가야 해!]평소라면 에쉬르가 호출하기도 전에 나란히 달리고 있었을 텐데, 이번에는…….
가고 싶지 않은 곳으로…….
가면 뭔가 일어날 듯한…….
마지못해 그 뒤를 따르면서, 어딘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장소로 끌려가는 기분마저 들었다.
[에쉬르 : 멜레느, 레오네! 병단을 부탁할게! 카밀라, 우리만이라도 서두르자!]그 불길한 예감은 전당 앞에 다다르자마자 실체가 되어 시야를 붉게 적셨다.
시체…….
아니, 시체였던 것…….
원형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갈기갈기 찢어발겨진 사체들이 사방에 즐비했다.
‘뭐야, 이게…….’
시체는 인간 말고도 있었다…….
거신, 즉 바위와 강철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움직이는 기계들조차 똑같은 꼴이었다.
살점 대신 돌덩이가, 피 대신 증기기관의 온수가 흘렀다.
‘대체 어떤 공격에 당해야 거신이 이렇게 되어버리지? 어린애가 장난감을 부숴버린 것 같잖아.’
4년 전에 보았던 것과 똑같은 참상…… 에쉬르는 강렬한 기시감 속에서 자각했다.
지금, 여기 있구나…….
원수가, 스승님의 원수가…….
르노드가 호응하듯 타오르듯이 붉게 울부짖었다. 에쉬르는 평소의 냉정조차 잃고 전당 내부로 단숨에 뛰어 들어갔다.
“언니!”
전당은 피로 얼룩져 있었다.
피와 뇌수와 살점과 뼛조각이 낭자하지 않은 곳이 없었는데, 저 끝에서 훌쩍거리는 울음소리가 들렸다.
“스, 스승님…… 저, 저, 정신을, 좀, 차려보세요, 스, 스승님…….”
곧 부서질 듯 여린 음성에, 곧 꺼질 듯 다급한 숨결…….
류넬의 것이었다.
에쉬르를 다급히 뒤쫓아 전당 중심부에 도착한 카밀라는 멍하니, 도저히 믿을 수 없는 현실을 목도해야 했다.
“스승님, 스승님, 제가, 제가 잘못했어요, 앞으로, 앞으로는 정말 열심히 할게요…….”
백발이 피 웅덩이 속에서 붉게 젖어가는 것이 보였다.
얼굴에 경련의 흔적이 주름으로 남아 있었는데, 죽던 그 순간의 당혹감이 그대로 투영돼 있었다.
실키 알터 가우므리스…….
제9석 페이쿼리어가 피 칠갑이 된 채 널브러져 있던 것이다.
류넬이 더는 움직이지 않는 스승의 어깨를 흔들며 울고 있었다. 오면서 보았던 시체들과는 달리 존엄은 잃지 않은 형태였으나 죽었단 건 마찬가지였다.
“거짓말…….”
전장 중심, 용사의 동상 앞에는 다른 누군가가 하나 있었다.
심연과 같은 암청색 머리…….
누더기 망토 너머로 보이는 건 옛 천사 시대의 갑주, 낡고도 해어진 형태로 고대의 빛을 희미하게 명멸하고 있다.
그리고 보랏빛 폭류…….
선대 대리자에 대한 원망으로 울부짖던 르노드조차도, 놈이 쥔 칼이 보랏빛으로 우짖자…… 굴종(屈從)하듯 숨을 죽였다. 원래 그런 상하 관계로 태어난 것처럼.
“너 대체 누구야…….”
에쉬르가 울음의 골이 치받치는 목소리로 외쳤다. 조금만 긴장을 놓아도 울부짖게 되는 음역대다.
“대체 누군데 이딴 짓을 몇 번이고……!”
마치 날파리 하나가 앵앵거려도 인간이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류넬을 방치해두고 있던 놈이 반응했다.
지금까지 동상을 올려다보고 있었는데, 어딘가, 깊은 상념에 잠긴 사람처럼.
놈이 이쪽을 돌아보았다.
「내가 누구냐고?」
그 질문이 너무나도 같잖고, 하찮으며, 또 기가 막힌다는 듯 쓴웃음을 지으며.
「내가 먼저 묻지. 이 앞에 있는 건 누구냐?」
“뭐……?”
「엘디아 알마(01) 알카이오스와 베테(02) 카듀엘이다. 죽음을 불사하고 폭식공 베헤─리크의 체내로 들어갔지. 성공했기에 망정이지 실패했으면 둘 다 그 안에서 죽었을 거다. 그런데도 둘은 그 배 속으로 들어갔다. 자신들의 싸움이 빛의 통로가 되리라 믿으며.」
이번에는 놈의 시선이 저편, 썩어가는 시체로 향했다.
「그 결과가 이거다. 인류는, 약자들은! 저 멍청이들의 죽음을 이용했다. 기억하고 슬퍼하기는커녕, 모욕하고 모독했지!」
“무슨 헛소리야……!”
「약자들은 여기에 전당을 세우고 순례자들로부터 돈을 수금했지. 존경심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 물적 욕망 때문이다. 내가 여기 왔을 때는 마녀란 것들이 전당 시종들을 취향에 맞는 미소년으로만 뽑아서 붙어먹고 있더군. 봉헌금으로는 사치품을 구매하여 자기들의 배를 불리고 말이다.」
숨을 황망히 내뱉었다 마시기를 반복하며, 온몸을 떨던 에쉬르가 그 순간 움직였다.
르노드가 붉게 포효한다.
평소보다 몇 배는 빠른, 눈으로 좇을 수 없는 찰나, 십일자의 검기가 예언자(預言者)를 덮친다.
분명, 그렇게 보였다.
그런데 눈을 깜짝인 순간, 죽음의 목전에 다다른 건 에쉬르였다.
한순간에 보랏빛 검이 44개의 철편으로 분열, 채찍처럼 휘둘러져 르노드의 맹위를 쳐내고 에쉬르의 육신을 휘감은 것이다.
카밀라는 두 눈을 의심했다. 두 눈을 몇 번이고 깜빡였다.
‘믿을 수가…….’
무엇 하나 믿을 수가 없어…….
저 사복검의 작동 원리…….
극위성검 플라디마르테와 베룸페이라와 똑같아도 너무 똑같잖아.
“그거 놔…….”
아니, 더 빠르고 정확했다.
아니, 비교하는 게 실례일 정도로 강력하게 느껴졌다.
아니, 어떻게 르노드를 쥔 에쉬르를 저토록 쉽게 제압할 수 있단 말인가?
“놓으라고…….”
그래서, 어찌할 바 모를 무력감 속에서 그렇게 애걸하듯이 속삭였던 것일까.
머릿속은 그랬건만.
몸은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저걸 잡아당기기만 하면 에쉬르가 죽어버릴 테니까, 그 본능 하나가 공포를 짓눌렀다.
“그거 놓으란 말이야아아아!”
십문자도 제9식, 절뢰도(切雷刀).
기술 이름의 기원이 벼락조차도 벤다는 것인지, 벼락처럼 빠르게 벤다는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으나 그 속도는 십문자도 심화 초식 중 발군이었다.
순간적으로 십문자도 제7식, 진뇌룡의 힘까지 머금은 절뢰도가 보랏빛 칼날과 격돌했다.
「!」
다음 일순간, 불티가 막대하게 튀며 에쉬르를 휩싸고 있던 보랏빛 칼날이 튕겨나갔다.
정확히는…….
인간이 꿀벌 따위의 벌레를 관찰할 때, 갑작스레 반항하는 벌레에게 응징 대신 호기심으로 반응하는 느낌이었다.
즉, 튕겨나간 게 아니다.
놈이 검을 거두어들였을 뿐.
핑……!
그렇기에 검과 검이 전력으로 격돌한 것도 아니었건만, 검순이의 칼날이 쪼개지며 덧없이 비산했다.
이건, 한철(寒鐵)인데……?
대륙 최고의 강철로 벼려낸 칼이 이렇게나 쉽게 깨진다고? 쪼개진 것도 아니고, 찢어발겨진 것처럼, 무수한 파편으로?
「나쁘지 않아.」
섬뜩할 정도로 미세하게, 고개를 오른쪽으로 갸웃하던 예언자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날 상대로 움직인 것 자체로도 칭찬해 마땅한데, 저런 힘까지 끌어내다니. 크게 될 소질이 있군.」
검이 깨어져 버렸으므로 싸운다는 선택지가 없었다. 하지만 깨어지지 않았더라도 없었을 것이다.
어떻게……?
어떻게 해야 하지……?
강점인 상상력으로도, 도저히 저 상대를 이기는 법이 떠오르질 않았다. 이제는 아예 접근하는 것조차 불가능해 보였다.
「하지만 아직 그릇일 뿐.」
르노드가 다급히 울었다.
자신을 사용하라는 것일까.
하지만 아까와는 규격 자체가 다른 초월적 존재감 때문에 움직이기는커녕 숨을 쉬는 것조차 불가능할 정도였다.
「너희처럼 어린 것들도 단지 강하다는 이유만으로 이런 최전방으로 내몰린 건가…….」
한순간이었다.
눈을 깜빡한 한순간, 그 보랏빛 칼날이 에쉬르와 카밀라를 휘감고 있었다.
섭리 그 자체를 물어뜯는 게 가능한 44마리의 번견이 송곳니를 드러내고 겁박하는 기분이었다.
「그런 쓰레기 같은 세계에 과연 가치가 있나? 너희가 모든 걸 버려 가면서까지 싸우고 지킬 가치가 대체 어디 있느냔 말이다.」
“……?”
「알카이오스와 카듀엘, 그 개죽음의 계보가 너희들에게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너희는 <온 것들>에게 세뇌된 것뿐이야. 희생은 고상하다고. 타인을 위해 희생하는 자야말로 위대하다고.」
예언자가 손목을 살짝 흔들었다.
그러자 카밀라를 휘감아 그 온몸에서 선혈이 배어나오게 만들던 철편들이 느슨해졌다.
검의 채찍, 사복검이 순식간에 검의 형태로 응집되었다.
「천 년이 두 번도 지나지 않았건만 이 모양 이 꼴이다. 경외와 경의는커녕 모욕하지. 너희들은 나에게 ‘누구냐’라고 묻고 있고.」
도와줘…… 그런 무책임한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내가 누구냐고? 나는 너희들의 미래다. 그리고 또 나는 너희들의 과거였다.」
여기, 신선한 피비린내와 시체가 썩어가는 고린내가 진동하는 죽음의 한복판에서…….
“무슨, 무슨 말도 안 되는 헛소리야……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면서, 스승님을, 비네사 스승님을 죽였어? 실키 선배님도? 용서 못 해…… 절대, 너는 절대로 용서 못 해……!”
옛 진용사들의 위업을 칭송하는 곳에서, 가짜 용사의 제자로서 품위 하나 없이, 그저 그렇게 중얼거리는 게 전부였다.
「죽인 게 아니다. 편하게 쉬게 만들어 주었을 뿐. 미래를 보고 온 자는 과거에 속한 자를 올바른 길로 인도해줄 수 있는 법.」
맞서 싸워야 하는데, 용사의 제자로서 저 비현실적인 위험에 대해 맞서야만 하는데.
「모든 게, 세계의 이치가 올바르게 된 후에 다시 깨울 거다. 저 바보들이 올바른 세계에서 응당 누렸어야 할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도록.」
모든 것이 암흑에 잠기는 것만 같던 그 순간.
바로 그 순간에.
어린 날의 그때와 마찬가지로 빛이 찾아왔다.
“카미!”
그와 동시에 예언자…… 녀석이 서 있는 ‘시공간’에 균열이 일었다.
실금이 금이 되고.
금이 균열이 되어.
다음 순간, 공간이 파열되며 그 위의 모든 것이 섭리 저 밖으로 추방되어 가기 시작했다.
“절원, 시공섬(切願 – 時空殲).”